빙의물의 정석, 죽거나 빨려 들어가거나
짜증 나.
보고 있던 태블릿을 침대 위에 세게 집어던졌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태블릿은 한 번 점프하더니 다시 침대 위에 안착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침대에 걸쳐 앉아있던 그대로 드러누워 눈 위에 팔을 올렸다.
순식간에 열기가 팔을 타고 올라 뺨으로 흘러내린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감정싸움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왜 이리 열이 받았는가.
이야기의 시작은 2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친 거 아냐?
이거 틀림없이 남자작가다.
아니면 발로 썼거나.”
내 황금 같은 주말 1시간을 바쳐 읽은 로판은 개판이었다.
‘로맨스 여주인공 속성을 획득했습니다.’
라는 제목과 졸라맨들에게 쫓기는 여주의 표지에 끌려 보게 된 소설.
처음에는 꽤 재밌었다.
판타지 소설을 읽다가 신의 실수로 소설 속 세계에 빙의하게 된 여자주인공, 은화.
소설 속 세계로 전송될 때 에러가 발생하여
소설 속에 존재하지 않는 포지션인 ‘로맨스 여자주인공’이라는 속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로 인해 소설의 장르가 로맨스 판타지로 변하고 만다.
신은 은화를 돌려보내 주기 위해선 이 세상의 시스템을 다시 바로 잡을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진짜 남자주인공’을 찾아내야만 한다고 말한다.
사람 속 뒤집는 역하렘의 군상과 그 속에서 남자주인공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은희.
누가 남자주인공인지 거의 공언하고 시작하는 보통의 로판과 달리
마치 모 드라마처럼 진짜 남주인공을 찾는 소설.
어지간하면 한 번 읽은 소설은 완결까지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주행 시작!’이라는 댓글을 달고 읽기 시작했다.
1화, 2화, 5화, 10화, 20화, 24화···.
초반에는 재밌다, 뒤의 전개가 기대된다. 따위의 댓글을 달았었다.
하지만 24화가 되니 딱 질려버렸다.
“장난치냐!”
24화에 걸쳐 내 추정으로는 최소 7명 이상의 남자주인공 후보가 소개되었다.
그러면 뭐 그 뒤를 캐서 누가 남주인공일지 추리를 하던! 하렘을 누리던! 전부 다를 공략하건!
뭘 해야 재미가 있을 것 아니냐고!
그냥 남자들 사이에 껴서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진짜!
나는 생전 처음으로!
하차 댓글을 달기로 마음먹었다.
‘여주 핵 발암. 와, 더는 못 보겠다. 여주가 바본 건지 작가가 바본 건지 모르겠네.’
댓글을 단 후 회차 목록으로 돌아가 총 회차 수를 보았다.
225화.
와, 완결도 안 났어.
미쳤나 봐, 작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던 소설 새 회차가 업로드되었다는 알람이 왔다.
오, 1주일 만의 업로드!
기쁜 마음에 냉큼 달려가 읽고 있는데, 새로운 알람이 떴다.
뭐지?
읽던 걸 마저 읽고 알람을 누르자 ‘니가 이해 못 하는 거겠지, 멍청아.’라는 글이 보였다.
···.
미친 건가?
지금 독자더러 멍청이라고 한 거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알림창을 켰더니, 역시나.
아까 그 대환장 파티 소설의 작가가 내 하차 선언을 보고 나한테 쪽지를 보낸 거였다.
이런 또라이를···.
아, 아니.
진정하자, 화아사.
이런 거에 화를 내서 뭐 하냐.
마음을 가라앉히자, 가라앉히자···.
···는 개뿔!
와, 미친 거 아냐 진짜!?
나는 분노로 바들거리는 손으로 엄청난 오타를 내가며 답장을 썼다.
솔직히 뭐라고 썼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난다.
발로 썼냐, 남자작가냐, 이게 글이냐, 내가 여주였으면 벌써 소설 끝났다···.
엄청나게 쏟아낸 후 짜증에 못 이겨 태블릿을 던진 것이 조금 전 일이다.
아직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오더라도 볼 마음은 없다.
후, 진정해야지.
짜증을 내어서 무얼 하나, 화를 내어서 무얼 하나.
음.
얼음이라도 가져올까.
그렇게 생각하며 눈 위에 있던 팔을 치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자신 있냐?!”
걸걸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흐릿하던 시야가 맑아지면서 눈앞의 ‘그것’도 선명하게 보인다.
“···새?”
와, 귀엽다.
내 손바닥보다도 훨씬 작을 정도로 작고 하얀 새.
솜뭉치처럼 생긴 게 참새는 아니고···.
“아, 뱁새!”
얼마 전 페이스 노트에 올라왔던 그 새다.
세계에서 가장 귀여운 새로 뽑혔다던 그 새.
“···뱁새가 말을 하던가?”
멍하니 혼잣말을 하자 뱁새가 귀여운 얼굴로 걸걸한 웃음소리를 냈다.
갑자기 이미지가 와장창 깨지는 느낌에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아니, 잠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 너 뭐야?”
“나?
나는 연애소설의 신이다!”
에헴, 하고 뽐내듯 가슴을 내민다.
쪼끄만 게 뽐내봤자···.
“연애소설의 신···?”
“그래.
너 방금 이 소설을 바보 취급했지?
여주가 바본지 작가가 바본지 모르겠다고!
내가 하면 벌써 소설 끝났겠다고!”
윽.
내가 남긴 댓글이 내 가슴을 후빈다.
막상 입 밖으로 내니 꽤 잔인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것도 저 귀여운 입에서 조잘조잘 저런 말이 나오니 더 죄책감이 커진다.
“그, 그래!
솔직히 누가 모르냐?
원래 로맨스 소설에선 남자주인공의 공식이 딱 정해져 있잖아!”
하지만 죄책감은 일단 뒤로 제쳐둔다.
괜한 자존심이 사죄의 말을 가슴 속 어딘가에 숨겨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솔직히 요즘 소설의 전개는 다 거기서 거기지 않나?
메인 주인공과 서브 주인공을 밝히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 시켜봤자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그건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아서 댓글 창에도 꽤 많은 사람이 그 캐릭터를
진 남자주인공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호오, 그래?”
뱁새의 부리가 살짝 휘어진다.
···내 눈이 맛이 가고 있나?
휘어진다고?
부리가?
“바보는 너 같은데?
그럼 너, 나랑 내기 하나 해볼래?”
내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으니 뱁새가 내 눈앞으로 내려온다.
오지 마.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귀여워.
완전 솜뭉치.
아, 정신 차려, 화아사!
저건 적이다!
날 공격하는 적이다!
“내가 널 저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줄게.
소설에 나온 거랑 클리어 조건은 같아.
진짜 남자주인공을 찾아내서 고백을 받아내면 게임 클리어.”
“싫어.
내가 뭐하러?”
역시나 귀찮은 것 싫어하는 내 몸은,
내 생각은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말을 뽑아냈다.
굳이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해?
“설마 자신 없어서 그러는 거야?
넌 이미 진짜 남자주인공을 알고 있다며?
그럼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돌아올 수 있을 텐데.
설마 작가를 그렇게 바보 취급하고, 틀릴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지?”
···.
이 빌어먹을 새대가리가.
“누가 그래서 그렇대?
나한테 이득 될 게 없잖아.
내가 뭐하러 그런 귀찮은 짓을 해?”
새대가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윽,
심장이 아프다.
귀여워.
“그래?
이래 봬도 신인 내가 보상을 섭섭하게 주면 안 되겠지!
클리어했을 땐 니 소원 하나 들어준다.
콜?”
소원?
···이 쪼꼬만 게 들어줘봤자···.
“세상의 섭리를 뒤틀 정도의 소원이 아니면 들어줄게.
뭐, 100억을 달라거나 이런 건 OK.
지구의 공기를 다 없애줘, 이런 건 NG.
어때?”
부자!
돈만 있으면 귀찮게 일 안 하고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다!
“콜!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입은 호기롭게 콜을 외쳤는데 이성과 본능이 경고를 보낸다.
인생 노 리스크, 하이 리턴은 없는 법.
하이 리턴이 있으면 하이 리스크가 따라오는 법이라고.
그런 생각을 애써 억누르며 뱁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뱁새의 입가가 씰룩쌜룩 웃는 모양을 만든다.
젠장.
저렇게 이상한 표정조차 귀여워.
“좋아.
한번 잘 해보라고~.”
뱁새의 주위로 흰빛이 뿜어져 나온다.
뭐야, 신이라더니 진짜 마법이라도 쓰는 거야?
당황하는 내 눈이 빛 때문에 저절로 감긴다.
눈을 떴을 때, 어떤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
그 후의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도···.
- 작가의말
기존 작품 선호해주셨던 분들, 너무 죄송합니다ㅜ
같은 제목의 작품이 있으면 작품등록이 되지 않아 부득이 삭제하고 다시 올립니다.
기존 수, 토에서 벗어나 월, 수, 토 주 3회 연재 계획중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재미있게 보실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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