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판타지의 정석, 마지막의 마지막에 둘은···.
쏟아지는 빗물이 입술을 적신다.
아아.
아아아.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빌어먹을.
나는, 나는 여전히 살고 싶다.
이런 오물범벅에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서도.
하하.
내가 이렇게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나?
하지만···.
“하아···.”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리고 혀를 깨물···.
“아샤!
어딨어요, 아샤!”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
구덩이 안에는 한층 크게 울릴 것임에 틀림없는 그 소리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니···.
환청이다.
나는 아직 맛이 가진 않았다.
테베가 여기 있을 리가···.
“아샤!
제발 대답해줘요, 아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점점.
점점.
그렇다는 건···.
“하, 하윽···.”
목소리를 내려 숨을 깊게 마시자 어깨가 아팠다.
아프다.
살아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테베도 이곳에···.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입술 사이에 고인 빗물을 핥았다.
바짝 말라 있던 목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시간이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숨을 들이마셨다.
“오지 마···!
으, 으아악!”
아, 아파.
나는 소리를 치기 무섭게 다시 이를 악물었다.
아프다.
혀를 살짝 물었는지 입에 피 맛이 스몄다.
하지만 그 비릿하면서도 묘한 온기를 가진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아주 조금이지만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다시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바닥!
크, 으으으윽”
이제 못해.
죽어도 못해.
나는 이를 으득, 갈며 신음성을 참아냈다.
바닥이 위험하다는 건 알렸으니, 더는 접근하지 않겠지.
접근하더라도 조심스럽게 접근할 테고.
천만다행히도 뒤의 신음성은 작았다.
아파하는 건, 아마도 못 들었겠지.
먹구름 가득한 하늘 아래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를 찾아내는 것은 아무리 테베라도 불가능할 터.
다짐했잖아.
테베에게서 떨어지기로.
그래, 좋아하기 때문에라도 떨어져야만 한다.
“아샤, 아샤!
어디에요, 아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명 대답해버릴 것 같아서.
살고 싶다는 내 마음이 몸을 멋대로 움직일 것 같아서.
“아샤, 제발 대답해요!
아샤!”
언제나 맑은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인데 너무나 낯설다.
저렇게 될 때까지 날 찾아다닌 걸까.
“아샤!
이제 내 옆에 있으라고 하지 않을게요!
곁에 있게 해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어리석은 남자.
잊어버리면 될 것인데.
처음부터 이 세계에 있어 내 존재는 이물이었다.
내가 죽으면 셋 중 하나겠지.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지거나,
회귀하거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거나.
어느 쪽이건 이제 테베는 날 잊겠지.
차라리 이렇게 될 거라면 카이델에게 가 있는 게 낫다.
만약, 회귀한다면···.
“아샤?
아샤!”
거짓말···.
어렴풋이, 하늘과 구덩이의 경계에 무언가가 보였다.
거짓말.
눈에 익숙한 금발.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아샤···.”
아아.
어째서 너는 나를 찾아내 버린 걸까.
나는 눈을 꽉 감았다.
*********
오물과 비에 젖어 테베에게 안겨 오는 날 맞이한 건 마리였다.
마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언니, 언니!
디리 언니!”
그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디리가 뛰어나왔다.
디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이내 저택의 문을 활짝 열고 테베에게 말했다.
“얼른 침대에.”
“로아드 사제를 불러와, 디리.”
“응.”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테베가 조심스럽게 날 다뤄도 아픈 건 아팠다.
흔들릴 때마다 어깨가 망치로 부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랫도리는 마치 불에 지진 것처럼 화끈거렸다.
뭐, 오물 때문에 독이 오른 탓이겠지만.
냄새나고 더러운 나를 테베는 마치 보물상자라도 옮기듯 조심스럽게 옮겼다.
그게 더 수치스러웠다.
“아, 윽···.”
정신을 잃은 척하고 싶었지만 악문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성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픔에는 어지간히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약해진 거겠지, 나.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아샤.”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어깨가 아픈 걸로도 충분하니,
마음은 그대로 뒀으면 좋겠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왜 네가 미안한 걸까.
나쁜 건 나인데.
내가 진짜 여주인공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네가 진짜건, 그냥 서브건···.
상관없이 무언가의 끝맺음이 났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주인공이 아니고···,
테베도 남주인공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
테베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일그러져 눈물지을 것만 같은 그 눈동자를 닦아주고 싶다.
하지만 내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인가.
“···젠장.”
닫힌 방문을 열 재간이 없는 테베가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토도도도 소리가 들리더니, 드물게도 마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오빠!
제가 열게요!”
마리는 조금 울었는지 눈이 새빨갰다.
하긴, 사람이 이런 식이 되어있는 건 처음 봤겠지.
팔은 부어오르다 못해 새카맣게 변색 되어 가고 있다.
아마 까딱 잘못하면 못쓰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몸을 감싸고 있는 악취.
오물범벅인 몸.
마리가 본 가장 충격적인 광경이 지금의 내 모습일 것이다.
마리···.
많이 놀라지 않았어야 할 텐데.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르륵 정신을 잃었다.
*********
사제는 반쯤 기절해서 실려 갔다.
내게 어지간히 힘을 쏟아부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시커멓던 팔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다만, 아직 움직이기에는 조금 이르다고 해서 지켜보고 있던 의사가 깁스를 해주었다.
의사는 내 상태를 살피더니 혀를 찼다.
“살아있는 게 다행입니다.”
“···.”
테베는 약간 비어있는 눈으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그리고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은 것은 나와 디리뿐.
디리는 언제 가져왔는지 대야에 담긴 따스한 물을 수건에 적셔 나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
이제 목소리는 나올 것 같다.
목을 가로막고 있던 껄끄러운 무언가가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내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디리가 중얼거렸다.
“돌아와 줘서 너무 다행이에요.”
나는 반사적으로 디리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흐릿하게 눈물이 고여있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
어쩜 저렇게 상냥할 수 있을까.
이토록 더러운 몰골을 보고도···.
“정말, 살아 있어 줘서 너무 고마워요.”
울먹이는 목소리.
디리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몸을 닦아주고, 내 옷을 갈아입혀 준 후 다른 방까지 부축해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울려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있던 방을 정리하려는 것일까.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
일부러, 겠지.
테베가 있는 방에 날 밀어 넣은 건.
나는 가만히 테베를 바라보았다.
“제가 곁에 있겠다는 것이 그토록 부담스러우셨습니까.”
“···.”
그렇다.
네가 옆에 있으면 나는 부담스럽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무섭다.
두렵다.
“그냥···, 아무런 감정 없이 옆에만 있게 해주시는 것도 안 됩니까.”
안 된다.
내가 너에게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알까.
내가 너에게 얼마나 커다란 감정을 품고 있는지.
그 감정은 사람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세상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했다.
죽기 위해 살던 나는,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내가 되어버렸다.
그게 온전히 너로 인한 건 아니었지만,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너였다.
“당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싫다.
네 앞에서 다른 남자와 연애질을 하라고?
나는 못 한다.
그게 너에게 얼마나 아프고 괴로운 일인지 뻔히 아는데.
“싫다고 하시면···.
그러면 전···.”
테베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그 날처럼.
너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건 나를 잃는 것일까?
이미 너는 수도 없이 나를 잃었는데.
그게 그토록 두려운 것일까.
“전, 물러나겠습니다.”
이를 악물며 내뱉는 짐승 같은 소리.
그것이 너의 괴로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 그 꼴을 보고도 여전히 내가 좋나요?”
“당신이 어떤 모습이건 제게는 당신입니다.”
“오물을 뒤집어쓰고 냄새가 나고 더러운 나를 보고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나요?”
“당신이 살아있을 수만 있다면 더한 모습이라도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럼 말해 봐요, 나를 사랑한다고.”
나는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그런 나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알았을 것이다.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어째야 하는지.
그리고, 그 상대가 네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나도 알고 있다.
너에게서 고백을 받으면 뭐가 된다는 걸까.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다.
회귀할 지도 모른다.
다시 처음으로, 날 모르는 너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것도 좋다.
아무 일도 없을지도 모른다.
속성의 힘도, 연신이도 잃어버린 내가 고백을 받은 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이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어쩌면 영원히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사라질 시간.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서 지워질 시간이지만···.
그래도 나는 꿈의 조각 하나를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고,
너는 그런 나를 완전히 잊고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나 같은 이물이 사라진, 순수하고 완전한 원래의 세계로.
어느 쪽인들 상관없다.
그리고 이 행위 자체에도 의미는 없다.
그냥···.
그냥 듣고 싶을 뿐이다.
“말해줘요.”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그런 내게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이미 통증이 가신 팔에 조심스럽게 네 손가락이 닿았다.
“저는···.”
듣고 싶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있는 지금.
네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설령 지난 감정의 잔재라 하더라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금.
아마 두 번 다시 없을 이 시간에 그 말을 듣고 싶다.
“나는···.”
머뭇거리는 네게 나는 한 걸음 다가섰다.
너는 내 팔을 놓고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게 웃겨서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나는 로이스터···, 아니, 당신이 좋아요.
테베인.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룰 위반.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고백하는 건 룰 위반이었다.
그 페널티가 뭔지는 듣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지금 나는 네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바보 같아요.
나라면 절대 날 사랑하지 않을 텐데.
그 감정이 거짓이라고 알려줬을 때 멀리 도망갔을 텐데.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떠나지 않았어요.”
내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던,
집착도 어설픈 흥미도 서툰 사랑도 아닌 진짜 사랑.
여자로서 이 이상 없을 정도로 푹 잠겨 들어갔던 사랑.
“당신이 나를 바꿨어요, 테베인.”
사랑하면 변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말해줘요, 내게.
당신의 가슴 속에서 당신이 내뱉지 못하던 그 말을.”
그 말을 내뱉으면 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걸 너도 알 것이다.
그래서 너는 망설이는 것이다.
하지만, 테베.
이 순간은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나는 두 번 다시 너를 사랑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내 시선에서 내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너는 입을 열었다.
“···아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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