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의 정석, 주인공은 계략을 꾸민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은 의외로 편했다.
카이델은 이 세계에 대해 여러모로 가르쳐 주었다.
이 나라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마법에 대해서.
마녀에 관해 설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였다.
아는 이야기뿐이었지만 카이델의 목소리로 이야기해주는 것을 듣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자장가라도 듣는 기분이었다.
흔들리는 마차.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
머리를 울리는 아픔.
그것이 뒤섞여서 나를 잠으로 끌고 간다.
으으···.
안 되는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관문에 도착한 후였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가···.
카이델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슬쩍 그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아까만큼 두려워하는 표정은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여줄 뿐.
“내리도록 하지.”
카이델이 망토를 벗어 내게 넘겨준다.
나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카이델을 바라본다.
카이델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머리카락은 가리는 것이 좋겠군.”
···.
아.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망토로 대강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카이델을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맨발이 바닥에 닿아 아프다.
먼저 앞장서 가는 카이델과 달리 테베는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살짝 눈을 찡그리는 것과 동시에 테베가 내게 다가왔다.
“···실례.”
테베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달빛 아래에서 금색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난다.
나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을 눈으로 따라갔다.
“아프시겠군요. 이거라도···.”
테베가 자신의 부츠를 벗었다.
그 안에는 하얀색 타이츠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나왔다.
“···.”
테베는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귀가 새빨개졌다.
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눌러 참았다.
테베는 조용히 내 발 앞에 손을 내밀었다.
“발을···.”
나는 테베의 손에 살짝 발을 올려놓았다.
으음.
이 몸 기준으로 어제 씻었는데.
발 냄새가 나는 건 아니겠지···.
아니,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까놓고 말해서 설령 발 냄새가 난다 쳐도
속성의 힘 때문에 이 사람들한테는 꽃향기로 느껴질 텐데.
그걸 알면서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굴에 드러내지 말자···.
테베는 조심스럽게 내 발에 자신의 부츠를 신겨주었다.
오른발, 그리고 왼발.
신발 신기기를 마치고 테베는 일어섰다.
그의 발은 여전히 맨발이었다.
“저···, 발이···.”
테베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발을 옮겼다.
카이델이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카이델의 의심에 또 불을 붙이게 될지도 모른다.
저번처럼 의심 사고 시작하는 것은 곤란하다.
나는 테베의 뒤를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무슨 일인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이 분의 발이···.”
카이델의 눈동자가 내 발로 향한다.
그리고 테베의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카이델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대가 맨발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수고했네, 로이스터 경.”
테베는 카이델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 얼음 인형 같은 얼굴에는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그 녹색의 눈동자만이 희미한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테베는 정말로 카이델을 좋아하는구나.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노림수를 실행하기 위해 배를 부여잡았다.
마치 배에서 꼬르륵 소리라도 난 것처럼.
그러자 나를 바라보고 있던 카이델이 중얼거렸다.
“일단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좋겠군.”
카이델이 숙소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나도 따라 발을 옮겼다.
따스한 온기가 확 몸을 감싼다.
잠옷 한 장 입은 몸은 내 생각보다 더 차갑게 식어있었던 모양이다.
동시에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델은 프런트로 보이는 곳으로 가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누가 봐도 비굴해 보이는 태도로 굽신거리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베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나와 카이델을 번갈아 보며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나는 슬쩍 머리에 둘러맨 망토의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아···.”
당황한 것처럼 망토 자락을 잡는다.
하지만 잡을 마음이 없는 손을 지나쳐 망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변의 소란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마녀다!”
누군가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와 동시에 테베가 나에게 다가와 자신의 망토로 나를 가렸다.
“아···.”
나는 마치 겁먹은 것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테베가 재빨리 나를 안은 채 숙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소란에 눈치챈 카이델이 나를 따라 나왔다.
“무슨 일인가?”
“이 분의 머리카락이···.”
테베가 나에게서 손을 치웠다.
망토 자락에 가려져 있던 머리카락이 달빛 아래 드러난다.
카이델은 으음, 하고 작은 신음성을 내었다.
“그래서 소란이 일어난 거였군.”
카이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미 내 머리카락이 드러난 이상 다시 숙소로 데리고 들어갈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나도 모르게 바라보는 척 마차를 바라보았다.
내 모습을 살피던 테베가 카이델에게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이 분은 마차에서 밤을 보내시는 게 어떠실지요.
마차가 익숙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며 몸을 움츠렸다.
으으.
몸을 떠는 것도 의외로 힘들다.
하지만 해야지, 뭐.
별수 있나···.
“그대의 의견이 타당하다.
그대의 의견대로 하도록 하지.
괜찮겠나?”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는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단 몇 시간 동안 익숙해진 마차가 훨씬 낫다.
그런 어필이었다.
카이델이 테베에게 눈짓을 했다.
테베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마차 쪽으로 인도했다.
“가시죠.”
나는 카이델의 옷자락 끝을 살짝 잡아끌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ㄱ, 고맙습니다···.”
나는 아주 엷게 웃어 보였다.
카이델은 그런 나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재빨리 마차 쪽으로 달렸다.
조심스럽게 마차 위로 올라가자 테베가 문을 닫아 주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기 직전에 내가 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말 없이 부츠를 벗었다.
마차 안은 뭘 어떻게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깨끗하다.
내가 부츠를 신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벗은 부츠를 테베에게 건넸다.
그리고 엷게 웃었다.
“고마워요···.”
테베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받을 생각 없어 보이는 테베의 품에 부츠를 안겨준다.
얼결에 받아든 테베가 잠시 생각에 잠겨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돌아가 테베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문이 닫히고 테베가 부츠를 신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아마 담요를 가지러 간 거겠지.
그제야 연신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뭐 하냐?”
“뭐가.”
“뭐냐고, 그 가증스러운 연기는.”
나는 엷게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이걸 게임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소설 속 내용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동시에 현실이라는 것을 계속 깨달으면서
마치 진짜 사람을 대하듯 이 사람들을 대했어.”
그게 문제다.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략에도 일관성이 없었고 계속 예상외의 길로 가게 됐었다.
“게임으로 생각하기로 했어.”
나는 눈을 감았다.
흔들릴 필요는 없다.
게임···.
이 모든 것을 다 게임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게임 속 주인공은 내 선택지에 따라 성격이 바뀌어.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면 상대에 따라 취향도 성격도 바뀌지.
나도 그러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야.”
연기라면 자신 있다.
매일 해오던 것이니까.
연신이는 의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엷게 웃으며 작은 새를 손가락으로 간질였다.
“신경 쓰지 마.
그냥 내가 주인공인 연극을 본다고 생각해.
더럽게 재미없는 연극을.”
발소리가 들린다.
나는 연신이에게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다 댔다.
마차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연신이는 조용히 가장 그늘진 자리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마차 문을 노크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겁먹은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대답할 리 없다.
나는 구석 쪽으로 가 연신이를 가리는 식으로 몸을 웅크렸다.
“접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맑은 목소리가 끝나고 잠시동안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열 때까지 기다리려는 걸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열어줄 것인가.
여는 걸 기다릴 것인가.
테베의 성격상 내 허가가 없으면 문을 열 리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 손끝으로 문을 열었다.
“···무, 무슨 일로···.”
“···.”
테베는 아무 말 없이 내게 담요를 내밀었다.
익숙한 담요다.
담요를 받아들자 다른 쪽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거기에는 빵과 우유병이 담긴 바구니가 있었다.
“드십시오.
허기를 달래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바구니까지 받아들자 테베는 엷게 웃었다.
나는 마치 이끌리듯 웃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테베는 예를 갖추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발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아마 옆에 서 있는 거겠지.
나는 자리에 누웠다.
연신이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마차 안에 불러들이지 않을 거야?”
“···지난번이랑 같은 전개가 되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너도 명색이 소설의 신이면 알 거 아냐?
지금 내 캐릭터로 남자를 잠자리에 불러들이면 그건 캐붕이야.”
연신이는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빵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저거 먹어도 돼?”
“아, 응.
다 먹어주면 좋겠는데 그건 무리겠지?”
연신이의 몸의 10배는 될 것 같은 빵이다.
입맛은 없지만···.
“같이 먹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구니에서 빵을 꺼내면서 솔직히 놀랐다.
“···따뜻해···.”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뭘 어떻게 한 걸까.
나는 피식 스며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작은 조각을 떼어 내어 연신이의 앞에 놓아 주었다.
연신이는 신난 얼굴로 빵을 쪼아댔다.
우유는···.
뚜껑에 주면 되려나.
우유병은 예상대로 따뜻했다.
빵을 데워온 시점에서 예상은 했지만.
뚜껑을 열어 연신이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우유를 부어주었다.
“오오, 센스 있구만!”
연신이가 신난 듯 물을 쪼았다.
먹는 것보다 주변에 튀는 게 더 많은 것 같지만···.
뭐 그래 봤자 작은 방울이니 그냥 두자.
나는 빵을 베어 물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냥 빵이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빵과 우유를 먹어 치웠다.
“···잘 먹었습니다.”
*********
성에 들어온 후로 나는 배정된 방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데바인과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방 안에서 연신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연신이는 매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오곤 했다.
아마 밥을 먹고 오는 것 같긴 한데···.
대체 뭘 먹고 오는 거려나.
매일매일 야위어가는 나를 보며 데바인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
내 상태에 관한 이야기는 카이델에게까지 들어간 것 같았다.
성에 온 지 3일째 되는 날인 오늘.
카이델이 방으로 왔다.
“괜찮은가?”
나는 힘없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만 두려움에 물든 표정만은 지우지 않았다.
나는 살짝 몸을 움츠린 채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카이델의 약간 뒤쪽에 테베가 서 있었다.
좋았어···.
안 먹는 것엔 익숙하지만 3일째가 되니 아무리 나라도 배가 고프다.
슬슬 결판을 내야겠다.
나는 카이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흘끔거리며 테베를 바라보았다.
카이델이 내 시선에 이끌려 테베를 볼 수 있도록.
“···두렵습니다.”
“두렵다?”
“지난번처럼 또 사람들이 저를···.”
카이델은 무슨 이야긴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테베가 카이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첫날 숙소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아.”
카이델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흠칫 놀라며 몸을 더 웅크렸다.
“···그대의 마음을 읽지 못했군.
그대를 데려온 후 미안한 일만 하는 것 같아 면목 없네.
그대가 그토록 두렵다면 수호기사를 붙여주도록 하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검은 머리라 마녀라고 불리는 거죠···?
기사님들이라고 다를 것 같진 않습니다.”
아.
너무 길게 이야기했나.
이미 이야기는 나갔다.
계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그런가.
그렇다면 로이스터 경, 그대에게 부탁해도 되겠는가?”
···됐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표정에 드러내는 바보짓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이걸로 1단계는 완료다.
이제 2단계로 넘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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