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의 정석, 츤데레 캐릭터의 사과는 폭탄과도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다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 위를 거침없이 내달린다.
몸의 선이 단순해서 그런가.
연신이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렴풋한 형태가 되어 종이 위에 나타났다.
“오오···.”
내가 감탄사를 내뱉든 말든 별 관심도 없는 듯 연신이는 과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기도 입 아프다.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지만, 오늘도 밥을 잔뜩 먹은 상태다.
···.
아, 생각해보면 자주 굶겼구나.
동물 학대로 잡혀가는 거 아니겠지···.
내가 옆에서 감탄하든 딴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슈피는 집중하고 있었다.
금색 눈동자가 진지하게 앞을 바라본다.
으음.
연신이가 그 정도의 피사체인가?
하긴, 귀엽긴 하지.
“와···.”
순식간에 연신이의 모습이 종이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시 선을 다듬기 시작했다.
한참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고민하던 슈피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끝난 거예요?”
“밑그림은요.
이제 여기에 색을 입히면 돼요.”
색···.
근에 연신이는 거의 하얀색인데 굳이 색을 입혀야 하나?
그런 내 의문을 알아차린 것처럼 슈피가 입을 열었다.
“하얀색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명암도 넣어야 하고
하얀색도 종이의 하얀색과 이 아이의 하얀색은 전혀 다르거든요.”
그러고 보니···.
물감 같은 거 판타지 세계관에선 비싸지 않던가?
중세인지 근대인지의 유명한 화가가 돈이 없어서 그림 위에 계속 덧그리기도 하고
물감이 없어서 고생했다는 일화를 들었던 것 같은데.
“이런 물감은 안 비싸요?”
“비싸죠.”
“그럼 슈피는 어떻게 산 거예요?
정원사라는 게 그렇게 월급을 많이 받아요?”
슈피의 손이 멈춘다.
시선은 종이에 있는 채로 눈만이 나를 향한다.
그 금빛 눈동자는 차가웠다.
윽.
이 캐릭터, 무슨 지뢰가 이렇게 많아?
만약 게임으로 나왔으면 난이도 극악으로 불릴 수준이다.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왕궁의 정원사쯤 되면 돈을 많이 받나 봐요.”
“정원을 거의 제가 혼자 가꾸고 있으니까요.
적게 받는다고는 할 수 없죠.
하지만 물감을 사는 돈은···.”
슈피는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을 때,
슈피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리고 묘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마치 자신의 눈빛이나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는 것처럼.
하지만 아쉽게도 나에겐 슈피와 같은 힘은 없다.
으음.
혹시 그런 캐릭터를 원하는 건가?
그건 무리인데···.
“뭐, 사람마다 사정은 다 있는 거니까요.
그것보다 명암 넣는 거 보여 줘요.
나는 그림에는 재능이 없어서 궁금해요.”
“그림을 그려보신 적이 있으세요?”
“으음, 있죠.
제가 살던 세계에서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게 하거든요.
교육과정의 일환이죠.
하지만 썩 잘 그리진 않아서 좋아하던 시간은 아니에요.
보는 건 좋지만.”
거짓말이다.
보는 것에도 별 관심 없었다.
미술관이라는 것의 존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소위 입체파 화가?
그런 화가들은 도저히 이해 불가능이다.
차라리 마네나 모네가 낫다.
최소한 형태라도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래도 보는 건 좋아한다고 이야기해야 계속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낼 수 있겠지.
응.
“아샤님의 세계에서는 서로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나요?”
“네.
잘 그리는 친구들은 더 그렇죠.
슈펠리에 같은 사람들은 전문적인 화가가 되어도 충분히 먹고살 것 같은데요.”
응.
완전 가능이지.
게다가 저 용모.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미모의 화가.
부자들이 환장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아샤님의 세계로 가고 싶군요.”
“왜요?”
“이 세계에서는 그림은 천대받으니까요.”
아, 역시?
판타지 세계관이 거의 그렇긴 하지.
“그림이요?
왜요?
이렇게 가슴이 따스해지게 만들어주는데.”
슈펠리에는 씁쓸한 듯 웃었다.
그 얼굴에 서린 감정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전란의 세상이니까요.
이 나라는 예술을 그리 높게 보지 않습니다.
먹지도 못할 것 무슨 의미가 있냐는 식으로 대하죠.
그건 귀족이나 왕족일수록 더합니다.”
“그렇지만 왕성은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게 잔뜩 있잖아요?”
“그건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보이기 위한 겁니다.
이 나라에는 이 정도의 재력과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거죠.
폐하께서는 그런 것을 돈 낭비라고 생각하세요.”
으음.
그렇겠지.
카이델은 뼛속까지 무장이다.
그런 카이델에게 있어서 그림이나 조각은 사치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
그렇다고 해도 보는 눈은 꽤 있는 것 같던데···.
아, 카이델이 구입한 게 아닌가?
“그럼 외국에서도 그런가요?”
“비슷합니다.
아마 어디 가서 물어도 그림은 돈 낭비에 허세라고 대답할 거에요.”
으음.
그 정도란 말인가.
“그래도 이 정도로 잘 그리면 누군가는···.”
“제가 잘 그리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으니까요.
제 그림을 본 건 폐하와 아버지를 제외하면 아샤님이 처음입니다.”
오호.
슈피가 내가 이제 익숙해지긴 했나 보다.
말실수를 하는 걸 보니.
“아버지?”
“···제가 아버지라고 했나요?”
“네.
새삼스럽지만 슈펠리에도 아버지가 계시는군요.”
슈피의 눈동자가 난감하다는 듯 내려앉았다.
으음.
예쁘긴 하지만 후벼 파야겠지.
약점이 보인 이상.
“그럼 그 아버지랑은 어떻게 지내는 거예요?”
“···.”
“그림이 천대받는 거라면 아버지랑도 잘 지내진 못하겠네요.”
슈피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한다.
으음.
조금 서글퍼 보인다.
기분 탓은 아니겠지.
“아···.
그, 미, 미안해요···.”
슈피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으음.
그렇겠지.
여태까지 나는 수없이 많은 잘못을 슈피에게 저질렀다.
무례했고 또 무례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렇게 쉽게 사과를 날려서야 임팩트가 없잖아?
기본적으로 제멋대로 캐릭터는 사과하지 않는다.
대신 한 번 사과했을 때의 임팩트는 굉장하다.
그 한 번을 지금 써야 하나 싶은 마음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 그렇듯 테베에게 그랬듯
부친에 관한 이야기는 슈피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일 것이다.
그걸 건드렸으니 사과하는 게 맞다.
그리고 슬슬 슈피가 내게 마음을 여는 것처럼 나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왜 아샤님께서···.”
“···뭐, 뭐가 잘못됐나요!
나는 사과하면 안 돼요?”
쑥스러운 듯, 멋쩍은 듯.
나는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슈피의 입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안 되긴요.
그저 왜 사과하시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
슈, 슈펠리에의 눈이 조금 슬퍼 보여서···.”
“···.”
슈피는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런다고 해서 자신의 표정을 알 수 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러고 있는걸 보니 의외로 귀여웠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린지도 모른다.
“···그랬나요.”
슈피는 가만히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종이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
아마도 과거를 돌아보는 거겠지.
“···아버지는··· 저를 아들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검은커녕 식물을 돌보는 것을 좋아하고 이런 걸 좋아하는 저를···.
하다못해 딸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하셨죠.”
으음.
딸한테는 좀 더 유한 건가?
“그런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검술을 연마한 적도 있습니다.
마법을 공부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뭘 해도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그렇겠지.
하고 싶지 않은 걸 해야만 하는 그 괴로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괴로움이다.
뭐, 부자들이야 그런 걸 겪었겠나 싶긴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서 귀족이란 어마어마한 의무와 책무를 등에 짊어지고 있다.
그런 만큼 내가 느낀 그 절망감보다 더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겠지.
“그래도 참았어요.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상 그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20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겠지.
저 투박한 손은 정원 일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검을 쥐었던 손이다.
나는 가만히 슈피의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더 크고 생각보다 더 단단한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살짝 쓰다듬었다.
간지러운지 슈피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샤님?”
“굉장한 손이네요.
검에, 마법에, 정원 가위에, 붓, 도자기까지.
못하는 게 없는 진짜 마법의 손이에요.”
나는 슈피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 웃음 속에 담긴 거짓이 슈피에게는 보였을까.
아마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의 콩깍지는 위대하다.
아마도 가슴 속의 위화감으로만 남을 것이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한참 동안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귀에 연신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웩.”
*********
“연신아.”
“으, 응.”
“너한테 과자를 가져다주는 분이 누구냐.”
“너지?”
“너?”
연신이는 탁자 위에 정자세로 서 있었다.
아니, 뭐, 앉아있으나 서 있으나 별 차이는 안 느껴지지만.
어쨌거나 서 있었다.
긴장된 얼굴로.
내 귀에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으면 슈피의 귀에도 들렸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만 연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하면 상관없겠지만···.
“아, 아사지?”
“아사?”
“···아사···님?”
“그렇지.
내가 너에게 과자를 주지 않으면 네가 과자를 먹을 수 있느냐.”
“말투 왜 그래?”
“어허.”
“···아니요.”
연신이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과자 봉투는 꽉 닫힌 채다.
물론 연신이는 풀 수 없다.
자력으로는.
마법을 쓰면 될지도 모르지만···.
나를 회귀시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매번 그러고 나면 비실거리기 일쑤였으니까.
그런 연신이가 과자 봉투를 열려고 마법을 쓸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감히 이 주인님께서···.”
“주인님ㅇ···.”
“어허.”
“···.”
“이 주인님께서 하는 일을 훼방 놓으면 되겠느냐?”
“···아니요.”
연신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더러워서 해 먹고 살겠냐는 얼굴이었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하지만, 화를 내지는 못한다.
화를 냈다간 과자가 그대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강제로 얼마간 굶었던 연신이는 최근 과자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면 미안해지기는 한데···.
뭐, 애초에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잖아, 신이라는 건.
단순히 기호품이라는 건데 그런 걸 얻기 위해 뭐든 하는 건 내 잘못이 아니야.
응.
절대 내 잘못이 아니지.
“앞으로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안 그럴게.”
“게?”
“요.”
“그렇지.
먹어.”
나는 만족의 미소를 띠며 봉투를 뜯어 주었다.
연신이가 침이라도 뱉을 것같이 떫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과자에 달려들었다.
“···먹보.”
욕하는 것도 안 들리는 모양이네.
휴.
뭐, 이건 그렇다고 치고···.
저번에는 슈피랑 꽤 좋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이제 신경 써줘야 할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카이델.
으음.
슬슬 뭔가 방해를 하거나 집착을 하거나···.
뭔가를 할 때가 되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
어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혹시 내가 생각했기 때문에 온 건가?
생각 안 했으면 안 왔으려나?
으음.
다음에 시도해보자.
아니, 그런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생각한 게 되니까···.
···.
으으, 머리야.
“아샤님, 들어가겠습니다.”
“아, 네!”
데바인의 목소리.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지.
하긴 이번 회차에서는 거의 만날 일이 없었나.
내가 온 지 이주일.
무도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카이델의 부름이 있기도 전에 계속 정원으로 도망 다녔으니···.
뭔가 이벤트가 발생할 때가 되긴 됐다.
“오늘은 계셨군요, 아샤님.”
“아하하하.
무슨 일이세요?”
“폐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아샤님께서 괜찮으시다면요.”
“으음, 폐하랑 저녁을 먹으려면 드레스 같은 거 입어야 하는 거잖아요?”
귀찮다.
매우 귀찮다.
그런 눈으로 데바인을 보자 데바인이 식은땀이라도 흘리는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편한 의복으로 오셔도 된다고 합니다.”
“그럼 좋아요.”
나는 즉답했다.
슬슬 카이델의 불안을 잠재워줘야 할 때가 되었다.
아니면 또 혼을 빼놓던가.
자, 어느 쪽으로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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