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원의 정석, 연신이가 보여줍니다
딱 한 번 참여한 적 있었던 3일째의 무도회.
나는 조용히 무도회의 구석으로 숨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목표는 오로지 솔라.
그 외에는 아무도 필요 없다.
없는데···.
아까부터 보라색 머리의 남자와 자꾸 눈이 마주친다.
으으으음.
저 남자도 남주인공 후보인가?
제비꽃이 생각나는 보라색 머리카락.
초콜릿 같은 달콤함이 엿보이는 진갈색 눈동자.
건강한 상아색의 피부.
부드러운 관록이 엿보이는 단정한 이목구비.
으음.
외모상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척 봐도 저 남자의 나이는 최소한 30대 후반.
나이상으로 무리 아니려나.
은화도 나랑 비슷한 나이 또래였던 것 같은데···.
“제브 국의 국왕께서는 우리 팔렌 국과의 우호를 공고히 하시고자 방문해주셨소.
이번 제브 국과 팔렌 국의 사막 식물 관련 연구에서 좋은 성과가 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축하의 말을 나누기 위해서이기도 하오.
팔렌 국에 계신 동안 아무런 불편도 없이 지내 주시오.”
“팔렌 국왕의 배려에 감사를 표합니다.
귀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숙원 중 하나를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본국과 귀국의 우호가 오랫동안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있는 사람이다.
부드러운데 시선을 잡아끈다.
마치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긴 한 나라의 왕이니 당연한 건가.
제브 국왕의 인사가 끝나자 주변의 귀족들이 인사를 하러 몰려들었다.
그러나 카이델의 만류에 다들 멈춰야만 했다.
으윽.
불길한 느낌.
내 차례인 건가.
“소개해야 할 손님이 있소.”
작은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손님인지를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에게로 하나, 둘 시선이 모였다.
대부분 서로 알고 있을 터였다.
판타지 소설이나 로판 같은 걸 읽어보면 귀족들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 교류한다.
데뷔탕트 였던가.
그걸 하기 전에 이미 다른 귀족들, 자제들을 다 외우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이 회장에서 저들이 모르는 사람은 나뿐일 거다.
“···후.”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의연해야 한다.
강하고 초연하게.
어떤 것에도 주눅 들지 않고.
겁먹은 모습은 보이지 마라.
내가 두려워하는 순간 저들은 날 뜯어먹을 테니까.
이미 겪어봤잖아?
“···.”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하필 구석에 자리를 잡아서 카이델에게 가는 길은 멀기도 멀었다.
그러나 모두가 길을 비켜줘서 다행히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왕의 손님이다.
그러니 일진물에서 자주 나오는 유치한 괴롭힘은 없을 것이다.
카이델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왕의 위광이 크면 클수록.
“그녀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으나 교회의,
라이안 사제의 보증을 받았소.
사정이 있어 당분간 나의 손님으로 이 성에 머물게 되었소.”
귀족의 인사는 배웠었다.
하지만 이제 희미하다.
그리고 이세계에서 온 내가 이곳의 인사를 알아도 이상하겠지.
저 귀족들은 내 출신은 모르지만, 귀족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 평범한 인사로 괜찮을 터다.
다만, 어디까지나 비굴하지 않은 인사여야 한다.
나는 드레스를 양쪽으로 벌리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드레스에 달린 화려한 장식이 조명 아래 빛난다.
화장으로 떡칠을 한 얼굴이 무겁다.
하지만 다 참을 수 있다.
솔라.
네 시선을 잡을 수만 있다면.
인사를 마치고 꼿꼿이 선다.
그리고 카이델에게 허리를 숙여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카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로 카이델의 곁을 벗어나 구석으로 향했다.
이제 기다리면 솔라가 올 터···.
···.
······?
“실례하겠습니다.”
···대체 왜 이 남자가 여기에···.
당황해서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으으음···.
왜 제브 국의 국왕이 여기 있는 걸까.
“···제게 뭔가 할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으아아.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이 남자 남주인공 후보였나?
여태까지 안 엮인 건 3일째의 무도회에 제대로 참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가?
곤란하다.
이런 모습을 솔라가 보면 다가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름 이 남자, 국빈인 거잖아.
그 앞에서 나를 꼬실 순 없을 테니까.
“아.
혹시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실례지만 잠시 뒤를 돌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뒤?
뭐지.
나는 탐색하듯 남자의 눈을 보았다.
진갈색 눈동자에 악의는 엿보이지 않는다.
으음.
뭐, 해치려고 할 리가 없나.
카이델이 보는 앞에서.
나는 얌전히 뒤를 돌았다.
“읏···.”
따뜻한 것이 등에 살짝 닿았다.
손?
손인가?
뭐야.
지금 성희롱인···?
“됐습니다.”
황급히 뒤를 돈 내 눈에 웃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손에는 작은 시침 핀 하나가···.
···.
오 마이 갓.
“···제 등에 꽂혀있었나요?”
“네.
모르셨던 것 보면 다치신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입니다.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보였기 때문에 아마 다른 분들은 못 보셨을 겁니다.”
진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
뭘까.
조금···.
가슴이 울렁거린다.
“감사합니다.”
나는 차갑게 내뱉고 웃었다.
사람을 거부하는 웃음.
남자는 이해한 듯 웃음을 되돌려 주었다.
마치 태양처럼 따스한 웃음이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
일국의 왕이라는 자리에 있는 건 같은데
카이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남자다.
뭔가···.
“무슨 일인가.”
카이델의 목소리가 생각을 비집고 들어온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아샤의 가면을 썼다.
“옷에 뭐가 묻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랬나.”
카이델이 내 옷을 훑는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다.
으음.
뭐, 좋아하는 여자의 모습은 뭐든 좋지만 빡세게 꾸민 모습은 각별한 법.
그런 의미에서 솔라를 찾아야 하는데···.
카이델을 핑계로 근처에 와주지 않으려나.
“형님.”
오오.
왔다.
마치 자로 잰 것 같은 타이밍으로.
나는 의연한 얼굴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것···.
···.
······.
“솔레기안.”
돌아보던 카이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문이 막힌 이유와 같겠지.
···.
심각하다.
몹시 심각하다.
의상이.
“이쪽의 숙녀분이 소문의 그녀입니까?”
장난스러운 목소리.
으음.
아까 인사할 때 날 못 봤나?
아니면 멀리서 봐서 속성의 힘이 발휘되지 않은 건가?
솔라와 눈이 마주친다.
순간 솔라의 눈이 멈췄다.
···.
눈이 마주쳐야 발휘되는 건가?
속성의 힘.
“꼴이 그게 뭐냐.”
“···아, 어?
네?”
솔라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알기 쉽다.
슈피처럼 읽기 힘든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꼴이 그게 뭐냐고 물었다.”
“아아.
저에게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형님.”
진중하고 무거운 카이델과 달리 솔라는 가벼우면서도 화사한 용모를 자랑한다.
그런 그가 쓸데없이 화려한 의상을 입자 가벼움은 배가 되었다.
···.
솔직히 말하면 절대 공략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아까 그 제, 제, 뭐시기 나라의 왕이 더 낫다.
그래도···.
아마 지금으로서는 가장 남주인공에 가까운 남자도 이 남자다.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왕.
그 아래 애매한 위치에 있는 왕의 동생.
이 남자는 아마도 자신의 형님을 존경하고 있다.
지금 카이델을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느껴진다.
존경하는 형님을 위해 왕위 쟁탈전을 포기하고 한량이 된 왕자.
그것은 얼마나 힘든 길이었을까.
이 남자의 과장된 모든 것은 그 반동일지도 모른다.
아마 진짜 성격은 본인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이 남자를 끄집어낼 수만 있다면···.
그 존경하는 형님을 배신하는 짓을 시킬 수 있다면···.
카이델도 라이안도 테베도 슈피도 아니었다.
내가 아는 남자들 가운데 그들을 제외하고 가장 남주인공에 가까운 남자는 이 남자다.
그러니 싫고 싫어도 해야만 한다.
“···폐하의 동생 되시는 분입니까?”
“으음.”
“솔레기안이라고 불러주세요, 레이디.”
우욱.
“···솔레기안··· 님?”
“그냥 솔레기안이면 됩니다, 레이디.
형님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만나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솔라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뭐지.
올리라는 건가.
싫은데.
왠지 손 키스 당할 것 같다.
나는 가만히 솔라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무슨 의미죠?”
“아···.
이 세계 분이 아니라고 하셨던가요.
그냥 인사입니다.
손을 올려주시면 돼요.”
으음.
역시 손키스인가.
아니면 춤을 신청하는 걸까.
“···혹시나 해서 이야기 드리는 거지만 제가 살던 세계에서
손에 키스하거나 하는 건 고백의 의미였습니다.”
이 정도 거짓말은 해도 되겠지.
나는 뻔뻔스럽게 웃었다.
그 거짓말을 알아챘는지 못 알아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건 나는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랬군요.
실례했습니다.”
솔라는 손을 거뒀다.
그리고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일일이 눈에 거슬리는 남자다.
“제가 실례이지요.
이곳에 온 이상 이곳의 예법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데···.
제 무례를 용서하세요.”
나는 솔라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엷게 웃으면서.
솔라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이델은 그 시선에 눈치챌 수 있을까.
카이델이 눈치채야 한다.
그래야 더 쉽게 진행될 수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곁눈질로 카이델을 살폈다.
카이델의 눈에 그 검은 것이 스민다.
솔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하다.
됐다.
나는 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들었다.
“폐하.”
그리고 카이델을 불렀다.
맛이 간 눈으로 솔라를 바라보던 카이델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사가 끝났으면 저는 이제 방으로 돌아가도 괜찮을지요?
사실 익숙치 않은 차림이라 조금 피곤해졌습니다.
폐하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복장인데도···.”
나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카이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바인.”
“네, 폐하.”
“아샤를 방으로.”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데바인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을 나선다.
문을 나서기 직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생각에 잠긴 채 연회장 어딘가를 바라보는 카이델과
조금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솔라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내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타국의 왕이 있었다.
나는 솔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엷게 웃어보였다.
*********
“왜 오늘은 날 안 데리고 간 건데!”
“보면 놀릴 거잖아.”
“흥흥.”
연신이가 토라진 얼굴로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했다.
아마 연회장의 음식이 목적이었겠지.
“짜잔.”
“오오오오오!
뭐야, 뭐야!
드레스에 싸 온 거야?”
“···미쳤냐?”
나는 쟁반을 덮고 있던 은색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담긴 접시가 있었다.
틀림없이 투덜거릴 연신이를 위해 따로 부탁한 것이었다.
“할 말 없어?”
“우와아!
맛있겠다!”
“씁.”
나는 음식으로 달려드는 연신이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손바닥에 부딪힌 연신이가 풉,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
바보.
“할 말 없냐니까?”
“무슨 할 말?”
“잘 생각해 봐.”
“어, 어···.”
곰곰이 생각하던 연신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모른다.
알려달라.
그렇게 눈으로 말하고 있다.
“너를 위해 음식을 싸 와주신 나한테 할 말 없어?”
“고마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연신이가 달려든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연신이를 손으로 막았다.
“풉.
아오씨!
이번에는 또 왜!”
“그게 끝이야?”
“그럼 뭐라고 하라고?!”
“잘 생각해보라니까.”
연신이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하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웃겼다.
이쯤하고 그냥 줄까.
사실 정답은 없다.
그냥 놀려먹고 싶었을 뿐.
“친애하는 아샤님!
제발 저한테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세요!
아샤님의 넓으신 아량으로 불쌍하고 가엾은 이 작은 새에게
동정을 베풀어주세요!”
···.
미, 미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러자 연신이가 달려들어 미친 듯이 쪼기 시작했다.
···.
저건 신이 아니라 걸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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