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판타지의 정석, 침대에서 그와….
곤란하다.
오늘의 카이델은 기분이 좋지 않다.
아침부터 내 방에 들어와 나를 노려보는 중이다.
그것도 내가 잠에서 깨기 전부터.
사실 아까부터 잠은 깨 있었다.
그렇게 쿠당탕거리면서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데 어떻게 안 깨고 배기겠나.
하지만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
으음.
어쩐다.
오늘도 라이안을 부르려던 내 계획은 취소해야 할 듯하다.
그건 둘째치고 안가나.
가야 일어날 텐데.
슬슬 화장실도 가고 싶고···.
···.
아니 근데 지금 일어나면 왠지 싫은 소리를 들을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 일어나면 어제와 같은 일이 또 반복될 것 같다.
어제 라이안과의 짧은 만남 뒤로 나는 계속 카이델과 같이 있어야만 했다.
어디서?
카이델의 집무실에서.
덕분에 드나드는 귀족들의 눈총을 한껏 먹어야만 했다.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다.
거기서 눈칫밥 먹느라 저녁은 먹지도 못했다.
배가 얼마나 부르던지···.
후.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나 데려가려고 온 거구나.
···.
망할.
그럼 내가 깰 때까지 기다리겠네.
그럴 거면 차라리 빨리 일어나는 게 낫다.
“···으음.”
와, 어색해.
진짜 어색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연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엄청 어색하다.
카이델은 어제처럼 삐딱하게 소파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전혀 몰랐다는 듯 카이델을 부르자 카이델이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로 다가왔다.
···.
에?
엑?
설마?
“어, 어···.
좋···은 아침입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자책하고 있는 사이 카이델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폐···하?”
이제껏 카이델이 침대에 다가온 적은 없었다.
아, 내가 있을 때 한정이지만.
하여간 내가 있는데도 다가온다는 건···.
카이델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폐하?”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카이델의 팔이 나를 붙잡았다.
에에.
뭐야.
이거.
19금 소설 아니잖아?!
이런 전개는 아니잖아!
슬쩍 팔을 비틀어봤다.
빠지지 않는다.
애초에 팔 두께의 차이가 두 배가 넘는다.
맘먹고 카이델이 나를 잡으려고 하면 당연히 잡힐 수밖에 없다.
으으.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진 날의 악몽이 떠오른다.
카이델의 어깨에 달랑달랑 매어져 왔던 그 수치스러운 기억이.
“폐하, 잠시만···.”
밀어내 보지만 꿈쩍도 안 한다.
망할.
처음이 소설캐릭터라니.
그건 너무 오덕스럽잖아···.
나는 눈을 꽉 감았다.
“···.”
카이델의 팔이 내 배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나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리고···.
“···?”
아무 일도 없었다.
아.
이쪽?
이쪽 전개구나.
여주인공들이 이런 거 당황해할 때 비웃었는데.
내가 당황할 줄이야.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카이델은 내 옆에 누워있었다.
붉은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마 잠을 못 잔 것 아닐까.
눈이 빨갛다.
아, 물론 원래 눈동자는 빨갰지만.
물끄러미 그 눈동자를 바라보자 카이델의 눈이 살짝 감겼다.
카이델의 팔이 나를 더 꽉 껴안는다.
조금 아프다.
카이델의 눈이 가물거리더니 이내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잠들었나?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
아, 역시.
이럴 때 여주인공은 절대 못 빠져나가지.
응.
하.
모르겠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그렇게 급한 건 아니긴 하지만···.
설마 이 나이에 침대에 싸진 않겠지?
잠깐 자고 일어나서 가도 되겠지?
아니, 뭐.
되고 안 되고 애초에 선택지가 없는 걸 어떻게 하나.
응.
자고 일어나서 가지, 뭐···.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
파란 하늘.
맑은 햇살.
싱그러운 초록의 냄새.
하.
조금 살 것 같다.
나는 정원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3일.
꼬박 3일 동안 나는 카이델과 내내 붙어있어야 했다.
밥 먹을 때는 물론이고 카이델이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화장실 갈 때나 씻을 때 말고는 그야말로 계~속 붙어있었다.
솔직히 숨 막혔다.
할 일도 없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게 마치 인형이 된 것 같았다.
뭐, 그냥 앉아있는 것만 하는 거라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들락거리는 귀족들의 그 경멸에 찬 눈동자란···.
솔직히 내 성격 같았으면 진작에 싸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티는 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카이델이 또 어떻게 폭주할지···.
그저 웃으면서 받아주고 있었더니 속이 아프다.
그래도 3일 내내 받아준 보람이 있는지 오늘은 혼자 정원에 나올 수 있었다.
아니, 솔직히 혼자라고 말하긴 좀 어렵겠지.
집무실에서 창문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니까.
모르긴 몰라도 카이델은 서류는 대충대충 보면서 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응.
“휴, 오랜만에 살 것 같네.”
그동안 연신이도 거의 반죽음 상태였다.
눈에 띄이면 절대로 죽임당할 것이다.
연신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쥐 죽은 듯, 아니 그야말로 새 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나야 그래도 카이델이랑이라도 이야기를 했지만
연신이는 3일 내내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숨어있어야만 했으니···.
진짜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괜찮아?”
“심심해 죽을 뻔 했지!
예전에는 몇 백년을 어떻게 혼자 있었지?”
연신이가 내 어깨에서 구시렁거렸다.
음?
혼자?
혼자, 라니.
“혼자?
왜 혼자였어?”
“음?
신들은 각기 고유의 영역이 있어.
그래서 서로 그 영역을 침범하면 안 돼.
한 영역에는 하나의 신만 있을 수 있어.”
아.
신끼리는 교류할 수 없는 건가.
왜 굳이···.
자기들끼리 막 친목도 다지고 해야 더 좋은 거 아닌가?
이상한 시스템이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신자라던가···?”
“나는 신자가 있어서 생겨난 신이 아니야.
나한테 신자는 없어.”
아.
연애소설의 신이었던가.
신자가 없어도 존재하는 신이라면···.
아마 연애소설이라는 장르가 생겼기 때문에 생겨난 건가?
그런 신을 믿는 사람은 아마도 없겠지···.
아니, 애초에 그럼 이 쬐끄만 건 대체 몇 살이라는 거야?
“그래도 연애소설을 보는 사람이나 작가랑 이야기한다거나···.”
“음,
뭐 인터넷으로 이야기한 적은 있지.”
“인터넷?”
“응.”
“신도 인터넷을 해?”
“바보 취급하지 마!”
연신이 부리로 내 목을 살짝 쪼았다.
아파.
의외로 날카롭다.
쬐끄매서 더 따갑나?
그나저나 신이 인터넷이라니.
과학의 산물과 신···.
뭔가 전혀 안 어울리는데.
“누구랑 이야기했는데?”
“···윽.
그, 그건 비밀이야.”
···.
뭐지.
설마 신인데 초콜릿톡 같은 걸 한 건 아니겠지···?
아니면 설마 만남 앱이라던가···.
에이, 설마.
“그러면 혼자 있는 거엔 익숙하겠네?”
“그렇지.
그래서 나도 놀랐어.
3일 동안 거의 죽는 줄 알았다니까.
수다를 못 떤다는 게 이렇게 괴로운 일일 줄이야.”
···.
갑자기 연신이에게 동질감이 들었다.
나도 그랬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지 못했을 때는 내가 외롭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슬프다는 것도 몰랐고 아프다는 것도 몰랐다.
나는 그냥 평범한 줄 알았다.
그런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 아이 덕분이었다.
지금, 그 지옥에서 홀로 견디고 있을···.
어쩌면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외로움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감정의 대부분을 모른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 아이를 지옥에서 건져오기 위해서.
“카이델이 언제 집무실에서 쫓아 내려올지 몰라.
긴장해라.”
장난스럽게 말하자 연신이가 날개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뭐야.
절규 흉내냐.
나는 정자로 가서 앉았다.
저번에 카이델이 어떻게 했더라.
어떻게 하니까 시종을 부를 수 있었는데···.
“아샤 님.”
“으악!”
까,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리를 질러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뒤를 보자 시녀가 한 명 서 있었다.
아, 저번에 정원에 차를 가져다줬던 시종이다.
“뭐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시녀가 생긋 웃었다.
···.
뭐야, 무서워.
마치 내가 생각하는 걸 알기라도 한 것 같은 타이밍.
카이델 설마 나한테 도청기라도 붙여 놓은 건가?
“차랑 다과를 받을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녀는 내게 예를 갖추고 성 쪽으로 가버렸다.
우와 진짜 놀랐네···.
마음이 좀 가라앉자 주변이 보였다.
저번에 와봤다고 꽤 익숙하다.
정자 주변에 있는 하얀 꽃도 여전하다.
내 시선이 붉은 꽃으로 향했다.
화향화, 였던가.
카이델이 좋아한다고 했던.
그 날의 카이델이 떠올라 나는 뭔가 입맛이 썼다.
“야!”
나를 부르는 연신이에게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때 카이델은 마법인지 뭔지로 성안의 시녀와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에 뭔가 장치가 되어있다는 뜻.
설령 집무실에서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다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신이가 말을 할 줄 안다는 걸 카이델은 모른다.
게다가 외모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걸걸한 목소리.
이 목소리를 들었다간 카이델이 또 어떻게 미칠지 모른다.
나는 탁자에 글씨를 썼다.
-카이델이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연신이는 내가 쓰는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자신의 꽁지깃을 똑 하고 뗐다.
···.
에?
왜?
-안 들려, 멍청아.
연신이가 키득거리며 탁자 위에서 굴렀다.
···.
얄밉긴 한데 궁금하다.
분명 방금 꼬리에서 뗀 깃인데 어떻게 잉크가 나오는 거지?
나는 연신이의 입에서 흘러 떨어진 꽁지깃을 손에 들었다.
사각사각.
뭔가 깃털 펜이나 만년필을 쓰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묘하게 기분 좋은 필기감과 함께 선이 그어졌다.
신기하네.
“뭐 하냐?”
“아니, 신기해서···.
그것보다 어떻게 알아?
여기 뭔가 장치가 돼 있는 것 같던데.
그걸로 카이델이 니 목소리를 들으면 난 카이델 손에 죽을지도 몰라.”
“에헴.
내가 연애소설의 신 아니냐!
이 소설의 설정은 빠삭하게 꿰고 있지!”
실환가요.
그럼 그 수 많은 소설의 설정을 다 기억한다는 거야?
설마?
미친 거 아냐?
“너 기억력 얼마나 좋은 거냐···.”
“훗훗.
이제 나의 위대함이 다시 보이는가!”
···.
어우, 욕할 뻔했네.
나는 연신이를 쥐어박을 생각으로 손을 들었다.
연신이는 양 날개로 가드를 올리며 내게 날개를 뻗었다.
그렇게 연신이랑 투닥거리는 사이, 아까의 시녀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야, 숨어.”
연신이가 뽀르르 날아 내 어깨에 올라탔다.
내 머리카락으로 연신이를 살짝 가린 후 자세를 바로잡았다.
“···.”
시녀는 아무 말 없이 내게 인사를 하더니 이동식 트레이에서 다과를 꺼냈다.
나 혼자라서 그런가···.
저번 같은 3단 접시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꽤 호화로웠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저기 있는 줄을 당겨주십시오.”
시녀는 다시 한번 내게 고개를 숙이고 건물을 향해 발을 옮겼다.
시녀가 뒤돌아서기 무섭게 연신이가 다과에 달려들었다.
“여기 과자 진짜 맛있어.”
연신이는 붉은 장미 모양의 과자를 부리로 깨부수며 웃었다.
···.
으음.
내 입장에서는 먹는 것보단 보는 게 더 좋은데 말이지···.
나는 차로 손을 뻗었다.
은은한 향기가 코를 타고 올라온다.
오랜만에 맛보는 느긋한 시간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있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하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또 배드 엔딩이 뜨겠지···.
계속, 계속···.
행동해야 한다.
다만 배드 엔딩을 가능하면 비껴가서.
라이안이 남주인공 후보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교회로 갈 수 없다면 라이안이 성으로 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상하지 않게 그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미친 척이라도 해볼까?”
연신이가 나를 본다.
그 눈동자는 미친 사람을 보는 눈동자였다.
“뭐 척할 것도 없이 넌 이미···.”
···.
저걸 확 그냥···.
나는 기척 없이 연신이에게 손을 뻗었다.
헛소리를 지껄인 후 신이 나서 과자를 쩝쩝거리고 있는 연신이의 뒤로.
그리고 손가락 두 개로 톡, 하고 날려 보냈다.
“으아아악! 뭐야!”
···.
바보.
연신이가 나를 억울한 듯한, 분한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온다.
나는 연신이에게 손짓을 했다.
연신이는 씩씩거리다가 얌전히 내 어깨로 올라왔다.
그리고,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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