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물의 정석, 중요한 타이밍에는 꼭…!
“···.”
사제, 라이안은 오래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차가운 눈으로 나를 살피고 있다.
···.
숨, 숨 막히는데.
숨 쉬어도 되나···?
나는 슬쩍 데바인의 눈치를 봤다.
데바인은 심각한 얼굴로 나와 라이안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주군의 첫사랑이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가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긴장했을지도 모른다.
연신은 잔뜩 얼어있는 날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저놈이 진짜···.
“···흣.”
이런.
나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참고 있던 숨을 조심히 내뱉는다는 게 그만···.
내 바보짓에도 라이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부동자세로 서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우리를 항상 굽어살피시는 케리스만이시여.
저에게 당신의 지혜를 빌려주소서.”
은은한 빛이 라이안을 감싼다.
소설에서 읽어서 그가 기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게 되니 신기하다.
남색 머리카락이 빛에 삼켜져 은은하게 빛난다.
하얀 피부는 마치 피부에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투명하다.
그 빛은 한참이나 라이안의 주변에서 머물렀다.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이 조용히 문이 열렸다.
“···.”
마치 타이밍을 재기라도 한 것일까.
사제의 눈이 열리며 백금색 눈동자가 드러나자 그의 몸을 감싸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라이안.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네.”
라이안이 몸을 일으키자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그들 사이에서 흐르는 공기도 꽤 무겁다.
결과를 알고 있는 나만이 태평하다.
뭐, 나는 다른 의미로 긴장 중이지만.
“폐하.
이 여성은 전승되어 오는 저주의 존재가 아닙니다.”
역시나 라이안.
왕의 인사는 가볍게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한다.
저러니 신자들 사이에서 뒷이야기가 나오지···.
“그래.
그대의 인증이 붙어있으면 확실하겠지.”
카이델이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델도 불안했겠지.
데바인도 이제 안심이 되었는지 엷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다만.”
하지만 라이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카이델의 얼굴에 다시 긴장이 스민다.
“이 여성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닙니다.
이곳과는 전혀 다른 곳의 존재입니다.”
차가운 목소리에 카이델이 나를 바라보았다.
저 정도야 이미 예상했던 주제에
하긴, 생각만 하는 것과 남의 입에서 확증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겠지.
“그럼 이제 전 나가도 되나요?”
나는 나를 바라보는 카이델에게 폭탄을 떨어뜨렸다.
역시나 예상대로 카이델의 표정에 경악이 스민다.
왕의 얼굴이 아닌 남자의 얼굴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눈을 마주 봐주었다.
물론 성에서 나갈 마음은 1도 없다.
카이델을 공략해야 하는 내가 카이델의 곁을 떠나서 어쩌겠는가.
다만 소위 말하는 밀당을 시도해본 것뿐이다.
“···글쎄요.”
예상외로 라이안에게서 반응이 나왔다.
라이안은 무덤덤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성 밖으로 나가면 큰 혼란이 일 것입니다.
폐하의 윤허가 있으시다면 성안에 있거나 차라리 타국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겁니다.”
카이델이 살짝 이를 악물었다.
딴에는 티 안 나게 한다고 한 거겠지만, 턱이 꽉 다물리는 게 보였다.
나는 카이델의 반응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폐하의 호의에 기댈 수도 없겠죠.
저는 타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여기에도 염색 같은 것이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도 되겠죠.”
나는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연기로 고백을 받아내진 못하겠지만, 나에 대한 애틋함은 더해줄 수 있겠지.
그런 심산이었다.
“···아니.
그대는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표정을 관리했다.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카이델을 보자, 그는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폐하께는 많은 호의를 받았습니다.
숲에서 절 발견하고 여기로 데려와 주신 것도 그렇고···.
식사에 좋은 방까지 준비해 주셨는데 어떻게 폐하께 더 기댈 수 있겠습니까.”
살짝 카이델한테서 거리를 뒀다.
그러자 카이델이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오오, 누가 그랬더라.
위기는 사랑을 성장시킨다고.
그 카이델이 먼저 나한테 다가오다니.
아주 좋은 징조다.
“그대는···.”
내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카이델이라면.
하지만 카이델은 말하지 못한다.
“···저는?”
나는 카이델의 대답을 재촉했다.
오랫동안 망설이게 둬선 안 된다.
그러면 출구를 발견해버린다.
“···그대는 나의 손님이다.”
늦었나.
카이델은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버렸다.
그게 거의 바늘구멍에 가깝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어깨에 앉아있는 연신을 바라보았다.
연신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와 카이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 눈을 보며 낄낄거렸다.
“멍충이.”
···.
때릴까.
“제게 베풀어주시는 폐하의 은혜는 감사하지만, 저에겐 너무 과분한 것 같습니다.”
“그대가 나의 백성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다.
그대가 타국에서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대를 보낼 수도 없다.
그대가 나의 손님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튕겨봤지만 이미 대답은 완비.
더 튕기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보이겠지.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러면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진 폐하께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뭐, 이 정도면 됐다.
어쨌든 카이델 본인의 의사로 나를 궁에 둔다는 게 중요하다.
카이델은 지금 아주 조금이라도 상상했을 것이다.
내가 자신의 앞에서 사라졌을 때의 상황을.
그리고 이런 방법으론 나를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것을.
“지금 쓰는 방은 귀빈실이라 오래 쓰기엔 불편할 것이다.
3층으로 방을 옮기도록 하지.
데바인, 그대에게 맡기겠다.”
데바인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왼손을 오른쪽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저것이 이곳의 예를 갖추는 법인가.
집사 복장을 한 채 예를 갖추는 모습은 꽤 그림이 되었다.
“폐하의 뜻대로 모두 이루소서.”
“라이안.
와 준 것에 감사를 표하겠네.
이제 그대의 위치로 돌아가도 좋네.”
라이안은 데바인과 달리 무릎을 꿇지 않고 양손을 양어깨에 댔다.
“케리스만 신의 가호가 폐하와 팔렌 왕국의 위에서 영구히 머물 수 있기를.”
살짝 고개를 숙이는 라이안의 모습 역시 그림이었다.
뭐야, 이 소설 왜 잘생긴 남자들밖에 없어.
원래 판타지 소설이었다고 해놓고.
“아샤.
그대는 잠시 나와 이야기를 했으면 하네.”
카이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바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라이안이 나를 한번 흘끗 쳐다보고 데바인이 열어준 문을 통해 나가버렸다.
데바인은 라이안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자신도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방에는 나와 카이델만이 남았다.
“그대는 정말로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가?”
윽.
아니요.
절대 아니죠.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 아까 했던 말과 모순된다.
어쩐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나라는 정말로 아름답고 또 평화로우니까요.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폐하께 너무 누를 끼치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카이델은 왕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카이델에게 거짓을 말한 듯 분명 바로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하면 된다.
다만, 진실의 조각만을 이야기할 뿐.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네.”
카이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서린다.
참 신기한 남자다.
왕의 얼굴일 때와 남자의 얼굴일 때가 완전히 다른 남자.
그것이 카이델의 매력 포인트인 걸까.
그래서 은화는 카이델의 집착에 괴로워하면서도 떠나지 못했던 걸까.
글로 읽었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폐하.
아까도 들으셨듯 저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닙니다.
제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저는 바로 떠나야만 합니다.
폐하의 은혜를 감히 갚을 방법이 없어서 사양한 것도 있습니다.”
카이델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진다.
무슨 왕이 저렇게 포커페이스가 안 돼?
타국이랑 외교 할 때는 아주 난리가 나겠네.
“네 앞이니까 그런 거지.
원래는 잘 해.”
너 왜 우리 애 뭐라 그래?
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연신의 말에 슬쩍 연신을 내려다보았다.
지가 작가도 아니면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은 내 목에 휙휙 날개를 휘둘렀다.
“그런 것은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내 손님이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은 곧 나의 얼굴에 흙을 칠하는 것과 같은 것.
그대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국빈으로 대접할 것이니 이곳에 있도록 하라.”
카이델은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 눈빛에는 절절한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감정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감정이다.
저것은, 애절함이다.
“그대가 이곳에 온 것은 그대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여기에 머무는 것은 그대의 선택에 맡기겠다.”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보석처럼, 유리구슬처럼.
그 눈동자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이곳에 있기를 바라십니까?”
카이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연신은 내 목을 치던 것을 멈추고 숨죽이며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나는···.”
그때였다.
“폐하, 재무대신께서 찾으십니다.”
똑똑.
데바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 것에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카이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깝다.
말하게 할 수 있었는데.
“오, 오늘은 푹 쉬도록 하게.
그대가 괜찮다면 오늘 저녁을 함께하는 건 어떤가?”
“···저녁이요?”
아.
폭발했다.
카이델의 얼굴이 불타오른다.
어제처럼 그 붉은 얼굴을 살포시 가려줄 어둠도 없다.
그 생생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 저녁 식사 말씀하신 거군요.
저는 당연히 좋습니다.”
“으, 음.
그럼 있다가 보도록 하지.”
카이델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살짝 가린 채 문을 향했다.
그 발소리를 듣고 가늠한 것일까.
데바인이 적절한 타이밍에 문을 열었다.
카이델은 잠시 문 앞에서 멈칫, 하더니 나를 휙 돌아보았다.
뭐지?
뭐 더 할 말이 남았나?
설마, 데바인 앞에서 고백을···!
“···.”
그럴 리가 없지.
응.
카이델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데바인이 곧바로 들어왔다.
“아샤님.
방을 옮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일단 욕실에 들어가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갈아입으실 의복도 준비하겠습니다.”
으음.
확실히 찝찝하긴 하다.
어제부터 계속 이 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발도 아직 흙투성이.
그러고 보니 나 흙발로 막 여기 밟고 다녔는데 괜찮은 건가?
시녀들한테 미안하네···.
“그,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는 건데 혼자 씻을게요.”
이런 로판물은 꼭 시중들어주는 시녀가 나온다.
그러면 꼭 그 시녀가 나중에 뭔가 트러블을 일으킨다.
난 그런 트러블에 휩싸여 있을 시간 없단 말이다.
“알겠습니다.”
의외로 데바인은 순순히 물러났다.
하긴 내 신분이 귀족도 아니고 그냥 왕의 손님인 건데 그런 것까진 강요하지 않겠지.
데바인이 앞장서서 문을 열어주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문밖을 나섰다.
“아.”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기던 데바인이 갑자기 멈춰섰다.
뭐, 뭐야.
“머리는 잠시 가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는 중앙귀족분들의 집무실 근처라···.
혹시라도 아샤님을 보게 되면 패닉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데바인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더니 흰 천으로 된 베일을 여러 장 가져왔다.
그리고 내 머리에 하나씩 덮어씌우기 시작했다.
···.
아, 아니, 데바인 씨?
8장은 좀 너무 많은 게···.
얇은 천인데도 머리에 무게가 느껴진다.
데바인은 내 머리에 베일을 모두 덮어씌우더니 요리조리 살폈다.
그리고 만족한 듯 씩 웃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2층에는 객실마다 욕실이 있지만, 3층의 대욕탕을 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미리 말을 해두었으니 지금쯤 물이 다 데워졌을 것입니다.”
아니, 작은 데가 더 좋은데···.
얹혀 있는 주제에 이것저것 이야기하기가 뭐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 하나 들어가자고 물 낭비하긴 좀···.
어차피 물 채워놨다니 다음부터는 방에 딸린 욕실에서 하겠다고 하자.
“그리고 아샤님.”
“네?”
“왕성에는 왕가 분들뿐 아니라 중앙귀족분들이나 지방 귀족분들도 자주 드나듭니다.
그들에게 아샤님이 폐하의 손님이며,
당분간 궁에 머무르시리라는 것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으음.
나랑 여기저기 나다니기 위한 밑밥인가!
하긴, 왕이 갑자기 검은 머리의 여자랑 돌아다니면 망조라며 큰 소란이 일지도 모른다.
“필요하다면 해야죠.”
“그래서 말인데, 모레 무도회에 참가해주셔야겠습니다.”
···.
······.
·········?!
지,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