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정석, 배신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다
나는 멍하니 테베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베는 내게서 조금 떨어져서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어디까지나 충만하고 아름다웠다.
···.
부탁이야.
그런 얼굴로 바라보지 마.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테베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속일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이토록 뜨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아프다.
아아.
게임 캐릭터처럼 생각하자.
나도 테베도 그냥 게임의 캐릭터.
그래, VR.
VR 게임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자.
나는 웃었다.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로이스터, 경···.”
나는 확신했다.
나의 감정을 알면서도 내게 고백하는 테베는 틀림없이 진 남주인공일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일까.
“고마워요···.”
나는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이 아니라 고맙다고 말했다.
테베는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생글 웃어주었다.
그 얼굴에 마치 화사한 꽃이 핀 것처럼.
“별말씀을요.”
이제 곧 시작된다.
깨어진다.
세상이.
그렇게 되면 이토록 사랑스럽게 웃어주는 테베도 사라질 것이다.
뭔가 남겨주고 싶었다.
사라질 세계의 테베에게.
나는 테베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샤님!”
“고마워요, 테베.”
나는 당황하는 그의 뺨에 살짝 입 맞추었다.
가까이에서 맡은 그의 향기는 꽃향기 같기도 하고 향수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그건 테베 자신에게서 나는 향기다.
올곧고 항상 지킬 것을 생각하며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서 나는 향기.
그리고 세상의 마지막이 시작된다.
소용돌이처럼 휘말려 사라져가는 세계.
내가 머물던,
이제는 익숙해진 방이 엿가락처럼 이리저리 휘어진다.
그 안에서 테베는 나를 꽉 끌어안고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나는 담담한 얼굴로 테베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울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그래도 그는 끝까지 나를 지켜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쩐지···.
“고마워요, 로이스터 경.”
테베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의 눈이 나의 눈을 바라본다.
그는 이해한 것 같았다.
이 종말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를.
“···아샤님.
마지막이니 말하게 해주세요.”
테베가 나를 더 꽉 껴안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가녀리면서도 듬직한 등에 팔을 감았다.
“폐하가 아시면 경을 치시겠지만···.
사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사랑했습니다.”
쨍.
세계가 깨진다.
무너져 내린다.
나를 안고 있는 테베의 몸도.
그의 몸에서 나는 그 향기로운 꽃향기도.
나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
연신이는 내 옆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하던 까불거림도 없었다.
왜일까.
“뭐야, 너.”
“뭐가?”
“왜 까불거리지도 않고 가만히 있어?”
“우는 애 괴롭힐 정도로 못되진 않았거든.”
울어?
누가?
말도 안 돼.
나는 연신이의 말에 불신을 품으며 내 눈을 만졌다.
아.
차갑다.
진짜로 눈물이 흘렀던 건가.
눈물이라.
하품도 하지 않았는데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그런 건 이미 잊은 지 오래였는데.
나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 내지 마.
안 어울려.”
내 말에 연신이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덤비진 않았다.
뭐야, 재미없게.
나는 몸을 일으켜 커다란 스크린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결말이 달라질 것이다.
진 엔딩이 나온다면 나는 이제 그 아이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연신이와의 내기에서 이겼으니 어마어마한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아이를 그 지옥에서 건져올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테베가 진 남주인공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나오는 것이 배드 엔딩이라면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가라앉는 그 숲으로.
“후···.”
나는 심호흡을 했다.
어떤 결과든 받아들여야 한다.
게임에서 배드 엔딩 몇 번 봤다고 게임을 포기할 순 없으니까.
다행히 진 엔딩이었다면 다행.
배드 엔딩이라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연신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스크린은 아직 밝아지지 않았다.
나는 연신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아?”
“응.
보여 줘.
그래야 앞으로 나가든 멈추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연신이가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스크린이 밝아졌다.
거기엔 내가 미치고 있었다.
나는 기운없고 힘없어 보이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아사는 테베인과 사랑의 도피를 했어요.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함께 살게 되었어요.
그런 내게 테베가 다가온다.
아아.
테베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작고 가녀리다.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안 된다.
이 전개는.
이건···.
-화아사와 테베인은 행복했어요.
-1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화면이 바뀐다.
테베인의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아아.
아아아.
나는 절규했다.
“아니, 아니야···! 아니야!”
안 돼.
저건 내가 바란 결말이 아니다.
아아.
내가 왜 억지로 고백을 받아내지 않았는데.
왜 목숨을 걸면서까지 테베에게 계기를 주었는데.
이건 아니다.
이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테베는 야윈 얼굴이었다.
그 얼음 인형 같던 아름다운 얼굴이 완전히 수척해져 있었다.
1년.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벌떡 일어나 화면으로 다가갔다.
스크린 너머에 있는 테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아.
어째서.
-테베인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어요.
-주군인 카이드레아를 배신했다는 것이 테베인의 마음을 병들게 했지요.
화면 속의 나는 엷게 웃으며 테베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그 힘없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저건 연기다.
나는 테베에게 있는 힘껏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저 상황에서 만약 내가 마음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테베인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내가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괜찮아요, 로이스터?”
-“네, 괜찮습니다. 오늘은 조금 기분이 괜찮으신 것 같네요, 아샤님.”
-“아샤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잖아요.”
-“하지만 아샤님도 절 로이스터라고 부르셨습니다.”
테베는 부드럽게 속삭이며 나를 안았다.
나는 그 포옹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얼굴에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 얼굴에 있는 것은 연민이다.
아아.
안 돼.
테베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옆에 있는지.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그라면.
차라리 나는 떠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테베는 카이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
아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카이델은 나를 데리고 도망간 테베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서 용서를 구한다 해도 테베는 죽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테베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까지 떠나면 테베는 남는 것이 없어진다.
아무것도.
아아.
바보 같은 테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그때 도망갔어야 했다.
너는 나에게서 도망갔어야 했다.
그럴듯한 말을 하며 그럴듯한 감정을 속삭였던 나를 버렸어야 했다.
네 감정이 사랑인 걸 알면서 가지고 노는 듯 행동한 나를 두고 갔어야 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너의 고백뿐이었는데.
-화아사도 테베인도 알고 있었어요.
-그들의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요.
화면이 바뀐다.
테베는 거친 호흡을 하고 있다.
그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속병.
화병.
그걸 뭐라고 부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가슴에 쌓여 있는 카이델에 대한 충성이
카이델을 배신한 스스로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저럴 걸 알면서 왜 테베는 나를 선택했을까.
차라리 나를 선택하지 말지.
그렇게 만든 것은 나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도 나는 테베를 원망하고 있다.
진짜 원망해야 하는 것은 나인데.
“아사, 괜찮아?”
“···.”
화면이 멈춘다.
테베가 괴로워하는 그곳에서.
아무래도 연신이가 멈춘 듯했다.
나도 나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이델 때도 라이안 때도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가슴에서 뜨거운 뭔가가 계속 울컥울컥 치솟아 오른다.
시랑, 은 아니다.
나는 사랑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어렸을 때 사랑을 배운다.
일방적으로 부모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그들의 사랑하는 방법은 부모에게서 물려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없다.
사랑받은 적이 없다.
단 한 순간도.
그들은 항상 나를 매도했다.
나를 싫어했다.
나를 경멸했고 나를 미워했다.
내가 배운 것은 사람을 싫어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들은 나에게만 그러지 않았다.
서로를 향해서도 그랬다.
그들은 상대를 욕하고 헐뜯고 때렸다.
그 분풀이를 다시 나에게 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을.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미움과 폭력 뿐일 테니.
그런 그들은 그래도 할 건 다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부터 그녀의 배가 이상하리만치 불러왔다.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났다.
그녀는 술도 담배도 그만두지 않았다.
태어난 아이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신기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울고 짜증 내지 않았다.
그저 항상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울고 떼를 부리면 그들은 그 아이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릴 것을.
그들은 그 아이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나를, 그들을 사랑해주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사랑을 배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뒤늦게 배운 온기에 불과하다.
나는 여전히 사랑을 모른다.
그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주는 아이.
그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서라면···.
“···계속 보여 줘.”
엔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게 끝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를 악물고.
연신이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화면을 재생시켰다.
-어느 날, 테베인은 화아사를 깨우러 오지 않았어요.
나는 홀로 방 안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테베가 나를 데리러 오기만을.
하지만 그 눈동자는 한없이 슬퍼 보인다.
알고 있는 것이다.
테베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항상 칼같이 시간을 지키는 테베가 시간이 되었음에도 오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나는 알고 있을 터였다.
-화아사는 알고 있었어요.
-테베인은 더이상 화아사를 데리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요.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저기에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테베를 위한 것.
성을 두고 테베와 함께 밖으로 나온 것은···.
그리고 테베와 저런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소망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항상 냉정하고 이성적이려고 노력한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내가 사랑의 도피 같은 짓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아마도 테베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테베는 카이델의 옆에 있는 나를 보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테베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니 테베의 괴로움도 읽고 있었을 터다.
나는 테베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테베에게 말했을 것이다.
나를 데리고 도망쳐 주세요, 라고.
첫 1년은 행복에 취해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배신이라는 행위는 점점 테베를 좀먹어 들어갔을 것이다.
아아.
어리석다.
나도 테베도.
-그래도 화아사는 기다렸어요.
화면 속의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죽었는지 잠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테베인이 깨우러 오는 것을요.
-BAD ENDING.
화면이 어두워진다.
화면 속의 나는 평온해 보였다.
잔인한 여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쉬었다가···.”
“아니, 괜찮아.”
연신이의 말을 끊고 문 앞에 선다.
쉴 시간은 없다.
이게 아니라면 또 다른 남자를 찾으면 된다.
이번에는 또 누구를 공략해야 할까.
나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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