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정석, 좋은 음악은 항상 사랑하는 이를 떠오르게 한다
으음.
의외로 힘들다.
내가 그림의 모델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긴 한데···.
딱딱하게 굳은 것 같은 어깨를 살며시 움직이며 슈피 쪽을 바라본다.
아주 진지한 얼굴로 연신이를 바라보며 붓을 움직인다.
아니, 대체 뭐 저렇게 색칠할 게 많은 거야.
벌써 1시간은 넘게 이러고 있었던 거 같은데···.
“···.”
조금 좋지 않은 생각을 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로 슈피는 진지했다.
그래서 더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였다가 연신이가 깨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으음.
나는 살짝살짝 몸의 자세를 바꾸며 슈피를 관찰했다.
아까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목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다.
여기 남자 캐릭터들은 다 목선이 예쁘긴 했지만,
슈피는 그중에서도 원탑으로 목선이 예쁘다.
가끔 친구들이 남자 연예인을 보며 목선이 섹시하다며 소란을 떨 때마다
그깟 목 가지고 뭘···, 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아주 조금은 친구들의 마음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사실 내게 있어 남자란 별 의미 없는 존재였다.
굳이 따지자면 싫은 것에 더 가까운 존재.
뭐, 그도 그럴 것이···.
내 아비라는 인간은 그 모양이었다.
여자에게 쉽게 손을 올리고 힘으로 사람을 찍어누르려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걸 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조금 큰 남자는 다 무서워했다.
중학생쯤 되자 내가 두려워했던 그 남자들과 같은 교실에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고 무서웠다.
하지만 평온한 매일을 보내는 사이 또래 남자들은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그 남자는 계속 폭력을 휘둘렀었다.
사실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 또래 남자들보다는 그 남자 쪽이 훨씬 더 무서웠으니까
또래 남자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다가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연애는 소설 속의 것으로 충분했다.
잘생기고 능력 좋고 내 여자를 소중하게 여기는 남자.
무엇보다 실체가 없다.
그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남자였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보게 된 것은 고3 때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항상 어둡고 몸에서 냄새가 나는 아이였다.
가스비가 아깝다고 주에 한 번 겨우 씻을 정도였으니까.
머리도 제대로 다듬지 못해 엉망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남자아이들은 비웃지조차 못했다.
나는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려고 하니 내 용모가 문제였다.
“그, 최소한 단정하게라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나를 채용할 수 없다며 미안하다고 하던 사장님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제야 나는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나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매일 차가운 물로 씻었다.
샴푸도 제대로 없어서 비누로 씻곤 했다.
그래도 최소한 사람의 몰골은 되었다.
머리를 다듬었다.
싸구려지만 단정한 옷을 입었다.
그러자 그리 어렵지 않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말하며 조금 조소했다.
나는 달라진 게 없는데.
겉모습이 달라진 것만으로 왜 대우가 달라지는 것일까.
그들은 내 내면을, 내 능력을 보기는 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활이 조금 나아지면서 좀 더 나은 치장을 했다.
샴푸를 사용하고 여전히 싸구려긴 하나 다양한 옷을 샀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돈을 벌어오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월급의 절반은 항상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명목은 내 등록금이라는 것이었지만 알고 있었다.
그 돈이 내게 돌아올 일은 없다는 걸.
그때의 나는 반이라도 남겨주는 것에 감사했다.
그때부터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특히 주변의 남자아이들.
처음에는 내가 있는지도 몰랐던 남자들이 달라 붙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설마 내가 그런 대상으로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예쁜 것도 아니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성격이 좋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접근하는 이유는 그저 내 성적의 비밀을 캐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접근해오는 남자들이 많기도 했었고.
“···내가?”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별일 없이 지나갔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게 고3의 여름 때부터였으니 무슨 일이 생기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대학교 때는 달랐다.
내가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심지어 그 대상은 나와 몇 마디 나눠본 적도 없는 남자 선배였다.
아니, 정정한다.
정확하게는 나는 몇 마디 말하지 않았다.
그쪽에서는 더럽게 많이 이야기했지만.
문자에 톡에···.
짜증 날 정도여서 나중에는 그냥 차단해버렸다.
그런데 뭘 사귄다는 걸까.
소문의 진원지를 찾던 나는 어이없는 사실을 알았다.
“선배.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문을 내신 거예요?”
“너 나랑 사귀잖아?”
···.
어이가 없었다.
그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것일까.
그는 마치 괴물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너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알았다며?”
“제가요?”
“그래!”
나는 그런 적 없었다.
솔직히 기억도 안 났다.
만약 그가 그런 말을 했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걸 내게 한 말이라고 인식하지 못했거나 무시하고 그냥 지나갔었을 것이다.
“그때 고개 끄덕였잖아!”
“···.”
내 말에 그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나는 더 어이가 없었다.
“저랑 사귀는 사이라고요?
저희가 데이트를 해봤나요, 아니면 평소에 문자나 톡을 하나요?
저랑 전화라도 한 적 있으세요?”
“넌 아싸니까 그런 거 싫어하는 건가 싶었지.
몇 번이나 놀러 가자고 했는데 니가 다음에, 라며.”
확실히 그가 어디 가자고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다음에, 라고 한 적은···.
없었나? 있었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설령 했다고 하더라도 아마 제대로 듣지도 않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네가 나빴네.”
주변에서 듣고 있던 다른 선배들이 그렇게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돌아보는 내게 그들이 말했다.
“아니, 마음이 없으면 딱 잘라 거절해야지.”
“왜 애매하게 다음에,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랬어?”
“너 다른 선배들 얼굴은 모르면서 얘는 알잖아.
사귀는 사이라서 아는 줄 알았는데?”
제멋대로인 소리.
내가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그 선배가 내게 호감이 있는 걸 알았다.
다만 그 호감이 남녀 간의 호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뭐랄까···.
좀 신기한 희귀종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
지금 생각해도 단언할 수 있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냥 신기해할 뿐이었다.
사귀자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저 희귀종을 컬렉션해볼까,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억이 안 나겠지.
아무리 나라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말에 그런 식으로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인사 안 하면 동기들 기합 주시겠다면서요?”
“그건 농담이었지.
설마 진담인 줄 알았어?”
거짓말이었다.
진담이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의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눈을 광기로 물들이고 그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마치 장난으로 넘기려는 듯.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안 그래도 룸메이트 때문에 주변에서 미움받던 나였다.
나 때문에 단체 기합이라도 받으면 내 대학 생활은 더 귀찮아질 게 뻔했다.
그들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귀찮은 일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그게 그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을 줄이야.
“···어쨌든 이제 확실히 아셨을 테니 이상한 소문 내는 거 그만해 주세요.”
“니가 나 차단 풀면.
너 나 차단했지?
얼마 전부터 대답이 없던데.”
그렇다.
그는 진짜로 나와 사귄다고 생각해서 그런 망언을 지껄인 게 아니었다.
내가 그를 차단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이다.
“지금 제가 차단했다고 그러신 거예요?”
“내가?
설마!”
그는 이죽였다.
그 이후로 나는 연상의 남자가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싫어졌다.
하지만 돈을 벌려면 과외 학생들의 부모님과 소통을 해야 한다.
내가 선생이라는 입장이기 때문일까.
그들은 내게 친절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남자에 대한 저항감이 사라졌다.
여차저차해서 지금은 그렇게 남자를 싫어하진 않는다.
다만 남자란 존재는 내게 썩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어렸을 때나 지금에나 내가 관심을 가졌던 남자는 오로지 가상의 남자들뿐.
그런 내가 지금은 남자에게 고백을 받아내려 아등바등하고 있다는 게 조금 우습다.
“기분이 안 좋아요?”
갑작스러운 슈피의 목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슈피를 바라보았다.
그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다 그렸어요?”
“네.
힘들었죠?”
나는 연신이를 피해 찌뿌둥한 어깨를 살짝 주물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슈피의 뒤로 돌아갔다.
“와···.”
화폭 안의 연신이는 정말로 예뻤다.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생생함.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림 특유의 아름다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말 예뻐요.”
무엇보다 따스하다.
연신이의 잠든 모습이 은은하고 따스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린 사람의 시선이 느껴진다.
얼마나 따스하게 세상을 보고 있는지.
그런 사람이 그토록 차가운 눈을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슈피의 차가운 눈동자를 떠올리며 조금 슬퍼졌다.
“···.”
슈피는 쑥스러운 듯 나를 보며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아.”
이 좋은 분위기에서 음악을 들려달라고 하면 들려줄까?
아니면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기분 나빠할까.
으음.
그래도 예술은 별로라고 단언한 카이델이 들어보라고 할 정도면
정말로 하모니카를 능숙하게 부는 거겠지···?
조금 들어보고 싶다.
“슈펠리에.”
“네, 아샤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들어줄래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요.”
으음.
그렇다는 건 안 해줄 가능성이···.
무조건 해주겠다고 약속을 받아야 하는데···.
“무조건 들어줄 거에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요.”
“할 수 있는 거면 아무리 싫은 거라도 들어줄 거에요?”
“···아샤님을 그리는 건 할 수 없다고 거절했을 텐데요···.”
아.
나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아니에요.
그거만 아니면 다 돼요?”
“···일단 들어보고···.”
“된다고 말 해줘요!”
으음.
어리광이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 든다.
연기라고 해도 이런 언행을 계속하면 점점 어리광쟁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엔 어색했는데.
사람이란 자신에게 편리한 것에는 어찌나 빨리 적응하는지···.
스스로가 조금 얄미워진다.
“대체 무엇이길래 그러세요?”
“약속해주면 말할게요.”
슈피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부탁인지 생각해보는 거겠지.
그래도 나를 그려달라는 부탁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으니 아마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
제발, 제발.
“알겠습니다.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말해주세요.
대체 무슨 부탁이에요?”
“하모니카 불어주세요.”
슈피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내가 그걸 알고 있는지 궁금하겠지.
하지만 나는 말해주지 않고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슈피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어차피 곧 알아챌 것이다.
유일하게 공통되는 나와 자신의 지인을.
“폐하께서 말씀해주셨습니까?”
거봐.
나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약속했죠?
날 그려달라는 부탁만 아니면 다 들어주겠다고.”
“···.”
슈피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 이내 슈피가 졌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됐다!”
아차.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슈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냈다.
항상 주머니에 넣어두는 건가?
“···후.”
슈피가 작게 심호흡을 하더니 하모니카를 입에 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풍부한 음색에 실려 내가 모르는 곡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쩐지 가슴이 아릴 정도의 곡이라는 것.
부드럽지만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소리다.
하지만 결코 듣기 싫진 않았다.
오히려 더 듣고 있고 싶었다.
아아.
그렇구나.
그 아이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나는 하모니카 소리에 잠겨 가만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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