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의 정석, 형제 자매는 놀랄 정도로 닮는다
꿈이었나?
그렇게 생각할 만큼 테베의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베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의 나와 테베는 초면.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뿐.
내가 테베라고 부른 건 그의 여동생이 테비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서, 라고 변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한 말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봐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샤 양!”
맑은 목소리가 아침을 몰고 들어온다.
아직 밤 안에서 헤매던 나는 그 빛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안녕하세요.”
“몸은 이제 괜찮아요?”
“···네.”
아마도.
어제 하루의 태반을 자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기 때문에 아직 기력은 없지만···.
그래도 열은 좀 내린 것 같다.
“종일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프죠?”
그녀는 묽은 스프를 내 앞에 내밀었다.
으음.
좋은 냄새 덕에 식욕이 조금 돌아왔다.
“맛있겠네요.”
“오호호, 그쵸?
내가 요리 솜씨가 좀 좋아요.”
“아, 직접 만드신 건가요···?”
귀족이 요리를?
꽤 드문 일이다.
“후후.
귀족이면 뭐 별거 있나요.
요리 좋아하면 요리 하는 거지.
그리고 우리 같은 하급귀족 집안은 그렇게 생활이 풍족하지 않거든요.
일일이 사람 고용할 여유가 없어요.”
소설 속 귀족들은 허세를 부려서라도 사람을 부리곤 했다.
뭐, 한 명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귀족이 이런 식으로 집안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생각해보니 내 병간호도 이 여동생이 했었구나.
이름이 디리, 였던가.
“손재주가 좋네요.”
“과찬의 말씀을···.
후후.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우리 집의 사람들은 다 무뚝뚝해서 그런 말 잘 안 해주거든요.”
무뚝뚝?
테베가?
흠.
그런가?
“혼자 드실 수 있겠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다 먹을 것을 신신당부하는 디리가 나가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후···.”
속이 사르르 풀린다.
나는 연달아 숟가락을 놀렸다.
맛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풍기는데 역하지 않다.
게다가 뱃속에 뭉쳐있던 차가운 무언가가 풀리는 것 같다.
순식간에 스프 한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빈 그릇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두 마음이 격하게 충돌한다.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연신이 없이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엔딩을 보면 벗어날 수 있나?
하지만 판단을 내릴 연신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연신이 힘의 잔재일까?
아니면 새로운 신이 태어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힘이 계승되었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연신이의 힘이 약해진 것은 확실하다.
혹은,
무언가가 이상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테베에게 무언가 기억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만약 힘을 계승 받은 것이 남주인공 후보들이라면 날 돌려보내 줄까?
아니, 아니···.
“그럴 리 없나.”
누군가 힘을 계승 받았다면 이전 공략 때 나 혼자 그 어둠 속에 있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여기 있는 모든 캐릭터는 그야말로 소설 속 캐릭터.
연신이의 힘을 누군가가 이어받았더라도 여기 캐릭터들은 아닐 터다.
후···.
쓸데없는 상상은 그만두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
여기서 연신이를 기다리거나,
그냥 여기서 살아가거나.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저쪽 세계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있는 걸까?
아니면···.
나 없이도 언제나 그랬듯 세상은 굴러가는 걸까.
“괜찮으십니까?”
언제 온 걸까.
문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아니, 내가 너무 생각에 깊이 빠져있었던 걸까.
“아, 좋은 아침이에요.”
입이 멋대로 아침 인사를 내뱉는다.
딱히 좋은 아침도 아닌데, 나한테는.
테베는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엷게 웃었다.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디ㄹ···, 딜레아가 요리를 꽤 잘합니다.”
거봐.
안 무뚝뚝하잖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 피식 웃었다.
“그러네요.
정말 맛있었어요.”
“기력을 좀 찾으시고 몸 상태가 안정되면···.
성으로 모시고 가드리겠습니다.”
성.
등줄기가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싫다.
가고 싶지 않다.
그곳으로는.
새삼 깨달았다.
별별 꼴을 다 당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연신이가 옆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연신이가 있어서 나는 이 모든 걸 소설,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 가상의 세계를 만든 건 연신이라고.
하지만 연신이가 없는 이 순간 깨닫게 된다.
이곳이 지금의 나에겐 현실이라는 것을.
물론 연신이가 있었을 때도 현실이긴 했지만···.
뭐랄까.
어차피 곧 떠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까.
좀 더 버틸 수 있었는데.
“성은, 성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요···.”
나도 모르게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문득 기억이 떠오른다.
피바다.
피바다.
피바다.
그 안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들이 머릿속을 물들인다.
“몸을 추스르게 되면 여기서 나갈 테니···.”
“아샤님은.”
아.
테베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나도 역시 놀라서 테베를 바라본다.
“로이스터 경은, 역시 기억이 남아있는 건가요?”
“···.”
테베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절 기억하고 있었나요?”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제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당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숲속에서 당신과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아.
속성의 힘이 발동됐을 때, 를 말하는 건가.
“그때 깨달았습니다.
저는 당신을 알고 있다는 것을.”
“···.
경은 제게 아무런 감정도 없나요?”
테베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건 거짓말이겠죠.
저에게는 당신을 사랑했을 때의 기억이 있으니까요.”
했을 때.
라는 건···.
망할.
망했다.
내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스몄다.
속성의 힘이 사라졌다.
내게는 이제 속성의 힘이 없다.
대신 나와 눈이 마주치면 지금까지 거쳐온 회귀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테베는 기억하고 있다는 걸까.
그 죽음의 일을.
···.
떠올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새삼 그에게 미안해졌다.
“미안해요.”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내가 했던 사과의 의미를 테베는 알겠구나.
“괜찮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미안해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 때문에···.”
테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 주먹 쥔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투박한 손이 따스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했던, 그로 인해 어떤 결과를 불러들였던 그건 아샤님과는 상관없습니다.”
마치 진심이 흘러드는 것 같다.
하지만···.
“로이스터 경이 가졌던 감정은 모두 가짜에요.
어떤 감정이건 간에···.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요.
잘 생각해 봐요.
평소의 당신이라면 날 사랑했겠어요?”
얼음 인형 같던 그가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은 아마···.
나로 인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원작의 원작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의 여자는 아니다.
절대 나는 아니다.
“그 모든 건 가짜에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느끼는 감정도요.”
그건 지난 감정의 잔재다.
나도 알고 있다.
한 번 느꼈던 감정의 잔재는 끈질겨서,
그걸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볼 때마다 다시 떠올라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니 테베가 지금 느끼고 있는 모든 감정 또한 잔재에 불과하다.
속성의 힘이 사라진 지금, 특히나.
“나를 볼 때마다 당신에겐 그 감정이 떠오를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여기 있어선 안 된다.
그렇게 말하려는데 테베가 내 손을 꽉 쥐었다.
“저는···.”
씹어 삼키는 듯한 억눌린 목소리.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샤님을 처음 봤던 그 순간을.”
아련한 듯, 비통한 듯.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일렁인다.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그 순간이 제게 어떤 것이었는지.
당신을 처음 봤던 나를 질투해버릴 정도의 감정이었습니다.”
테베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하지만 여전히 내 손은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의 감정이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아샤님.
제게 있어 당신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합니다.
그 이후에 당신을 지켜본 모든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요구하던 그 순간조차도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테베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마치 무언가를 움켜쥐듯 주먹 쥐었다.
“이 감정의 계기가 설령 거짓이었다고 하더라도···.
제 감정이 거짓이라곤 말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제 가슴은 정말···.”
아파 보였다.
살짝 찡그린 얼굴이.
억눌린 목소리가.
그의 고백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감정은 여전히 거짓이었다.
계기가 거짓이더라도 감정은 거짓이 아니다?
웃기는 소리.
계기가 거짓이라면, 감정도 거짓이다.
심지어 내 속성의 힘은 계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감정을 만드는 것이지.
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말이 어떤 의미인지.
“···미안해요.”
테베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
지금,
정말로 테베는 내 사과의 의미를 잘못 알아들었다.
테베의 감정을 거짓으로 치부한 게 미안한 게 아닌데.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삼켜야만 했다.
*********
“와···.”
작은 목소리에 놀라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질 않으니···.
하는 거라곤 거의 자는 것밖에 없게 돼버렸다.
사람으로서 좀 그런데, 이런 건.
“···.”
“검은 머리···.”
슬쩍 고개를 돌리니 침대 바로 옆에 작은 소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금색 머리카락.
에메랄드보다 더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마치 테베를 여성스럽게 만들어놓으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앳되다.
어쩌면 어릴 때의 테베는 정말 이런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
“로이스터 남작가의 셀마리안이라고 합니다.”
작은 소녀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제 딴엔 어른스럽게 행동한 거겠지만···.
귀엽다.
“셀마리안··· 양?”
“마리라고 불러주세요.”
마리는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디리가 무뚝뚝하다고 한 가족 중에는 마리도 들어가는 걸까.
이토록 귀엽게 미소짓는데.
“마리.
제게 뭔가 용건이 있나요?”
“···음.
죄송해요.”
엥?
갑자기?
“뭐가요···?”
“언니, 오빠는 검은 머리 언니가 쉬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마리는 언니가 너무 궁금해서 찾아와 버렸어요.”
···.
아.
검은 머리가 신경 쓰였던 건가.
“그랬군요···.
괜찮아요, 마리.
나는 마리를 만나서 기뻤거든요.”
진심이었다.
보지도 못한 테베의 어린 시절을 본 것 같아 조금 좋았다.
나는 마리에게 살짝 웃어 보이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내 손짓에 하늘거렸다.
“검은 머리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아샤, 라고 불러요.”
“아샤!
아샤 언니, 다음에 또 만나러 와도 돼요?”
“물론이죠.”
군식구는 나다.
마리가 보러 온다면야···.
내게 거부권은 없을 것이다.
“고마워요, 아샤 언니!”
마리는 내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마리?”
“아, 오빠!”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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