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무뚝뚝 남주는 여주에게만 달콤하다
“제 감정의 계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이미 이전의 제가 죽을 만큼 고민했습니다.”
살짝 목소리가 갈라진다.
테베는 콜록, 하고 기침을 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풀어 헤쳐진 가슴팍에 나는 순간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테베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폐하께서 아샤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미녀가 폐하의 마음을 열려 했지만, 그 누구도 열지 못했습니다.
그 차가운 눈동자를, 왕의 얼굴을 녹여낸 여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샤님을 바라보는 폐하의 얼굴은···.”
테베가 아직 열기가 남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모르겠다.
저 눈동자는 타다 남은 모닥불인 걸까.
아니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난롯불인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막 피어오르는 불꽃일까.
중요한 건,
그것의 계기가 거짓이라는 것.
테베는 왜 모르는 걸까.
진실한 계기에서 생겨난 감정이 아니라면, 그건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소설을 보며 감정 이입을 하면서 느끼는,
그냥 타인의 감정에 극단적으로 동조한 그런 감정인 게 아닐까.
“오랫동안 비를 들이지 않으시던 폐하께서 그런 반응을 보인 여성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실은 나라의 경사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당신에게 저는 가져선 안 될 감정을 가져버렸습니다.”
테베의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평소에 단정하던 자신의 의복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본 테베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담담한 것처럼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하지만 나는 보았다.
새하얀 얼굴이 엷게 달아오른 것을.
테베는 모두 그대로다.
그리고 나와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나와는 다른 각도로 본,
이 소설 속에서 본 모든 일을.
“내가 마녀라고 생각했죠?”
“아뇨.”
테베는 단언했다.
붉게 물든 얼굴은 여전했지만, 그 눈동자는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신은 절대 마녀가 아니라고.”
하긴.
그때의 테베는 모든 걸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거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마녀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폐하와 제가 동시에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건,
어쩌면 있을 수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폐하는 당신을 만나서 변해갔고,
저는 폐하의 명을 거역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습니다.”
테베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마치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하지만 동생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샤님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그 아련한 웃음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알 것 같다며 웃어주시던 당신을.
그날, 저는 당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나는 테베의 손을 떼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 위에 손을 겹치자 왠지 모르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아졌다.
왜인지 모르겠다.
부드러운 눈빛 때문일까.
아니면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향기 때문일까.
“미쳐가는 폐하를 바라보면서도 저는 당신을 걱정했습니다.
그 사제와 함께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당신의 무사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테베의 눈이 일그러졌다.
고통으로, 괴로움으로.
그는 이미 지금의 자신을 잊은 것일까.
남은 것은, 나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겪고 수많은 나를 만나온 테베뿐인 걸까.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죽는다는 것은,
제게 있어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불타오른 그 날 세상은 끝났습니다.”
테베의 두 손이 내 뺨을 어루만진다.
마치 내가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게.
“동시에 저는 기억합니다.
당신을 폐하에게서 빼앗아 달아난 그 날의 일을.
당신을 두고 떠나야만 했던 그 날의 저를.”
나는 테베의 손에 겹쳤던 내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만히 테베의 말을 들었다.
“당신을 폐하에게서 앗아올 때까지 저는 정말,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항상 고민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이 감정의 시작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의 저는 알 것 같습니다.”
테베의 손이 멀어진다.
나는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아.
아니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다.
테베의 감정이다.
테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감정이 이끌렸을 뿐이다.
내게,
그런 기특한 감정이 있을 리 없다.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의 사랑스러운 점은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테베가 마치 소년처럼 웃었다.
싱그럽게, 또한 부드럽게.
마치 첫사랑의 기억을 가슴에 갈무리하는 소년처럼.
“당신의 그 눈동자가 좋습니다.
짙은 커피 향이 나는 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저는 제 마음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 머리카락이 좋습니다.
밤하늘보다도 더 깊은 그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면,
제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고 또한 안식을 얻습니다.”
테베의 시선이 목소리와 함께 움직인다.
내 눈동자에서 내 머리카락으로.
닿을 리 없는 시선이 마치 실제로 닿아있는 기분이 들어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간지러움을 느꼈다.
“당신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좋습니다.
마치 소녀처럼 맑고 투명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제 마음 역시 소년 때로 돌아가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테베의 시선이 다시 내 눈동자로 향했다.
그 녹색 눈동자가 내 안을 파헤친다.
내 마음속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당신의 그 상냥함이 좋습니다.
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으면서도 당신은 언제나 상냥했습니다.
아니,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은 남을 상처입힐 때, 자신도 상처 입었습니다.
당신의 어둠이 좋습니다.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주 가끔 흘러나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제가 그 어둠 속에 사는 생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제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을 품으면서도
그 어둠을 눈 속에 꼭꼭 숨겨놓고 꺼내지 않는
당신의 마음이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싫다.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
가슴이 울렁인다.
눈이 뜨겁다.
내게는 낯선 감정이다.
내게는 싫은 감정이다.
그럴 터였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테베의 눈동자를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종잡을 수 없음이 좋습니다.
저의 좁은 생각으로는 감히 다 잴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생각은 넓고 크고 새로웠습니다.
그런 당신에게서 유일하게 좋아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가슴이 뜨끔거린다.
불이 난 것 같다.
칼에 찔리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끌려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었다간 심장이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아니, 뱃속까지 모조리.
“감히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이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인데.
당신은 종종 당신을 던져버리곤 했습니다.
마치 당신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게 저는 너무나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그런 당신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그런 당신께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는 것이.”
머리까지 울렁인다.
나는 테베의 말을 막고 싶었다.
들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들으면···.
“그러니까 당신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다 이뤘으면 좋겠어요.
아샤.”
아아.
결국, 나는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테베는···.
그런 나를 가만히 끌어안아 주었다.
*********
한참을 울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나는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꾹꾹 눌렀다.
그 손을 살며시 테베가 옆으로 치우고 내 눈가를 어루만졌다.
“이제 막 만지는 거예요?
처음엔 팔도 못 잡아서 목덜미를 잡더니.”
내 말에 테베가 웃음을 흘렸다.
원체 목소리가 맑아서인지 정말로 방울이 살랑이는 소리가 났다.
“그때의 당신은 정말로 귀여웠습니다.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는데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저도 모르게 계속 당신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으윽.
닭살.
소름.
나는 울렁이는 가슴을 속이려 가볍게 몸을 떨었다.
“로이스터가 이렇게 닭살 돋는 성격인 줄 몰랐어요.”
“다샬?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저도 제가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테베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웃음이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저는 항상 놀랍니다.
새로운 저를, 새로운 당신을 발견하게 되니까요.
처음엔 놀라고 낯설었지만, 지금은 그게 나쁘지 않습니다.”
으으.
작가 미친 거 아냐?
진 남주인공도 아닌 테베한테 왜 이런 기능을 탑재시켜 놓은 거야.
사람을 닭으로 만들어 잡아먹을 생각인가.
게다가 평소에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테베이기에 그 갭이 더 크다.
이 울렁거림은 그 갭 때문임이 틀림없다.
“나한텐 나빠요.”
“당신께 나쁘다면 하지 않겠습니다.”
웃던 테베가 순간 멈칫, 했다.
그러더니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정정해도 되겠습니까?”
“뭘요?”
“당신께 나쁘다면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샤가 자신의 좋은 점을 알 수 있도록 계속 이야기할 겁니다.”
···.
그게 뭐야.
결론은 그냥 한다는 거잖아.
“내 좋은 점은···.”
“이미 잔뜩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시간 동안 당신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
설마.
나는 불현듯 든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혹시···.
테베는 내 엔딩 조건을 알고 있나?
고백을 받아내는 것이 엔딩 조건이라는 걸?
그래서 일부러 직접 적으로 내게 마음을 고백하지 않고 빙빙 돌려 말하고 있는 건가?
“로이스터, 혹시···.”
“···.”
테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단정한 옷매무새로, 언제나처럼 단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
하지만 나는 마치 대답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틀림없이.
테베는 알고 있다.
내게 고백하면 나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걸.
그런가.
테베는 처음부터 말하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장작불도, 모닥불도, 불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테베의 마음은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건 정말 테베의 감정일까?
이전의 테베들이 느낀 감정을,
지금의 테베에게 강요했을 뿐인 건 아닌가?
쌓이고 쌓인 경험들이 날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만든 건 아닌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는 거지?
나는 엔딩을 보지 않을 것이다.
연신이가 올 때까지 지금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니까.
테베는 그저 계속 내 옆에 있을 것이고,
나는 그런 테베를···.
“···.”
나는,
그런 테베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복잡한 눈으로 테베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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