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남주인공은 재능충
눈에 익은 음식물.
으음.
카이델과 첫 식사마다 나왔던 메뉴들이다.
그렇다는 건 메뉴 지시는 카이델이 하는 건가.
이게 가장 나에게 대접하고 싶은 메뉴인 거겠지.
맛은 있지만, 슬슬 질린다.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음식을 뒤적이고 있었다.
카이델이 뭔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쉽게 말을 꺼내질 못한다.
뭐, 할 말이야 뻔하지.
뭔가 불만이 있냐고 물어보고 싶을 것이다.
다만 내 대답이 두려워서 물어보지 못할 뿐.
“폐하.”
“으, 으음.
말하라.”
“매운 음식이 먹고 싶습니다.”
사실 밥을 먹고 싶다.
빵은 이제 질린다.
한국인은 밥심인데.
“···매운 음식?”
“네.
그리고 쌀밥도요.
쌀은 있나요?”
“있기는 있다만 성에는 없을 것이다.”
“왜요?”
내 말에 카이델이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옆에서 음식 시중을 들어주던 데바인이 대신 대답했다.
“밀을 먹는다는 것은 부의 상징입니다.
가장 넓은 재배면적을 차지하는 쌀이 아니라 같은 면적에서
훨씬 더 적은 양밖에 수확할 수 없는 밀을 먹는 것으로 나라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죠.
그래서 성에는 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라의 위상을 드러내는 거랑 쌀을 안 먹는 게 무슨 상관인데요?
오히려 쌀이 없으면 이 나라는 쌀도 없나? 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당연히 나는 지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누가 봐도 그렇지.
나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저는 쌀밥을 주식으로 먹던 사람이라 빵 솔직히 질려요.
이 성에 와서 몇 주째 빵만 먹었잖아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벌써 몇 달째다.
으으.
테베랑 나가서 먹었던 볶음밥 먹고 싶다···.
“···그랬군.
그대가 말했다면 쌀을 준비했을 텐데.
다음에는 쌀을 꼭 준비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근데 오늘은 왜 부르신 거예요?”
다시 한번 카이델의 입이 멈췄다.
뭐, 왜 불렀겠어.
싸가지 없고 이해는 안 가는데 이상하게 끌리는 거겠지.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싶었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아무래도 확인 쪽에 가깝지 않을까?
“그···.
그대가 성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오오.
적절한 이유.
어떻게든 짜내는구나.
“저요?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데바인한테서 듣고 있는 거 아니셨어요?”
“그, 뭔가 불편사항 같은 건 없는지 묻기 위해···.”
“불편사항···.
그런 거 없어요.
굳이 꼽자면 음식이 빵만 나온다는 거?
그리고 옷이 너무 불편한 거?”
아.
뭐지.
불량소녀인가.
으음.
너무 예의 없는 것도 좀 그런데.
말괄량이와 예의 없음의 균형이 어렵네.
“폐하가 잘 해주셔서 크게 어려운 건 없어요.”
나는 생글 웃었다.
마지막 한 마디는 서비스인 걸로 치자.
“그··· 그렇군.
그대가 잘 지낸다면 다행이네.”
카이델은 엷게 웃고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조금 지치는 모양이었다.
후후.
이번 공략이 끝날 때까지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질리면 질릴수록 날 찾을 확률이 줄어들 테니까.
“요즘 슈···펠리에에게 자주 간다고 하더군.”
“슈펠리에?
아, 그 정원사!”
나는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슈펠리에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으음.
뭐, 그렇죠?
옆에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더라고요.
낯선 곳에서 조금 긴장됐었는데···.”
쨍강.
카이델이 나이프를 손에 들다가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
아니, 은근히 상처받네.
“왜 그러세요, 폐하?”
“아니, 아니다···.
그렇군.
슈펠리에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지.
그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있는가?”
“음악이요?”
헐.
미술에 도예에 공예에 음악까지?
뭐야, 무서워.
천재 예술가 캐릭터인가?
“아뇨, 들어본 적 없어요.”
“그렇군.
나중에 하모니카를 연주해달라고 해보게.”
으음.
질투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친한 사이인 것 같다.
물어볼까?
아니면 모른 척 넘길까.
···.
역시 여기서는 물어봐야겠지?
“폐하와 슈펠리에는 어떤 사이인가요?”
“어떤··· 사이냐니?”
“그 오두막에는 악기도 없던데 알고 계시길래요.
폐하라고 해도 그런 걸 다 이야기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
카이델은 잠시 머뭇거렸다.
집안 사정에 대한 것도 이야기해야 할 테니 말해도 되나 싶은 거겠지.
하지만 어차피 말해주게 될 텐데, 뭐.
조금 기다려 보자.
“···그와는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다.”
역시.
소꿉···, 아니 이 경우에는 불···.
아니 로맨스 소설에서 이건 좀 아닌가?
음.
어릴 때부터의 친구.
그렇게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알아도 그런 것까지 이야기해주나요?
이 나라는 예술에 대한 걸 천대한다고 하던데.
폐하께 안 좋은 소리라도 들으면 어쩌려고요?”
“···확실히.
나도 예술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라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목소리.
이래서 카이델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었구나.
“다만 그와는 조금···.”
“20살 때부터 집을 나와서 살았다던데,
어릴 때부터 폐하와 알고 지냈다는 건 슈펠리에는 원래 귀족이었나요?”
“···그런 것도 이야기하던가?”
아.
조금 스위치 눌렀나?
아니, 아직은 되돌릴 수 있다.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요.
예술이 이 나라에서 천대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어요.”
“그랬나.”
“그래서 제 나름대로 추리해본 거예요.
저, 그런 거 특기거든요.
폐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맞힐 수 있을걸요?”
나는 짐짓 생각에 빠진 척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카이델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긴.
이번의 카이델은 나에게 익숙지 않으니까 더 그렇겠지.
말없이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면 황당할 일도 없고.
“폐하는 여성에게 익숙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그리고 나라를 굉장히 많이 생각하는 임금님일 거 같아요.
으음···.
꽃은··· 왠지 붉은색 꽃을 좋아할 것 같네요!”
뭐, 더 주절주절 이야기할 순 있지만 의심받고 싶진 않다.
이 정도로 끝내자.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지금도 제가 물끄러미 쳐다보면 얼굴이 붉어지시니까요.
여성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증거죠!”
애초에 내 속성 때문에 남주인공 후보면 다 그렇게 되지만.
뭐, 카이델이 여자에 익숙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제가 잘 지내나 신경 쓰이시면서도 절 보러 오는데 몇 주나 걸리셨잖아요?
그렇다는 건 바쁘셨다는 거겠죠?
임금님이 바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나랏일 하느라 바쁘셨겠죠.”
나는 동의를 구하는 듯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카이델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색 꽃은 그냥 찍은 건데요···.
왠지 지금 폐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붉은색 꽃이 생각나서요.”
하하, 하고 웃는다.
물론 전에 들었기 때문에 아는 거지만.
굳이 그런 걸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다소 허점을 보여 줘야 어쩌다 때려 맞췄구나, 하는 느낌을 줄 수 있으니까.
“그렇군···.
그대가 내 마음이라도 읽은 것인가 생각했다.”
“하하,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슈피는 그런 것 같지만.
나는 헛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자 카이델이 엷게 웃으며 다시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슈펠리에와 가까이 지내다오.”
“왜요?”
“외로운 자다.
그는.”
그렇겠지···.
성안의 사람들은 슈피가 귀족이었다는 걸 알 것이다.
그러니 일하는 자들은 쉽게 다가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귀족들이 지금의 슈피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아버지가 어느 정도의 귀족인지는 모르지만,
귀족의 자제가 정원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귀족들 사이에선 이래저래 말이 돌았을 것이다.
그 전에 슈피와 친한 사이였다고 하더라도 쉬이 다가갈 순 없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두려워서.
애초에 귀족들 사이에 진정한 우정이 존재하는 건 주인공의 주변뿐이다.
대부분 귀족은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기묘한 관계이니까.
“폐하는요?”
“나는 아무래도 그와 자주 만날 수 없으니 말이다.”
카이델이 엷게 웃었다.
슈피에게 보여주던 웃음이다.
어지간히 친했던 걸까.
왕자와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려면···.
으음.
“뭐, 폐하께 부탁받아서는 아니지만···.
최대한 그래 보겠습니다.”
*********
“그런 고로 앞으로 더 자주 여기에 오도록 하겠습니다.”
슈피는 드물게도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어이가 없다는 표정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겠지.
1주일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드나들었다.
그래놓고 더 자주 오겠다니.
하루에 두세 번 들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다.
뭐, 나도 잘 알고는 있지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요컨대 허가를 구하고 있는 거다.
“괜찮죠?”
지금까지는 내가 일방적으로 드나들었다.
굳이 따지면 주거침입에 가깝다.
왕의 손님이라 뭐라 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뭐, 게다가 본인도 내게 마음이 있을 것이고.
하지만 계속 그래서야 곤란하다.
내가 고백해도 되면 모를까 나는 고백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슬슬 슈피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러려면 우선은 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게 우선이다.
솔직히 슈피는 읽기 힘들어서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겠다.
나를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이를 부정하는 단계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미 체념을 한 것인지.
그러니 살짝 떠보는 것도 있다.
지금 내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아샤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오시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는 웃으며 피한다.
으음.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와도 된다는 허가가 필요하다.
솔직히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도 좋다.
“내가 원하면?
그럼 슈펠리에는 내가 안 왔으면 좋겠지만 내가 오고 싶어서 오는 거라
어쩔 수 없이 받아준다는 거네요?”
도망가는 길을 차단한다.
슈피가 난감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당혹으로 물든 금빛 눈동자에 마음이 약해진다.
으음.
아니, 약해지면 안 되지.
겨우 이 정도로.
“어떤 거예요?”
나는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으아.
거의 닿을 뻔했다.
이런 데서 내 첫 뽀뽀를 뺏길 수는 없지.
나는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살짝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한다.
드물게도 슈피의 목이 살짝 붉어진 게 보였다.
특이하네.
귀도 얼굴도 아니고 목이 빨개지는 타입···.
이러다가 나중에 손이 빨개지는 타입이 나오는 게 아닐까.
“대답은요!”
“···저, 저도 아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으음.
억지로 끌어낸 대답이긴 하지만 꽤 만족스럽다.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으니까.
사실 아직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원사를···?
남주인공으로 삼았을까?
같은 느낌.
하지만 상급 귀족의 자제에 사연 있는 천재 예술가 캐릭터.
그 정도면 진 남주인공이 되기엔 꽤 괜찮은 조건이다.
“진짜요?”
나는 활짝 웃었다.
입가가 당긴다.
이런 표정은 거의 해본 적 없으니까 어색하다.
그래도 슈피에게 가까이 다가온 이상 내 속내를 보이면 곤란하다.
그러니 최대한 예쁘게 보여서 현혹해야 한다.
예상대로 슈피의 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과 목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얼굴까지 조금 빨개졌다.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척 몸을 뒤로 당겼다.
“오늘도 얘 그릴 거죠?”
연신이는 내 어깨에서 잠들어 있었다.
내 몸이 흔들리건 말건 슈피랑 무슨 일이 있건 말건 평화로운 모습이다.
떨어지지 않게 발톱을 내 어깨의 옷감에 걸어두고.
치밀한 것 같으니.
“···잠들었군요.”
슈피가 거절의 말을 담으려 한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어깨에서 자고 있으면···.
“그럼 오늘은 이대로 그릴래요?”
“네?”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른다.
연신이를 보면서 자동으로 나도 보게 되니, 나를 의식하게 되겠지?
그럼 나로서는 오히려 옆에서 그림 그리는 걸 보고만 있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나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더 좋고.
나는 조금 사악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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