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정석, 만민을 평등하게 지키는 자
쉬엄쉬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계속 뒤를 신경 쓰게 되었다.
등 뒤의 인기척이.
뒤를 돌아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아마 틀림없이 테베겠지.
“···.”
크고 넓은 바위를 발견해 그 위에 드러누웠다.
힘들다.
발도 아프고, 어지럽고.
그나마 다행인 건 봄 날씨라 햇살이 강하지 않다는 거려나.
일사병에 걸릴 일은 없으니까.
그래도 좀 춥다.
숲은.
냉기가 가득하다.
“후···.”
몸을 살짝 웅크리고 내가 걸어온 길 쪽을 보았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테베도 멈춰서 있는 걸까.
“···.”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려 온다.
아.
감기려나.
그동안은 의외로 따스하고 안락하게 지냈기 때문에 몸이 나태해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겨우 하루 밖에서 잤다고 감기 기운이 돌다니.
하.
뭐, 이러고 있어 봐야 의미 없다.
빨리 가자.
잘못하면 오늘도 숲에서 자야 할지도 모른다.
“읏···.”
비틀, 하고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자 숲 안쪽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테베인가?
나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넣었다.
그리고 꼿꼿하게 섰다.
테베의 손을 빌려선 안 된다.
카이델의 비호가 없는 상태에서 테베의 도움을 받으면···.
테베까지 마녀의 하수인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상급 귀족의 후계자 같은 거면 몰라도···.
응, 절대 안 된다.
나는 숲속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풀 밟는 소리.
아직 발은 멀쩡하다.
작가의 배려일까.
은화가 다치지 않을 수 있도록.
···.
그런 배려 할 거면 이런 거지 같은 소설 속에 끌어들이질 말았어야지.
하긴, 뭐···.
은화도 결국 소설 속 캐릭터에 불과하지만.
그러고 보면···.
나도 지금은 어느 소설의 캐릭터에 불과하려나.
하, 하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어···.
머리가 아프니 별생각을 다 하네, 진짜.
“콜록.”
으으.
진짜 감기에 걸리려나 보다.
몸이 으슬거리는데다 기침도 나오니···.
테베네 별장에 닿을 때까지는 괜찮아야 할 텐데.
걸어서 세 시간이랬나.
지금 나는 얼마나 걸었지?
시간 감각이 둔해졌다.
못해도 두 시간 이상은 걸었을 테지만···.
“콜록, 콜록콜록.”
흠.
서두르자.
열이 오르면 큰일이다.
어릴 때의 나는 자주 열이 오르곤 했다.
뭐, 당연한 일이다.
방치되어 있는, 학대받는 아이의 건강상태란 건 항상 그런 법이니까.
게다가 위생환경도 좋지 않았으니···.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1년 365일 중 320일쯤 감기에 걸려 있었을 정도였다.
근데 문제는 감기에 걸리면 꼭 열이 오른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날 제대로 돌볼 리 만무했기 때문에 열은 쉬이 내리질 않았다.
그런 나를 치료해준 것은 학교의 양호실이었다.
“아사야, 혹시 집에서 무슨 일 있니?”
가느다란 손가락.
보드라운 향기.
선생님은 내가 접한 사람 중 가장 아름답고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요.”
“그럼 왜 이렇게 감기가 안 떨어지는 거야···.
떨어지긴커녕 점점 더 심해지고 있잖아.
병원에는 가 봤니?”
나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불행이 너무 당연해서,
거기서 벗어나려 애써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어린아이였으니까.
“아사야···.”
대답 없는 나를 붙들고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또래 사이에서는 냄새가 난다며 따돌려지던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따스한데 아팠다.
가슴이 마치 바늘이나 날카로운 것으로 마구 찌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이제 가도 되나요?”
나는 그 따스한 마음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 낯설고 불쾌한 감각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게서 도망쳤다.
그 후로도 몇 번 약을 받으러 갈 때마다 그녀는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내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선생님을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한다.
“아, 망했···.”
헛소리하는 걸 보니 열이 오르는 모양이다.
그렇게 자각한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리고 그대로 내 의식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머리가 아프다.
지끈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열이 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
낯선 천장이다.
내 방이 아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항상 있던 내 방이 아닌 건 확실하다.
연신이가 죽고,
나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었고,
그게 싫어 도망쳤다.
카이델을 만나지조차 않았고,
테베를 만났지만, 그에게 더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또 도망쳤다.
아아···.
나는 결국 어렸을 때나 지금에나 도망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일까.
“···아.”
몸을 일으키자 이마에서 흰 수건이 툭, 떨어졌다.
위쪽은 차갑고, 아래쪽은 묘한 열을 품고 있다.
누가?
이런걸?
뻔하다.
“···테베···.”
멍한 눈동자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만다행히도 테베는 옆에 없었다.
···.
그러고 보니, 여긴···.
예전, 테베의 엔딩롤에서 봤던 것 같다.
사랑의 도피를 한 곳···.
그게 여기였나.
어리석다.
집안의 별장이라니.
카이델이 집착을 거두지 않았다면 아마 하루도 안 되어 들켰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카이델이 사람을 보내지 않아 무사할 수 있었던 거겠지.
아니면 어쩌면···.
그 둘은,
엔딩 롤 속의 나와 테베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짧은 행복을 누리고 싶었을 뿐인지도···.
“일어나셨네요!”
···.
······.
누구?
나는 멍하니 방에 들어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딘지,
좀 전에 꾼 꿈의 선생님과 닮아 있었다.
아니, 닮은 건 분위기뿐이다.
생긴 건 테베와 똑 닮았다.
약간 어린 테베라고 해야 할까.
테베의 여동생인가?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그녀는 헤실헤실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
부담스럽다.
시선이.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마주 보자, 여자는 갑자기 꺄르르 웃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계속 쳐다봐서 부담스러웠죠?
그냥 신기해서 그랬어요.”
신기해?
뭐가?
나는 당신이 더 신기한 거 같은데요.
“저 목석이 웬 여자를 안고 와서는 어쩔 줄 몰라하잖아요.
게다가 그게 전설에나 나올 법한 검은 머리카락의 미녀라니!
너무 로맨틱하지 않나요?”
로맨틱이 다 얼어 죽었나.
하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기 있을 순 없다.
나를 안고 왔다는 건 누군가는 나를 보았다는 뜻.
즉, 테베가 검은 머리의 마녀를 숨겼다는 걸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소설이라면 특히 더.
나가야 한다.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민폐를 끼칠 순 없습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려고요?”
“···.”
갈 곳은 없다.
연신이도 없으니까.
원래 세계에 돌아갈 수도,
이 세계에 남아있을 수도 없다.
하지만 이곳도 내가 있을 곳은 아니다.
아니다.
“테비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계셔 주세요.
네?
저를 봐서라도요.”
테비?
테베를 말하는 건가?
아니, 뭐, 그건 둘째치고···.
우리 초면인데 왜 당신을 봐서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목 끝까지 치달았던 말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표정에 선생님의 표정이 겹쳐졌다.
선생님이 이 여자처럼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아마 그때의 나는 마음을 열 수 있었을까?
···.
아니···.
아니겠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여기 있을 수 없어요.”
나는 거짓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들이 친절하면 친절할수록,
나를 생각해주면 생각해줄수록 여기엔 있을 수 없어진다.
그들이 소중할수록···.
“그 기사님에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녀는 물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매달리듯 나를 바라보았다.
녹색 눈동자에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 하지만···.
“정말로 감사했어요.”
나는 그녀의 눈빛을 뿌리쳤다.
그게 그녀를 위한 일이니까.
하지만···.
“일어나셨습니까.”
아.
이런.
늦었다.
그녀에게 막혀 있는 사이, 테베가 와버렸다.
“오빠!”
역시.
여동생이었나보다.
“고마워, 디리.
나 대신 이 분의 옆을 지켜줘서.”
녹색 눈동자의 미소녀는 방긋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그리고 발걸음도 가볍게 나가버렸다.
남은 것은 나와, 테베뿐.
“더 누워계셔야 합니다.
아직 열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기사님.
그렇게 모진 말까지 했는데···.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저는 여기 있을 수 없습니다.”
테베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테베는 하얀색 단정한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제복을 입지 않은 테베는 처음 본다.
항상 기사 제복을 집고 있었는데.
단정한 제복을 입었을 때 풍기던 얼음 인형 같던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져 있다.
아니, 표정이 그래서일까.
어쨌거나 뭔가 좀 더 생기있는 얼굴이다.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
매번 이름을 문답하는 것도 지친다.
귀찮고.
“아샤라고 부르세요.”
“아샤··· 양.”
카이델의 손님이 아닌 나는 양 취급인가.
뭐, 하긴 당연하다.
테베는 귀족이고 나는 평민···, 이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니···.
아샤, 라고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배려겠지.
“아샤 양을 여기 모셔올 때, 부득이 몸에 손을 댄 점 사과드립니다.”
···.
에?
지금 그런 이야기 할 타이밍이···.
나는 황당해서 멍하니 테베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베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제 망토로 아샤님을 덮어드렸으니 아무도 아샤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처음 생각대로 이곳에 계셔 주세요.”
윽.
뭐, 유도하긴 했었지, 테베가.
나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오려고 했었고.
“···.”
걱정거리 하나가 줄었다면···.
굳이 숲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으려나.
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폐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모두가 테베의 가문에서 나오는 것.
즉, 금전적인 부담을 끼치게 된다.
“역시···.”
여기 있을 순 없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테베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다소 강제적인 어조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밤 날씨가 꽤 춥습니다.
여린 여인의 몸으로 밖에서 밤을 새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뼛속까지 기사 같으니.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한다.
내가 아니라도 테베는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사랑 혹은 호감이라는 모호한 것에 휘둘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자였더라도, 노인이었더라도 테베는 같은 말을 했겠지.
그는 그런 남자···, 아니, 기사니까.
“그럼 잠시만··· 신세를 지겠습니다.”
일단 내 머리카락을 어떻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먹고 살면서 연신이를 기다릴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나를 테베는 침대까지 끌고 가 밀쳤다.
아.
이런 전개에는 이제 속지 않는다.
나는 담담하게 침대에 낮은 채 테베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테베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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