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판타지의 정석, 왕과 측근을 홀리는 마녀.
···.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정말로 조심, 또 조심했다.
비싼 건 최대한 사양했고, 쓸데없는 건 다 돌려보냈다.
솔직히 나라고 사치하기 싫었던 건 아니다.
평생을 없이 살던 사람에게 갑자기 큰 부가 쥐어지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걸 억지로 억눌러 참은 이유는 단 하나.
마녀라고 불리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태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사건의 끝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결국 카이델이 원인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무도회장의 구석에서 연신이가 음식을 먹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낮에 고기요리를 먹고 난 뒤라 그런지 비실거리던 연신이가 조금 기운을 차렸다.
그래서 무도회에 나와서 이것저것 요리를 뜯어 먹고 다니던 참이었다.
확실히 무도회는 전날보다 사람이 많았다.
드문드문 사람이 있던 전날과는 달리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다니기 불편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지난번에는 이러고 있다가 카이델이 왔을 때 곧바로 건배하고 손 다치고 떠났었지만,
오늘은 카이델이 제대로 소개해주기로 마음먹은 듯 나를 홀 중앙으로 불러냈다.
“제브 국의 국왕께서는 우리 팔렌 국과의 우호를 공고히 하시고자 방문해주셨소.
이번 제브 국과 팔렌 국의 사막 식물 관련 연구에서 좋은 성과가 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축하의 말을 나누기 위해서이기도 하오.
팔렌 국에 계신 동안 아무런 불편도 없이 지내 주시오.”
어제 봤던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귀족들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데바인의 손에 이끌려 카이델에게로 끌려갔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손님을 소개하겠소.”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으아.
이런 거 딱 질색인데.
나는 눈을 딱 감고 카이델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낮에 술집에서 들렸던 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말들이었다.
저주라느니, 마녀라느니···.
그 소리에 조금 화가 난 듯 카이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대들은 나를 모욕하는가!”
카이델의 노성에 소란이 멎었다.
놀랐을 것이다.
본래 카이델은 거의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전쟁터가 아니라면.
그런 카이델의 변모에 그들은 더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마녀도, 저주받은 존재도 아니오.
이 부분은 교회에서 이미 확인받은 바이오.
앞으로 그녀가 곧 나라고 생각하시오.
즉, 그녀에게 행하는 무례는 내게 행하는 무례라 생각할 것이오.”
카이델의 차가운 눈동자가 귀족들을 훑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카이델에게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멀리했지만,
그로 인해 카이델은 확실히 거칠어져 있었다.
본래의 카이델이라면 내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저런 말은 하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귀족들의 소란은 잦았지만 나를 향해 꽂히는 시선은 매서웠다.
뭔가 잘못되어간다.
그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향후 그녀를 본다면 나를 본 것과 같게 생각해주길 바라오.”
카이델이 나를 바라본다.
그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것이 보였다.
뭔가 새까만 것이.
카이델이 나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하기 전에 공략을 끝내야 한다.
설령 테베가 아니더라도 일단은 빨리 끝내야 한다.
이번에는 단추를 잘못 끼워도 단단히 잘못 끼웠다.
나는 이를 악물며 웃어 보였다.
소개가 끝난 후에도 카이델은 한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옆에 세워둔 채 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내 귀에는 카이델의 귀에는 닿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폐하께서 저렇게 큰소리를 지르시다니···.”
“저 마녀가 폐하를 현혹한 것 아닐까요?”
“흥, 검은 머리의 마녀가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했다지.”
“그 멸망이 팔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딨겠어.”
“쉿, 폐하께 들리겠어요.”
“들으라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으아아.
제발 조용히 하세요.
죽일 수도 있어요···.
나는 이미 글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나를 위해 사람을 죽인 카이델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대놓고 죽인 건 아니었지만···.
소설 속에서 카이델은 누가 보든 말든 은화와 엮이는 사람을 기분대로 죽였었다.
그 상황까지 가는 것은 절대 싫다.
“폐하.”
이 상황에서 남주인공 후보를 찾는 것은 무리다.
그렇게 판단되기도 했고 여기서 더 견디며 서 있는 것은 내게는 무리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카이델을 불렀다.
카이델은 이름 모를 귀족과의 이야기를 중단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도 괜찮겠습니까?”
카이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분명 오늘 낮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불허한다.”
“···.”
뭔가 더 말해보려 입을 열었지만 결국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더이상 이야기해봤자 카이델의 기분이 나빠질 뿐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지금, 몸을 사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와 테베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씩 웃으며 테베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
테베의 반응이 이상하다.
그는 마치 내 인사를 무시하는 것처럼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왜지?
뭐가 문제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카이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우와.
원인은 이거였나.
카이델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오늘 나와 테베가 나갔다 온 것은 어디까지나 카이델의 허락하에서였다.
우리가 나가서 뭘 하고 온 것도 아니고 밥 먹고 잠깐 산책하다 들어온 게 전부다.
뭐라도 하고 왔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애초에 테베랑 같이 나가라고 한 것도 카이델이다.
그대라면 맡길 수 있니 어쩌니 하면서.
그런데 왜 저렇게 짜증을 내는 거지?
나는 슬쩍 카이델의 눈치를 보았다.
제브 왕국의 왕이랑 담소를 나누기 시작한 카이델을 보며 나는 슬쩍 옆으로 빠졌다.
그리고 테베의 옆에 가서 옷 소매를 끌어당겼다.
“···.”
나는 말 없이 테라스를 가리키고 다시 카이델의 눈치를 봤다.
카이델은 내가 없어진 걸 모르는지 여전히 제브의 왕과 이야기 중이었다.
나는 조용히 발을 옮겨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테라스에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이 무도회에 와 있는 사람들은 카이델이나 제브 국의 왕을 보러 온 사람이거나,
플라티나 공주와 연을 만들러 온 사람들일 테니 당분간 이곳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불안해서 무도회장과 연결된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가 테베를 기다렸다.
그리고 꽤 시간이 지났다.
혹시 내 손짓을 이해하지 못했나?
아니면 올 수 없는 사정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금빛 머리카락이 문을 넘어왔다.
“로이스터!”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반짝이는 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상대는 역시나 테베였다.
테베는 약간 굳은 얼굴로 계속 주변을 살피며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차가운 목소리.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은 테베의 태도에 나는 움찔, 몸을 움츠렸다.
“무,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근데 폐하도 로이스터도 왜 그러는 건가요···?”
테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듯했다.
잠시 망설이던 테베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로이스터···.”
“폐하의 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샤님.”
···.
세상에.
카이델이 뭐라고 한 건가?
대체 왜?
“폐하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나는 돌아서려는 테베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래 봤자 아주 살짝 잡은 거라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테베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
폐하께서는···.”
테베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그 눈동자가 묘하게 괴로워 보였다.
“···아샤 님께서 오늘 외출 후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는 시녀의 보고를 들으셨습니다.”
···?
그게 뭐가 문제지?
“그래서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아샤 님과 뭘 했었냐고.”
음.
한 거 없다.
밥 먹고 산책했지.
“그래서 식사를 하신 후 산책을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여기 어디에 카이델이 기분 나빠질 요소가 있는 거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데···.
“폐하께서는···.
모르겠습니다.
화를 내시며 다시는 제게 아샤님의 호위를 맡기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미치겠네, 진짜.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모르겠다.
다시는 테베를 내 호위로 붙이지 않겠다니?
대체 방금 이야기에서 뭘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되는 거지.
“···.”
“···.”
테라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나도 테베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느라 움직이지 못한 거지만, 테베는 왜일까.
소설 속의 테베는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삼는 기사 중의 기사였다.
카이델이 다신 내 호위를 맡기지 않겠다고 했다는 건,
달리 말하면 이제 내 근처에 가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테베는 여기에 왔다.
그리고 날 뿌리치고 갈 수 있음에도 가지 않고 여기에 있다.
카이델의 명령을 무시하고.
···.
하하.
바보 같아.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당연하다.
결국은 또 속성의 힘이다.
카이델의 명령조차 무시하게 만들 정도로 속성의 힘이 강했던 거다.
그 정도로 테베는 나를···.
···.
“알겠어요.
이제 가도 돼요.”
나는 테베의 옷소매를 놓았다.
테베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장으로 돌아갔다.
나도 돌아가야 하는데···.
가고 싶지 않다.
그때였다.
“아샤!”
카이델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깜짝 놀라 회장으로 연결된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샤, 무사했군.”
피를 뒤집어쓴 카이델이 있었다.
···.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정말로 조심, 또 조심했다.
비싼 건 최대한 사양했고, 쓸데없는 건 다 돌려보냈다.
솔직히 나라고 사치하기 싫었던 건 아니다.
평생을 없이 살던 사람에게 갑자기 큰 부가 쥐어지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걸 억지로 억눌러 참은 이유는 단 하나.
마녀라고 불리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회장의 사람들은 이미 나를 마녀라고 부른다.
카이델의 성급한 언행을 이유로.
카이델의 변모를 이유로.
어쩌면 카이델이 평소처럼 행동했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비록 내 머리카락 색이 검더라도 평소의 위엄있는 카이델의 말이었다면,
그랬다면 그들은 카이델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이델은 뭔가의 이유로 초조해졌다.
나도 테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그로 인해서 나는 결국 마녀로 낙인찍혔다.
만약 저 안에서 카이델의 옆에 있었다면 소문은 더욱더 부풀려졌을 것이다.
나는, 이미 그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다.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
어쩔 수 없이 했던 행동이 와전되어 거대하게 부풀려지는 상황.
그리고 그로 인해 나만 뒤에서 죽일 년이 되어있는 상황.
그 원흉과 붙어있으면 붙어있을수록 상황은 심각해질 뿐.
문제는 그 원흉이 나를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자가 그대를 훔쳐보고 있었다.
위험하니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좋겠군.”
이성적인 척 이야기하지만, 그 눈은 미쳐있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복장을 보아 아마도 시종인 듯했다.
혼자 테라스에 있는 나를 걱정해서 쳐다봤던지,
아니면 테베가 나온 후 누가 있나 싶어서 나를 쳐다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카이델이 죽여버렸으니까.
원작에서의 카이델은 이렇게 빨리 미치지 않았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앞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었다.
회장 안의 사람들에게로 시선이 옮겨간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괴물 바라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
그대로 내 의식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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