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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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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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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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63

DUMMY

우의정 민희가 탄 초헌이 한성부 진장방鎭長坊으로 정신 없이 내달렸다. 자신이 수어사를 겸직하여 관할하는 수어청守禦廳으로 웬 사내 셋이서 흉인을 고변하러 찾아왔다는 사령의 급보를 받고 달려가는 길이었다. 걸어서도 고작 일각 남짓한 거리였다. 하지만 마음이 급하다 보니 가마꾼들을 독촉했다.


"빨리 좀 가지 못하겠느냐? 네놈들 다리를 확 부러뜨릴까?"

"가, 갑니다, 갑니다요."


가마꾼들은 숨이 턱에 차오르고, 끌대를 쥔 손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팔뚝이 끊어질 듯 얼얼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면서 정신없이 내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그들이 내달려도 민희의 성에 차진 않았다. 걸어가는 것보다 조금 빠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가마꾼들이 팔이 빠져라 남여를 진장방 수어청 앞에 내려놓았다. 민희는 한달음에 수어청 본청으로 뛰쳐들어갔다. 서로 닮은 얼굴 셋이서 수어청 본청 안에서 초조히 서성이는 참이었다.


"흉인을 안다는 게 자네들인가?"


민희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며 빠른 어조로 묻자, 그들 셋은 화들짝 놀랐다. 눈앞에 우의정 민희가 있었다. 환갑을 넘겨서 중턱에 이른 터라 머리도 수염도 희끄무레했다. 무척이나 흥분해서인지, 얼굴은 붉은 빛이 감돌았다. 무엇보다 좀처럼 보기 힘든 홍단령의 위엄이 대단했다. 그들은 숨을 반쯤 죽이고서 바짝 긴장하여 답하였다.


"소인은 광진 사는 이인징이라 하옵고..."

"저는 그 아우 이휴징입니다..."

"저는 이성징이라 하온데..."

"가만! 한놈만 말하거라. 네가 맏이더냐?"


민희는 바로 이인징을 쳐다보며 눈짓했다.


"예, 허면 말씀..."

"가만..."


민희는 일단 별장이 간단히 자신에게 적어보낸 수본을 품속에서 꺼내어 빠르게 눈으로 훑으면서, 그는 이인징의 고변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양주楊州 미음촌美音村에 사는 이유정李有湞이란 자가 3월에 강도를 왕래하다가 지금은 두문불출한다. 흉인의 용모파기와 닮았고 그 행적이 수상한데다, 종들이 이유정의 행방을 저마다 거짓말한다?"

"예,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저마다 딴소리만 합니다."

"분명히 문틈으로 안에 있는 걸 봤는데 없다고 잡아떼지 뭡니까."


이인징 한사람만 말하라 하였는데도, 이휴징이 끼여들어 말했다. 하지만 민희는 그런 이휴징을 책망하지 않았다. 안에 있는 걸 봤는데도 없다고 잡아떼는 것만큼 수상한 건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흡족한 고변이었다.


"그 종들을 잡아들여 족쳐 보면 알겠지."


족쳐 보면. 민희는 이미 이유정이란 자의 종을 모조리 잡아들일 결심을 했다. 흉서에 적힌 왜동倭洞이란 문구와는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일단 혐의에 근접하기만 해도 무조건 잡아들이고 보는 탓에, 그다지 거리낄 게 없었다.


당장 군교들이 양주 미음촌에 들이닥쳤다. 행적이 묘연하다던 이유정 본인은 물론, 그 종 계종, 귀일이며, 그 아들 이홍도, 이홍조에 이어 그 사촌 이유량과 그 아들 이홍식, 그 종 후승까지 포승줄로 줄줄이 굴비엮듯 국청 마당으로 잡혀왔다.


"누가 이유정이냐?"

"이잡니다."


오시수가 위관석委官席(심문 책임자의 자리)에 앉아서 묻는 말에, 군교들이 이유정을 묶은 포승줄을 거칠게 잡아당겨 선두로 세웠다. 이유정이 비틀거리면서 겨우 몸에 중심을 잡고 국청 마당에 섰다. 용모파기대로 키도 크고 수염도 많았다. 그 큰 체구로 벌벌 떠는 모습만 봐도 이놈이 맞았다. 확실했다.


드디어.


"네놈이 이유정이라고?"

"..."


오시수의 두눈이 기쁨으로 희번득하게 번뜩였다. 이놈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가의인들을 잡아 문초한 게 몇날며칠이던가. 당장 의금부의 남간, 서간이 모두 미어터져서 이제는 더는 죄수를 수용할 공간도 없었다.


"형틀과 형장을 대령하라!"


오시수는 죄수들을 일단 감옥에 수용할 생각에 앞서 국청 마당에 모조리 무릎 꿇리고선 형틀과 형장까지 대령시켰다.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죽어나간다는 국청 형틀에 엎드리자, 이유정의 종들은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맞고 불겠느냐, 그냥 불겠느냐?"


오시수는 모두 형틀에 앉혀놓고 나장들에게 일러 둔장, 척장, 소곤, 치도곤, 중곤까지 들고 위협적인 분위기로 사열시킨 후에, 마치 큰맘 먹고 기회를 주듯 물었다. 이인징 형제가 이유정의 행방을 탐문하였을 때 저마다 거짓말로 둘러대며 주인을 지키려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매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 일단 시뻘건 곤이며 장이 눈앞에 전시된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


선뜻 입을 열진 못했지만, 위아래 입술이 서로 맞물리지 않을 만큼, 턱이 빠졌나 싶을 만큼 가엾게도 벌벌 떠는 자들을 보면서, 오시수는 문득 떠오른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중에 왜동 사는 자가 누구냐?"

"..."


순식간에 국청 마당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을 쉬는 것도, 침을 삼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이유정은 그대로 굳은 얼굴로 오시수를 쳐다보았다. 왜동이라니.


"누군지 말하라."

"왜동 어른은 왜...요?"

"너..."


이유정이 사납게 눈을 흘겼지만, 이미 계종이 입을 열었다. 왜동 어른, 그 어떤 언질보다 확실했다. 이유정의 친인 중에 왜동 어른이라 불리는 자가 있다. 헌데 끌려온 자들의 눈치를 보니 이 중에 왜동 어른이란 자는 또 없는 모양이었다.


"그자가 누구냐?"

"계종아!"


이유정이 제지하듯 불렀지만 계종은 자신은 아직 상전을 고변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애써 자신을 달랬다.


"마님의 친정오라비이십니다요."

"그자의 이름은?"

"이름은 잘...그냥 왜동 어른이라 불러서요..."


계종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들 같은 무지렁이가 주인마님의 친정 오라비 이름 석자까지 알아둘 게 뭐 있나 싶었다. 그저 평소에도 왜동 어른이라 부르는 게 다였다. 곧이곧대로 고하였으니 그저 형신을 면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왜동 어른? 그자가 누구냐? 네놈은 알렷다?"


오시수가 이유정의 사촌 이유량을 쏘아보며 물었다. 아직도 다 끌려오지 않았다. 이유정은 물론이고 이유량의 종들을 채 절반도 채 끌고 오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점이 있으면 있는 대로 죄다 끌고 와야 했다. 이유량은 오시수의 번들거리는 두눈이 자신을 향하자, 헛숨을 들이켰다. 하필이면 딸꾹질이 나왔다. 아니, 이 딸꾹질은 이유량 자신이 아니었다. 호기롭게 흉서를 썼던 이유정의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유량은 그런 이유정을 보고 눈시울을 실룩였다. 한심해서 더는 봐줄 수도 없었다.


"성초객."

"..."


딸꾹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이유정의 형형한 두눈이 이유량을 쏘아봤다. 하지만 이유량은 이유정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아직 사촌을 팔아넘긴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호구조사일 뿐이었다. 사돈이며 팔촌까지 캐어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 쯤이야. 그런 호구조사까지 의리를 지킨답시고 입을 닫는 것은 바보천치나 하는 짓이었다.


"성초객? 성승지 말인가?"


오시수의 두눈이 야릇하게 번뜩였다. 잔챙이들만 걸린다 싶더니, 이제야 좀 입질이 온다. 그래도 방귀깨나 뀐 자가 걸려들어야만 추국할 맛이 나는 참이었다. 낙담하여 두눈을 질끈 감는 이유정을 쳐다보다, 오시수는 살짝 시선을 들어 머리 위를 찍어누르는 땅거미를 응시했다.


저녁이 온다. 밤이 온다. 하지만 인정이 울리기 전에,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았다. 그 전에 일단 저 홍두깨로, 사실은 홍두깨보다 더 시뻘건 둔장으로 매타작을 시작해야 했다.


"자, 성초객이 올 동안 이제 한놈씩 문초를 해볼까? 누구부터 해볼까?"

"..."


파리하게 질린 저들을 훑어보는 자신의 두눈이 한순간 피에 주린 야차처럼 느껴져서, 오시수는 스스로 말을 뱉아놓고도 움찔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미쳐가는 모양이었다. 벌써 두달 동안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국청에서 문초를 하다보니 자신의 피가 이상하게 들끓는 모양이었다. 이래서는 곤란했다. 오시수는 두눈을 내리깔고 땅거미에 덮인 땅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그래도 아직은 사람이고 싶었다.


밤이 이슥해서야 성초객과 그 아들 성인동, 그리고 성초객의 집에 숨어있던 창녕성씨까지 또 다시 끌려왔다. 창녕성씨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국청 마당에 들어서선, 일렁이는 횃불에 비친 남편, 아들들의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마침 국청 마당에선 계종이 엉덩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공술을 하는 참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왜동 어른은 그때 계시지도 않았구먼요. 그 아드님이 오셔서 오히려 크게 꾸짖고 마님까지 모시고 가셨습니다요! 예! 저기 사촌분도 같이 뜯어말리셨습니다! 다들 안된다고 뜯어말렸는데 대감마님 혼자 하신 겁니다요! 참말, 참말이구먼요."


끌려온 주인마님과 성초객 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채로, 계종이 열심히 두둔했다. 이 일은 역모가 아니었다. 그저 역모인 척 엄포를 놓아 왕실과 조정을 겁주려는 거라 들었다. 그런데 억울하게 구족이 다 엮여서 결딴나게 생겼다. 그것만은 막아야만 했다. 제발 이 모든 객기를 부린 주인마님 혼자 다 덮어쓰고 죽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뭐? 네 주인 혼자 한 짓이다?"


오시수는 입가를 실룩였다. 손샅에서 월척 한마리가 싹 빠져나갔다. 갑자기 신물이 확 올라왔다. 이유정 혼자라니. 성초객을 이대로 놓아주게 생겼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치게 생겼다. 하필이면 계종의 공술을 성초객이 목도하였으니, 잡아떼기도 딱 좋았다. 자신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는 게 좋을까. 낚시는 잔챙이는 방생하고 월척만 포획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성초객을 잡긴 다 틀렸다.


고작 이유정 혼자서 역모는 무슨. 이유정이 흉서를 쓴 건 맞다. 역모를 꾀하는 흉서도 맞다. 하지만 몸통이 없다. 처음부터 역모인 척 왕을 겁주려던 계획을 실행에 옮긴 모양이었다. 시어꼬부라진 시금치를 먹는 것이 이런 맛일까나.


"네가 진촌에 가서 머물며 그집 모녀에게 일러 흉서를 승장들과 축성장 이우한테 전하라 하였다지?"


결국 오시수는 이유정을 곤죽이 되도록 문초를 했다. 이유정은 이미 반쯤 체념한 얼굴이 되었다. 이미 온몸이 너덜더덜해지고, 피가 마르다가 또 나고, 그렇게 엉겨붙어 괴로웠다. 사촌 이유량이 이미 자백을 하였다. 어떻게 말이 새어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시수는 이유량이 이휴징에게 먼저 고변을 한 거라고도 말했다가, 강도의 승장 중 하나가 진촌 아낙의 얼굴을 알아본 탓이라고도 말했다가, 중언부언했다.


"예, 그저 십년전에 쌀과 말먹이를 빌린 일이 있어, 정어리로 갚으려 한 것 뿐입니다."

"정어리? 그 안에 흉서가 있었는데도?"

"그저...고마웠다고 적어놓았을 뿐입니다."

"허? 고마워서? 허면 강도는 왜 왕래했느냐?"

"그저...강도에서 살까 해서 좀 알아보았을 뿐이지요. 헌데 노역을 해야 한다기에 접었을 뿐입니다."


이유정의 답변에 오시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는 이내 웃음을 삼키고 매섭게 쏘아보았다. 뻔히 밑천이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은 자신을 더 자극할 뿐이었다.


"이놈이...누굴 바보로 아나? 바른대로 말하지 못할까! 여봐라! 이놈을 매우 쳐라!"

"예 대감!"

"아니, 귀일을 데려와라!"


오시수는 갑자기 변덕을 부렸다. 방금 전에 이유정을 매우 치라고 말하고도, 진촌아낙의 딸 귀승을 데려오라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인 변덕에 그만 진촌아낙의 딸 이름을 귀승에서 귀일로 잘못 말해버렸다.


"귀일이요?"

"아니, 귀승! 발음이 헛..."


오시수는 짜증스레 손을 휘저었다. 고단했다. 막바지에 이르니 한순간에 피로가 밀려들었다.


"그 죽은 계집의 딸년 말이다."

"..."


이유정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귀승어멈이 죽었다고? 하기야 모진 형장에 목숨이 남아날 리가 없지만서도. 그래도 자신과 안면이 있는 여인이 벌써 죽어버린 사실에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장들이 남간에서 득달같이 귀승을 끌고 왔다. 귀승은 나장들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양 옆구리가 붙들린 채로 발버둥을 치며 끌려왔다. 아예 두다리를 질질 끌며 버티기까지 하였다.


"똑바로 걷지 못해?"

"이게 죽고 싶나?"

"..."


귀승은 대꾸도 못한 채로 울먹였다. 어미가 여기 끌려와서 죽었다. 이게 다 강도에 와서 쌀을 빌린다, 정어리를 나눈다, 하며 글 모르는 어미를 속여 흉서를 숨긴 자 때문이다. 눈물이 뿌옇게 차오르는 눈시울 사이로 보이는 저 얼굴...귀승은 두눈을 깜빡여서 눈물을 떨구면서 이유정의 얼굴을 확인했다. 저 얼굴이 맞다. 이게 다 저자 때문이다.


귀승의 걸음이 이유정의 앞에서 딱 멈추었다. 피투성이가 된 이유정을 내려다보는 귀승의 두눈이 유독 붉었다. 실핏줄이 터진 두눈을 더는 깜빡이지도 않고 귀승은 뚫어져라 이유정을 쏘아보았다.


"당신..."

"..."


이유정은 두 입술이 말라붙은 채로 목안의 소리도 목구멍에 들러붙어버렸다. 오시수가 귀승에게 이유정을 손가락으로 떡 가리키며 물었다.


"이자를 아느냐?"

"예."

"어찌 아느냐?"

"즈이 진촌에 와서 즈이집에서 며칠 묵어갔어요."

"그래? 이자가 무얼 하고 돌아다녔느냐?"

"정어리 몇마리를 가져와선 그 속에 서찰을 숨겨서 전해달라 했어요. 사대부 체면에 중놈들한테 쌀을 빌린 거는 남부끄러운 일이니 몰래몰래 전해달라면서."

"..."

"당신 때문이야. 엄마가 죽었어. 살려내...살려내..."


이유정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숨이 턱턱 막혔다. 자신 때문에 귀승어멈이 억울하게 죽었다. 한문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글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전하기만 했을 뿐인데도. 한치의 인정사정도 봐주지 않는 국청의 붉은 형틀 위에서, 붉은 형장 아래서...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서 숨이 끊겼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다 끝났군."


넋이 빠져버린 이유정을 지켜보며 오시수가 차갑게 냉소했다. 비로소 끝이 보였다. 여기서 불고지죄不告知罪까지 얼기설기 엮어서 매듭만 지으면 끝이었다. 바야흐로 길고 지루한 흉서사건도 이제야 끝이 보인다.



- 3월 13일은 계해반정일입니다. 이날 쳐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안에서 원조를 해주는 척 눈속임으로 한 것일 뿐, 실은 사람들과 상의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승려들을 움직여보려고 한 것입니다. 임천군을 거론한 것도 별 생각 없이 칭하여 한 말이며, 영상과 병판, 훈련대장과 광성부원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쓴 것은, 영상은 체찰사를 겸하고, 병판은 사람을 공정하게 쓰지 않고, 훈련대장은 군정軍政에 게으르고, 광성부원군은 외인外人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유정의 공초를 어탑에서 읽어내리던 어수御手가 꿈틀했다. 숙종은 공초를 꾸깃하게 구겨쥐고 두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흉서는 진짜였다. 역모도 진짜였다. 아니, 역모인지 자작인지 그 실체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역심은 실체가 분명했다.


"역도 이유정을 압슬하여 그 당인黨人의 이름을 받아내라. 그 죄를 알고도 숨겨준 자들 또한 불고지죄로 다스려라."

"분부대로...하겠나이다."


서릿발 같은 옥음에 허적은 묘한 눈빛이 되었다. 왕이 진노했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김석주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나. 김석주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일을 추진해야 하나. 하지만 이유정은 혼자 떠안고 가기로 작심한 모양이었다. 아니, 이미 이유정 혼자 설치다가 된서리를 맞은 분위기지만. 머뭇머뭇 대답하는 허적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방금 금부에서 공초를 바친 터라 편전 문이 열려 있어, 문틈으로 아침햇살이 사납게도 짓쳐들었다. 어느덧 음력 오월으로 접어드는 한때라선지, 아침인데도 햇살이 강렬했다. 왕의 진노만큼.


"하옵고, 이유정의 종들을 문초한 결과, 3년전 병진년에도 이유정이 종 귀일과 함께 장기를 오가며 스승 송시열의 수발을 든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사오니...송시열을 안율(죄를 다스림)하심이..."

"공은 기어이 송시열의 목숨을 거두어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시뻘겋게 달궈진 분노가 왕의 두눈에 번뜩였다. 3년전에 송시열의 수발을 들 정도로 송시열이 아끼는 제자였음이 밝혀졌으니 송시열의 사주를 받았음을 밝혀내자? 허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미 잘 알았다. 이미 후끈한 불길이 숙종 자신의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 불길이 음력 오월의 아침햇살과 뒤엉켜서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방향을 걷잡을 수는 있었다.


송시열의 목숨 만은 붙여둔다...


아침햇살은 한낮이 되니, 더욱 잔혹한 무지개 빛깔로 반짝였다. 군기시 앞에 목과 몸이 분리되어 쌓인 시체 더미마다 콧마루에 묻은 핏방울 한점까지 고스란히 비출 만큼.


흉인 이유정, 그 아들 이홍도와 이홍조, 그 사촌 이유량, 그 아들 이홍식, 그리고 이유정의 행랑채에 살던 훈련도감 포수 이승립이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무서운 공포에 질렸는지, 그 검은 눈동자에 어린 감정도, 흰자위에 터져버린 실핏줄에 묻은 고통도, 벌린 입에 갇힌 비명도 적나라히 비출 만큼.


그리 참혹한 주검 위로 비스듬한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다. 그림자는 제대로 일어설 기운도 없는지, 지팡이 하나에 온몸을 기대어 겨우 지탱하고 선 사람의 형체였다. 성초객은 착잡한 눈빛으로 매부와 조카들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누이도 곧 관비로 끌려가게 생겼다. 자신도 당장은 걷지도 못할 몸이 되어 풀려나긴 하였지만, 혐의까지 벗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 다시 불려와서 모진 형신 끝에 목숨이 끊기든, 이렇게 이곳 군기시에서 목이 잘려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에 닿고, 발길에 치이는 신세가 될 지도 몰랐다.


그리도 말렸거늘...미욱한 이놈이 결국 여러사람을 결딴내고, 구족을 거덜내었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식들도 이젠 역적의 골육이 되어서 자자손손 벼슬길이 막히려나. 성초객은 무릎에서 힘이 턱 빠져서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주저앉는 그 순간에도 타는 듯한 고통이 둔부를 엄습했지만, 일어설 기운도, 자세를 고쳐 앉을 기력도 없었다. 다 끝났다. 다 끝났다.



수레바퀴가 구르듯이 낮과 밤이 오고 가고, 또 밤과 낮이 가고 왔다. 김석주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흉인도 잡히고, 또 그 일족이 처단되고, 그 배후로 송시열이 지목되고, 송시열을 안율按律(불러다 죄를 다스림)하라는 주청이 빗발치다가 왕의 일갈에 일소된 뒤였다.


"왜 이렇게 늦으셨소? 강화에서 도성까지 뭐 얼마나 걸린다고."


행각 신도 바깥에 늘어서서 왕의 행차를 기다리던 허적은 행각 아래로 느긋하게 들어서는 김석주를 보고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김석주는 가만히 뒷짐을 지고, 빈손을 쥐었다 폈다 하였다.


대감 아들의 명줄이 이 손안에 있소이다.


김석주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것을 보고 허적은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이 음흉한 놈이 또 무슨 꿍꿍이를 숨겼을꼬. 도대체 강도에서 보름씩이나 있을 건 뭔지.


"아, 강도를 둘러보고 돈대 스물네군데를 그려오다 보니..."


김석주는 대답도 느릿하게 끌었다. 살갗도 거뭇하고 입술도 거뭇하니. 그 속내도 시꺼멓게 보여서 허적은 괜히 검은 재를 한입 가득 삼킨 기분이 들었다. 이놈이...일부러 송시열을 내 손으로 죽일 때까지 기다렸던 건가. 그러라고 자리를 비웠던 건가.


김석주는 어쩐지 편전 뜨락의 공기가 자신을 따갑게 휘감는 기분이 들었다. 굽이치는 시선마다 하나같이 가시가 돋쳐 있었다. 대체 왜? 송시열을 죽이라고 기껏 자리까지 비켜주었더니, 왜 실컷 나를 미워하는 건지.


"미안하이. 자네가 기껏 자리를 비켜주었는데 말이야. 송시열의 목숨을 거두지 못했으이."


하필이면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은 데서 석주의 속내를 허적이 후벼팠다. 석주는 내심 뜨끔하였지만, 이내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허적을 노려보았다.


"뭐요? 무슨 소리신지. 이 오뉴월에 벌써 더위를 잡수셨습니까?"


벌써 단오였다. 땡볕이 내리쬐는 통에 편전 행각 아래로 들어선 지금도 아직 정수리가 뜨끈뜨끈했다. 석주는 눈앞의 상대가 더위를 먹은 탓이라고 몰아부쳤다. 하지만, 상대는 조정에서만 사십년을 넘게 묵은 생강이고, 더위를 먹기는 커녕 머릿속에서 춤추는 온갖 권모술수들을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술술 뽑아내는 자였다. 그저 더위를 먹은 걸로 치부한다고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의심어린 눈길을 거둘 리가 없었다. 김석주는 이내 두눈에 비웃음을 띠고 뒷짐 진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아, 그래서 내가 강도에 나간 사이 내겐 스승이나 다름 없는 대로를 죽이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셨구만? 아, 내가 자리를 비켜주면 허적은 내가 하란대로 다 하는구만? 움화화화! 천하의 허적이 이 손안에 있소이다!"


석주의 웃음소리가 행각 지붕에 부딪쳐서 쩌렁쩌렁 울려댔다. 허적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뭐?"

"천하의 허적이 이 손안에 있다, 이겁니다! 대감도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닙니까?"


석주가 허적의 흰 턱수염에 자신의 입김을 훅 내뿜었다. 이놈이 무슨 말을. 허적은 모욕감에 얼굴이 시뻘개졌다. 이렇게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편전 뜨락에서 감히...낯이 순식간에 흐물흐물 익어버린 느낌이었다. 옆에 있는 권대운은 물론이고, 권대운의 옆으로 늘어선 오시수도 들은 모양이었다.


"..."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허적과 김석주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부러진 칼날처럼 거친 시선이 김석주의 온몸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김석주는 유들유들한 혀를 마저 놀렸다.


"그럴 리가 없지요. 암, 암요. 천하의 허적이신데."


눈은 웃지 않았다. 석주의 두눈은 맹수의 눈동자처럼 눈동자가 마냥 사나웠다. 그 눈은 금세라도 허적의 명줄을 틀어쥘 것 같았다. 허적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죽지를 움찔했다. 그날 통명전 모퉁이에서 김석주의 손아귀에 목줄기가 비틀릴 뻔한 그 때의 수치스런 치욕이 다시금 목을 졸랐다. 자신도 모르게 꺽꺽거리는 숨소리가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머리로는 잊으려 해도, 이미 몸이 기억하는 굴욕이었다.


"검어보인다고 때를 함부로 묻히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이래뵈도 깨끗한 걸 좋아해서요."


석주는 나른하게 못박고는, 두손으로 자신의 소맷부리며, 옷자락의 먼지를 털털 털어냈다. 그리고는 손바닥의 티끌도 야무지게 털어냈다. 할 말을 잃은 허적이 그저 쳐다보고만 있자, 석주는 그런 허적을 무시하고 다시금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시야에 비친 오뉴월의 하늘은 그저 나직했다. 높지막하던 구름도, 해도 그저 나지막했다.


둥, 둥, 둥


왕의 행차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더니, 삼문 가운데 중문이 열리고 왕의 행렬이 위용을 드러냈다. 파랗고 붉은 산선傘扇을 든 내관들을 거느리고 어린 왕이 남여에서 내려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 석주의 눈동자가 짙게 불타올랐다.


어이하여 송시열도, 허적도 목숨을 붙여두셨나이까?


착각처럼 왕의 눈길이 석주에게 닿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숙종은 석주를 보았다. 원망어린 눈동자를 시꺼멓게 불태우며 자신을 보는 시선을 그대로 정면으로 마주쳤다. 감히 용안을 볼 수 없도록 온힘으로 맞부딪쳤다.


그랬다간 외숙만 남게 되거든.


숙종은 속엣말을 차갑게 식히고 또 삭였다. 그랬다간 정말로 외종숙만 남게 된다. 그 이름 김석주...권력의 속성이란 본래 굶주린 맹수의 등줄기 같아서 눈앞의 먹이를 보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이리 할퀴고, 저리 할퀴고, 그렇게 날뛰면서 모든 것을 꾸역꾸역 먹어치우는 법이어서, 외숙이 어찌 나올 지는 허공에 뻔히 그려볼 수 있었다. 그 때가 되면, 상대가 외숙이라 해도 치워버리고 싶어질 터였다. 그 사나운 등줄기에 올라탈 게 너무도 뻔한 어미마저도. 그러니 김석주의 등줄기는 잠잠해야 하고, 그 목줄기도 무사해야 했다.



이유정의 흉서가 조정 안에 던져놓은 파문은 그치질 않았다.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 한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참을 수 없을 만큼, 머리를 맞댄 허목과 허적의 눈길이 맹렬하게 불타올랐고, 서로 손끝이 닿는 것도 견디지 못할 만큼 사촌지간인 권대재와 권대운의 손길은 차디차게 식었다. 어탑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보일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전하, 헌납 이수경은 감히 영의정 허적을 모함하고자 위로는 성명聖明(임금의 총명)을 속이고, 아래로는 동료를 속였사옵니다. 어찌 두고 보시나이까?"


이번엔 흉서를 이틀이나 숨겼던 허적을 비난했던 이수경에게로 그 부러진 칼끝이 닿았다. 장령掌令 이식이 이수경을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장령의 나머지 손엔 또 다른 칼끝이 숨겨 있었다. 대사헌과 대사간의 지위를 오가는 권대재였다. 감히 자신의 칼끝이 닿지 않을 대사간 권대재보다는 일단 그 발치의 이수경 먼저 떨궈내고 권대재를 허공에 띄우는 편이 나았다.


권대재 역시 자신의 턱 밑으로 숨어든 칼날을 느꼈다. 이수경이 쫓겨나면, 그 다음엔 자신이다. 그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등뒤의 신경을 이식과 이수경에게 집중했다. 전하께서 이수경을 어찌 처결하시려나.


"전하, 영의정 허적은 그 이틀 동안 비밀리에 범인을 탐문했을 뿐이옵니다. 영상을 모함한 헌납 이수경을 파출하시옵소서."

"파출하시옵소서."


탁남에 속하는 신료들이 한 목소리로 이수경의 파출을 요구했다. 숙종은 지그시 이수경을 내려다보았다. 허적이 정말로 비밀리에 범인을 찾고자 함이었든, 아니면 범인을 만들고자 함이었든, 그 이틀을 문제삼은 이수경은 조정에 남을 수 없었다. 남기고 싶어도 남길 수가 없었다. 아마도 허적의 위세가 꺾이기 전까진 쉽사리 부를 수도 없을 터였다.


"헌납 이수경을 파직한다."


왕의 옥음이 나른하니 어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허적은 입가에 비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두눈을 홉뜨고 맞은편에 엎드린 허목을 보았다.


보셨소이까?


눈두덩을 온통 덤불처럼 덮어버린 허목의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허적의 행보에 의심을 내비친 것 만으로, 이수경이 오히려 왕을 기망하고 동료를 기망하였다는 죄목을 쓰고 관복을 벗게 되었다. 이수경 다음엔 권대재가 당할 터였다. 어쩌면 윤휴도, 자신도, 홍우원도 무사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야겠지.


허목은 씹히지도 않는 아랫입술을 말없이 빨면서, 두눈을 번뜩였다. 처음부터 칼자루는 저쪽 허적이 쥐었고, 자신은 칼날을 쥐었다. 하지만, 칼자루를 쥐었다고 해서 허적이 쉽사리 자신에게 칼날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왕이 두고 보지 않을테니. 그 어심에 기대어, 허목은 자신의 신념대로 허적과 부딪쳐볼 생각이었다. 벼르고 벼르며, 허목은 콧마루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쓰윽 닦아냈다. 내일모레면 단오인가. 사흘 뒨가. 하필이면 오늘 쫓겨나다니, 이수경이 딱하였다. 아무래도 부채 하나쯤 따로 챙겨줘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당장 자신에게도 지금 부채는 절실했다. 가슴 속의 불길을 다스릴 길이 없는 탓에.



사흘이 지나고, 대궐 문설주마다 붉은 경면주사로 쓴 천중부가 나붙었다. 한낮의 햇살이 유독 강렬하게 관모와 관복을 파고들었다. 신료들도 빠짐 없이 인정전 앞에 모여들어 저마다 자신의 품계석 앞에 늘어섰다. 단오례가 거행되고, 또 어김 없이 단오사선端午賜扇이 신료들의 품계대로 지급되었다. 옥추단이 달린 옻칠부채를 받아든 허적과 허목은 싱글벙글하며 부채를 차르륵 펼쳤다.


부채살 수만 해도 사십살이 넘는 듯한 부채너머로 서로 시선이 부딪친 허목과 허적의 두눈에서 웃음기가 식었다. 이렇게 좋은 날이면 서로 화기애애하게 말도 몇마디씩 섞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권력은 부모형제간에도 나눌 수 없는 지라,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어 서로에게 칼을 맞댄 참이었다.


"시원하시지요?"


허적이 웬일로 팔을 뻗어 허목에게 단오부채를 힘껏 부쳐주었다. 그러자 선추에 달린 옥추단이 대롱거렸다. 허목은 허적의 눈동자에서 파편 같은 것을 본 듯하여 어쩐지 찜찜했다. 저 눈속의 파편에 자신의 눈이 찔린 기분이었는데 어찌 부채를 부쳐주는 것인지.


"기운을 아끼셔야지요."


그럼 그렇지. 덧붙인 허적의 말에 허목은 코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장가를 들어 첫날밤을 치를 나이에, 똥오줌도 못가렸을 놈이지만, 이미 칠순을 넘기고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자신을 죽을 날 받아놓은 산송장 취급을 하려 들다니. 죽음은 그저 복불복福不福이라는 것을 왜 모르나 몰라.


허목은 그 자리에서 옥추단을 한입에 털어넣어 잘근잘근 씹었다. 어금니에 꽉꽉 씹히는 옥추단의 식감을 느끼면서, 뼈째로 씹어먹을 듯이 허적을 노려보면서.


"아니, 그 옥추단은 한번에 씹는 것이 아닌데. 조금씩 떼어먹는 것일진대. 잊으셨습니까?"


허적이 히죽 웃으면서 야죽야죽 입을 놀리자, 허목은 웃지도 않고 허적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꾸했다.


"내 온힘을 다하여 자네와 부딪쳐보려고."

"네?"


허적이 반문하였지만 허목은 더는 대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온몸에서 투지가 매섭게 불타올랐다. 어쩌면 온몸을 휘도는 약효 때문에 가슴어림이 홧홧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머릿속에서 들끓는 분노 때문에 가슴어림이 답답한 것일 수도 있었다.


- 영의정 허적은 선왕께서 고탁顧托(후사의 안위와 보호, 뒷일을 부탁함)을 하신 신하요, 주상께서 믿고 가까이하는 신하로, 제환공齊桓公의 관중管仲에 비할 만큼 임무와 책임이 막중합니다. 그러나 위세가 드세지자, 척리(외척)와 결탁하고 환관과 귀근貴近을 밀객으로 삼아서 임금의 동정을 염탐하여왔습니다. 허적이 깊은 산 험준한 곳에 수많은 성루를 쌓게 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성상을 현혹시켜 권력을 독차지하더니, 그 아들 허견은 방약무도하여 거리낌 없이 온갖 만행을 자행하니 그를 가로막을 자가 없나이다. 남구만의 상소로 비로소 공론이 시작되었으나, 남구만은 귀양가고 도리어 허견은 무사하니 인심人心이 불쾌해 합니다. 강도의 흉서가 나와서 인심이 어지러워지고 한치 앞도 헤아릴 수 없는데도, 이틀이나 흉서를 감춘 채로 상달하지 않은 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편전 어탑에 허목의 차자가 올랐다. 숙종은 수중의 차자를 물끄러미 보고 또 보았다. 허목이 아예 죽기살기로 온몸으로 허적을 들이받았다. 온몸이 부딪혀서 깨져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허적을 끌어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이미 차자를 봉입하면서 승정원 관리들은 차자의 내용을 숙지한 터였다. 모두 숨을 죽이고 왕의 비답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숙종은 한참을 뚫어져라 차자만 들여다 보았다. 어느덧 입안의 침이 말라붙어버렸다. 지금 허목의 차자는 허적은 물론 김석주까지 겨냥한 참이었다. 용납하고 싶어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허적과 김석주...


그 둘을 쳐내느니, 차라리 허목을 쳐내는 편이 나았다. 당장 서안 위에 놓인 붓을 잡지 못했을 뿐, 숙종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허적과 김석주의 존재가 허목보다 크고 분명해진 터였다. 숙종은 등뒤에서 부채를 부치는 두광을 힐끔 보며 눈짓했다. 그새 먹물이 굳었으니 와서 먹을 갈라는 뜻이었다. 두광은 팔이 빠져라 왕의 등줄기에 대고 부채를 부치다가 졸지에 먹도 갈게 생기자 , 낯빛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냉큼 먹을 갈아 진득하게 먹물을 우려낼 수 밖에. 그렇게 두광이 먹을 갈아놓자, 숙종은 붓을 들어 비답을 써내렸다.


- 경卿의 차자를 보니 그저 모골이 송연할 따름이다. 허적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원로시귀元老蓍龜이고, 경은 산림의 기덕耆德(나이 많고 덕이 많은 사람)으로서, 둘이 함께 합심하여 이 미욱한 나를 보필해야 하는데도, 본연의 책무를 망각하고, 시기하는 무리가 모함하는 말에 동요하여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죄목을 영상에게 뒤집어씌우고 조정을 분열시키고 국사를 파괴하니, 이 무슨 짓인가?


숙종은 자신의 결정을 일언반구도 미리 신료들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다. 왕의 옥음이 들리지 않자, 신료들은 왕의 손끝에 신경을 쏟았다. 뭐라고 쓰는지 보이지도 않는데도 붓끝에 신경을 기울이는 참이었다. 민종도에 이어 후임 도승지가 된 민암은 그나마 왕의 비답을 훔쳐볼 수도 있을 만큼 가까운 지점인 탓에 곁눈질로 힐끔힐끔 왕의 비답을 살폈다.


"전하라."


비답을 몰래 훔쳐보던 민암이 움찔했다. 그는 즉시 왕의 손에서 비답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비답을 낭독했다.


왕은 이미 선택했다. 허목을 버렸다. 아무리 왕이라도 허적에 이어 김석주까지 한꺼번에 버리는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이 싸움은 김석주가 끼여있는 것 만으로도, 허목의 필패였다.


"차자 가운데 척리와 결탁하고 환관과 귀근을 밀객으로 삼아서 임금의 동정을 염탐하였다고 쓴 것은 참으로 놀랍도다. 이는 필시 들은 출처가 있을테니 그자는 필히 자수토록 하여 처치할 곳을 마련하라."

"..."


허적은 뱀처럼 차갑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허목은 물론 권대재를 훑어보았다. 자신은 결코 패장을 살려보내거나 고이 놓아주는 위인이 아니었다. 허목이 기세가 꺾인 김에, 손발도 잘라내야 했다. 그를 추동했든 그를 추앙했든 그런 자들을 조정에서 쫓아내야 했다.


허목은 결코 없는 소리를 지어서 하는 소인이 아니다. 척리와 결탁하고 귀근을 밀객으로 삼아서 임금의 동정을 염탐했다...허목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는 몰라도, 들은 출처를 왕이 의심하는 것도 지당했다. 하지만 그 출처가 누구든 관심이 없었다. 이참에 윤휴든 권대재든 한놈만 꺾어놓으면 되었다. 그렇게 허목의 기반을 무너뜨리면 되었다.


"..."


하지만 허적은 당장은 침묵했다. 이 정도로는 도저히 성에 차질 않았다. 왕이 비록 자신의 편을 들긴 하였지만, 허목을 귀양보낼 리는 없었다. 기껏해야 연천으로 돌려보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젖은 땔깜을 들쑤시고, 부채를 사정없이 부쳐대어, 매운 연기를 왕의 코밑으로 들여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허목의 탁남을 짓뭉개버릴 궁리로 바쁘게 흔들리는 허적의 눈을 슬그머니 곁눈질로 훔쳐보며, 김석주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인들이 가랑이가 보기 좋게 찢어졌다. 지금이야 서로의 목줄기를 물어뜯느라고 서로가 흘리는 시뻘건 핏줄기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테지. 이미 피를 많이 흘린 뒤엔 병든 닭이 되어 아예 홰를 칠 기력도 없을테지. 석주는 야욕에 눈먼 허적을 흘낏 보곤 허목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쩌면, 지금 쫓겨나가는 쪽이 더 운이 좋은 것을.


헌데 어떻게 알았을까. 허적이 자신과 결탁하고, 또 환관과 귀근을 통해 왕의 동정을 염탐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을...


그날밤 허적은 마름 황씨를 시켜 이삿짐을 꾸리게 하고서, 동이 트기도 전에, 아들 허견을 비롯하여 식솔들을 모조리 거느리고 양화진楊花津으로 나아갔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누에고치 머리처럼 솟아오라 한강을 오연하게 굽어보는 잠두봉蠶頭峰이 허적의 두눈에 들어왔다. 그 잠두봉 아래로는 지세가 완만하여,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푸른 머리를 늘어뜨린 버드나무들이 즐비했다.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 어스름이 걷히기 전이라선지, 어쩐지 조금은 을씨년스러웠다.


눈치 빠른 마름 황씨는 이미 간밤에 좌상댁은 물론 예판댁으로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어 연통을 넣은 탓에, 이제나 저제나, 왕이 보낸 개유사開諭使가 오려나 싶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잠두봉 옆으로 그나마 지세가 낮은 곳에 나룻배 서너척이 정박하여, 사공들이 아까부터 뚫어져라 이쪽을 쳐다보는 참이었다.


"타실 겁니까?"

"..."


사공의 물음에도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황씨는 물론 다른 머슴들도 하나같이 답변하지 않았다. 그저 주인은 이곳 양화진에 시위하러 나온 것이었다. 영의정 허적이 낙향하여 도성을 떠나려 한다...이 정도만 보여줘도 왕은 안달이 나서 허목을 내쫓지 않고는 못 배길테니. 이 모든 게 허적이냐, 허목이냐, 둘 중 하나만 도성 안에 남겨두라는 상전의 압박이었다. 당연히 왕은 이미 상전의 손을 들어주었으니, 이제는 허목의 손을 놓을 차례였다. 아예 허목을 도성 밖으로 배를 태워 보내야만 할 터였다.


"안 타실 겁니까?"


허적의 딸 윤이와 함께 배웅 나온 홍만종이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잠두봉에 사는 자신이었다. 하필이면 느닷없이 허적이 도성을 뜬다면서 이곳 양화진을 찾은 탓에, 마지 못해 배웅을 나왔지만 아직도 '장인어른'이란 호칭이 입에 착착 달라붙지가 않았다. 무슨 꿍꿍이로 허적이 잠두봉에 오른 건지, 이미 조보를 통해 감을 잡은 터라 더욱 달갑지가 않았다.


"..."


허적은 배 위로는 내리지도 않고 잠두봉에 올라서서 은빛 물비늘이 그물처럼 펼쳐진 강물을 굽어볼 뿐,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위한테 체면 구길 대답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일부러 조회에도 참여하지 않고 이리로 왔다. 허니 해가 이미 잠두봉 위로 모습을 드러낸 지금은, 왕이 보낸 승지가 붉은 관복자락을 펄럭이며 달려와야 했다. 그렇게 힐끗 뒤를 돌아보는 허적의 눈꼬리에, 불그스름한 옷자락의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먼빛으로 걸려들었다.


그래, 이제 허목은 두번 다시 도성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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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2.03 01:16
    No. 1

    강아지 한 마리가 흐린 물?이 몇화를 이어서 이어지는군요.
    후대의 관점에서 보면
    숙종이 김석주와 허적의 손에 놀아나면서
    가끔 희로폭발을 해주시는 것으로 비칠 만 하겠습니다.
    숙종이 모조리 뒤집어 엎을 때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도 곧 닥치겠군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2.08 15:06
    No. 2

    그날의 이야기를 쓰는 것 때문에 저도 심적 부담이 큽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2.03 16:11
    No. 3

    남인들이 알아서 분열되는지 아니면 작전인지...
    아직 어리지만 숙종이 부대끼면서 능구렁이 돼가는 기분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2.08 15:06
    No. 4

    김석주의 작전도 좀 주효했겠지요. 숙종도 슬슬 정치고수가 되어가야지요. 송시열을 상대하려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5.10.12 19:10
    No. 5

    허적이 나이가 몇인데 어린 왕이 벌써 맞상대가 돼면 세월이 울겠지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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