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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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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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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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07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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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쪽

해의 그림자 164

DUMMY

어명을 받아 양화진으로 쫓아갔던 민암이 홀로 편전에 들었다. 숙종은 시선이 뾰족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민암의 어깨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영상을 데려오라 하였더니?"


민암이 털썩 무릎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마가 전돌에 금세라도 닿을 듯한 거리에서 스스로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민암은 머뭇머뭇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그대로 충주로 낙향을 하겠다 하여..."

"그래서, 배를 탔다더냐?"

"그게..."


민암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숙종의 눈빛이 차갑게 반짝였다. 양화진 잠두봉엔 홍만종이 산다던가...허적으로선 딸과 사위가 잠두봉에 있으니 급할 것도 없었다. 인달방 사직동에 유독 담장 높은 갑제를 지어놓고 산다는 허적이 그 큰집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도성 밖으로 나갈 리가 없었다. 그저 허목과 힘겨루기를 하겠다는 뜻이려니...


"도승지 민암은 다시 가서 영상을 데려오라."

"..."

"안 들리는가? 한번 더, 다녀오란 말이다!"

"..."


숙종이 버럭 소리쳤다. 민암은 움찔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이젠 그림자에 시야가 갇혔다. 더 고개를 조아릴 수도 없다. 민암은 하는 수 없이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뒷걸음질로 편전을 물러났다.


- 헛말을 지어내어 대신을 모함하는 것은 필시 그 출처가 있을 것이니, 자수를 하라 일렀거늘! 어찌 한 사람도 자수를 하는 자가 없단 말인가? 이것이 신하의 도리더냐?


왕의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렸다. 빈청의 동편에 앉은 권대운은 얼굴이 굳어진 채로 비망기를 서탁에 내려놓았다.


"전하께선 나와 내 사촌아우를 의심하시는군요. 이 권대운을 영상에 앉히고자, 대재 그놈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였다...허, 차라리 부러질 지언정 구부러지진 못하는 그놈을...판부사 대감까지 가지고 논 천하의 모리배로 만드셨습니다."

"..."


서편에 앉은 허목은 발꿈치도, 앞발도 바닥에 붙이지 못한 채로 허공만 응시했다. 저절로 참으로 고약한 상황이었다. 왕은 지금 허적도, 자신도 놓아두고, 자신의 발밑만 볶아치는 참이었다. 유난히 발이 붓고 아픈 것이 느낌 탓인지는 몰라도, 허목은 그저 발을 꿈틀거렸다. 권대운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빈청을 나간 후에도, 허공은 어둠 속에서 하릴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 신이 비록 무상하나

어찌 감히 남의 꼬임에 넘어가서

남을 무함하는 계획에 가담하였다,

그리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떠넘기고

자신은 모면하려 들겠나이까?

죽어도 아니옵니다.


死且不爲. 죽어도 아니다...늦은 오후 편전 어탑의 숙종은 수중에 들어온 미수체의 차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허목답다. 구구절절 변명하지도 않고, 빙빙 돌려 덮으려고 들지도 않고, 주절주절 늘어놓고 꾸미지도 않고, 폐부를 파헤쳐 보인다. 다른 사람 괴롭히지 마시라...그 강단 있는 흉골이 손에 잡힌다. 숙종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더 지켜주고 싶은 위인.


그래서 숙종은 붓을 들어, 벼루 위에서 조금은 말라붙은 먹물을 억지로 덕지덕지 묻혀가며 비답을 써내렸다.


此必信聽欺誣之言也

이는 필시 무함하는 말을 곧이 믿은 탓이다.


군말이 필요 없었다. 그리 못박아 둘 뿐이었다. 허적이라면 꼬리를 자르고서라도 자신은 살아남을 터였다. 허목도 그리 해야 했다. 버티고 또 버텨서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그러라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허적이 허목을 두고 볼 리가 없다. 당장 허적이 굶주린 아귀처럼 입을 쩍 벌리고 저 잠두봉 아래서 벼르고 또 벼르는 참이거나, 저 잠두봉 위에서 벼리를 당기는 참일테니.


숙종의 생각대로 허적은 잠두봉 위에 서서 여전히 서호의 물결을 내려다보는 참이었다. 서쪽 호수, 동쪽 호수로 나뉘어 불리는 한강이 은빛 물비늘을 머금고 잠두봉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헌데 기껏 돌려보냈더니 민암이 또 다시 달려와서 쓴침을 삼켜야만 했다.


"전하께선 허목을 처단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민암은 땡감을 씹은 얼굴로 고하였다. 허적은 입안을 우물거렸다. 괜히 뒷목이 뻐근하니 당겼다. 마치 몸은 곁에 있어도 맘은 곁에 없는, 그런 낭군을 보는 계집의 심정이 이러할까.


"꿩 대신 닭이라도 구워야지."

"그 말씀은...?"

"허목이 안되면 윤휴, 윤휴가 안되면 권대재...이미 내손을 떠난 물건은 아예 바다에 띄워보내야지."


허적의 음성은 차갑게 식었다. 권대재...이놈이 우리를 배신했다. 감히 허목에게로 돌아섰다. 내 등을 찔렀다. 이런 물건을 도성에 둘 래야 둘 수가 없었다. 먼저 도성에서 치우고서, 그뒤엔 그 사촌형인 좌상도 치워버리리라. 좌의정 권대운...이놈도 이제는 믿을 수가 없다. 권대재가 허목 편에 붙은 게 아니라, 제 사촌형을 만인지상에 올리기 위해 허목을 움직인 것이리라. 어쩌면 알고도 묵인했거나, 아무도 모르게 제 사촌아우를 움직였거나...이런 권대운을 놔둘 수는 없었다. 좌상에서 끌어내리고, 민희를 좌상으로, 오시수를 우상으로 앉히리라.



"전하, 판부사 허목은 연로한 대신이온데, 자수를 하라고 핍박하는 것은 체모를 크게 상하는 일이옵니다."


해질녘에 편전으로 민암이 돌아와 고하는 말이었다. 붉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편전의 전돌바닥은 그저 울긋불긋했다. 숙종은 불그스름해진 전돌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시퍼런 냉소로 되받았다.


"누군가 허목을 기망한 것이니, 그를 자수시킬 것이다. 그자는 도성 안에, 조정 안에 있으니. "


그렇게까지 허목을 지키고 싶으십니까? 그게 과연 허목을 지키는 방식이십니까? 민암은 입안의 쓴웃음을 애써 삭였다.


"전하, 그자라면 신이 압니다."

"도승지가 안다?"


숙종은 묘한 눈빛으로 민암을 보았다. 허적을 개유하고 오랬더니, 돌아오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허목을 움직인 손을 안다니. 어쩐지 민암의 입이 허적의 입으로 보였다.


"예, 전하. 애초에 이옥과 유명천의 일이 터졌을 때, 그 일로 조정이 분열을 했사온데, 당시 허목은 이옥을 편들었사옵고, 그때 허목은 누군가의 청을 들어준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청?"


숙종은 속눈썹이 뻣뻣해질 정도로 두눈을 치뜨고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민암이 지금 군불을 지피고서 굴뚝을 때워 냄새를 피우려 한다. 그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괴롭힌다.


"예, 그자는 또 영상이 흉서도 이틀이나 감추었다고 비난하도록 이수경을 사주했사옵니다. 심지어는 허목까지 기망하여 영상의 관복을 벗기려고 필사적이지요."

"그자가 누군가?"

"권대재이옵니다."


드디어 민암이 그 이름을 꺼내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듣던 숙종은 돌연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였다.


"전하?"

"좀 고단하여 말이지."

"하오시면 간략히 아뢰겠나이다."

"..."

"권대재는 지난해 허목이 연천으로 내려갈 적에도 기어코 따라가서 장문의 글을 건네어 허적과 오시수를 배척하라 이간질한 일이 있습니다. 하여 영상이 좌상을 의심하여, 왜 사촌과 조카를 시켜서 자신을 끌어내리려고 하냐, 그리 따진 적도 있사옵니다. 하오나 기실은 권대재가 영상을 끌어내리고 그 사촌인 좌상을 영상에 앉히려고 꾸민 일이라..."

"..."

"이 모든 사달을 일으킨 권대재를 멀리 전보轉補(보직이동) 시키시옵소서."

"..."


숙종은 나른히 두눈을 감았다. 이젠 목소리도 허적으로 들리는구나. 정말로 좌상이 사촌동생 권대재를 시켜 영상을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이라곤 믿을 수가 없다. 좌상이 그리 수를 읽히는 짓을 할 리가 없다. 허목도 권대재의 수작에 놀아날 만큼 실 없는 사람이 아니다. 따로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허적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그러니 지금 허적도 허목과 권대운, 둘 다 예기를 꺾어놓으려고 기를 쓰는 중이다. 그 목소리가 지금 민암의 입을 빌어 자신의 귀로 불어와 닿는 참이다. 자신도 이미 알고도 속아주려는 참이다. 그런데 왜 알고도 속아주려는 이 순간 하필이면 졸음이 쏟아지는 건지. 숙종은 꾸벅꾸벅 졸며 깜빡깜빡 눈을 부대꼈다.


전보라...



"전하께선 대사간 영감이 사촌인 좌상대감을 위해 영상대감을 자리에서 끌어내려 판부사대감을 기망한 것으로 보시고, 대사간 영감을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전보 조치 하셨습니다."


허목은 어두컴컴한 빈청에 홀로 앉은 채로 도승지 민암의 말을 착잡히 듣고만 있었다.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을 함경도 종성도호부의 부사로 옮기다니. 게다가 좌의정 권대운도 자리를 내어놓았다니. 이제 권대재는 벼랑에서 굴러떨어진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권대재를 걱정하기 이전에, 허목 자신이 먼저 벼랑에서 굴러떨어진 듯한 타박상을 온몸으로 느끼는 터였다. 온몸이 얼얼하고 얼어붙어...심장이 펴지도 못하고 움츠러든 채로 굳어가는 이 고통을, 전하께서 알 리가 있을까. 모르시면, 알게 해드려야지. 그게 신하의 도리이니.


"앞장서게."

"네?"


한순간 민암은 허목의 말을 못 알아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어디를 앞장서라는 건지. 하지만 그는 허목의 말을 한참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그저 허목을 왕에게 안내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냥 약간의 거리낌 정도로만. 이제 와서 허목이 왕을 만난다고 이미 결정난 사안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 크게 께름칙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마뜩찮은 기분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허목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대신의 독대는 불가한 바...내가 다른 한림들을 앞세워 전하를 만나면 좋겠는가?"

"제가 앞장서지요."


민암이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허목의 말대로, 다른 한림翰林(왕의 명을 기록하는 벼슬 혹은 왕의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들을 끼고 허목이 왕을 만날 바엔, 자신이 있는 편이 더 나았다. 그는 허목에게 등을 보인 채로 흘끔 곁눈으로 허목을 흘겨보았다.


노인네, 당신이 졌다니깐.



"무슨 짓이오? 석고대죄라니?"


숙종은 허목이 기어이 민암을 앞세우고 통명전 뜨락까지 찾아와서 거적을 깔고 대죄하자, 몹시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허목과 함께 온 도승지 민암을 노려보았지만, 민암은 그 옆에서 두손을 정갈히 모은 채로 시선을 회피할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노려보곤, 숙종은 서온돌 장지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장지문에 하얗게 불빛이 반짝이는 참이었다. 아무래도 신료들이 통명전 앞으로 찾아드는 일이 잦아, 번거롭기 그지 없었다. 아무리 중궁이 조보를 읽지 않는다고, 대청마루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손바닥으로 비를 막는 기분이었다.


"전하께선 신에게서 허적을 지키려 하심이옵니까, 아니면 허적에게서 신을 지키려 하심이옵니까?"


허목은 숙종 앞에 고개를 조아린 채로 거침 없이 여쭈었다. 곁에서 민암이 흰자위가 도드라질 정도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허목은 거리낄 게 없었다. 더는 체면을 따질 상황도,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 허목을 보는 숙종의 두눈이 언뜻 처연하게 반짝였다. 허목의 나이가 여든 다섯. 볼 때마다 나이를 세게 된다. 되새기게 된다. 여든 다섯...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다. 가까이 두고 싶어도 오래 둘 수가 없다는 사실은, 마음 한 귀퉁이를 말아서 온전히, 오롯이 붙여둘 수 없게 한다. 언제든 자신의 마음에서 떨어질 수 있도록.


"말씀해 주소서."


허목의 독촉에 숙종은 눈길을 돌려 그 옆 민암을 쳐다보았다. 당하관들은 언제고 승지나 사관 없이 불러 앉혀놓고 독대할 수도 있거늘, 당상관들은 왜 이리 걸리적거리는 게 많은 건지. 숙종은 민암을 뾰족한 눈길로 흘겨보곤, 다시 허목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허목의 눈시울이 유독 붉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일 만큼 붉었다.


"경을 지키기 위함이오."

"..."


왕의 옥음에 허목은 반신반의하듯 가만히 침묵했다. 허적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려 한다고 답하였다. 헌데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그저 자신이 대답을 청한 때문인지, 선심을 쓰듯 빈말로 답을 하신 건지.


"정말이시옵니까?"

"정말이오. 경을 지키려는 거요."


왕의 옥음에 허목은 감격하거나 감읍하긴 커녕 오히려 미간을 실룩였다. 고개를 조아린 탓에 덤불 같은 흰 눈썹에 덮인 눈두덩도, 그 눈두덩 아래로 뻗은 흰 가시 같은 속눈썹도, 그 속눈썹에 가려진 눈동자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허목은 고개를 조아린 채로 두눈을 홉뜨고, 가만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감히 왕의 용안을 보지 않으려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 눈은 짙은 원망으로 번뜩였다.


"이게 정녕...신을 지키는 전하의 방도시옵니까?"

"판부사?"

"정녕...신을 지키는 방도라 믿으셨사옵니까?"

"..."

"정녕, 정녕, 정녕! 신을 지키는 방도라 믿긴 하셨습니까?"


허목의 음성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숙종은 영문을 모르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자신의 대답이 오히려 허목을 자극했다. 오히려 허목의 울분을 일깨웠다. 자신이 아닌 허적의 손을 든 결과를 따지기 위함인가, 아니면 방도 그 자체를 따지기 위함인가?


"왜 이러는 것이오?"

"어떻게, 어떻게 이게 천신을 지키는 방도라 믿으셨사옵니까? 전하께오선 신을...고작 남의 말에 놀아나는 천하의 반편 중의 반편半偏으로 만드셨사옵니다!"

"..."

"이제 어찌 신이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이까? 어찌 신이...살아 숨을 쉴 수 있겠나이까? 어찌 신이...신이..."


허목은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고개를 조아리며 통곡했다. 반년만 기다려라, 숙종은 그리 말하려다 민암의 존재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허목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 선인仙人이라 세간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영험한 구석이 있는 인물인 만큼 아흔아홉살이 되도록 살 수도 있으려나...하지만 한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정말로 못할 짓을 한 셈인가. 그의 얼굴에서 가죽을 벗기고, 이름을 뜯어낸 셈인가.


"차라리...신을 죽여버리시지...신을...죽여버리시지..."

"..."

"이게 전하께서 사람을 지키는 방도시라면...전하께선 결코, 결코 중전마마를 지키실 수 없습니다."

"뭐라?"


숙종은 허목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순식간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중전을 지킬 수가 없다? 그걸 말이라고? 중궁을 지킬 수가 없다?


"중궁은 왜 걸고 넘어지는가?"


순식간에 검게 불타오르는 눈동자로 왕이 허목을 노려보자, 민암은 가시돋친 시선으로 허목을 보고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허목은 입을 우무러뜨리긴 커녕 오히려 비죽거리고선 더욱 분명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답하였다.


"정녕 전하께서 이런 방도로 천신을 지키려 하신 것이라면, 전하께선 똑같은 방도로 중전마마를 지키실 수 없다는 것을, 전하께서 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판부사!"


숙종은 이내 충혈된 눈으로 허목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중궁은 건드리지 말아야만 했다. 왜 중궁을 걸고 넘어지는 건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고약하고 괘씸했다. 하지만 분노에 휩싸인 채로 허목을 쏘아보던 숙종은 한순간 자신을 보는 허목의 눈물 고인 두눈을 보고 말았다. 감히 용안을 보았다고 탓할 수도 없었다. 감히 용안을 본 것이 아니라, 감히 자신의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을 두눈에 꺼내보인 것이었다.


"전하께선...중전마마를 이렇게는 지키실 수가 없습니다."

"..."

"그만하시지요 대감!"


마침내 도승지 민암이 한마디 끼여들었다. 하지만 허목은 민암이 끼여들 틈새도 내어주지 않았다.


"중전마마께는 부디, 부디, 그 방도를 달리 하시길 바라옵니다."

"물러가라."


숙종은 입안의 한숨을 씹어삼키듯이 답하였다. 허목은 마지막 충언을 다한 듯이,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고개를 까딱 떨구고서, 엎드린 자리에서 사배례를 거행했다. 작별의 의미가 그 맞댄 두손에, 떨군 이마에 절절히 담겨 있었다. 그렇게 허목은 너무도 초라하게 무너진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빠지기라도 하였는지, 순식간에 중심이 무너진 모습으로 휘청거리면서, 그는 힘겹게 편전을 물러갔다.


"..."


숙종은 가슴이 한순간에 꽉 막혀버린 기분이 되었다. 차라리 죽여버리지 그랬냐고, 자신을 원망하던 허목의 그 음성, 그 눈빛이 가슴을 후벼팠다. 허목을 권대재의 이간질에 놀아난 실없는 반편이로 만들지 말고 차라리 허적을 모함한 죄로 벌하였더라면, 권대재를 함경도로 내쫓는 대신에 허목을 함경도로 내쫓았더라면, 허목의 두눈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死且不爲

죽어도 아니다...


저렇게 부러질 지언정 굽히지 않는 사람을 구부러뜨렸으니...숙종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쥐어뜯었다. 자신이 이기적이었다. 너무도 이기적이었다.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다시 결정하라 해도 똑같은 결정을 이기적으로 내릴 것이었다. 구부러뜨려서라도 살려야겠으니, 그러니 이기적이어도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또 다시, 이기적인 결정을 내려야겠으니.


"도승지, 좌상한테서 사직소를 받아내라. 아무래도 영상은 편전 바닥이 깨끗해져야만 돌아올 모양이니."

"좌상...한테 말이옵니까?"


민암이 우물쭈물하며 되물었다. 좌상대감한테까지 사직소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하루아침에 좌상대감이 물러나면, 그 자리를 이어받을 자들이 없는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법이니, 아마도 허적의 수족이 되어 의금부의 옥사를 처결한 민희와 오시수가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을 맡으면 될 일이긴 해도 그들이 재상감은 못될텐데. 그런데, 도대체 성상께선 무슨 생각으로 허적에게 전권을 쥐어주시는 건지. 허목과 권대운을 쳐내면서까지, 허적을 지켜주려는 건지.



"중전마마, 춘택이가 왔사옵니다."


쑥국이며, 쑥지짐이며, 쑥내음이 가득한 조반을 들던 진홍은 장지문 밖에서 들려오는 씩씩한 음성에 깜짝 놀랐다. 춘택이라니. 너무도 반가운 손님이었다. 오라비에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장남이고, 아비와 어미에겐 귀하디 귀한 장손인 아이였다. 광산김문의 혈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미간의 콧날이 오똑하게 살아 있어, 장성하면 더욱 인물이 수려할 것이라 아비의 기대도 컸다. 한동안 궁궐 출입이 뜸하다 싶었더니 느닷없이 찾아들었다.


"춘택이? 들라 하라."


진홍은 살짝 광대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웃는 얼굴로 답하고서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라상을 내어가게 하고 춘택의 입시를 기다렸다.


열살이 되더니 조잘조잘 얘기도 잘 늘어놓는 춘택이었다. 어떨 때는 본방의 어른들이 털어놓지 않는 얘기도 털어놓기도 하였다. 물론 이제는 눈치가 빤하여, 해도 되는 얘기인지, 하면 안 되는 얘기인지를 가늠할 정도로 속머리가 제법 굵어지긴 하였다. 그래도 잘만 구슬리면 그녀가 듣고 싶어하는 얘기도 곧잘 꺼내놓으니 그녀에겐 박씨를 물고 온 봄날 제비처럼 반갑기만 하였다.


장지문이 열리고, 그새 한뼘은 더 큰 듯한 춘택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두눈은 흘끔흘끔 진홍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이내 시침을 뚝 떼고서 짐짓 의젓하게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그래, 춘택이 너는, 잘 지냈느냐?"

"네, 중전마마."


춘택은 두손을 모은 채로 이마를 떼지 않고 대답했다. 수중에는 웬 서찰 하나가 꼬깃하게 접혀져 있었다. 춘택은 수중의 서찰을 꼼지락꼼지락 만지면서, 통명전 앞에서 쪽지를 건넨 주름투성이 손을 떠올렸다. 쌍커풀이 보일락말락 눈두덩을 덮은 은백의 눈썹도 떠올렸다.


중전마마께 전하라 하였는데...손바닥만하게 접힌 쪽지 겉면엔 우물정, 뒷면엔 열십의 표식...그 표식이 괴이하여 슬쩍 읽어보았기에, 무슨 내용인지는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다.


- 천신 허목, 도성을 영영 떠나게 될 것 같사옵니다. 중전마마의 탄신을 앞두고 태임이 태어날 거라 예언했던 술사는 다름 아닌 신의 친우였나이다. 신은 친우의 예언을 믿지 않았사오나, 뒤늦게야 중전마마의 성품에 감복하여 마음으로 승복하였나이다. 허니 그저 그림을 가르친 인연으로만 기억하지 마시고,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면, 신의 그림을 통명전 협문에 높이 내거시옵소서. 하오시면 천신과 인연이 닿은 자들이 성심껏 마마를 도와드릴 것이옵니다.


이걸 전해도 될까. 그자는 남인의 수뇌인데. 허적과 권력을 다투다 쫓겨나가는 자인데. 뭘 믿고서. 춘택은 이미 조보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읽어 시국을 잘 알았다. 춘택이 고민하며 눈치를 보는데, 장지문 밖에서 왕의 옥음이 들렸다.


"춘택이가 왔다지?"


춘택이 두눈을 반짝이는 순간, 웃음을 머금고 일어서려던 진홍이 화들짝 놀라 그대로 주저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전마마?"


춘택이 놀라서 쳐다보는데, 장지문이 시원하게 열리면서 왕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진홍은 배를 두손으로 감싸쥔 채로 두눈을 화등잔 만하게 뜨고서 멀거니 허공을 보았다. 그 검은 동공이 반짝반짝하였다가, 속눈썹이 깜빡깜빡하였다.


"중궁?"

"..."

"이 서방이 안 보이는 거요? 나요. 나 안 보이오?"


숙종은 진홍이 일어나긴 커녕 쳐다보지도 않자 두눈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 성질머리로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진홍의 얼굴을 두손으로 부여잡고 얼굴을 바짝 갖다대었다.


"전하를 뵈옵니다."


대답은 뒤에서 들렸다. 춘택이놈이다. 숙종은 고개만 까딱하곤 중궁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담길 만큼 가까이 대었다.


"전하는 지금 중궁의 눈동자 속에 들어가느라 바쁘시다."

"전하?"


숙종의 짓궂은 대답에 춘택은 벙찐 얼굴이 되었다. 열살인 자신의 눈에는 마냥 크기만 한 전하께서 어떻게 고모의 눈동자에 들어가신다는 건지. 남녀간의 눈동자에 서로 얼굴이 비치는 이치를 모르는 춘택으로선 그저 의아하기만 하였다. 한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지금 자신은 두사람의 눈엔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춘택은 두사람 사이에 끼여서 손안의 쪽지를 더욱 움켜쥐었다. 지금은 드릴 수가 없다. 지금은 그저 이 웃음꽃 속에 파묻히고 싶었다. 고모인 중궁과 고모부인 왕...이 두사람 틈새로 이 쪽지를 비집고 넣을 수는 없으니.


"중궁, 나 안 보이오?"


계속해서 채근하는 왕의 음성에, 진홍이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이 숙종의 동공에 들어차는 순간 진홍의 보드라운 손이 그의 손목에 닿았다. 맥박이 뛰는 그 자리...그 한점에 닿은 손끝이 숙종의 손끝을 다홍치마에 덮인 배 위로 잡아끌었다.


"들어보십시오."

"뭐?"

"아기가, 말을 걸었사옵니다."


진홍이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숙종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눈동자에 별빛을 심었다. 태동인지, 박동인지 분간도 되질 않는데, 저 눈동자의 별빛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 같다. 반짝반짝, 두근두근, 꾸물꾸물...정말로 손에 태동이 잡힌다. 볼록볼록...오랜만에 손에 쥐는 감촉이었다. 숙종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면서 진홍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중궁?"

"그리웠나...보옵니다."

"무슨..."

"이 느낌, 이 기운...너무 오랜만입니다."


진홍은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눈시울이 젖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하얗게 웃는 얼굴이 숙종의 붉은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리웠나 보다면서, 너무 오랜만이라...그리 울고 웃는 얼굴이 심장에 틀어박혀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기쁜 거요, 슬픈 거요?


숙종은 손을 뻗어 진홍의 얼굴을 품에 안았다. 고요히 숨을 쉬는 코끝이 자신의 펄떡거리는 심장에 닿는 느낌이 너무도 아릿했다. 뭉클한 체온이 자신의 심장박동을 듣고, 또 느끼고 움찔하는 것이 품안에서 느껴졌다. 심장이 멈출 것 같다고 느낀 순간이 오히려 날뛰는 순간이 되었다.


설렘인가, 불안인가.


허목의 음성이 아직도 고막에 들러붙어 있었나. 숙종은 고막을 파고드는 허목의 발언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서, 자신의 손끝이 마냥 차디찼다.


- 전하께선...중전마마를 이렇게는 지키실 수가 없습니다.

- 중전마마께는 부디, 부디, 그 방도를 달리 하시길 바라옵니다.


허목은 진정이었다. 진정으로 충언을 하였다. 왕이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 오히려 자신을 죽였음을, 정치생명도 끝장내고, 얼굴가죽도 벗겨내고, 이름까지 떼어내어, 그대로 세상에서 매장시켜 버렸음을, 여실히 보여주며 충고했다. 중궁에겐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마시라, 고통어린 두눈으로 그리 말하였다.


사부가 알면, 역시 실수한 것이라 쓴소리를 할까.


그래도 소용이 없는 일. 아마 사부가 있어도, 사부가 왔어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숙종은 아랫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힘껏 깨물었다. 중궁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허목이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이었으니, 중궁은 이렇게 무너뜨려선 안된다는 사실을 한가지 배웠다. 도대체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도대체 사부는 어디에 있기에 여태 돌아오지 않는 건지, 무사하긴 한 건지.


"대비전과 공주전께서 납셨나이다."

"드시라 하라."


장지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숙종은 어깨를 움찔했다. 장지문이 열리고, 오랜만에 명안공주를 데리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어미를 보다가, 숙종의 시선은 이내 열세살의 명안공주에게로 옮겨갔다.


"전하...요즘 용안을 뵙기가 너무너무 힘드옵니다."

"그랬던가?"


숙종은 명안공주의 투정을 받아주며 빙긋 웃었다. 보통 혼인 적령기는 열다섯...그나마 왕실이 빠른 편이긴 해도, 열세살 안팎의 나이에 가례를 올린다. 마침 숙종의 눈앞에, 최석정을 불러들일 좋은 구실이 있었다.


- 명안공주의 부마를 정할 것이니, 적령의 아들을 둔 자들은 속히 단자를 제출하라.


느닷없는 봉단령이 내렸다. 가례청이 준설되고, 당상관과 도청, 낭청들이 배속되더니, 부마단자를 접수하느라 바빴다. 집집마다 부마단자의 일로 떠들썩하였지만, 지아비가 문외출송되고 친정에 아이들을 데리고 더부살이를 하는 처지인 경주 이씨는 그저 남의 일이려니 하였다. 헌데 갑자기 예조정랑이 찾아왔다. 마당에 세워놓는 일은 예가 아니지만, 그가 꺼낸 첫마디가 워낙 가관이라 경주 이씨는 차를 내오거나 술을 내오거나 할 경황도 없었다.


"이댁에 아드님이 계시지요?"

"제 아들은 왜..."

"한번 얼굴이나 좀 봅시다."


예조정랑이란 자가 다짜고짜로 아들 창대의 얼굴이나 보겠다고 나서다니. 경주 이씨는 불안하고 불길하여 두손을 비볐다. 헌데 웬 관리들이 찾아들자, 어린 마음에도 어미를 지킬 심산이었는지, 사랑채 건넌방에서 창대가 걸어나왔다.


"무슨 일로 저희 집을 찾으셨습니까?"

"오...자네가 최석정의 아들인가?"


예조정랑은 묘한 눈길로 창대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열살? 열한살? 어리다. 명안공주도 어리지만, 이놈은 더 어리다. 이리 어린 놈의 부마단자를 받아가야 하는 건지. 하지만 하필이면 왕이 콕 집어서 최석정의 집에 가서 부마단자를 받아오라 명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예. 창대라고 합니다."

"제 아들은 왜..."


경주 이씨가 치맛자락으로 창대를 감싸듯이 끌어안았다. 온통 신경이 곤두선 경주 이씨를 흘낏 쳐다보고 예조정랑은 묘한 냉소를 머금었다.


"뭐...부마단자를 내셔야지요."

"네? 부마단자라니요?"


경주 이씨는 기가 막혀서 두눈을 깜빡였다. 부마단자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지아비가 문외출송 죄인이 되었는데, 예조정랑이 직접 찾아와서 부마단자를 내놓으라 하다니.


"지금 조선 전역에 봉단령이 내린 걸 모르시오?"

"아니...지금 제 지아비는 문출門黜(문외출송)된 죄인입니다. 어찌 부마단자를 내란 말이십니까?"

"난들 아나. 전하께서 꼭 부마단자를 받아오라 하였으니, 지금 준비해주게."


예조정랑이 짜증스레 말하였다. 경주 이씨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지아비는 스승을 따라 거제로 가더니 벌써 두어달째 연락두절이었다. 물론 나라에서 봉단령이 내렸으니 그녀 혼자 알아서 부마단자를 내었다고 지아비가 탓할 리도 없지만서도, 이거 덜컥 부마단자를 내었다가 아들이 부마가 되어도 곤란했다. 아들이라곤 창대 하나였다. 하나 뿐인 아들이 덜컥 부마가 되면, 살아생전 아들이 문과에 급제한다거나, 문관으로 출세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터였다.


초조히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그녀를 보면서 예조정랑도 짜증스레 제 턱을 꼬집었다. 도대체 왜 왕이 굳이 최석정의 아들에게 관심을 두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왕이 지목하여 부마단자를 받아오는 만큼, 적어도 초간택에서 최창대가 떨어질 일은 없을 터였다.


- 참판 오두인吳斗寅의 子 태주泰周, 유학 김만년金萬年의 子 유손有孫, 급제及第 최석정의 子 창대昌大, 현령 김성최의 子 용득龍得에겐 혼인을 금지시키고, 나머지는 허혼許婚토록 하라.


초간택이 열리고, 왕의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렸다. 도승지 민암은 언짢은 기색으로 비망기를 받아들었다. 하루아침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아무리 봐도 이중 유력한 건 오두인과 최석정이었다. 둘다 서인이니, 서인 쪽에서 부마가 나오게 생겼다. 물론 부마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맛도 멋도 없는 자리였다. 오히려 아들 벼슬길만 막힐 일이니 좋을 게 없었다. 아들을 왕실에 인질로 내어놓는 대신 가문의 안위는 보장이 되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아 하나. 그렇다곤 해도 왕실 일원을 서인으로 채우게 생겼으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특히나 최석정의 존재는 더더욱 달갑지가 않았다.


민암은 왕이 신료들과 윤대를 준비하는 동안 곁에서 은근히 간하였다.


"전하, 최석정은 문출 죄인이니, 그 아들 최창대는 부마에 적합하지가..."

"그렇소? 알았소."


왕은 짤막히 대꾸하곤 더는 언급이 없었다. 민암도 왕이 굳이 최석정의 아들을 부마로 삼을 생각이 없을 거라 믿었기에 더는 간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최창대는 최석정의 외아들이었다. 아들이 둘인 것도 아니고 하나인데 왕이 그 아들을 부마로 삼을 리가 없었다.


헌데 닷새가 지나고, 민암이 승정원에 등청하자마자 또 뜬금 없는 비망기가 내렸다.


- 급제 최석정을 방기문출放其門黜(문외출송에서 풀어줌)하라.


민암은 짜증스레 눈밑을 실룩거렸다. 정말로 왕은 최석정의 아들을 부마로 삼으실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어쨌거나 이 정도 소식이 전해지면 어딘가에 틀어박힌 최석정도 한달음에 달려올 터였다. 그 천재입네 하는 교만한 면상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뒤틀렸다. 민암은 당장 비망기를 들고 빈청으로 달려갔다.


"설마, 최석정의 아들을 부마로 삼으시겠는가?"


조정에 돌아오자마자 최석정을 문외출송에서 풀어주게 생겼다. 허적은 마뜩찮은 얼굴로 허공을 보며 말하였다. 오두인의 아들, 최석정의 아들...둘 중 하나는 부마가 되게 생겼다. 게다가 이번 간택 문제로 최석정이 나타나도 누구도 트집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들 잘둔 덕에 누구는 자유의 몸이 되었구먼."

"..."


빈청 안에 허적의 발작적인 쓴웃음이 흘렀다. 급할 것도 없는 명안공주의 혼사를 왕이 억지로 서두르더니, 결국 그 혼사를 핑계로 최석정을 문외출송에서 풀어주었다. 아니, 그 아들을 인질로 삼아서 최석정을 불러들일 심산이신가? 아들이 부마가 되길 원치는 않을테니 최석정도 부랴부랴 달려올 터였다. 어디 숨어있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최석정이 떳떳하게 고개를 내밀고 도성거리를 활보하게 생긴 데다, 왕실의 사돈 자격으로 나설 수도 있었다. 물론 최석정을 싫어하는 대비 김씨가. 최석정의 아들이 부마가 되는 것을 두고 볼 리는 만무하였지만.



"그래도 안 나타난단 말이지..."


아들에게 금혼령이 떨어졌는데도, 최석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숙종은 최석정을 기다리다 결국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를 부마로 낙점했다.


- 오두인의 子 태주를 부마로 낙점하였으니 나머지는 허혼토록 하라.


아무래도 최석정의 하나 뿐인 아들을 부마로 삼을 수는 없었다. 일단 문외출송도 풀어주었으니 언제고 최석정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릴 뿐이었다.


또 두달이 흘렀다. 푸릇푸릇하게 대궐을 감싸던 신록은 어느덧 불긋불긋하게 대궐을 감싸는 낙홍으로 바뀌었다. 전설典設과 상세尙洗 등의 내관과 궁녀들이 비를 들고 앞뜰 뒷뜰의 낙엽들을 쓸어내기 바쁜데도, 바람이 다시금 불어와서 낙엽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도로 흩어놓았다. 간밤에 비가 왔으니 땅이 질척거려 낙엽들이 달라붙을 법도 한데도, 바람이 다소 굵어진 건지, 거칠어진 건지.


진홍은 어느덧 만삭이 되어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로 힘겹게 통명전 대청마루에서 내려섰다. 봉이와 상아가 저마다 앞뒤로 보호하듯 지키고 서서 부축을 해주는데도, 이미 봉긋하게 솟아버린 봉우리 하나로 발치가 완전히 가려져서, 진홍은 오른발로 불안하게 발치를 더듬었다.


"여기 당혜이옵니다."


이미 사슴가죽 당혜도 제법 늘어나 버렸다. 발이 붓고 하다 보니, 회임 전의 형체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같은 신인가 싶을 만치, 너부죽이 퍼진 당혜의 입구마다 진홍은 한발씩, 또 한발씩 조심스레 넣었다.


"조심, 또 조심하소서!"


그 와중에도 봉이가 호들갑을 떨면서 잔소리를 하였다. 충분히 조심하는 참인데. 진홍은 입맛을 쓰게 다셨지만 진홍을 곱게 흘겨보고 굳이 따지지 않았다. 출산을 앞두고 이미 내의원 한켠에 산실청이 차려졌다. 출산이 처음이 아닌데도, 어쩐지 가슴이 후들거릴 만큼 출산이 두렵다 보니, 그러면서도 용기를 내어 출산을 준비하는 참이었다. 하루에도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조심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진홍이 두 본방나인은 물론 다른 지밀나인 여섯과 상궁 둘을 대동하고 산보를 나서자, 협문을 지키는 금군의 눈길이 걱정스레 따라붙었다. 복중태아만 건강하다면야, 언제든지 무사히 순산을 마칠 것을, 진홍이 내딛는 걸음마다 위태위태하게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낙엽을 조심하소서. 비가 온 뒤엔 본래 낙엽이 더 미끄러운 법이옵니다."


뒤따르던 상궁 하나가 노파심에 충고했다. 진홍은 주변에 잔소리꾼들만 있는 현실이 답답하였지만, 고맙기도 하였다. 길이 미끄럽다고 산책을 안할 수도 없으니, 순산을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걷고 또 걸어서 태아가 나올 길을 터줘야 하니...조심해서 걷는 것만이 정답이었다.


"이럴 때는 전하의 손을 잡고 걸으셔야...안전하실텐데."


볼멘 소리로 봉이가 푸념했다. 진홍은 대답 대신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아침공기를 들이마셨다. 아침이슬이 마르지 않을 시각에, 그러니까 왕이 중신들과 윤대輪對를 할 시간에, 가볍게 산보를 나온 거니 어쩔 수가 없었다. 진홍은 아쉬운대로 발끝에 집중하여, 또 눈앞에 집중하여 천천히 거닐었다. 코끝에 닿는 가을바람이 소슬하면서도 상쾌했다. 조금은 발치에서 미끌거리긴 하였지만, 발밑에서 바삭바삭거리는, 혹은 미끌미끌거리는 낙엽도 폭신해서 좋았다. 뱃속의 아기가 꾸물거리는 것이, 아기도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리도 좋으니?


그제야 진홍은 지아비도 함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작은 후회가 들었다. 이따 정오에 다시 나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때는 꼭 지아비의 손을 잡고...


저벅저벅.


갑자기 등뒤에서 빠르게 걸어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진홍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몸이 무거운 탓에, 무릎도 뻐근하여 기민하게 돌아서거나 하는 일은 무리였다. 애초에 동작이 느린 진홍인 만큼, 회임 후엔 더 느려터진 그녀인 만큼, 그저 느릿하게 뒤돌아본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휘둘린 그녀의 시선에 반가운 얼굴이 닿았다.


"누가 혼자 산책을 나오랬소?"


지아비가 노려본다. 진홍은 가슴이 덜컥하니 놀랐다가 배시시 웃어버렸다. 그저 반가웠다. 자신도 손이 허전하고, 속이 허전하던 참이었다.


"전하..."

"누가 혼자 나오랬냐, 이 말이오."

"혼자는 아니옵고..."

"날 두고 갔잖소."


숙종은 퉁명스레 말하고서 진홍의 두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손끝에서 진홍의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전하는 너무 빨리 걸으시옵니다."

"천천히 걷겠소."

"너무 많이 걸으시옵니다."

"조금만 걷겠소."

"정말이시옵니까?"

"아니."


숙종은 진홍의 손을 불쑥 잡아끌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홍이 놀라서 제지하듯 자신을 불렀지만, 숙종은 짓궂은 웃음을 얼굴 가득 떠올리며 휘적휘적 걸어갈 뿐이었다. 진홍의 손을 잡고 걷는 그의 손에 유독 힘이 들어갔다. 방금 그는 편전 어탑에서 신료들의 무릎으로 비망기 하나를 던지고 나온 길이었다.


- 왕실의 경사가 박두하였으나, 조정과 왕실은 화기和氣를 잃고 서로 반목하는 바, 지난날 편벽했던 과인의 처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마음 지극하다. 남구만, 구일, 권대재, 권해, 이옥, 이봉징, 민정중, 민유중, 이숙, 이익, 이선 등 멀리 귀양 보낸 자들을 방면토록 하라.


이제는 우의정이 된 오시수도, 좌의정이 된 민희도, 충주로 내려갔다가 결국 영의정으로 복귀한 허적도 펄쩍 뛸 노릇이었다. 자신들도 모르게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 그들의 두눈에서 반발의 빛이 이미 펄쩍펄쩍 뛰었다. 어떻게 떼어낸 자들인데, 도로 들러붙게 생겼다. 중궁의 출산을 앞두고, 왕이 하필이면 자신의 정적들을 모두 사면했다. 한사람한사람, 힘들게 끌어내린 자들인데, 이리 쉽게, 어이 없이 도로 불러들이게 생겼다. 그것도 중궁의 순산을 기원하는 취지라니? 물론 순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죄수들을 사면하는 것이 왕실과 조정의 관례이긴 해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을. 그들의 두눈이 그렇게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러댔다.


숙종은 이마에 어린 두통을 즐기듯이 입꼬리를 틀어올리면서, 계속해서 진홍의 손을 잡아끌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발꿈치가 살짝 미끄러질 뻔하였지만, 등뒤에서 축축 늘어져서 따라오는 중궁과 태아의 무게 덕분에 다행히도 모면했다. 자신이 도움이 되어 진홍을 이끌어줘야 하는데도 거꾸로 도움을 받은 자신이 살짝 한심하였지만, 숙종은 그럴 수록 더욱 진한 미소를 머금고 한발한발 걸어갔다. 당장 내일부터 맞서 싸워야 할 남인들의 얼굴들을 하나둘씩 머리에 떠올리며, 그렇게 전투적으로 걸어갔다.


"전하! 괴수 송시열을 추종하는 민정중을 석방하다니요. 이는 너무도 부당하신 처사이시옵니다!"

"전하, 남구만은 상신相臣을 모함한 자이옵니다."

"구일 또한 중옥重獄을 꾸민 자인데 어찌..."

"하나같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자들이옵니다. 하교를 거두어주시옵소서!"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우의정 오시수를 비롯해서 민종도 등이 목청이 찢어져라 간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반년을 지겹게도 기다렸다. 자신이 저들을 사면할 수 있는 명분이라곤 중궁의 출산 뿐이었기에, 일부러 중궁의 출산에 맞춰서, 겉으로는 동지를 기약하는 척 최석정에게 윷판과 윷을 보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산실청의 설치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렇게 반년을 기다렸다. 이제는 그들을 불러들일 때였다.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허적의 기세를 꺾을 자들로 조정을 도로 채울 때였다.


"저들이 비록 죄는 있으나, 그 부모와 처자의 원망이 화기和氣를 상할까 저어되어 내가 놓아주는 것이다. 허니 그리들 알라."


왕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게 화기和氣라는 단어가 나왔다. 허적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왕의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왕은 지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중궁을 지키겠다고, 무사히 순산을 기원하는 의미로 저들을 놓아주겠다고, 허니 허튼 수작 말고 중궁이 무사히 용종을 생산할 수 있도록 잠자코 있으라고, 그리 자신의 의지를 피력한 것이었다. 허적 자신의 정적들을 모조리 풀어놓으면서까지. 허적의 두눈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그리도 중궁을 지키고 싶으십니까?


왕은 아직도 순진하다. 하긴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있으니 닳고 닳을 수가 없다. 중궁은 결코 왕이 지키고 싶다고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남인천하에서 중궁이 무사하길 바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의 성상은 너무도 천진난만하다. 게다가 광통교에서 자신의 아들 허견과 그런 일까지 있었던 마당에. 아직도 중궁을 지킬 수 있으리라 믿다니.


작가의말

승정원일기에도 최석정의 아들 최창대가 부마 간택의 최종후보들 중 하나로 뽑힌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오태주가 명안공주의 부마가 되고, 최창대가 떨어졌는지는 몰라도, 당시 숙종이 부마간택 기간에 최석정의 문외출송을 풀어준 건 사실입니다. 제 소설에선 숙종의 각별한 총애 탓으로 설정하였지만요. 천지인을 쓸 때만 해도 최석정의 아들이 부마가 될 뻔한 사연은 미처 몰랐는데, 그 제자가 숨은 부마가 된 걸로 써놓았으니...우연치곤 좀 얄궂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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