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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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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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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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2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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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69

DUMMY

허견이 또 다시 찾아오는 바람에 광성부원군 김만기는 영락 없이 인달방을 찾게 생겼다. 딸의 난산과 공주아기씨의 사망이 찜찜하여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김석주가 사람을 보내어 서찰로 종용했다.


- 우리 둘 중 하나는 참석해야지 않겠습니까?


김석주다웠다. 자기 하기 싫은 일을 교묘하게 남에게 떠넘기는 재주가 실로 용하였다.


김만기는 서찰을 가져온 약관 남짓한 서생을 흘끗 쳐다보았다. 청풍김가의 핏줄이라선지, 흑옥같은 살갗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시선을 휘어잡았다.


"자네도 청풍김문 사람인가?"

"예, 병판대감의 족제입니다."


석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좀전에 인달방에 가서 족형이 시킨대로 암탉 한마리를 제삿상에 투하하고, 또 장충방 재산루로 가서 족형에게 보고하고, 또 족형의 간찰을 받아와서 회현방 청풍부원군댁에 전하고...오늘따라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게다가 아까 암탉을 용봉차일 틈새로 밀어넣으면서, 닭털이 온몸에 여기저기 묻어나고 냄새도 손에 묻어난 참이었다. 석하는 허벅지에 묻은 닭털을 떼어내며 입을 실룩거렸다.


"잠시 기다리게."


만기는 서찰을 들고 내별당으로 향하였다. 아우 만중 내외가 자식들과 함께 거처하는 곳이었다. 워낙 효자라서, 아예 한집에서 살며 아침저녁으로 어미를 뵙겠다는 아우였다. 아우와 일단 상의해보고 결정할 심산이었다.


김만기가 내별당으로 가버리고, 석하는 계속해서 닭털이 더 묻진 않았는지 도포자락이며 바지자락을 살피다가, 손바닥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자네가 함께 가주겠나?"


만기의 제의에 석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나왔는지, 만기가 눈앞에 있었다. 석하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닭털 잔뜩 묻은 도포를 입고, 도로 허적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내가 닭 날렸네, 내가 범인입네, 얼굴에 써붙이는 꼴이었다.


"옷이 이래서..."


석하는 보란 듯이 만기의 눈앞에서 옷자락에 묻은 닭털들을 탈탈 털었다. 만기는 움찔하여 뒤로 한발 물러났지만, 눈빛은 물러서지도 않았다.


"내 아들 옷을 빌려주겠네."


석하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만기는 곁눈으로 흘끗 보면서, 석하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우 만중이 이 친구를 추천했다. 꼭 함께 데려가라면서. 꽤 쓸 만한 친구라고. 마상재의 귀재라던가. 수중에 납탄이나 시석이 있다면 어마어마한 괴물로 돌변할 것이라고.


만기는 아들 진구의 행의까지 석하에게 입혀놓고 함께 회현방을 나섰다. 김석주가 자신을 등떠밀었지만, 정작 아끼는 김석하를 데려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터였다. 돌아오지 않는 석하를 기다리다 일그러질 석주의 얼굴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헌데, 해가 저물어서야 만기와 석하가 허적의 집 마당으로 들어서니, 십여명의 무희들이 숙정의 가야금 연주에 맞춰 하늘하늘 나비처럼 춤을 추는 참이었다. 숙정은 꿀이 깃든 고운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석하가 들어서는 모습에 손가락 끝이 멈칫했다.


도련님.


해의 은총을 너무 받아서 검게 그을린 피부가 오늘따라 더 반짝거렸다. 흑옥같은 눈동자며, 타오르는 듯한 입술이며, 우뚝한 콧날 사이에 숨은 점까지 모두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잠시 황홀경에 젖던 숙정은 석하가 고개를 돌리고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두눈을 깜빡였다. 늘 병조판서 김석주를 수행하던 사람이, 오늘은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수행했다. 그댁 사위라도 되려는 건...숙정은 가슴이 덜컥하여 헛숨을 들이켰다. 그댁 여식들이 혼기가 찼는지, 남았는지, 한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어이구, 부원군 대감!"


허적이 중문 앞까지 달려나와 두손을 부여잡았다. 만기는 소름이 손목에 숨은 혈관을 타고 어깨죽지를 뒤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허적의 어깨너머로 징그러운 눈웃음을 짓는 허견의 얼굴도 보였다.


자신이 반가울 이유가 없었다. 이미 암중에서 중궁과 복중아기씨를, 또 두분 공주아기씨를 해한 자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었다. 헌데 이들이 자신을 마치 목이 빠져라 기다린 것처럼 반기다니 미심쩍었다.


"헌데 이 친구는..."

"오랜만입니다."


석하가 쓴웃음으로 화답하자, 허적은 미간을 찡그렸다.


"저번엔 최석정을 따라다니더니, 이번엔 또 부원군 대감? 아주 신출귀몰 바쁘구먼. 자네 정체가 뭔가?"

"아시다시피 병판대감의 족제...입니다만."


석하는 괜히 오른손을 허공에 대고 쥐었다 펴며 씨익 웃었다. 허적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잡놈이? 김석주가 통명전 앞에서, 자신의 목줄기를 잡고 들어올리던 그 치욕스런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석하로선 그날 허적이 보낸 무사들 덕분에 무려 보름이나 몸져 누웠던 탓에 이 정도 조롱으론 직성이 풀리지도 않았다. 남이 복수를 대신 해주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좋았다.


중궁의 부친이자, 임금의 장인인 청풍부원군 김만기가 동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석하는 서편이나 남편으로 가서 앉아야 했지만, 석하는 그냥 만기의 뒤에 조용히 시립했다. 왜 잔치를 즐기지 않느냐고 허적과 허견이 물었지만 그다지 잔치를 즐길 마음이 없었다. 서찰을 전하러 온 자신을 굳이 잡아끌고 이리로 데려온 것만 봐도, 이미 부원군의 심기가 다소 예민해진 상태였다.


"한잔 받으시지요."


계집종이 만기의 앞에 술잔과 소반을 차려놓고 가자, 허적은 술잔을 집어들어 친히 술을 따라주었다. 자신이 영의정이라 해도, 상대는 무려 중궁의 아비이지자, 왕의 장인인 탓에 어려웠다. 만기는 가만히 술잔을 받다가는 그만 손이 미끄러진 척 술잔을 발밑으로 굴렸다.


"어어? 아니 이를 어쩐다..."


만기는 자신의 실수에 당황스러운 척 맨손으로 도포의 물기를 툭툭 털고, 옆에 있던 오시수의 술잔을 뺏아들고 허적 앞에 내밀었다. 이 잔으로 술을 받겠다는 의미였다. 만기를 보는 허적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술잔에 독이라도 있을까봐 그러냐고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이 인간이 누굴 역도의 무리로 모나 싶어, 언짢기도 했다. 하지만 더는 분위기를 흐릴 수가 없어, 허적은 조용히 만기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고맙습니다."


만기는 순순히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잔을 뺏긴 오시수가 입가를 실룩이며 눈을 흘겼다. 계집종이 다시 오시수의 앞으로 술잔을 가져다 주자, 오시수는 혼자 술병을 기울여 술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오시수가 입을 비죽거리는데, 김만기가 허적에게 트집을 잡는 것이 들렸다.


"헌데, 오늘 이 자리엔 어째 서인은 해창위海昌尉의 부친인 호참戶參(호조참판)을 제외하곤 모두 남인 뿐이오?"

"다들 불렀는데 오지 않았소만."

"부응교는 어찌 안 부른 거요? 그 친구는 불렀으면 왔을 터인데."


만기가 언급한 부응교란 말에, 오시수는 그나마 혀끝에 남아있던 술맛도 뚝 떨어져 버렸다. 벌써 한철이 바뀌어 왕이 관료들의 직임을 물갈이를 한 터였다. 이조판서 홍우원 대신 이조판서에 이원정이 앉았고, 도승지 민암은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차피 밥그릇을 나누는 일이지만, 부응교 자리가 문제였다.


오시수가 눈치를 보듯 흘끔 허견을 돌아보니, 허견이 대뜸 발끈하여 코웃음을 치는 참이었다.


"흥, 부응교?"

"누가 부응교요 누가! 벌써 며칠째 전하께 개정改正을 청한데다, 그 친구는 아직도 사은을 않고 뻗대는구만!"


대사헌 민암 역시 버럭 성을 냈다. 부응교라니. 벌써 자신이 사헌부를 진두지휘하여 탑전에 개정을 청한 터였다. 몇날며칠이 거려서라도, 이번엔 삼십육계가 아닌 삼백육십계가 되더라도 기필코 개정을 시킬 셈이었다. 그 잡놈이 언감생심 부응교 자리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부응교가 누군데 이토록 흥분들 하시는 겁니까?"


석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양 허리를 슬며시 기울여서 만기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허적과 허견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몰라서 묻나?"

"..."


그 이름 두어자도 모두 입밖에 내질 않았다. 다 같이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얼굴이었다. 당상관도 아니고 겨우 당하관이고, 종4품일 뿐이지만, 종4품 역시 결코 한미한 관직은 아니었다.


석하는 주변의 눈총에도 꿋꿋하게 만기에게 다시금 고개를 기울여 질문했다.


"나으리, 도대체 부응교가 누구기에?"

"최석정 그 친구. 자네도 잘 알지."

"아...그새 또 벼슬이 오르셨구나..."


석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좌중의 분위기가 한층 더 험악해졌다. 남인만의 잔치였다. 서인은 한 귀퉁이라도 끼워넣고 싶지 않은 것을. 기껏 불렀더니 흥겨운 분위기에 초를 치다니. 허적과 허견은 만기와 석하를 흘끗 노려보고 자신들끼리 은밀하게 속닥거리더니, 허적이 한발 앞으로 나서서 목청을 돋웠다.


"자, 원래 활쏘기 시연부터 하여 여러분의 흥을 돋우려던 것이, 이 늙은이가 정신이 없어서 깜빡 하였으니, 이제라도 활쏘기 시연을 할까 하오. 누가 먼저 하겠나?"


만기는 조용히 실소했다. 늙은이가 정신이 없어서 깜빡한다는 말은, 평소 스승 송시열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물론 정말로 정신이 없어서 깜빡하진 않았다. 스스로 편리한 기억은 지니고, 불리한 기억은 버리는 스승의 습성을 변명하는 말일 뿐이었다. 헌데 허적도 같은 소릴 한다. 노인의 습성이란 다 비슷비슷한 건지. 허적도 아들 허견이 자신을 데리로 인달방에서 회현방을 다녀가고 하였으니, 아들이 빠지는 활쏘기 시연 따위는 벌이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적장남도 아니고 서장남인데도.


서장남.


허견은 한순간 움찔하여 만기를 쳐다보았다. 꼬맹이는 자신을 서장남이라 했다. 자신 밑으로 서자가 더 있다는 것을 아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이제 열한살 짜리가 거기까지 알 리는 없을 터였다. 자신들의 실정을 아는 누군가가 서인들 사이에서 떠벌리고 다니지 않은 한은.


"제가 하지요."


허견이 한발 나서는데, 등뒤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선수를 치더니, 장희재가 기단 앞으로 걸어나왔다. 북편에 안석案席을 놓고 앉은 허적이 두눈을 야릇하게 번뜩이며 희재를 쳐다보았다. 이놈이 이번 상평통보 주조 때 제법 돈을 만졌다고 들었다. 누가 인동장씨 사람 아니랄까봐서, 면포전에서 면포와 은을, 은과 동전을, 또 동전과 면포를 교환하여, 동전의 통행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면서, 장희재 본인도 사주전을 발행하여 막대한 이문을 챙겼다. 역관 장현이 조카 하나는 잘 두었다.


무려 대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종1품의 반열에 오른 장현이지만, 태생이 문반이 아닌 탓에 서편에 앉은 장현이었다. 그는 장희재를 보고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잘 생겼다. 외모, 재물, 심계, 무예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자신의 조카였다. 잘난 맛에 사는 양반들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만큼 재물을 축재한 놈이었다.


"미처 활과 화살은 준비를 못했는데, 빌려주시겠습니까?"


장희재는 장현을 흘끗 돌아보고 자신감에 차서 허적의 앞으로 다가섰다. 허적이 힐끗 허견을 쳐다보았다. 네가 빌려주겠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이었다.


"내가 먼절세."


허견은 각지角指를 낀 손을 쓱 흔들어 보이고선 마름 황씨에게 손짓하여 대청 아래에 놓아둔 활과 화살을 가져오게 했다. 등뒤에서 희재가 입을 비죽이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 없었다. 춤을 추던 무희들이 남편으로 물러나고. 허적의 머슴들이 과녁을 가져왔다. 사방에서 초롱으로 온통 환히 마당을 밝혀서, 하객들의 눈에도 뚜렷하게 과녁의 붉은 중심이 보였다.


황씨가 활 하나와 화살 백여자루가 가득 든 청동항아리를 마당에 갖다놓았다. 새로운 볼 거리에, 하객들은 그저 흥미 어린 눈초리로 과녁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지만, 만기는 경계의 눈초리로 주변에 신경을 집중했다. 옆에서 누가 술이 가득 든 술잔을 건네며 마시라고 손에 쥐어주어도 한사코 손을 내저으며 사양하는 참이었다.


허견은 위풍당당하게 화살을 메기고, 한발, 두발, 연달아서 화살을 쏘았다. 열발 모두 아슬아슬하게나마 과녁의 중심에 틀어박혔다. 당장 하객들 사이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거 이거, 주몽의 현신이로세."

"열발 모두..."

"대단하다..."


좌중의 아부 섞인 감탄에 허적과 허견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다행히도 모두 명중했다. 물론 자신 뒤에 나서는 자들은 결코 열발 모두 적중시킬 수는 없을 터였다. 이 활쏘기 시연회는 바로 텃세란 무엇인가를, 자신들 양천허씨 일문이 나머지 남인과 서인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기 위한 자리기에.


"자, 그 다음은 누가 하겠는가? 보시다시피 먼저 하는 자가 유리하네. 교대도, 교차도 아니라 먼저 쏘는 사람이 열발을 다 쏘고 그 다음사람이, 또 그 다음사람이 열발을 쏘는 걸세. 이미 꽂힌 화살을 빼지 않을 것이니, 그 틈새로 맞춰야 하거든."

"..."

"누가 나서겠나? 보다시피 화살은 아주 많으이!"


허적이 의미심장하게 좌중에 던진 물음에, 남편에 앉은 무관들이 심각해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새 과녁을 가져오지도 않고, 또 화살을 뽑지도 않은 채로 화살을 쏘아 맞춰야 하다니. 확실히 나중에 화살을 쏘는 사람이 불리한 시연이었다.


"한마디로, 텃세가 무엇인가, 보여주는 시연이로군."


석하는 씁쓰레히 과녁을 돌아보곤, 다시금 허적을 돌아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는 짓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마름 황씨란 자가 허견에게 활과 화살을 건네받더니, 희재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아까 빌려달라 하셨지요?"


황씨가 활과 화살을 희재의 손에 건네주자, 희재는 여인의 몸을 훑어보듯 활을 훑어보곤 성큼성큼 자리를 잡고 섰다. 희재가 활시위를 당기더니, 시위를 떠난 활이 보기 좋게 과녘의 중심에 꽂혔다.


"오오! 괜히 내금위가 아니구먼! 도로 내금위에 복직해도 되겠으이!"


허적이 흡족하여 희재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토닥였다. 희재는 의기 양양하여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활을 쏘았다. 두발, 세발, 네발....그렇게 모두 열발을 쏘더니, 열대의 화살이 모두 과녁의 붉은 중심에 꽂혔다.


"오오...참으로 신기神技로군. 어찌 이리 갸름한 얼굴로 이리 늠름한 위용을 보여줄 수가 있는가?"

"과찬이십니다."


허적은 겸손을 보이는 희재를 보며 어깨를 툭툭 쓰다듬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 다음은 누가 하겠는가? 늦을수록 불리하네."

"제가 하지요."


서진이 허적의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등허리의 묵빛 활을 발치로 풀어놓았다. 허적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서진을 지켜보았다. 서진은 활을 친친 감아놓은 천을 풀었다. 천에 물방울이 군데군데 맺힌 것이, 한눈에 봐도 기름먹인 옷감이었다. 비에 젖지 않도록 보호한 것만 봐도 활의 재질이 비에 젖으면 제 구실을 못하지만 제법 귀한 흑각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허적은 더욱 유심히 활을 쳐다보다가, 활의 모양이 어쩐지 눈에 익은 느낌에 두눈을 끔뻑였다. 어둠을 삼킨 듯한 묵빛의 활에, 활 중앙엔 삼극三極의 문양이 금은동으로 구분되어 세공되어 있고, 손잡이는 주홍빛 어피로 감싼 흑각궁이었다. 조정에서 사십년을 넘게 묵은 구렁이인 자신인 만큼, 허적은 그 흑각궁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선대왕이 쓰시던..."


허적은 굳은 얼굴로 한발 두발 서진에게 다가섰다. 서진은 허적이 활을 알아보자 굳은 얼굴로 숙부 서후행의 눈치를 보았다. 서후행이 비웃음 어린 얼굴로 허적을 흘낏 돌아보고 서진에게 턱짓을 보냈다.


"왜 선대왕의 활을 조카분이 갖고 있는가?"

"그야 제가 빌려주었지요?"

"누구 맘대로. 전하께서도 아시는가?"

"언제는 전하께 일일이 여쭙고 빌려 드렸습니까?"

"..."


허적은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서후행을 흘겨보고 머리 위 용봉차일을 올려다 보았다. 느낌 탓인지, 임창군 형제가 제주로 유배를 떠난 이후, 서후행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같지 않았다. 이자가 무슨 꿍꿍이로 윤허도 없이 왕의 용봉차일을 자신에게 빌려주었는지, 정말 윤허도 구하지 않은 건지, 온갖 의심으로 머릿속이 뒤엉켰다.


서진이 차분하게 화살을 메기고 과녁을 조준했다. 한발, 두발, 열대의 화살이 모두 과녁의 중앙을 파고들다가 한발의 화살만 미리 꽂힌 화살촉에 부딪혀 그대로 툭 떨어졌다.


"아..."

"아깝다..."


하객들이 탄식을 하였다. 이미 과녁 중심을 선점한 화살에 막혀서, 혹은 부딪쳐서, 혹은 미끄러져서 화살이 떨어지는 경우도 슬슬 나왔다. 처음부터 허견이 선수를 차지하고, 나머지 권력자의 아들, 조카들이 후수後手를 차지하니 점점 뒤에 쏠 수록 불리한 시연이 되었다. 원래 활쏘기는 육례六禮의 세번째 덕목으로 꼽히는 터라, 문인들도 제법 실력이 있었지만, 이렇게 불리한 시연이 되고 보니, 무인들만 나섰다. 그러다 나중에는 무인들도 체면이 깎일 상황이 되니 나서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벌써 과녁엔 칠십발도 넘는 화살이 빼곡하게 꽂힌 상태였다.


"자, 다음은 누가 하겠는가? 김석하, 자네가 해볼텐가?"

"아직 아드님 한분이 안하신 걸로 아는데, 제가 양보하지요."


석하가 무심히 대꾸하자, 허적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안하다니? 이미 견이놈이 제일 먼저 시연을 보였건만.


"자네가 딴짓을 했나보군. 내 아들이라면 벌써..."

"저분 말고, 이분 말입니다."


석하는 걸음을 성큼 떼어 허후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 손에 들린 부러진 대나무 끝이 허후의 가슴팍에 한치 앞에서 멈췄다. 허후의 두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어떻게...허후는 놀랍고 두려운 눈빛으로 허적을 쳐다보았다. 아비는 남들 이목이 두려워서 자신을 인정한 적이 없다. 임자 있는 여인을 겁간하여 아들까지 낳은 사실을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은 탓에. 그런 아비 앞에서 석하는 허후 자신의 신분과 혈통을 정확히 밝혔다.


"이분?"


허적은 문인석처럼 굳은 얼굴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허후를 쳐다보았다. 허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인 탓에, 그는 더 눈을 깜빡일 수 없었다. 눈에 힘도 주지 않고 허후를 쳐다보고, 허적은 그 앞에 있는 석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네놈이 어떻게...


허후의 두 눈동자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최근 들어 김석주가 자신을 징그러운 눈웃음으로 쳐다보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아비의 목줄기를 움켜쥐고 들어올려 수치심을 주고 나서, 협문으로 와서 자신을 쳐다보던 그 회심어린 눈빛이 뇌리에 고리처럼 걸렸다.


너, 김석주와 무슨 관계냐?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이미 김석주의 시커먼 얼굴빛과 닮은 피부를 보니 물을 생각도 없어졌다. 방금 아비가 김석하라 부른 게 생각나기도 했다. 김석주와 김석하, 같은 청풍김문인 게 뻔하였다. 얼굴은 그다지 닮은 것 같진 않은데. 오히려 통명전을 누구보다 번질나게 드나드는 얼굴, 중궁을 보면 웃음이 물결치는 눈초리...그 누군가를 닮았다. 감히 닮았다고 입에 담기도 힘든 그 누군가를.


"해 보시겠습니까?"


석하가 웃지도 않고 허후를 보며 건넨 말이었다. 허후는 갈등어린 눈빛으로 허적을 보았다. 허적은 마뜩치가 않아서 고개를 살짝 틀어 과녁을 노려보았다. 이미 화살이 서른발 가까이 꽂힌 과녁인데, 솜씨를 제대로 발휘할 수나 있을까? 물론 아직도 화살이 더 꽂힐 공백이 있는 탓에 큰 지장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실력발휘를 제대로 해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단 한발이라도 실수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 시연은 텃세가 뭔지를 보여주기 위함인데, 허씨 집안의 친아들을 그 텃세의 희생양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네놈들이...그래서 어제 나한테 서장남庶長男 타령을 해댔구나."


허견이 한발한발 다가서며 이를 갈았다. 그 눈길은 이미 허공을 더듬어 춘택의 얼굴을 떠올리고, 또 그런 춘택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김만기를 향하였다. 만기는 묘한 눈빛으로 허견을 쳐다보며 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적은 허견이 회현방 김만기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 잡을 수 있었다.


"내 아들이 둘씩이나 솜씨를 보일 필요가 뭐 있나. 자네가 쏴야지."


허적은 결국 모두가 보는 앞에서 허후가 자식임을 시인했다. 여기서 더 잡아떼도 꼴만 우스워질 터였다. 궐에 드나들지도 않는 김석하가 허후가 자신의 아들임을 눈치챘다. 김석하가 알면 김석주도 안다는 얘기였다. 김석주가 먼저 알았든 김만기가 먼저 알았든, 이들이 알았으니 발뺌하다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얼굴에 철판 깔고 버텨야만 했다.


"뭐야, 아들이 또 있었어? 저 친구가?"

"어디서 본 얼굴인데?"

"봐? 어디서? 영상대감 얼굴에서 봤겠지. 아주 빼다 박았고만."


하객들이 술렁거렸다. 하필이면 시호를 고하는 고유제에서 또 다른 서자의 존재를 들킨 허적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진 채였다. 오시수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도 어쩐지 거슬렸다.


어디서 봤겠나. 자네가 통명전 협문을 번질나게 드나들며 양화당을 찾다가 보았겠지.


허적은 속으로 대답을 삭이며, 눈앞의 석하를 노려보았다. 물고하신 조부가 시호를 받고, 자신이 궤장을 하사받아 잔치를 벌이는 이 시점에 하필이면 허후의 존재를 터뜨려서 잔치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린 놈의 치기인지, 노림수가 있는 건지. 아무리 봐도 스물한둘 밖에 안된 놈이 딱히 노림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허견이 회현방을 다녀와서 열한살짜리 놈이 남의 집 족보까지 꿰고 있더라고 치를 떨 정도였으니, 눈앞의 애송이 머릿속에도 구렁이 몇마리쯤 들어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 활을 빌려드리지요."


어느덧 서진이 흑각궁을 들고 허후의 눈앞에 내밀었다. 허후가 의아한 얼굴이 되어 흑각궁을 쳐다보았다. 한눈에도 여느 활과는 달랐다. 얼떨결에 흑각궁을 받아든 허후의 두눈이 은근한 생기를 띠었다.


"넌 나서지 말거라!"


활쏘기 시연의 숨은 뜻을 모르는지, 허후가 한발 앞으로 나서자, 허적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쩐지 오늘따라 일진도 사나웠고 정신도 사나웠다. 갑자기 암탉이 날아들더니 제사상을 엎고, 잔칫상을 엎고, 지금은 또 김석하 이놈이 허후의 존재를 밝혔다. 자신의 치부인 아들을.


"..."


허후가 가슴 깊에 묻어둔 상처를 언뜻 두눈에 내비치며 입을 다물었다.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존재가 드러났으니 오죽하랴 싶었다. 하지만 과녁이 빼곡하다 하여 활쏘기 시연도 하지 않는다면, 사내답지 못하였다. 아니, 이미 아비와 형이 암중의 중궁에게 가한 짓들 역시 사내답지 못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형 허견은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눈빛으로 책망하는 참이었다.


"넌 이래서 안돼. 이건 텃세놀음이거늘."

"허면 틈새놀음을 보여드리지요."


허후는 이를 악물고서 손가락에 각지를 끼더니 항아리에서 화살을 집어들어 시위를 물렸다. 옆에서 아비와 형이 만류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고도의 집중력을 기울여서 과녁을 겨냥하고 시위를 놓았다. 활을 떠난 살은 순식간에 힘차게 화살들의 틈새를 파고들어 과녁의 중심에 명중했다.


"아니!"

"저게 어떻게 들어가지?"


무관들을 숱하게 거느려 본 고관대작들이 놀라서 웅성거렸다. 허후는 의연하게 과녁을 쳐다보곤, 손안의 흑각궁을 내려다 보았다. 손에 착 감기는 손맛이 무서울 정도였다. 선대왕이 쓰던 활이라 역시 다른 건가. 허후는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흑각궁을 내려다 보곤 군침을 꼴깍 삼켰다. 이미 빼곡한 화살들의 틈새를 파고들 만큼 충분히 탄력이 빼어났다. 허후는 계속해서 화살을 메겼다. 두발, 세발, 화살은 계속해서 과녁의 중심을 맞추었다.


"진짜 신궁일세."

"아니 어떻게 저런 아들을 꼭꼭 숨겨두셨대?"

"영상대감도 참으로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있으이."

"..."


모두 혀를 내두르는 가운데, 허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들 허후를 바라보았다. 태생이 떳떳치 못한 아들이라 감추었다. 하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아들은 자신의 빼어난 궁술을 발휘했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석하를 돌아보는 얼굴에도 의기양양한 빛이 어렸다.


"내 아들이 내 체면을 세워주었으이. 이제 자네가 쏠 차례구먼."

"..."


석하는 냉담한 얼굴로 과녁을 돌아보았다. 허후까지 열발을 쏘고 난 지금은 과녁 중심에 화살이 들어차서 한발도 꽂아넣기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내의 피가 끓어 손바닥도 손가락도 근질근질했다.


"저는 됐습니다."


의외로 사양하는 모습에 허적이 미간을 찡그렸다. 허적은 징그러운 자벌레를 보듯 석하를 쳐다보았다.


"웬 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가? 어째 해보지도 않고?"

"해보나 마나...겠지요."


석하는 비굴한 발언을 조금도 비굴하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히 내뱉았다. 허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만기 역시 실망스런 눈빛으로 석하를 쳐다보았다. 물론 자신이 보기에도 나머지 화살이 비집고 들어갈 틈새도 없었다. 서인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위시하기 위함인가. 그렇다고 해보지도 않다니. 물론 미련하게 화살을 쏠 필요까진 없었다. 하지만 아우가 그랬다. 뭔가 있는 놈이라고. 손에 시석과 납탄이 있으면 괴물이 될 거라고. 궁술은 기대할 필요가 없는가.


"명초命招요! 공조판서 겸 훈련대장 유혁연, 광성부원군 김만기는 패牌를 받으시오!"


갑자기 문간으로 두명의 무예별감들이 둥그런 명패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하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문간을 쳐다보았다. 명초라니. 하필이면 밤도 깊은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서 왕이 김만기를 찾다니. 어쩐지 심상치가 않았다. 허적은 굳어진 얼굴로 김만기를 돌아보았다. 여태 다른 하객들과는 잔도 섞지 않고, 혼자 묵묵히 술을 마시던 김만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인쪽 사람인 훈련대장 유혁연도 엉거주춤 일어서서 별감들에게로 나가섰다. 그들이 별감들에게 명소패를 받아드는 모습에, 하객들이 숨죽이고 문간만 예의주시했다.


"부원군대감, 도대체 무슨 일이시오?"


김만기가 석하를 대동하고 솟을대문을 나서려는데 허적이 허겁지겁 뒤따라나왔다. 그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김만기의 두손을 부여잡았다.


"난들 알겠소?"

"아니오. 공은 알 것이오. 공은 알지 않소?"

"모르오."


만기는 차갑게 소매를 떨치고 솟을대문을 벗어났다. 석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솟을대문 위로 희노란 용봉차일이 불빛에 반짝이며 밤바람에 펄럭이는 참이었다. 석하마저 말없이 용봉차일을 쳐다보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허적의 눈길이 서후행에게 사납게 돌아갔다.


"자네, 저 유악을 전하의 윤허도 구하지 않고 빌려주었는가?"


허적이 한달음에 서후행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쥘 기세로 따져 물었다. 서후행은 비웃음으로 입가가 근질근질한 지, 입꼬리를 꿈틀거리면서 허적을 돌아보았다.


"언제는 뭐...윤허를 먼저 구했나이까?"

"이보게!"

"얼른 들어가시어 전하를 좋은 말로 잘 달래보시지요. 그래도 전하께서 대감께는 쉽게쉽게 진노를 푸셨지 않습니까?"

"..."


물론 이제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궁중에도, 조정에도 없었다. 용이든 뱀이든, 비늘 많은 족속들은 순식간에 그 체온이 식어버리는 법이었다. 그렇게 식어버린 비늘이 어느덧 바늘이 되어, 허적의 목덜미를 찔러들었으니.


"대감, 이럴 때가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전하께서 갑자기 장수들을 부르신 것만 봐도 뭔가 우리에게 화가 닥칠 것입니다."

"..."

"얼른 들어가셔야지요. 삼공께서 얼른 들어가 보셔서 전하를 배알하면 수습할 수 있을 테니 어서..."


유명천이 어느새 뒤로 따라붙어 권하는 말이었다. 불안해진 민희와 오시수도 허적의 좌우로 다가들어 눈치를 보았다. 이미 술맛은 떨어졌다. 술맛이 문제가 아니었다. 갑자기 제삿상을 엎어놓고 잔치상을 엎어놓은 암탉도 불길했을 뿐더러, 왕이 갑자기 장수들을 패초한 것이 불안했다.


"늦었으이."


허적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자신은 그저 중궁만 해할 생각이 있었을 뿐, 감히 성상에겐 역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왕이 무슨 결정을 내리든 불복하고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편전에서 혀끝과 붓끝으로 왕을 압박하고, 겁박하는 게 고작이었다.


"네? 늦다뇨?"

"이미...변하셨으이. 지난 시월 중순부터...변하셨으이."

"대감?"


오시수가 멍하니 되물었다. 지난 시월 중순부터라니...중궁이 세번째 회임이 잘못된 그날이 언제더라...그날이 10월 23일에 공주가 태어나고, 다음날 죽었으니...허적이 말하는 것은 공주의 죽음을 뜻하였다. 허적은 온몸에서 기운이 한순간에 빠져나간 얼굴로 문간 너머 아들 허견을 돌아보았다.


더는 지켜주지 못할 지도 모른다.


이미 김석하가 이 자리에서 허후의 존재를 폭로했다. 허적 자신에게 아들이 하나 뿐일 때는, 왕도 마음이 약해져서 함부로 대를 끊어놓진 않으려고 참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대를 이을 손주라도 태어나면 바로 아들 허견의 목숨을 끊어놓을 심산으로. 그런데, 허후의 존재가 알려졌다. 이제는 왕이 허견을 곱게 놔둘 리가 없다. 허적 자신도 정말로 벼슬을 내려놓고 충주로 내려가야 할 지도 모른다. 허적은 부적처럼 항상 품속에 지니고 있던 사직소를 가만히 더듬었다.


- 噫! 災異荐臻, 危疑多端, 訛言沸騰, 輦下親兵將領之任, 不可不以國家至親位高之人爲之。 以光城府院君金萬基爲訓鍊大將, 卽日受符察任。 柳赫然三朝宿將, 予甚倚重, 而二十年長在此任, 及今年老, 筋力已衰, 姑爲解任。 摠戎使則以申汝哲除授, 亦於當日內, 受符行公.


아, 재이災異가 거듭되고, 위의危疑가 잦으니, 유언비어가 비등하여 연하輦下(왕 밑)의 친병을 거느릴 책임은 지극히 나라와 가깝고 직위 높은 사람으로 임명할 수 밖에 없다.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훈련대장으로 삼으니, 즉시 병부를 받아서 임무를 살펴라. 유혁연은 삼조에 걸친 숙장宿將(노련한 장수)라서 내가 신임하는 장수이나, 스무해나 되어 근력이 쇠하였으니, 우선 해임시키고, 총융사는 신여철에게 제수하니, 당일 병부를 받아서 공무를 집행하라.


승정원에서 도승지 경최는 심각해진 얼굴로 왕의 비망기를 내려다 보았다. 이미 왕이 훈련대장을 갈아치웠다. 도성 밖을 지키던 김만기를 도성 안으로 불러들여 훈련대장을 맡기고, 그 대신 신여철을 총융사에 앉혔다. 소식을 듣고 파루가 울리기도 전에 허겁지겁 달려왔다. 정말이었다. 아무리 두눈을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비망기를 내려다보는데, 문간에서 기척이 있었다. 허적과 민희, 오시수가 비맞은 강아지처럼 어깨가 축 늘어진 채로 자신을 쳐다보는 참이었다.


"..."


자신도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을 깨닫지 못한 채로, 경최는 갑자기 5년은 더 늙어보이는 허적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듯이, 검은 그늘이 허적의 미간에 드리워져 있었다.


"한명회도 못한 짓이라고 대노하셨답니다."


경최는 맥빠진 음성으로 설명을 마쳤다. 한명회란 이름이 나왔으면 이미 끝났다. 한명회도 용봉차일을 쓰려다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왕이 한명회란 이름을 언급했다.


"..."


유명천의 등쌀에 못 이겨서 빈청까지 오긴 하였지만, 허적은 망연자실 하였다. 왕이 이렇게 빨리 병권을 갈아치울 줄은 몰랐다. 병조판서 김석주로도 모자라서, 훈련대장 김만기, 총융사 신여철이라니...남인들이 발을 디딜 데도 없었다. 병권을 모두 내어주었다는 것은, 정권도 내어주었다는 얘기였다.


마냥 하늘을 날던 허적 자신의 발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늘이 무너진 게 아니라,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허적은 하릴 없이 돌아서 걸음을 떼었다. 머릿속이 온통 비어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무릎이 꺾인 채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더니, 어느새 구종과 노비들이 자신을 초헌에 태웠고, 그 초헌에 쓰러지듯 몸을 기댄 채로 넋을 놓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인달방 자신의 갑제였다. 솟을대문 위로 비치는 왕의 용봉차일은 아직 철거하지도 못한 채로, 잔치판이 파장이 된 자리를 노비들이 치우는 참이었다.


"나으리?"

"..."

"아버지?"

"..."


압구정狎鷗亭 한명회. 욕심을 버리고 갈매기와 친하게 논다는 뜻의 별호를 지어놓고도 정작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끝내 부관참시剖棺斬屍(관을 꺼내어 시체의 목을 베는 형벌)를 당한 인물. 폐비 윤씨를 죽이는 데에 가담했다는 죄목이었던가.


"전하께서...나를 한명회라 부르셨어..."


허적은 넋이 반쯤 나간 채로 중얼거리면서, 기단에 세워진 병풍을 얼싸안았다. 조상에게 제를 올렸으니 이 병풍 어디엔가도 조상의 손길이 묻었을 터였다. 그는 병풍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병풍에 묻은 얼룩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직도 여기저기 초롱이 환히 걸려서 환한 기단 위로, 마당 위로, 초롱의 불빛이 하나둘씩 사그러들었다. 머리 위에 바람결에 펄럭이는 용봉차일이, 그런 허적의 온몸을 덮칠 것처럼, 사납게도 펄럭였다.


하루아침에 병권이 오롯이 서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자고 나니 세상이 바뀌었다. 남인들은 침통한 얼굴로 편전 앞 뜨락에 모여 있었다. 어찌나 속이 탔는지, 목도 바짝바짝 말랐다. 북이 둥둥둥 울리는 소리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심장이 온전히 몸에 달려 있지 않고 목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것만 같았다. 왕이 붉디 붉은 곤룡포를 펄럭이며 그들의 앞을 지나가는데, 핏빛 물결이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


왕이 편전으로 들었으니, 신료들도 뒤따라야 했다. 가슴이 울렁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서, 오시수는 오른손으로 심장 부근을 꾹꾹 누르며 허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평소엔 태산처럼 거대하던 허적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왜소해 보였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데, 자신들이 문제삼을 것은 이제 왕이 절차를 무시하고 밤중에 갑자기 병부를 교체한 일을 문제삼는 수 밖에 없었다. 오시수는 다른 신료들과 함께 편전에 부복하자마자, 어탑 앞으로 다가서는 도승지에게 독촉하는 눈짓을 보냈다. 도승지 경최는 입술을 앙물고서 숨을 가다듬었다.


"전하, 어찌하여 훈련대장을 교체하는 일을 천신을 통하지 않고서 전하의 독단으로 처리하셨습니까? 아무리 군부라 해도, 절차를 무시하심은..."

"지금 감히 도승지 주제에 군장君長(임금)에게 군장軍將(장수)을 교체한 일을 따지는 건가? 도승지가 뭐라고?"


숙종이 서슬퍼런 옥음으로 도승지 경최의 말을 단칼에 베었다. 도승지 경최는 움찔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거침 없이 무안을 주는 왕의 두눈은 맹렬한 창칼이 되어 자신의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왕이 단단히 작심했다. 이미 병권을 교체했으니, 다음은 누군가. 누굴까. 경최의 눈길은 육조의 으뜸인 이조吏曹의 수장을 맡은 이조판서 이원정에게로 쏠렸다.


"..."


이원정 역시 이미 손끝이 차갑게 식은 채로 홍단령자락을 움켜쥐었다. 무서웠다. 이미 병권을 넘겨주었으니, 인사권도 넘겨줄 차례였다. 그러자면 당장 모가지가 날아갈 건 자신이었다. 그는 어느새 말라붙은 아랫입술을 윗니로 꽉 누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잘근잘근 각질을 씹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올까봐 두려워서, 또 참기 힘들 만큼 불안해서,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게 되는 이율배반의 심정이었다.


"철원부에 양이量移(죄를 감등하여 내지나 가까운 곳으로 옮김)했던 김수항을 우선 방면한다."

"..."


편전 안 신료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서 목젖이 출렁이도록 침을 꼴깍 삼켰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입을 벌렸다가는 그저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대로, 수염이 입김에 흔들리는 대로, 그저 입술을 내버려둘 뿐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왕이 병부를 모두 서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게다가 허적은 왕의 용봉차일을 제멋대로 가져다 쓰는 바람에 명분마저 서인 손에 넘겨주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마른 침을 힘겹게 넘겼다.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하고, 국가의 안위를 앞에 두었건만, 과인의 신하들은 거꾸로 사사로운 원수를 앞에 두고 국가의 안위를 뒤로 하니, 어찌 전국시대의 선비 만도 못하는가? 근래엔 공도公道는 소멸하고, 사의私意만 대행하니, 관리의 천거 및 임용조차 한쪽 당파 사람만 쓰이는 것이 실로 유감이다. 이쪽 저쪽을 논하지 말고 공평하게 임용하라, 누차 이조판서 이원정을 책망했거늘, 그때그때 책임을 면피할 요량으로 고작 한두명만 천거하니, 참으로 용납하기 힘들도다. 이조판서 이원정을 우선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출송하라!"


드디어 나왔다. 차가운 옥음이 얼음조각이 되어 이조판서 이원정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이원정은 어깨죽지가 굳은 채로 그저 두눈을 끔뻑였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라, 눈이 침침하고 뻑뻑하여 오늘 아침에 눈을 뜰 땐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이기도 했다. 그래선지 눈앞이 더욱 순식간에 흐릿해졌다. 귀도 먹먹해졌다.


"하오나 전하, 이원정은 의망의 절차엔 충실하였습니다. 어찌 편당이라 허물을 씌우십니까?"


도승지 경최의 반박을 들으며 허적은 두눈을 질끈 감았다. 왕이 훈련대장을 갈아치워서 병권을 모두 서인의 손에 넘기고서, 이제는 이조판서도 갈아치웠다. 병권과 인사권이 모두 서인에게 넘어갔고, 자신은 지금 왕의 눈 밖에 나서 온몸의 피가 마르도록 서 있는 참이었다.


"신 허적...자질이 미욱하여 환시의 농간에 속아 전하의 유악을 가져다 쓴 죄...전하께 용서를 받을 길이 없으니, 이만 물러가서 대죄를 청하나이다."


허적은 그 자리에서 품속을 더듬어 사직소를 꺼내어 무릎맡에 내려놓고 이마를 전돌바닥에 찧을 기세로 고개를 조아렸다. 왕이 칼을 빼들더니 대처할 틈도 주질 않았다. 병부도 바꾸고, 이제는 이조의 수장마저 내쫓았다. 이조판서 이원정이 힘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편전을 나서는 모습도 더는 허적의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는 그저 그늘진 검은 전돌바닥에 시야가 갇힌 채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였다. 그저 자신이 꺼내어놓은 사직소가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대죄하지 말라. 어찌 그만한 일로 재상을 포의로 무릎꿇리겠는가. 내 아무리 용렬해도 고작 유악의 일로 상신의 체모를 구기지는 않을 것이니 공은 괘념치 말고 본직에만 힘쓰라."


왕의 옥음이 차갑게 허적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허적은 대죄도 거부하는 왕의 반응에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워졌다. 대죄하지 말라? 진심인가. 그럴 리가 없다. 한명회란 발언까지 내뱉으며 당장 유혁연을 훈련대장에서 내쫓고 병부를 바꾼 왕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조판서까지 체차했다. 그러면서 대죄하지 말라니?


어지러이 흔들리는 허적의 시선이 마침내 전돌바닥에 엉켜버렸다. 그런 허적의 등골을 내려다보는 숙종의 동공은 먼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 어둠처럼 이슥하고 소슬했다.


대죄待罪라...고작 유악의 일로 대죄를 해선 안되지. 진짜 대죄를 할 일은 유악을 훔친 일이 아니라, 중궁의 눈물을 훔친 일이니.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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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4.02.26 10:11
    No. 1

    크으... 드디어 시작이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2.26 22:19
    No. 2

    와~
    이제 살떨리는 일만 남은건가요
    왕이 허적을 어떤 식으로 징치할지 궁금해지네요
    진홍이의 눈물이 말라야할텐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2.26 22:31
    No. 3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4.02.27 01:13
    No. 4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2.26 22:32
    No. 5

    조정에 피바람이 몰아칩니다.
    중궁을 어이할 생각이신지 작가님의 계획이 정말 궁금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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