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파리
센강 기슭에 누워있는 한 병사는 복부에 쓰라린 통증을 느꼈다. 복부 근처를 만져보니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검은 하늘을 바라보는 그 병사는 물이 찰랑거릴 때마다 발치에서 흔들리는 다른 병사의 시체를 느낄 수 있었다.
“으으..으윽···”
“위생병..위생병..”
여기저기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병사는 같은 처지가 많다는 것에 일말에 위안감을 느꼈다. 영원할 것 같은 지옥의 밤도 조금씩 끝나가며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잔인한 태양은 그렇게 서서히 떠오르며 센강과 파리를 훤히 비추었다. 신병 그래버는 주저앉은채 이 참혹한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자신의 피 묻은 양 손을 바라보았다. 그래버는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버가 혹시라도 살아남은 프랑스 병사가 있을까봐 주위를 둘러보자, 피셔가 아직 살아남은 한 프랑스 병사의 상처 부위를 압박해주며 그래버에게 외쳤다.
“위생병 데려와!!”
그래버는 방금 전까지도 서로 죽고 죽이던 프랑스 병사를 왜 치료하는지 이해가 안 간단 표정으로 피셔를 바라보았지만 근처에 있던 위생병을 데리고 왔다. 위생병이 프랑스 병사의 상태를 보고는 말했다.
“이미 끝났네.”
피셔는 피로감에 강 기슭에 주저앉아 얼굴을 찡그리며 담배를 피우며 몸을 녹였다. 피셔는 여전히 손을 떨고 있는 그래버를 보며 중얼거렸다.
“전투에 중독되지 말게나.”
“하..하지만..”
피셔는 허탈한 눈으로 수 많은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피셔와 그래버의 군복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피셔는 강물에 손을 씻고는 자신의 소대원들이 머무는 건물로 걸어갔다. 소대원들이 피셔를 반겼다.
“소대장님!!”
피셔가 술병을 들고는 한 모금 마신 이후에 말했다.
“잔존 병력이 많을 테니 이들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
한 병사가 말했다.
“하..하지만 놈들은 하수구나 민가에 숨어있기 때문에 소탕이 힘듭니다! 민간인들 집을 다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피셔가 말했다.
“수색을 다 하고 지나간 곳에서 놈들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이미 지나친 지역도 불시에 습격해서 다시 수색해야 한다!”
피셔의 말에 돌격대들은 죽을상을 지었다.
‘젠장..잠 자긴 글렀군..’
한편 한스의 전차 대대는 파리 남부를 포위했지만 프랑스 병력의 저항이 치열했기에 잠시 정체 상태였다. 한스가 생각했다.
‘파리 남부를 빨리 점령하지 않으면 포위되는 것은 우리 쪽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뚫린 이브히 슈흐 쏀느 쪽으로 독일 18군이 빠른 속도로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강을 건너오는 18군의 병사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 눈치를 살폈다.
“젠장 이러다가 우리가 포위되는 것 아냐?”
현재 독일군이 파리 남부를 포위하며 점령한 이 곳에는 프랑스군의 야포들이 어마어마하게 남아 있었다. 주인이 바뀐 이 거대하고 육중한 야포들은 자신들의 원래 주인을 향해 포를 쏟아낼 것 이다.
다만 포 진지, 기관총 진지들이 그간 폭격, 포격에 다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독일 병사들은 기관총 진지, 포 진지를 구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차병들도 전차를 위장해두고 궤도 자국을 지우고 급하게 전차를 보수하느라 잠시도 눈 붙일 틈이 없었다. 또한 전차병들은 유개호를 파야 했다. 삽으로 흙을 판 다음에 그걸 주머니에 넣어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위에 얹어 놓았다. 바그너가 외쳤다.
“5센치라도 많이 파야 놈들의 포격에 살아남는다!!”
한스는 플로리안이 운전하는 사이드카가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쌍안경으로 주변 지형을 샅샅이 관찰했다. 여태까지 전투들에서 지도가 부정확한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한스는 위험을 무릎써서라도 가능하면 직접 주변을 정찰했다.
‘분명히 놈들은 우리쪽 포위망을 뚫으려고 할 것 이다..’
한스는 머리를 쥐어짜내며 어느 쪽으로 프랑스군이 뚫고 들어올지 예상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주공을 속인 채로 한 곳을 뚫고 들어오겠지..젠장..이런건 예측이 불가능한데..’
한스는 어제 전투부터 단 1분도 눈을 붙이지 말고 지도를 보며 고민했다. 이번 전투에서 한스의 전차 대대도 부상자가 많았으나 롤스로이스와 뷔싱 장갑차로 부상병들을 빠르게 이송한 덕분에 다행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한스가 정비병 빌에게 말했다.
“르노 FT 전차, 슈나이더, 생샤몽의 궤도 측면을 보호할 수 있도록 옆에 철판을 붙일 수 있겠나?”
빌이 말했다.
“가능은 하겠지만 제대로 용접하려면 재생공장에서 해야할 걸세.”
“좋아! 앞으로 노획해서 보수하는 전차들은 궤도 옆에 철판을 붙여달라고 해야겠어!”
한스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흡족해서 실실거렸다.
‘연막탄 발사기도 성공적이었는데 이렇게 궤도를 보호하는 철판을 붙이면 앞으로 기동 불가가 될 일도 줄어들 거야! 우린 맨날 노획한 전차나 쓰니 기왕이면 오래 써야지!’
그 때 바그너가 실실거리는 한스에게 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대장님! 중상자가 3명 경상자가 7명 있습니다!”
한스는 바그너를 따라서 대피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병사들을 보러 갔다. 한스는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위로를 해야할지 잘 몰랐다.
‘젠장..뭐라고 해야 하지..’
한스는 다른 장교들이 지껄이던 말을 똑같이 인용하기로 결심했다.
“자네들은 훌륭한 병사들이었네. 나중에 브레멘에 오면 내가 술이라도 사 주겠네.”
바그너 옆에는 이번에 부상병들을 이송하느라 혁혁한 공을 세운 에밋과 거너가 서 있었다. 하지만 한스는 쌩하니 에밋과 거너를 지나치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부대 말고 다른 부대에서도 장갑차를 운용해서 부상자들을 운반하는 방안에 대해 위에 건의해야겠어..특히 조종사들과 같은 정예 병력들은 중요한 자원이다···빨리 보병 녀석들이 와서 포위망을 넓혀야 하는데..’
바그너가 병사들에게 외쳤다.
“개인호 팠으면 다들 각자 전차 정비하고 보고한다!!”
전차병들은 노래를 부르며 전차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얼간이 신병이 똥오줌을 지리고 있었지
궤도를 교체하기 위해 전차를 들었네
잠시 뒤 전차는 다시 가라앉았네
너는 다시 전차를 못타겠지
피 철철 피 철철 이런 개죽음이 있나
피 철철 피 철철 이런 개죽음이 있나
집에서 기다리는 에리카를 떠올리며
웃으며 달려오는 위생병을 바라보았네
피 철철 피 철철 이런 개죽음이 있나
피 철철 피 철철 이런 개죽음이 있나
전차장은 대가리를 쳐박고 있었네
포병놈의 야포는 불을 뿜어대고
전차에선 베이컨 굽는 냄새가 나고
신난 보병들이 양동이를 들고오네
피 철철 피 철철 이런 개죽음이 있나
피 철철 피 철철 이런 개죽음이 있나”
프란츠가 중얼거렸다.
“이 노래는 가사가 너무 찝찝합니다.”
바그너가 말했다.
“그건 그렇지! 다른거 부르자!”
한스는 술병을 들고 전차병들 사이를 계속 왔다갔다하며 어떻게 빨리 파리 남부를 점령하고 포위망을 방어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시간이 없다..시간이 없어!!’
한스는 강박증 환자처럼 기계적으로 왔다갔다하면서 머리 속에서 지형을 그리며 전투가 벌어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전차병들은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거너는 노래를 부르다가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윤활유가 얼굴에 범벅이 되어도
어제 수리한 궤도가 망가져도
우리는 행복하다 으흑
정말 행복하다 으흑흑
전차 장갑이 날라가도
우리는 전진한다 으흐극 으흑..”
하지만 한스는 지도를 보며 술을 마시며 머리만 굴리고 있었고 바그너는 이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민간인 노획, 약탈은 철저히 금한다! 그리고 특히 민간인 여성과는 절대 접촉하지 않는다! 프랑스군이 민간인 여성을 이용해서 유인한 이후에 납치, 사살할 수 있으니 절대 좋다고 달려가지 마라!!조만간 휴가 때 더 좋은 기회가 있을 테니 멍청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라는 소리다!”
에밋이 중얼거렸다.
“하긴 키스 상대는 살아있는 여자가 더 좋죠.”
쨍그랑
한스의 손에서 박살난 술병 파편이 여기저기서 굴러다녔다. 한스의 아버지 요제프는 집에서 한스를 폭행할 때마다 술병을 먼저 집어던지고는 했다. 바그너가 한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대대장님?”
한스가 말했다.
“손이 미끄러졌네.”
한스는 빠른 속도로 장교 대피소로 걸어갔다. 그 순간, 뒤에서 권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탕!
“으아악!!! 진정해!!”
“거너!!”
거너가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발사하려다 바그너에게 양 팔을 묶이고 허공에 권총을 쏜 것 이었다. 잠시 뒤, 바그너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거너를 방 안에 묶어 두었다. 한스가 말했다.
“다들 나가 있게.”
‘젠장!! 지금 당장 프랑스놈들이 포격을 쏟아부을 수도 있는데 이딴 일에 시간을!!’
한스는 벌벌 떨고 있는 거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사고였네. 넘어져서 뇌진탕으로 사망했고 자네 잘못이 아닐세.”
“하..하지만..”
“고통 없이 갔을 걸세. 물론 자네가..”
“저···정말 고통 없이 갔을까요?”
순간 한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당연하지. 어쩌면 그 여자는 포격으로 더 고통스럽게 죽을 수도 있었네.”
한스의 말에 거너는 진정이 되는 듯 했다.
“이보게. 앞으로 롤스로이스 장갑차에 무전통신기를 장착할거고 기동하는 통신소 역할을 해야 하네. 자네와 에밋은 내가 믿는 베테랑 병사들인만큼 이 중요한 임무를 해야 하네. 할 수 있겠나?”
영국군, 프랑스군 전차 부대는 통신선을 운반하는 수송 전차까지 따로 두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전차 부대가 실시간으로 사령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던 것 이다. 또한 각 대대마다 통신 전차까지 한 대씩 두고 있었고, 그렇기에 효과적인 전차 운용을 위해서는 전차를 통한 통신선 운반과 무전통신기가 꼭 필요했다. 거너가 대답했다.
“하..할 수 있습니다! 으흑..흑..”
한스는 건물 밖으로 나오자 바그너가 물었다.
“대대장님 저 녀석은 후방으로 보내는 것이..”
“당장에라도 프랑스놈들이 대규모 전차 부대를 이끌고 공격해올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 숙련된 전차병을 후방으로 보낼 순 없네.”
한스는 의무병들이 있는 대피소로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손에 피칠갑을 한 의무병이 한스에게 물었다. 한스가 우물쭈물거리다 물었다.
“그..그냥 궁금해서 묻는건데, 혹시 시체가 사망한 다음에 눈을 깜빡거릴 수 있나?”
의무병이 대답했다.
“눈을 깜빡거리면 살아있는 겁니다만..근데 무슨 일입니까? 소령님?”
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대피소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좋아서 하늘에는 프랑스군의 관측용 비행선이 여기저기 떠 있었다. 그 관측용 비행선에는 중심에 빨간 점이 찍혀 있는 파랑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저···저 시발놈들!!”
Commen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