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먹고 삽시다. (4) / 9. 18 수정
죄 없는 양서 지방 백성들을 괴롭히던,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기근이라는 괴물이 묘비조차 세우지도 못하고 스러저간 것이 세 달여가 지났을 때였다.
추석은 진작 지나가 육조거리에 감돌던 흥은 가라앉아 차분히 연말을 맞이해야 할 준비를 해야 했을것이었다.
허나 어찌 된 영문인지 곳곳에 백성들은 더 왁자지껄 하여 하늘 날던 까치가 소란함에 방향을 틀었으니 그 소란함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병자년 이후 이런 소란함은 처음이었는데, 청국 오랑캐가 다시 도성을 쳐들어와서 그런 건 아니었고 단지 근래 널리 퍼진 황석-
아니 이제는 이 나라 지존께서 지난날 만민공동회에서 그 옥루를 흘리시며 모두에게 양껏 나눠준 감자 때문이었다.
어질고 덕 있으신 임금님께서는 진정 옛 성현이신 맹자와 공자의 뜻을 이어 만백성을 구휼할 높은 뜻이 있으시니 마땅히 이를 백성 된 도리로 받들지 않을 수 있겠냐 하며
감자라는 별볼일 없고 투박한 이름 대신 덕과 라고 불러 항상 임금님의 높으신 덕을 기억하고 밝은 뜻을 새기자며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과연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뜻이 옳다 여겼지만,
공자 가라사대, 길 가던 중 세 명이 있으면 그 중 한명은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고 하였으나,
생각해보면 세 사람 중 하나는 스승이요. 배움이 많이 필요한 학동은 둘인것이니 스승이 전해주는 말 보다는 학동끼리 통하는 것이 많이 있어
스승의 금강산처럼 높은 뜻은 학동들을 거쳐 갈수록 어느새 저 청계천 밑바닥에 처박힌 것이었다.
감자, 아니 덕과 역시 이런 시조를 거스를 수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덕과라 부르는 이는 소수요 감자라 부르는 이가 다수이니 결국 덕과를 고집 하던 사람들도 감자라 부르게 되었다.
도성 백성들 중 지식 있는 이들이 있어 임금님께서 왜 감자라는 이름을 쓰셨는지 머리를 맞대고 파자(破字)를 해보니,
가뭄을 이겨내는 단비 처럼 목구멍과 주린 배에 가뭄이 들었을 때 이겨내는 단비와 같다 하여 달 감(甘) 자에
것 자(者) 를 써서 제멋대로 부르고 다니니 후일 영섭이 이를 알고는 본래 그 뜻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하여 작은 소란은 잠잠해졌다.
감자가 전국으로 전파되고 약 넉 달이 지났을 무렵 도성에 기괴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발단은 성저십리에 기거하며 장작 떼기나 삭정이 따위를 긁어다 팔던 박 아무개가 시전 근처 으슥한 곳에서 무뢰배들에게 둘러싸여
“보시오. 이번에 수확한 가을 감자가 맛나다오”
하며 봇짐 가득 감자가 넣어져 곤란을 겪은 (입은 웃고 있었다.) 이후로 몇몇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었다.
그 전까지 지난날 양서 지방을 덮쳤던 기근이라는 괴물을 거뜬히 물리쳐 그 기세가 높던 감자였으니,
마땅히 가정에서 모시려면 많은 은전 혹은 군포 따위가 필요했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실은 저 어진 임금님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모두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니 어찌 칭송받지 않으리오.
하여 도성에 기거하는 생민들은 예로부터 예법을 아는 나라의 백성답게 둘이면 둘 셋이면 셋 모여 입을 모아 (글자 그대로였다.) 감자를 찬탄해 마지않으니 모두가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
특히 시구문(수구문) 밖 신당리(神堂里)에 움막 파며 기거하던 빈민들에겐 진실로 천지신명께서 큰 은혜를 내려준것 같았는데,
왕의 명을 받은 복지사(福祉士) 계금이 감자를 실은 수레 넉 대와 삼베 서른 필, 황소 네 마리, 보습 등으로 그들을 구휼하여 그날 주상전하 천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인근 도성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했다가 다 같이 눈물을 흘리며 천세를 외쳐 왕의 높은 덕과 뜻을 찬양하기도 했다.
이런 풍경은 처음으로 감자가 수확되던 당시 모든 고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양주 별비곡면은 말할 것도 없고, 황해도, 평안도, 경기, 함경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 전라 일부지역까지
감자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게 된 고을에선 다 같이 감자를 찾아 함께 캐어내고는 마을 사람들과 나누거나 남으면 유리걸식 하던 자들에게 한 망태씩 나누어주었는데,
영섭이 널리 반포한 대로 굶주리는 이웃에게 감자를 나누라는 높은 뜻을 실천한 것이었다.
또한 각지역 목사들은 영섭의 뜻을 받들어 아랫 현을 돌아다니며 관청 혹은 감자를 재배하는 가가호호마다 열십자(十) 표식을 하여 하여금 배고픈 이들이 쉽게 찾아 감자를 얻을수 있도록 하는 일도 소홀이 하지 않았다.
유리걸식하던 백성들 중에 특히 억척스런 화전민들이 감자를 가장 반겼는데, 오늘은 화전민이요, 사냥꾼이었지만 당장 먹을 것이 없어지는 내일 아침엔 칼을 쥐고 화적 혹은 산적이 되는게 운명이었으니 이들 또한 감자 덕분에 구사일생이라.
이에 감명받은 화전민 여럿이 마땅히 임금님과 수령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며 난리었는데, 배운것 없고 할 줄 아는것은 숲과 들에 불을 질러 농사짓는것이라,
그들이 받은 감자를 다른 누군가에게도 널리 전하고자 하는 마음에 산과 들에 불을 내어 스스로 길을 닦기도 하였던 것이었다.
이들이 도적 떼가 되어 생민들을 습격하면 고을에 큰 우환이 있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고을 수령들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감자를 화전민들에게 직접 찾아가 적극적으로 알리며 직접 조리하는 법을 책으로 내는 등 열심이었다.
특히 은율 현감(殷栗縣監) 박안기(朴安期)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왕마저 놀라게 하였는데, 소출한 감자를 한 데 모아 낮에는 정병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어느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밤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지게 하였다.
백성들은 도대체 저 감자가 얼마나 귀한 것이길래 하며 하나둘 감자를 서리해가니, 마침내 은율현 일대 모든 생민들이 감자의 효능을 알고 이를 노력한 현감 박안기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법석이었다. (이후 팔도 곳곳에 감자를 보급할 때 유용하게 쓰였다.)
그 무렵, 무명 한 자에 감자 스무개를 구워주는, 평안도에서 내려왔다는 최 아무개를 시작으로 채 달포가 지나지 않아 도성 곳곳 감자를 구워 파는 백성들이 있어 도성에는 때 아닌 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처음엔 광통방(廣通坊) 일대에서 최 아무개가 봇짐을 지고 돌아다니며 다 구운 감자를 팔던 것이 찾는 이가 많아 육조거리까지 그 사세를 확장하게 된 것이었다.
이문(利文) 남는 일이라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성부 장사꾼들도 하나 둘 감자를 구워 팔기 시작하여 도성 어디에서나 감자 굽는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자린고비가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크게 기뻐하여 당장 소반을 펼쳐놓을 기세였다.
너도나도 감자를 구워 팔다 보니, 개중에는 장사에 재능이 있어 감자뿐만 아니라 참새 따위를 잡아 와 구워 파는 자도 있었고,
좀 더 발품을 팔아 과천현(果川縣) 노량진(鷺梁津)에서 생선을 사다 쌀가루를 묻혀 감자와 같이 기름에 튀겨내어 파는 자도 있었는데 황공하게도 임금님께옵서 이를 보시고 “비시애집수로다” 하며 알 수 없는 이름을 말하며 상선을 시켜 즐겨 먹었으니 세간에서는 ‘비시애집수’ 가 인기가 좋아 물건이 금방 동나고는 하였다.
물론 이 상행위들은 모두 조정에서 인가되지 아니한 불법이었으나, 감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 특히 영섭이 그 ‘비시애집수’ 라는것을 즐겨 먹는다 하니
조정 중신들은 그저 또 다른 만민공동회가 개회될까 두려워해 언급 자체를 피해 가려는 경향이 생겨 소인배 장사꾼은 제 세상 만난 듯 점점 경쟁이 치열해졌다.
개중에는 용감한 자가 있어, 감자 싹은 먹지 말라는 감자촬요 내용조차 무시하고 감자 싹으로 나물 지어 먹겠다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감자 싹 재배에 얼마 안 되는 가산을 털어 넣기도 했다.
평소 그를 따르며 존경해오던 왈패들이 있어 높은 뜻은 모두에게 전해져 감자 싹으로 만든 나물 반찬을 다 같이 먹었다가 한날한시 다 같이 선민청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이를 들은 공조판서 신속이 황당해 하며 감자촬요를 언문과 그림이 주가 되는 책을 집필하여 어리석은 백성이 없게 하였다.
이쯤 되면 개성 송상(松商)과 경상(京商)같은 대형 상단들 역시 눈여겨 보았을 법 했지만 감자라는 것이 애초 기근에 고통받는 생민들을 위한 것이요, 그 것으로 이문을 남기는 것은 아무리 배워먹지 못한 천한 장사꾼일지라도 역적질이나 다름없는 것임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던 터라 (당장 영섭부터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감자를 직접 대량으로 매입하여 되파는 대신, 너무 많이 소출되어 다 썩어갈 뻔한 감자를 쌀이나 무명을 받고 한양 도성까지 운반해주거나 보관할 곳 없어 상하게 될 감자를 대신 보관해 주는 등 적극적으로 조정의 시책을 따라 보조하였으니 영섭도 흡족해했다.
게다가 지난날 양서 지방에 기근이 찾아왔을 때, 견디다 못한 백성들 중 일부가 도성으로 흘러들어와 선민청 식객이 되어 끓인 죽으로 연명하던 자들도
상단에서 감자를 운반하거나 보관하는데 팔과 다리를 제공한 자가 있어, 행수(行首) 눈에 들어 상단 밥으로 생계를 잇게 되었으니 어찌 복이 아니게 되리라.
사대부들에게도 감자는 (그들은 여전히 황석이라 불렀지만) 기꺼운 존재였으니, 황공하옵게도 주상전하께서도 낮것은 삶아낸 감자를 즐겨 드신다고 하니 참된 신하의 입장으로 어찌 흠모하는 지존을 따라 하지 않으리.
게다가 백성들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화로에 감자를 넣어 구워 ‘소금’을 찍어 먹는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던 터라 그것이 또 다른 별미였으니 퇴청 후 영감이니 대감이니 하는 집집마다 삼삼오오 모여 못다한 나랏일 이야기를 하다가 감자 구워 먹는 일이 빈번하였던 것이다.
감자가 처음으로 소출되며 영섭에게 보고된것이 이 정도 였으니 각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으랴.
***
영섭은 홀로 침전에 앉아 중용을 펼쳐 바라보았다. 이 시대로 떨어지며 생긴 또 다른 취미이자, 자존심 센 유학자들과 입씨름 할 때면 꼭 필요한것이 경전이었다.
“천명 은 하늘이 명령한 바로서 사람이 살아 가는 것을 말하고, 이것을 일러서 명령한 본성이라 한다. 목신은 곧 인이고, 금신은 곧 의이며, 화신은 곧 예이고, 수신은 곧 신이며, 토신은 곧 지이다. 본성이라는 것은 삶의 바탕인 천명이고, 사람이 부여받은 바의 법도이다.”
수도 없이 읽던 부분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그 느낌이 달라 책을 덮고 되뇌었다.
“그렇다면 나의 천명은 무엇인가.”
가슴 한쪽이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던 그가 개량한 감자 보급을 이렇게나마 조선에 떨어져서 착착 진행시킬 수 있었다니.
진작 감자가 보급되었더라면 기근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휼함에 있어 완벽을 기할 수 있었을텐데.
그렇기에 감자는 조선팔도 모든 곳에, 가장 빠르게 보급이 되어야 했다.
백성들에게 감자를 배불리 먹여 기근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리고, 대동법으로 쌀을 주로 걷어 거대 상단에 자금을 댈 겸 주주가 되고, 그러고도 남은 쌀로 하여 외국에 갖다 팔아 재정을 확보한다면 나라 전체가 윤택하게 되지 않겠는가.
영섭은 그저 이 마음이 조선사람 모두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 작가의말
9.18 제목 수정. 한자 일부 삭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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