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과 산당의 저항 (7) / 9. 18 수정
이월 정유일(14일) 새벽에 눈이 내려 훈련도감 갑사들과 병졸들은 며칠전부터 준비한 계단을 다시 한번 닦아내었다.
해가 뜨고, 다행히 찬 바람이 잦아들고 날이 따스하여 그다지 춥지 않았다.
회덕현 관아 근처 너른 터에는 만민공동회에 한 자리 차지하려 몰려든 백성들이 벌써 수천에 달했는데, 인근 고을 등지에서 하룻밤 자고 오는 사람이 많아
시간이 갈 수록 인파는 점점 늘어나 해가 중천이 되기도 전에 물경 이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모였던 것이었다.
백성들이 쓰는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전라도 방언과 경상도 방언이 가장 많고, 충청도 방언과 경기 방언 또한 많았다. 평안도 방언은 몇 있었으나 그 새 묻혀버리고
한데 어울려 탁주니, 개고기수육이니, 돼지 삶은 물이니 하며 서로 권하여 먹고 마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주상전하 납시오!”
지난번 도성에서 있었던 공동회 때와는 달리 영섭은 훈련도감 마군 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공동회가 개회되는 너른 터에 도착했다.
훈련도감 병졸들이 어찌나 엄정히 지키고 있었는지, 이번에는 주상전하 천세 소리 대신 잔뜩 긴장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영섭은 말에서 내리더니, 계단을 바로 올라가 서서 말했다.
“만 백성은 들으라!”
쩌렁 쩌렁 울리는 영섭의 목소리가 얼어붙은 겨울 하늘을 깨버리는듯 했다.
“오늘 열리는 만민공동회는 지난 날 수확한 감자를 향촌 사회를 구휼한다는 명목 아래 수탈하며, 쌀을 매점매석하여 그 폐단이 생기게끔 한 자들을 잡아다 충성스러운 신민들에게 그 죄를 분별하고자 한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눈을 크게 뜨고 영섭을 바라보는바,
“또한, 현 시국에 대해 말할 자가 있다면 기탄없이 이 계단으로 올라와 말할지어다. 죄인들을 들여라!”
하니 병졸들이 성큼성큼 걸어와 송준길과 송시열을 영섭 바로 앞에 던져넣고는 군례를 올리고 계단 앞에 진을 쳤다.
“여기 있는 자들은 지난날 회덕현 백성들의 감자를 수탈하고, 사람을 시켜 쌀을 매집. 시세를 폭등하게 한 자들이다. 이 자들이 스스로 저지른 것을 고변토록 할테니 백성들은 들으라!”
송시열은 영섭과 눈을 한번 마주치곤, 작게 한숨을 내쉬고 크게 외쳤다.
“인의예지와 덕을 알고 있는 회덕현 백성들이여! 주자(朱子)의 글을 조금 읽어 보니 한 글자 한 구절도 지론(至論)이며 격언(格言) 아닌 것이 없도다!
그 중에는 오늘날의 병통을 적중시킨 것도 있었는데, 마치 성명(聖明)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 둔 것과 같았으므로 감히 몇 조목을 구성하여 다음과 같이 고하도록 하겠다!
삼가 생각건대, 이런 말들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을 것이고 경연의 신하들도 이미 강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러나 이와 같이 간절하고 지극한 가르침은 마땅히
만 백성들이 함께 향유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였으니 나누어야 할 것이며 늘 보아도 싫지 않은 것이고 보면, 다시 고 한다고 하여 무슨 혐의가 되겠는가!”
하며, 송시열은 주자가 송 효종(宋孝宗)에게 올린 봉사(封事)와 학문의 요점을 논한 두 조목을 빗대어 고변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삼가 생각건대, 지난날 전란 이후로 습속이 비루해진 나머지 도학(道學)이 생활과는 멀리 하다 하여 현실적으로 시행하는 데에는 절실하지 못한 것이라고들 여겼도다.
그래서 실제로 운영해 갈 때 사용한 방법은 권모술수와 지력(智力)밖에는 없었던 바, 도학과 정치가 두 길로 나뉘어져 이에 도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도다!
주자께서도 평소 이 점에 분개하여 학문을 논할 때 현실적인 일을 빠뜨리지 않았고,
정치를 논하면서도 반드시 학문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에 다스림에 있어 그 도(道)를 얻었던 것이되, 본인 스스로가 가르침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최근 나라를 살펴본즉, 감자라는 기물은 지난날 공동회를 말미암아 모든 이가 알고 있듯, 청나라 오랑캐의 기물이지만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곡식심을 부정하진 않겠다.
게다가 구휼함에 도움이 되니 어찌 향촌 사회에서 이를 기꺼이 여겨 재배를 권하지 않을 수 있인가!
다만! 향촌 사회에서는 모두가 굶주리고 모두가 배불리 먹지 아니하니 그저 각자 소출한 감자를 한 데 모아다가 구휼이 필요한 집에 나누어 주려 한 것일 뿐!
수탈하여 서원의 세를 늘릴 목적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히겠다.
만약 그것이 수탈이 목적이었다면 왜 충청, 전라, 경상의 분연히 뜻 있는 선비들이 의를 떨쳐내 회덕으로 모여 향촌 사회의 구휼제도를 바로잡는 성스러운 일을 행했겠는가!”
송시열이 스스로 고변을 마치자 공동회에 모여있던 모두가 조용했다.
영섭은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송준길을 향해 말했다.
“다음 죄인은 고변하라!”
그러자 송준길이 영섭에게 크게 절 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외치기 시작했다.
“아, 주공(周公)이 세상을 뜬 후로 백세 동안 훌륭한 정치가 없었고, 맹자가 죽은 뒤로 천년 동안 진정한 선비가 없었도다!
그러다가 송(宋)나라에 이르러 정(程)주(朱) 등 제자(諸子)가 비로소 그 도(道)를 접하였으나 그 후에는 또 아무도 없었으며,
임금으로 이 도를 맡아 전한 자는 더욱 들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본인이 오랫동안 한탄해오던 것이었다.
도대체 이른바 도 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일용하는 사이와 동정하는 즈음에 사리를 정밀하게 살펴 참으로 그 중(中)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덕(德)을 이루는 것을 수기(修己)라고 하며, 이로써 교화를 베푸는 것을 치인(治人)이라 하며, 수기와 치인의 실제를 다하는 것을 전도(傳道)라고 하니,
요순이 서로 전한 것이 단지 이와 같을 뿐이리라!
그러므로 도통(道統)이 군상(君相)에게 있으면 도가 한 시대에 행하여져 은택이 후세에 유전(流傳)되고, 도통이 필부(匹夫)에게 있게 되면 도가 한 세대에 행하여지지 않고 단지 후학에게만 전해지는것이다.
만약 도통이 실전(失傳)되고 아울러 필부가 전해 받아서 진작시키지도 못하면 천하가 어두워져 따를 바를 모르게 될 터이니 어찌 통곡하지 않으리오!
그러더니 송준길이 고개를 돌려 영섭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외쳤다
“전하께서 보시기에 지금의 나라 형세가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백성들의 곤란함이 이미 심한 지경에 이르러 청나라로부터는 압박을 받고 안으로는 믿을 곳이 없으며,
천재(天災) 지변(地變)과 물괴(物怪) 인요(人妖)가 없는 달이 없으니, 비유하자면 큰병이 든 사람이 원기가 점차 다해 백가지 증세가 한꺼번에 일어나서 가슴속의 숨결 하나만이 겨우 간신히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데도 만약 급히 약을 써서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서 감자를 보급하네 농서를 보급하네 하며 장차 나아지기를 기다린다면 자애롭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일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어찌 전하께서 처한 상황을 슬기롭게 처리하지 못하고 그전 잘못을 답습하거나 구습에 젖어 있을 때이겠습니까!”
그러자 영섭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그 표정을 본 훈련대장 유혁연이 칼을 뽑아 외쳤다.
“이 송가 역적놈아! 어느 안전이라고 궤변을 지껄이느냐!”
“훈련대장은 심기를 가다듬도록 하라.”
하니 유혁연이 씩씩대면서 칼을 집어넣었지만 형형한 눈빛은 여전히 송준길을 향해있었다.
“만 백성은 두 죄인이 고변하는 것을 잘 들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에게 해를 입었거나 압박을 받은 이가 있다면 고변해도 좋을 것이다!”
영섭이 외치자, 두 사내가 우물쭈물 하며 주춤주춤 걸어나왔다.
“아이고 임금님! 억울함을 풀어주시길 바랍니다요!”
“천지신명께서 임금님을 돌봐주소서! 임금님! 불쌍한 이 쇤네 이야기를 좀 들어주십시요!”
하며 영섭을 향해 절을 올리는데, 영섭은 계단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 걸어나갔다.
훈련대장이 깜짝놀라 영섭을 제지하려 할 찰나-
영섭은 그 둘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으켜 주면서 말했다.
“여러분의 임금이 바로 여기 있네. 얼마가 걸려도 괜찮으니, 속에 있는 설움 모두 풀어내시게.”
하니 이 나라 최고 지존께서 감히 무지렁이 촌부의 손을 잡아줄 줄은 몰랐던 터라 그 둘은 지난날 설움에 복받쳐 눈물이 터져나왔다.
영섭이 보기에 촌부 하나 행색이 너무나 남루했던 터라, 무명옷은 군데군데 튿어지고 찢어져 추운 겨울바람을 겨우 막아낼 정도였고,
뗏국물이 줄줄 흐르다 늘러붙어 그 색이며 모습이 처참하였다.
“이 나라 백성들은 어찌 이리 고통받아야 하는가!”
하며 영섭이 붉은 곤룡포를 벗어 그에게 손수 입혀주니, 훈련대장도, 갑사들도, 송가 죄인들도, 공동회에 모여있던 백성들도 모두 크게 놀라 모두가 서로만 바라보았다.
“전하! 옥체를 보하소서!”
하며 훈련대장이 다급히 다가오는데, 영섭이 손으로 제지하였다.
“아들의 옷이 상하였는데 어찌 아비가 보고만 있을것인가?”
하니 촌부 둘은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시작했고, 지켜보던 백성들 또한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가 고하게.”
영섭이 부드럽게 말하자 곤룡포를 얼기설기 입은 촌부가 계단을 올라가 울면서 이야기했다.
“쇤네는! 박길이라 하온데 회덕현 아랫마을 뱀골에 사는 무지한 농꾼이라 주자가 어쩌니 하는 어려운 말은 잘 모릅니다요.
다만 작년 구 월 임금님의 은혜로 감자 수십개를 받아 감자 농사를 지어 이제야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꺼라 믿었습죠.
허나 감자를 수확하려 간 날, 누군가 이미 감자를 모두 뽑아내어 수확할 것이 없어 그저 주린 배를 채우겠다는 것은 한날 꿈이 되어버렸으니..
그 때 저기 앉아있는 송가놈을 마주하였는데, 보리쌀을 줄 터이니 그것을 심어 농사지으라 권하는게 아니었겠습니까?
헌데 그 나누어준 보리쌀을 심으려 하니 이미 볶아낸 보리쌀이라 심을수 없어 그저 며칠동안만 굶주림을 면해야 했습니다요.
그러다 얼마 전 쇤네 소중한 감자를 모두 뽑아내고 착복한 이가 저 송가놈이 모시는 스승이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불쌍한 쇤네 아비는 그만 몸져눕고 말았습니다요!
이러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모여있던 사람들이 같이 분노하여 다 같이 송가놈을 벌하라 외치기 시작했다.
“송가놈을 쳐죽여라!”
“내 감자밭을 훔쳐간 것도 네놈이 그런것이지? 죽어라!”
“네놈이 그러고도 살아날 줄 아느냐! 천지신명께서 가만있지 않으리라!”
하니 영섭이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말했다.
“백성들은 들어라! 아직 고변이 끝나지 않았으니 마음과 입을 가다듬고 사안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박길이가 내려가고, 다른 촌부 하나가 계단을 올라가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제 억울함이 풀리겠구나.”
공동회에 모인 사람들을 한 번 크게 둘러보더니, 촌부는 고변을 시작했다.
“소인! 회덕현 옆 내동 사는 김 진사라 합니다. 부끄럽게도 과거에 번번히 낙방하다보니 가세가 기울어 스스로 농사짓지 아니하고는 생활을 하지 못하게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굶어죽으란 법은 없는지, 주상전하의 밝은 덕으로 하여 감자를 받아다 농사지은것이 지난 구 월 일이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박 서방처럼, 소인 또한 감자를 심어 소출하였습니다만··”
김 진사는 갑자기 감정이 복받치는지 말을 끊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수확하고 이튿날, 서원에서 나왔다는 장정들이 향촌에 시급히 구휼할 이가 있다며, 감자를 모두 내놓으라는 말에 소인은 거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감히 회덕서원에 맞서려는 것이냐 하며 저와 제 딸 아이를 겁박하였습니다.
소인은 그저 이 감자라도 없으면 가족이 겨울에 먹을 것이 없다며 항변하였지만 그들은 들은 체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며칠을 대치하던 끝에 저들이 물러나 감자를 겨우 지켜냈노라 안도하였지만, 그날 밤 감자를 보관하던 광이 별안간 불길에 휩싸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여 어찌할 바 몰라 발을 구르는데, 딸 아이가 그렇게나 좋아했던 그 감자를! 그 감자를 자기가 구해오겠노라 광 안으로 들어가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든 말려 광 안으로 들어가지 못 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하고는 김 진사가 그대로 엎어져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외쳤다.
“내 딸! 내 귀한 딸! 금아! 금아! 아비가 감자농사를 짓지 않았어도! 그 날 저들에게 감자를 모두 내어주기만 했더라도! 네가 화를 입는 일은 없었을텐데 금아! 금아!”
그렇게 먼저 간 딸아이 이름을 부르짖으며 주먹을 내리치는데, 어느 새 피가 흐르는것도 모른 채 김 진사는 한참을 내리치다 별안간 송준길을 노려보았다.
“저 놈! 전하 저 놈입니다! 내 딸을 죽게 만든! 저 송가 저 놈이 시켜 서원 놈들로 하여 집과 광에 불을 지르라 하였으니 내 딸을 죽게한 바로 그 자입니다!”
그러자 김 진사의 사연을 듣고 울던 백성들도 별안간 형형한 눈빛으로 송준길을 다같이 노려보는데, 그 기세가 감히 훈련도감 갑사들도 움츠러들게 하였다.
그 순간 영섭이 계단을 올라가 김 진사를 안아주며 같이 흐느끼다 백성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만하면 더 이상 고변이 필요없을듯 하니 두 죄인에 대해 죄를 묻겠다!"
- 작가의말
9. 18 수정입니다. 스토리가 수정됨에 따라 각 백성들의 고변, 양 송의 변론 등이 수정되었으며 양송의 반론에 들어간 한자 외에 나머지 한자를 없앴고, 오탈자를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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