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조선지부 (2)
박연 일행이 부산성 서쪽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올리고 절영도로 이동해 출항한것은 순치 8년 (1651년) 4월의 일이었다.
절영도에서 나흘간 항해한 후 대마도에 닿으니, 대마도 사람들과 쓰시마 번주 종의성은 그저 전라 병상의 무역선이겠거니 별 관심보이지 않았다.
다만 정사 윤순지가 어기를 내보이며 통신사로 왔음을 알리자 그제서야 대마도에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부랴부랴 일공을 제공받아 쌀이며 생선이며 두부며 파, 나물 담배 등을 제각기 넉넉히 하여 나흘간 항해하며 게워냈던것들을 다시 보충하였다.
이틀 뒤, 번주 종의성은 정사 윤순지를 찾아가 어찌하여 사전에 아무런 연락없이 통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는지 진위를 파악하고자 왔음에,
그를 맞이하여 윤순지가 커다란 나무상자 두 개를 내리게 하고는 그중 하나를 열어 뒤적거리더니 종이에 싸인 물건 하나를 종의성에게 건넸다.
“자자, 지난번에도 번주께서 소관을 보아서 아시겠지만 통신사라는 것은 지난번 처럼 화려하게 올 수도 있지만 오늘날 처럼 조용하고 시급히 오고갈 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하며 종의성이 종이를 걷어내보니 과연 유약 바른 작은 도자기에 파도가 굽이쳐 햇빛에 반사되어 눈을 어지럽히는지라
“과연 조선사람은 예로부터 신뢰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리 급하게 통신사를 보낼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여 오고가는 뇌물속에 신뢰가 싹트는 것이었다.
그 뒤에 일은 일사천리라, 종의성은 나가사키까지 직접 길을 안내하며 윤순지 일행이 조선 국왕의 밀명을 받아 은밀히 에도를 향하는 것이라 적당히 포장하여 인근 번들의 의심을 없애는데 크게 힘을 써주었다.
***
“상관장님! 상관장님!”
평화로운 일요일. 마땅히 예배를 드려야 했지만 데지마에 온 뒤로 사사건건 저 일본인들은 기리시탄! 하며 예배는 커녕 일요일에 쉬는것 조차 못하게 방해했다.
가뜩이나 상관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드리안 반 더 부흐르가 자신을 찾는 고함소리를 듣고는 인상을 구겼다.
“이봐! 오늘 일요일인거 모르나?”
“그렇지만 여기선 일요일이라는게 없는걸요!”
“자. 내가 여기에 왔을 때 내가 뭐라 했지?”
“일요일엔 찾지 않는다.”
“그렇지. 이제 가봐.”
“상관장님 지시야 늘 지켜왔지만, 정말 급한 일입니다! 일본인 봉행으로부터 전달받은 소식입니다! 우리 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정말 우리 깃발을 걸고 있는 배였습니다!”
“하나님 맙소사. 설마 전임 상관장인가?”
“아니, 4개월 전에 쇼군을 배알하러 에도에 갔던 분이 아니셨습니까?”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지마 선착장에 배가 정박하더니 일본인 봉행, 을명, 통사 몇이 배에 승선 했다.
배에 탄 사람은 몇인지 점고를 하고, 데지마에서 하지 말아야 할 규칙등을 낭독한 후 장부 대비 물품의 수량과 상태 등등을 점검하였는데 장장 세시간에 걸쳐 모두가 불만이었다.
점검이 끝나자 정말 질렸다는 표정의 네덜란드 사람 하나가 내려왔다.
“스테르테미우스 상관장님!”
“부르흐! 아니 이제 신임 상관장님이겠군!”
“저야 상관장님 대리로 있었던 것 뿐입니다! 아니 그런데 쇼군을 배알하는데 왜 4개월이나 걸린겁니까?”
“일단 상관에 들어가서 이야기 하지. 정말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하며 스테르테미우스가 씩씩대며 상관으로 들어가자, 부르흐와 하인은 영문도 모르고 잽싸게 뒤를 쫒았다.
상관에 도착하자마자 스테르테미우스는 부르흐에게 지난 에도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자 부르흐가 어이없어 했다.
“아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3개월을 만나주지 않았다고요?”
“그러니까 내 말이! 매번 쇼군을 찾아 배알하겠다 해도 아무런 답변도 없고 ‘그저 오늘은 날이 좋지 않아 쇼군께서 배알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같은 개소리나 지껄이고 말야!”
하며 스테르테미우스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우리가 저 교만한 나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을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할 지 모르겠네!”
“혹 키리시탄 문제가 된것이..”
“아마 그럴것이야. 에도에서 여기로 오기 전에 일본인들 중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붙잡혀 끌려가는걸 보았지.
전지전능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마음을 돌려 저들을 구원하셨길 바랄 뿐이네.”
“비록 저들이 카톨릭을 믿는 자들이나, 엄연히 저들도 하나님의 자식들인데!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지켜봐야 한다는게 슬픕니다!”
하며 부르흐가 얼굴이 벌게져서 일본과 쇼군을 규탄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네.”
스테르테미우스 표정에 짙은 어둠이 감돌더니 말을 이었다.
“쇼군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키리시탄이 퍼지는 이유로 네덜란드 사람의 왕래를 의심하고 있네.”
“예? 그게 무슨?”
“카톨릭이나 우리나 십자가 들고 다닌다는건 마찬가지라 이걸세.”
“순 억지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더군. 그러니 내가 저 쇼군을 배알하려 3개월을 기다려야 했지. 여관에다가 쏟아부은 체류비만 해도 어마어마했네!”
“정말이지, 이런 수모를 받아가며 일본과 무역을 계속 해야 하겠습니까?”
“17인 위원회는 어떻게든 일본과 무역을 계속 하라고 하겠지 우리는 계속 그래야 할 거고.”
다소 침울해진 분위기에 스테르테미우스가 손뼉을 짝짝 치면서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했다.
“뭐 어쨌든 배알도 끝났고! 이제 나는 다음달에 바타비아로 돌아갈것이니 부르흐 자네가 고생좀 하게나 하하.”
“기왕 계시는거 좀 더 오래 머무시지요.”
“그럴까? 바타비아에 편ㅈ···.”
“상관장님! 상관장님!”
또 그 하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또 무슨일인가!”
“이번에도 배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깃발은 분명 우리 깃발인데, 중국 정크선이 들어오고 있답니다!”
“무슨 소리야? 정크선에 우리 깃발이라니?”
“부르흐, 그러지 말고 직접 나가봐야겠네.”
스테르테미우스가 표정을 싹 바꾸더니 급히 채비하여 선착장으로 먼저 나갔다.
“거 참 오늘 운 좋은 날이네. 9월도 아닌데 우리 배 두 척이 오다니.”
***
“저기가 나가사키. 데지마 입니다.”
종의성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과연 반달 모양의 섬이 박연과 윤순지의 눈에 들어왔다.
장대 높이 걸린 하란타, 네덜란드의 깃발이 점차 가까워지자 박연은 조금씩 눈물을 흘렸다.
“본관이 잘 모르나, 저 깃발과 우리 배에 있는 깃발이 같구려. 그대가 있던 나라를 뜻하는 깃발이라지.”
“정사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조선말로 하란타, 네덜란드의 깃발이지요.”
“얼핏 보면 단조롭다 할 수 있겠으나, 알아보기 편하고 무지렁이 백성들이라도 내 나라라는걸 바로 알 수 있을터.”
“참으로 가 한 말씀입니다 어르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일본 배 여러척이 몰려와 관리로 보이는 자가 문정하길
“그대들은 어디에서 온 어느나라 배요? 깃발을 보아하니 화란 배인듯 한데 범선이 아니라 저 중국의 배 같소만.”
하니 박연이 답했다.
“하늘에 덕과 이치가 닿아 모두의 스승이자 만백성을 굶주림에서 해방한 빈민의 수호자, 역적을 토벌하여 전란을 잠재웠으니 백성 모두를 태평성세로 인도하신 진정한 유학의 인도자, 농협을 세워 만 농민의 아버지이신 대조선국 국왕전하의 배이고, 나는 대조선국 훈련도감 파총 박연이자, 동인도 주식회사의 조선 상관장이다! 내 옆에 계신 분은 통신사 정사 윤순지 대감어르신이다!”
하니 왜국 관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고는 배에 납작 엎드려 외쳤다.
“통신사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쓰시마로부터 받았습니다! 나가사키로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자 통변을 들은 박연이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닐세! 우린 데지마에 잠시 들릴것이다!”
“허면 저희 관료들이 배에 올라 배의 인원을 점고하고, 행동 규칙을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며, 실린 화물과 장부를 대조해야 합니다!”
“그리 하도록 하게. 다만 상관장인 본인과 정사인 어르신은 먼저 데지마에 상륙을 허해주게나.”
하니 관료들이 다시 웅성거리며 이야기하다 크게 외쳤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선박으로 내려오십시오!”
이윽고 통신사선이 느릿느릿 데지마로 들어오자 부르흐와 스테르테미우스는 놀란 눈을 뜨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정크선이 맞는데 왜 우리 깃발을 달고있는거지?”
“저런 배는 일찍이 본 적이 없네. 일본 배도 아니고 중국 배도 아닌것이..”
“그렇다면, 차오셴이라는 나라 아니겠습니까?”
“차오셴이라면, 그 황금과 은 덩어리가 가득한 섬나라 말인가?”
그 때 한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어느새 옆에 있어 말하길
“조선에서 온 얀 얀서 드 발테브레이라 합니다.”
상관장 둘은 익순한 네덜란드 말이 들려와 고개를 홱 돌렸는데, 왠 서양 사람이 검은색과 파란색 빨간색이 섞인 비단옷을 입고 처음보는 모자까지 쓰고있으니 당황해하였다.
“어··음...·데···데지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르흐가 먼저 입을 열다가 아차 하고는 다시 말했다.
“데지마 상관장 아드리안 반 더 부르흐(Adriaen van der Burgh)라 합니다.”
그러자 스테르테미우스도 질세라 말했다.
“피터 스테르테미우스(Pieter Sterthemius) 입니다. 전 데지마 상관장이었습니다.”
***
“정말 믿을수 없는 이야기군요! 20여년전 조선에 표류하여 조선왕의 신하가 되었고, 청나라 군사와 싸워 공을 세워 훗트만(파총)이 되었다니!
게다가 조선왕께서 정확하게 ‘네덜란드 동인도 주식회사 조선 지부 상관’을 설립하였고. 당신을 상관장으로 임명하셨다. 말씀하신게 맞습니까?”
스테르테미우스가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박연을 바라보았다.
“이제 많이 늙은 몸. 거짓을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제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고, 여기 영명하신 대조선 국왕전하의 신임장을 같이 가져왔습니다.”
하여 펼쳐보니, 네덜란드어로 된 신임장 한 부와 한자로 쓰여진 신임장 한 부가 있었는데, 맨 아래를 보니 커다란 도장을 (어보) 찍은 모양이 너무나 선명하였다.
“과연 틀림없군요. 잘 알겠습니다.”
하며 부르흐가 신임장을 받아 공손히 다시 말았다. 스테르테미우스가 조심스레 박연에게 물었다.
“저희는 이러한 일이 있을거라 상상하지도 못하여 이제 어떻게 계획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울것 없습니다. 동인도 주식회사 조선 지부 상관은 조선반도의 서쪽 도시 제물포에 위치해 있으니, 자비로우신 대조선 국왕전하께서는 네덜란드의 배라면 언제든 몇 척이든 무역을 허가한다 하셨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안그래도 일본 관료들이 하던 짓이 점점 선을 넘는듯 할 찰나, 스스로 동인도 주식회사의 상관을 만들어주고 무제한 무역을 허가한 조선이 눈 앞에 나타났으니
부르흐와 스테르테미우스 둘 다 새로운 시장 혹은 그 이상의 가능성을 보게 된것이었다.
“또한 교회를 자유롭게 설립하여 신앙의 자유 또한 허락한다 하셨습니다.”
“맙소사!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장 상관 건물과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예. 다만 조선에서 많이 나는 쌀을 동인도 회사의 범선으로 포모사와 포모사와 인접한 명나라 땅에 대신 운반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문제없지요. 다만 그러면 조선 국왕전하께서는 혹 어떤 물품을 무역하고자 하는지, 아니 이 정도 호의를 보이셨으니 반드시 구해야겠습니다.”
“영명하신 국왕전하께서는 인도산 초석(saltpeter)이 많이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제게 가능하면 250라스트 가량을 확보하라 하셨지요.”
그러자 부르흐와 스테르테미우스 둘 다 펄쩍 뛸 정도로 놀라며 외쳤다.
“인도 초석을 250라스트씩이나요? 그 많은 초석으로 화약을 만드실 셈입니까? 아직도 조선과 청나라가 전쟁중이었습니까?”
그러자 부르흐의 말을 들은 박연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전쟁은 수십년 전에 끝났습니다. 평화를 사랑하시는 우리 대조선 국왕전하께서는 황공하옵게도 초석을 사들여 이를 밭에 뿌려 감자 재배하는데 쓰고자 하십니다.”
“예????”
- 작가의말
1. 정사 윤순지가 쓰시마 번주 종의성에게 뇌물로 준 회령 도자기 입니다. 큰 나무상자로 두 개분이었으니 종의성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눈에 선하네요. 훗날 조선의 주력 상품이 될 것이기도 합니다.
2. 라스트 (Last)는 시기에 따라 1,250kg에서 2,000kg를 왔다갔다 하지만 작중에서 1 라스트는2,000kg이며, 초석 250라스트면 약 500톤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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