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조선지부 (4)
“구빈원이라.. 하심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스테르테미우스가 혼란스러운듯 말했다.
“어떠한 점이 말입니까?”
박연이 갸우뚱 하며 쳐다보자 스테르테미우스가 으음 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구빈원이라는것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거지떼들을 한 데 모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병든 자가 있으면 치료를 하는 곳이라는건 알겠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대체 왜 조선에 필요한겁니까?”
박연은 순수한 호기심을 스테르테미우스의 눈동자에서 읽었다.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각자 힘써서 일하고 주님을 성실히 섬겨야 합니다. 각하, 거지들을 보십시오. 일할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중히 받았음에도 스스로 일하지 않고 구걸하는 자들을 대체 왜 구제라는 이름으로 도와야 하는지요? 루터께서 하신 말씀을 알지 않으십니까?
‘가난한 자들은 배고파 죽지 않고 얼어 죽지 않을 만큼 알맞게 보살펴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현재 불합리한 악용이 만연한 것처럼, 누군가 악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무위도식하고 부자가 되고 잘 사는 것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바울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설교하고 다스리는 사제들 외에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재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라고요”
“전임 상관장님, 저 또한 조선에 난파되어 상륙했을 때, 저 거지떼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조선 사람들로부터 구원받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이 자리에 없었겠지요.”
“각하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이교도 아닙니까?”
“그 이교도들을 조선에서는 유생이라고 부릅니다. 전임 산관장님, 혹시 이들이 가장 우선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사실 알지도 못하지만 별로 알고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박연이 성호를 그리고는
“너희는 굶주린 자에게 너희 음식을 나눠 주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사람을 너희 집으로 맞아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고 도움이 필요한 너희 친척이 있으면 외면하지 말고 도와줄 지어다.”
그 모습을 본 스테르테미우스는 깜짝놀랐다.
“방금 그.. 그 말은 성서 아닙니까? 저들이 성서의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박연이 웃으며 답했다.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 유생들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저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지 않다구요?”
“예. 저들이 성자 그 이상으로 치는 맹자라는 옛 중국 사람이 있는데 한 국가의 왕과 유학을 공부하는 자라면 사궁진휼(四窮賑恤), 기근구제(饑饉救濟)의 뜻을 널리 펼쳐야 한다 하였습니다.”
“사궁진휼, 기근구제라구요?”
“예. 네덜란드 사람인 제가 이런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사궁진휼을 설명드리면..
늙어 아내가 없어 굶주리는 자가 첫번째,
늙어 남편이 없어 굶주리는 자가 두번째,
늙어 자식이 없어 굶주리는 자가 세번째,
어리고 부모 없어 굶주리는 자가 네번째입니다.
이 넷이 사궁민이며 그들의 형편을 어디에 호소할 곳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조선 국왕전하께서는 즉위하시고는 은혜를 베푸셨을 때, 이 넷에게 먼저 감자를 주며 돌보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기근구제 중 기근이라 함은 가뭄, 홍수, 태풍 등과 같은 천재지변으로 흉년이 들거나, 혹은 전쟁이나 전란으로 인하여 빈곤에 빠져서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을 뜻합니다.”
박연이 작심한 듯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구제는 백성을 굶주리지 않게 은혜를 베푸는 정치야말로 왕으로 있는 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입니다.
옛날 중국에 흉년이 든 해에 백성들 중엔 노약자들은 도랑에 굴러떨어져 죽고 장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는 사람이 많으면서도 왕의 창고에는 곡식으로 가득차 있다면 이는 왕이 백성들을 해친 것이라 하였답니다.”
그러자 스테르테미우스가 박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서의 가르침과 조선의 유학과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는 어느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을 인정해야겠군요.”
“제 말이 바로 그렇습니다.”
박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테르테미우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빈자들에게 적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선행이라 할 수 없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 더욱 가깝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우선순위를 정해 자격있는 빈민들을 우선 구제하여 가난을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정한다라.. 그 우선순위와 자격은 어떻게 정할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개종한 조선 사람을 경건한 행실과 삶을 이어나간다 하는 맹세를 하나님과 성서 앞에 하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의 성전과 성서를 보고도 개종하지 않는다면, 무엇하여 이들을 구제하겠습니까?
즉, 맛있는 것을 줄테니 교회 나오시라 가 아닌, 교회에 나와라, 그러면 맛있는 것을 주겠다. 라는 말이었다.
그 때 마침 부르흐 상관장이 들어왔다.
“여기! 계약서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고 계셨는지요.”
박연이 계약서를 보고 왕의 대리자로서 서명한 후 웃으며 말했다.
“추후에 조선에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되면, 교회와 성당을 세우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박연은 일부러 ‘성당’ 에 힘을 주며 말했다. 순간 스테르테미우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말을 들은 부르흐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예? 교회 뿐만 아니라 성당도 말입니까?”
박연은 아무일 없는 사람처럼 태평히 말했다.
“예. 저희 조선 국왕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카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모두 같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인데 각자 가르침이 깊으니 어느 하나만을 받아들이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러자 부르흐가 대단히 감명받았다는 표정으로 박연에게 말했다.
“오 맙소사, 대체 조선 국왕전하께서는 어떤 고귀한 분이시길래 저런 아름다운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박연은 껄껄 웃었다.
“네덜란드 사람인 제가 홀로 표류하여 조선에 당도하고서 벌써 스무 해가 지났습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조선의 귀족이 되어 왔으니 조선 국왕 전하께서 얼마나 편견없고 사려깊고 신앙에 열성적인지를 알 수 있을것입니다.”
하니 부르흐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삼 년전, 오스나부르크에서의 희소식으로 저희 카톨릭 교도들은 더 이상 네덜란드에서 박해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테르테미우스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각 지역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부르흐는 면면에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1627년 이전에 다른 신앙을 갖기 시작한 사람은 설령 거주 지역의 통치자와 다른 신앙이더라도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는걸 왜 빼먹으셨습니까.”
“그것은.. 음.. 됐습니다. 우린 무역하러 왔지 지구 끝에 와서 서로 전쟁하고자 온 것은 아니잖습니까?”
“기왕 이렇게 된거 우리 나가사키 조약이라도 맺는게 어떻겠습니까 전임 상관장님? 하하하”
하며 부르흐가 껄껄 웃자 박연도 따라 웃었다.
“헌데, 조선 상관장 각하, 궁금한게 있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성당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심은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댓가를 어찌..”
부르흐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이번엔 박연 대신 스테르테미우스가 답했다.
“안그래도, 방금까지 그 이야길 하던 참입니다. 조선 국왕 전하께서 내건 조건은 하나입니다. 교회든 성당이든 바로 옆에 구빈원을 지어 사람들을 대접하라구요.”
“예?”
박연은 아까 보았던 광경이 반복되자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오 맙소사 세상에 하느님! 대체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인이란 말입니까!”
반응은 전혀 달랐지만.
“가톨릭에서는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다’ 를 항상 가슴에 품어 왔습니다. 조선 국왕전하께서도 이를 깨닫고 구빈원을 지으라 하신 것 이겠지요.”
하며 부르흐는 말을 이어갔다.
“구빈원.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자선이라는 뜻은 단지 가난한 이들을 돕는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하여 성당에 들어오려는 모든 동반자에게 그리스도의 호의를 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자 한참을 박연이 통변해주던 대화를 듣고있던 훈련대장 유혁연이 흥미롭다는듯 말했다.
“아까 다른 자는 법당에 나와 맹세를 해야 호의다 뭐다 하며 지원하겠다 하였소만 그대들과는 어떤 차이인 것인가?”
그러자 박연에게서 말을 들은 부르흐가 굉장히 공손한 표정으로 답했다.
“근위대장 각하,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하는 것은 자애로운 행위 그 자체입니다. 이는 곧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한 스스로가 훗날 구원받는 데 도움이 되는 선행이기도 하지요.”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네만, 납득은 되는듯 하네. 부처님도 가난한 이들을 도와 공부하며 수양하라 하셨지.”
“아마도 그 뜻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각하.”
박연이 통변을 마치고는 부르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존재할 것인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복음이군요. 역시 조선에 오래 계셨어도 성서를 잊지 않으시···”
“이 말씀은 조선 국왕 전하께서 신부님이나 카톨릭 신자를 만나면 전해달라 하신 구절이었습니다.”
“예? 조선 국왕전하께서는 성서를 읽은 적이 있으십니까?”
“성서 뿐이겠습니까?”
하며 박연이 품속에서 은 십자가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고는 부르흐에게 건네며 말했다.
“국왕전하께서는, 이 은 십자가가 지난 수백년간 내려온 조선 왕실의 보물이라 하셨습니다.”
십자가에는 글씨가 작게 각인되어 있었다.
‘Presbyter Johannes’
부르흐도, 스테르테미우스도 그저 할 말을 잃고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
그 무렵, 영섭은 경연을 열어 중신들과 논쟁하고 있었는데 영의정 김육이 고개를 갸웃하며 영섭에게 물었다.
“전하, 소신 아둔하여 전하께서 하교하신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사옵니다.”
“무엇이 말인가?”
“사회복지제도 라는 말 이옵니다.”
“아, 조만간 교회니 성당이니 하며 이 조선땅에 몰려들 것인 즉, 나는 이들로 하여금 구빈원을 많이, 아주 많이 세워 사회복지제도의 뜻을 펼치려 하노라.”
빈민 구제라는, 선교사의 짐을 지워 본격적으로 성당과 교회에 빨대 꽂을 궁리를 하며 싱글벙글 웃는 영섭을, 김육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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