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결단 (3)
“조선 국왕께서 직접 북경에 가시겠다니요! 아니될 말입니다!”
칙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영섭에게 항의해 보았지만, 영섭은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나 또한 순치 황제폐하의 충실한 신하이고, 아까 칙사가 말씀한대로 신하로서 그럴 권리가 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북경까지 그 거리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칙사는 또 아차 했지만 영섭은 이제 여유만만한 태도로 답했다.
“잘 압니다. 이번에 가면 두번째 가는 것이니 그 길을 모르겠습니까.”
하니 책사는 그저 아무 말 못하고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듯 달아 올라 뒷목을 잡을 뿐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삼정승 이하 백관들이 나서서 영섭을 말렸다.
“전하, 뜻을 거두어 주소서! 전하께서 어찌 청나라에 가신다는 말을 하십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우의정 원두표를 시작으로,
“전하!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칙사도 죄를 지은것은 송귀들이지 전하께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아니했다지 않습니까!”
예조판서 김자점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채로 빌다시피 했다. 영섭은 말했다.
“백성들의 죄 또한 나의 죄이다. 백관은 들어라! 내가 국경을 넘어 청나라에 가있는 동안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것이니 나의 뜻을 받들도록 하라.”
그러자 영의정 김육이 땅바닥에 엎어져 고했다.
“전하! 세자께선 이제 지학(志學)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군국의 사무가 다른 것보다 시급한 일이니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나는 지학이 되기도 전에, 그대들 같은 유능한 관료들도 없이 청나라에 갔었다. 그대들이 있으니 세자는 잘 해낼 것이다.”
하며 영섭이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니 삼정승 이하 백관이 모두 엎어져 통곡하였고, 이를 바라보던 칙사도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렇게 폭탄 선언을 했지만 영섭 일행이 실제로 움직일 수 있던건 나흘이 지난 뒤였다.
임금이 사신처럼 상국에 가서 황제를 알현한다는 일은 전례없던 일이었기에, 그 구성은 어떻게 하고, 통역관은 누구로 할 것이며, 몇을 뽑을 것인지에 대한 것부터 말은 몇 마리를 대동해야 하는지, 현지에서 사용할 각 비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호위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 백관들은 나흘간 퇴청이라는 말은 잠시 잊은 채로 밤낮동안 열띤 토론과 토론과 토론을 이어가야 했다.
그 와중에도 매 시간마다 삼정승 이하 백관들이 돌아가며 영섭을 찾아가 아직 늦지 않았으니 어심을 돌릴것을 간청했다.
게다가 대리청정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세자가 영섭이 있던 침전 앞에 석고대죄 하며 제발 명을 거두시라 애원하니 관원 모두가 안타깝게 여겼다.
“전하! 제발 명을 거두시옵소서! 소신 배움이 미천하여 나라를 다스릴 형편이 못 되옵니다!”
영섭은 창호지 틈으로 애원하던 세자를 바라보았다.
딱히 그가 자식 같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저 지난날 자신을 아버지 하며 따르던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괜히 원 주인(효종)의 몸을 빼앗은 것이니 아비 노릇을 조금은 해주어야 한다는 부채 의식이 조금 남아있었다.
하여 차마 모질게 대하지는 못하고 그저 학문을 배울 때에는 “잘 하는구나. 참으로 장하다.” 했을 뿐이고
활 쏘던 날에는 세자가 화살을 잘 못 맞추자 “잘 맞추지 못하였어도 괜찮다. 세상엔 활 쏘는 일 말고도 다른 일이 많단다.” 했을 뿐이며
하루는 공부가 싫어 후원에서 노는것을, 영섭을 바라보자 겁에 질려 하던 모습이 안쓰러워 돼지 오줌보 하나를 구해와서 바람을 불어 넣어 같이 차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세자가 추운 이 겨울날 석고대죄를 하며 자신을 애타게 부르짖으니 영섭의 마음 한 구석이 찡했다.
이곳에 온 후 어느 누구 하나에게 정을 주지 않기로 생각했던 영섭이었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세자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라 잠시 시선이 멈칫했다.
여전히 세자는 제발 명을 거두어 달라며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눈물자국이 가득하고 떨어진 눈물은 얼어붙고 있어 안쓰러움은 배가 되었다.
영섭은 침전 밖으로 나가 세자에게 다가가더니, 세자를 일으켜 세우고 꼭 안아주며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연(棩)아. 나는 너를 믿는다. 걱정하지 말거라.”
***
영섭과 칙사 일행이 창덕궁에서 나와 영은문쪽으로 향하려 할 때, 별안간 반대편에서 와아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칙사와 청군들은 크게 동요하며 경계했지만, 영섭은 그저 미소를 띈 채 흩날리는 농협 깃발을 바라보았다.
나흘간 의전이다 뭐다 준비하는 통에 임금님께서 청나라로 끌려간다는 소식은 이미 경기 일대에 파다하게 퍼졌으니 사람들이 구름떼 처럼 몰려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 선봉에는 경기농협 회원들이 몰려와 소리를 질렀다.
“임금님을 이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청나라로 가시면 소인들을 누가 이끌어 준단 말씀입니까!”
하니 영섭이 웃으며 답했다.
“이미 농협은 내가 없어도 잘 운영되지 않느냐? 농협은 지금처럼만 잘 뿌리내린다면 십년이 지나고 이 땅 모든 농민들에게 빛이 될 것이니 그저 힘써 자영농 육성에 힘쓰도록 하여라.”
그 말에 경기 농협 회원들이 엎드려 통곡했다.
“전하! 저희들은 배우지 못해 무지하고, 글씨를 쓸 줄 몰라 글을 읽을 순 없지만 충군 애국이라는 뜻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어찌 저희들에게 충군 애국할것을 하지 말라 명한단 말씀이옵니까!”
영섭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가 못 배우고 글자도 모른다 하지만, 충군 애국의 뜻은 확실히 알고 있구나. 보아라! 글자를 읽고 그것을 입으로만 떠드는 대신에 글자를 모르더라도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나와 그 뜻을 실천하니 어찌 너희가 무지한 사람들이란 말이냐. 다만 오늘의 일은 내 뜻으로 스스로 청나라에 가고자 하는 것이니 나의 뜻을 의심하지 말고 물러날 것이다. 다만 충군 애국의 뜻을 팔도 모두에게 널리 퍼트리도록 하여라.”
하니 경기 농협 회원들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영섭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칙사에게 말했다.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려 송구합니다.”
그러자 칙사가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답하는데
“조선 국왕께서는 아직 늦지 않았으니 제발 기수를 돌려 궁으로 돌아가시길 청합니다. 일단 죄인들을 처결한 뒤에 이런 사정이 있었음을 폐하께 설명드리겠습니다!”
영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그래도 가는게 맞겠소.”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육조거리 인근에서 영섭 일행의 발걸음은 멈추고 말았으니, 수천 사람이 한데 모여있어 벽 처럼 단단히 있던 것이었다.
시간을 잠깐 돌려, 영섭 일행이 창덕궁에서 나오기 전에 도성 사람들은 지나가다 평소에 보기 힘든 농협 깃발이 도성 이곳 저곳 나부끼고 있고, 농협 회원들은 저마다 분통을 터뜨리며 울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물었다.
농협 회원들은 친절히 ‘임금님께서 청나라로 끌려가십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형세이니 어찌 슬피 울지 않겠습니까’ 하니 도성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 육조거리로 달음하였고,
그렇게 모인 자들이 일 각도 되지 않아 이천명이 넘었으니 영섭이 지시하지 않은, 백성들에 의해 첫번째 만민공동회가 열리게 된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단을 가져와 올리고, 농협 회원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포진하니 장엄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한성에 있는 모든 이는 들으시오! 대체 왜 우리 임금님께서 스스로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저 청나라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한단 말입니까!”
경기 농협 집정 처인규가 피끓는 목소리로 외치자, 아래 있던 사람들이 ‘옳소!’ ‘옳소!’ 하며 답했다.
“본인이 배움이 짧아 긴 이야기를 하지는 못하지만, 대체 임금님께서 저 청나라에 끌려가시게 되면 대체 이 나라 조선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옳소!”
“여기 있는 모두가 알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지난날 감자를 널리 전하지 않았다면! 임금님께서 선민청을 세워 구휼하지 않았다면! 저 서역 승려들로 하여금 구빈원을 세우지 않았다면! 이 나라에서 죽어나갈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옳소! 옳소! 옳소!”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저 역시 임금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저 굶어 죽었을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여기 모인 수 천 사람의 목숨을 임금님께서 구해준것이나 진배 없으니 그 은혜가 하늘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것 아니겠습니까!”
“말 잘 하네! 맞소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어진 우리 임금님께서 대체 무얼 잘못하여! 무슨 죄가 있어 저 청나라로 끌려가야만 한단 말입니까! 이래선 안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임금님을 살립시다!”
“살립시다! 살립시다! 살립시다!”
하며 집정 처인규가 내려가니, 이번엔 녹색 비단 옷을 입은 한 사람이 계단을 올라가 외쳤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날 모두가 천하디 천한 장사꾼놈이라 불렀던 경상 대방 김득수 올시다! 내 여지껏 상인들은 신의가 없다, 교활하다, 백성을 벗겨먹는다 하여 핍박받고 어느 한 곳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는 다르셨습니다. 우리 상인들을 믿어주셨고! 우리에게 장사할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해주셨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고하겠습니다. 장사를 하며 본 것인데, 어느 누구 하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재물이 많은 자는 스스로 사치를 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지금 이렇게 외치고 있는 본인도 스스로 녹색 비단옷을 지어 입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게 사람이고 이게 모두가 꿈꾸는 것이라 이 못난 장사꾼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비단옷을 내놓으시겠소?”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치니 엄숙했던 공동회가 순식간에 웃음으로 가득찼다. 경상 대방 김득수도 한참을 호탕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내, 하나는 약조하리다! 언젠가 이 나라 모든 이에게 녹색 비단옷 한 벌씩은 입게 해 주겠습니다!”
“와아아아!”
“그런데, 우리 임금님께선 이 조선땅 누구보다도 재물이 많으심에도 사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되고 모두가 침묵했다.
“우리 임금님께서는! 제가 장사하여 벌어들인 은자를 바치자 그 재물을 한데 모아 거름 쓸 염초와 사탕과 여러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물을 들여오라 하셨습니다.
동서고금을 따져보아도 이런 임금님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본래 재물이란 물고기 같아서 모여들면 썩은내가 나고 사람의 얼굴을 찡그리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 임금님께서는 그 재물을 한데 모아 사람을 살리는데, 사람을 배불리 먹이는데, 사람을 이롭게 하는데 하셨으니 어찌 그 죄가 있단 말입니까!”
“옳소이다! 옳소!”
“방금 경기 농협 집정께서, 임금님께서는 여기 있는 수 천 목숨을 살리셨다 했는데 이는 틀린말이외다. 최소 십만 아니 백만 이상의 목숨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임금님께서 잘못을 저질러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니 이 말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옳소!!!!!!!!!”
“임금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 살려주셨듯, 이제는 우리가! 임금님을 지켜 드립시다!”
“지킵시다! 지킵시다! 지킵시다!”
하며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던 차에, 영섭과 칙사 일행이 육조거리 근처에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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