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1)
영섭은 꿈을 꾸었다.
청병 하나가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달려오는데, 영격총을 아무리 쏘아도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달려와 칼을 휘둘렀다.
배에 서늘하고 날카롭게 베이는 느낌이 아찔하니 영섭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흙바닥에 쓰러져버렸다.
“허..허억!”
또 그 빌어먹을 꿈이다.
강화도에서 아오바이를 비롯한 청군 일만을 완전히 전멸시키고 당당히 도성으로 복귀한지도 한 달이 넘었다.
허나 당당한 개선과는 달리 영섭은 때때로 악몽에 시달렸으니, 지난 생에서 월남에 갔다온 이후에 한참동안 악몽을 꾸었던 일이 되풀이 된 것이리라.
이럴때일수록 마음을 다잡는게 중요하여, 영섭은 강화도에서 썼던 전투일지와 상황일지를 꺼내어 놓고 호롱에 불을 올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영섭은 강화성 전투 이후 보름간 강화에서 머물면서 잔당 소탕과 청병들에게 유린당한 강화도 백성들을 위무하며 희망을 심어주는 일에 주력했다.
경기 수군을 모조리 동원하기 전에 적의 총 지휘관 아오바이와 나라 팔아먹은 김자점을 놓친 것은 아쉬운 일이었으나 강화도에서 전투는 병자년 이래 유래없는 대승이었다.
대승. 상상할 수도 없는 승리를 거둔 영섭의 위용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청나라 조정. 특히 순치제는 아오바이의 군대가 완전히 전멸해버린 것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잉글랜드 상인의 말을 전해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주식회사의 조선 상관장 벨테브레가 영섭에게 고하길
“조선왕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에 청나라 군대가 전멸했다고 보고 받은 황제는 대노하여 살아돌아온 자들을 모두 처형하라 했다고 합니다.”
“과장된 이야기가 섞여있을 것이지만 청나라 황제가 단단히 돌아버린건 맞는듯 하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장 남경도 콕싱야(정성공)에게 함락되길 오늘 내일 하니, 이대로라면 자칫 양면에서..”
“그렇겠지. 그러니까 더욱 마음이 급할게야.”
정성공 일당과 후명의 군대는 의외로 끈질기게 싸우며 남경 수복을 목전에 두고 있다 했다.
청나라 입장에서도 남경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니 어떻게든 병력을 밀어넣으며 우위를 점해야 할 판인데, 그 판에 조선이 올라와 버린 상황이다.
영섭은 아직도 왜 청나라가 육로가 아닌 해로로 강화도를 들이쳤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탐색전이나 다를바 없는 이번 싸움에서 청나라 군대는 완전히 전멸해버렸다.
잔당 소탕까지 포함한 적 사살이 11,287명. 부상자나 포로 따위는 남겨두지 않았다.
가뜩이나 총력전 수행으로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 포로를 몇 달동안 먹이고 재울 병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터.
포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청나라 황제야 갈갈이 날뛰겠지만 그건 그 쪽 사정이다.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들.”
영섭은 자기도 모르게 월남에서 베트콩들을 때려잡으며 내뱉던 욕지거리를 여기에서도 내뱉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병원이라도 있어 정밀한 진단을 받아보면 좋았을 터.
여기 이 나라엔 병원은 커녕 어의란 자에게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무슨 무슨 탕이니
뜸이니 침이니 하며 반강제적으로 치료당하는데 영섭은 영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또 그 꿈..을 꾸셨습니까.”
옆에 누워있던 중전 장씨가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심려치 마세요. 부인과 같이 꽃놀이를 갔었지요.”
“그렇습니..”
하며 장씨가 코를 드르렁 골았다.
잠꼬대였던가.
장씨도 영섭이 사흘에 한번꼴로 악몽을 꾸어대니 이젠 익숙한 듯 잠꼬대로 영섭을 살펴주었다.
영섭은 중전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결혼생활이라면 이미 지난 삶 속에서 사십 칠년을 이어가, 부부라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바.
다행히 효종의 기억도 영섭의 기억마냥 자연스레 떠올라 지금껏 중전 장씨와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저 세자 이야기, 공주들 이야기, 전쟁 이전에는 영섭이 감자를 널리 보급하는것에 감명받아,
궁에서 쓰는 이불 색을 녹색 혹은 붉은색으로만 해야겠다는 말에 신군복 제정에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었다.
영섭이 뜬눈으로 침전 천장을 바라보다, 옆에 있는 자명종을 바라보니 로마자 I 에 바늘이 가 있었다.
동틀무렵이 다가오는듯 하니 대략 다섯 시간 정도 차이가 있을 터.
영섭은 저 로마자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었을테니 시간 맞추는것도 안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
어전 회의에서 영섭은 지난 밤 벨테브레와 대화를 기억하고는 영의정 김육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화도에 집중하느라 정성공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남경 함락이 오늘 내일 한다고 하였느냐?”
“예 전하. 하란타(네덜란드) 양행 (회사)를 통해 정성공에게 흘러들어가는 염초와 화포, 조총 덕분에 이제는 명나라 군대가 청나라 군대를 완전히 압도할 정도라 하옵니다.”
“명나라가 남경을 회복하면, 청나라는 장강 이남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을 터. 그렇게 된다면···”
“소신, 생각하건데 장강을 경계로 명나라가 강남을 지배할 것이고, 청나라는 강북을 지배하여 서로 나뉘게 될 것이옵니다.”
“영의정이 바로 보았다. 그 것이 청나라 황제가 그리고 있는 최악의 상황일 테지. 그런게 그게 최악이 아닐 터.”
“우리 조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린 문제이지 않겠사옵니까 전하.”
“그렇다. 고양 훈련소에서 조련중인 13만 군사를 당장에 의주성을 넘어 심양으로 진격한다면 청 황제 표정이 참 볼만 할게야.”
“안그래도 전하. 그 문제로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문제라고?”
“예 전하. 이는 수어청의 신식군과도 관련된 것이옵니다.”
“척탄여단 말이냐?”
“예 전하. 남한산성에서 출정때 까지 소신들에게 아무 말 없이 기밀을 유지하심은 김자점의 친청파가 청나라에 일러 바칠것을 염려하여 그런줄로 알았습니다만,
그들에게 들어가는 재화나 물목을 점검해보니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아니 그거야···”
“전하. 신식군 오 천명을 조련하는데 한 해 내수사 수입 중 팔 할이 들어갔습니다. 여기엔 강화 전투에 운송된 화약이나 치중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옵니다.”
“본래 뭐든지 처음 하는 일에는 시행착오라는게 있는게 아닌가?”
“전하. 그렇지만 화약의 문제는 더욱 심하옵니다. 수어청 신식군 5천명이 강화 전투를 치른 근 한달간, 소모된 화약이 자그마치 4만근(24톤)이 훌쩍 넘사옵니다.
일년을 싸운다 하면 48만근(288톤)이 될 것이온데 전하께서는 고양 훈련소에서 조련중인 13만 군사들을 수어청 신식군과 같이 하기를 하교하셨다 하니
13만 군사가 1년에 쉬지않고 전투를 치른다면 일천이백사십만근(7,488톤) 이라는, 저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운 화약이 소모될 것이옵니다.”
영섭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가 생각해도 13만 군사를 모조리 수어청 근위척탄여단과 같은 편제로 둔다면 김육이 고한대로 화약의 부족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만 대체 누가 저렇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전 치중대대장이자 현 공조판서 신속이 영섭의 얼굴을 본체 만체 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일 년에 조선으로 인도산 초석이 들어오는게 약 1천톤이니 이걸로는 1년 이상 장기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다.
혹은 전면전을 벌이더라도 3개월 후에는 다음 해에 들어오는 초석을 기다려야만 하니, 조만간 본격적으로 들이칠 청나라 군대를 막아내려면 화약을 아낄 필요는 있었다.
“전하. 팔도 모든 백성과 관료들이 총력으로 전쟁을 대비한 것도 벌써 넉 달이 넘었사옵니다. 적과 싸워 크게 이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정작 필요할 때에 화약이 없어
적을 보고도 쏠 수 없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러자 영섭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의주성 너머 적을 들이칠 적에, 보병이 아닌 철기병들을 상대해야 한다. 물론 강화도에서 장창 든 서역승들 덕분에 적 철기를 막아내었다곤 하나 저들이 나고 자란 평원에서 싸운다 하면 장창으로는 역부족이리라. 화포 숫자를 줄이더라도 총병의 수는 그대로 가야함이 옳다.”
“허나 전하··· 아니옵니다. 단지 소신은 13만 군사에게 들어가는 물목에 부족함이 없을까 싶어 고한 것이었으니 부디 헤아려 주소서.”
하며 김육이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숙이자, 퇴로가 열린 영섭은 경의 뜻대로 하겠노라 하며 얼버무렸다.
***
“병판하고 석반 한 번 같이 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내 혼났소이다.”
“대감. 전투가 끝난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찾아뵙지 아니한 소인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아닐세. 가뜩이나 저 청나라 놈들 때문에 나라가 뒤숭숭한데, 중신들이 사사로이 모인다고 하면 그 누가 좋게 보겠는가?”
영의정 김육이 공조판서 신속, 병조판서 이완을 강화도 종군간 고생했음을 알고 위로하겠다며 식사자리 초대한 것이 벌써 몇 차례.
드디어 병조판서가 수락함으로서 셋이 모이게 되었다.
“전하를 따라 강화까지 종군하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대감. 저희야 그저 전하 뒤를 따라다녔을 뿐이지요.”
신속이 슬쩍 웃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친정을 하신다니 삼정승 이하 관료가 기절할 노릇이었지만, 그저 기우였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군을 지휘하는 능력이 뛰어나신 덕택에 청적을 모두 궤멸하지 않았습니까.”
이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렇지. 전하께선 참으로 신묘한 재주가 많으신듯 하니 어찌 이 나라 복이 아닌가. 대저 감자라는 곡식을 가져와 팔도에 기승하던 기근을 물리치지 않았던가. 내수사 재물로 자점의 눈을 속이며 신식군을 양성해내 청나라 군대를 전멸시키지 않았던가.”
“참으로 그러합니다 대감.”
신속과 이완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욱 전하깨서 품으신 뜻을 모르겠네.”
“예?”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전하께서 감자를 들여온 것도, 하란타와 교역을 하게 한 것도, 서역승과 교회를 들여온 것도 그 모두가.. 단 하나의 목적으로 서로 연결되었던게 아닌가 함이야.”
“그 말이라면..”
“일전에,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세자세강원 시절 전하와 함께 북벌을 논의했던 때가 있었네.”
“그거야 모두가 아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석연찮은 점이 있었네. 그 때 전하께서는 단순히 북벌을 하려는 마음이 불타는 청년에 불과했었는데,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저리 정교한 판을 짜내어 이 나라를 재건해내고 정병을 육성한다는 일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란 말일세.”
“대감. 모두가 전하께서 행하심을 알지 않습니까?”
“병판. 그대에게 묻고자 하는게 있네.”
“하문하십시오. 대감.”
“전하께선 이 전쟁을 어찌 끝맺으려 하시는가?”
순간 이완은 침묵하고는 고개를 숙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추궁하여 죄를 묻고자 하는게 아닐세. 괜찮으니 말해보시게.”
“청나라를 완전히 멸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완전히? 종묘사직을 말인가?”
“아닙니다 대감. 그것이.. 전하께서는 무인지대라 하셨습니다.”
“무인지대? 그게 무슨 뜻인가 병판?”
“그것이.. 글자 그대로 청나라 땅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는···”
“뭐라고···?”
***
“전하, 소신 이완이옵니다. 부르시기에 찾아왔나이다.”
침묵
“대감, 전하께서 서책을 읽다가 침수에 드신 모양입니다. 아까 제게 일러두기를, 대감께서 오시면 바로 들이라 하셨습니다.”
하니 상선이 이완에게 들어갈것을 권했다.
“소신 이완, 송구하오나 들어가도록 하겠사옵니다.”
하며 이완이 침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직 끓고있는 찻물과 향 타는 향이 코를 자극하며 이완을 반겨주었다.
지난번에는 보이지 않던 강역 지도 하나가 벽에 있고, 바닥엔 과연 서책 여러개가 이리저리 흩어져있었으며 약과 몇개와 청주 한 병이 있어 상선의 말이 맞았던 것이었다.
이 나라 절대 지존께서는 그만 침수에 들어, 서안(書案) 위에 반 쯤 엎어진 모습으로 드르렁 거리고 있었다.
차마 옥체에 손을 댄다거나 소리를 크게 내어 전하를 깨우는 대신 굳세고 강직한 이완은 그 앞에 부복하고서 주상께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완도 사람인지라 한 각이 넘어 자세가 조금 흐트러질 즈음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서책에 눈이 갔다.
“필시 또 다른 고민이 있어 이리 많은 서책을 읽으셨던게야..”
이완은 왕이 엎어진 서안 위 종이에 쓰여있는 서역 글씨를 보았다.
먹물로 쓴 것은 아닌듯 하였는데, 요즘 하란타에서 건너온 청동 세필이 아닌가 싶었다.
이완은 순수한 호기심에 이완은 천천히 한 글자씩 바라보았다.
‘No man’s land.’
이완은 순간 눈을 비볐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그러다가 이완은 누군가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는듯 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바로 한 순간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왕을 보고야 말았다.
- 작가의말
늦었지만,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작품 수정이 일부 늦어져 시간이 좀 더 걸릴것으로 생각되지만 중간 중간 연재 이어가며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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