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협상 (1)
“여기···황제 폐하의··· 칙서입니다. 마땅히 예를 갖추고··· 해야 하지만···”
영섭이 범문정을 잡아먹을듯 노려보자, 범문정은 꼬리를 내렸다.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예는 생략하겠습니다.”
하며 범문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칙서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영섭이 칙서를 향해 절을 하고, 황제의 신하로서 예를 다 해야했지만, 범문정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런 예법이고 뭐고 빨리 협상을 끝내고 싶었다.
마땅히 예를 갖추라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조선 왕부터 관료들까지 순간 얼굴에 스쳐가는 살기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흠흠.. 조선왕 이호에게 고하노라. 지난 병자년의 화약 이후 조선은 대청의 신하를 자처하였으니, 이는 자연의 오묘한 섭리와도 같다 하겠다.
그간 소방으로서 책무와 상국을 받드는 데 소홀함이 없어 제일가는 신하로서 대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이 화합을 깨뜨리려는 불온한 자들이 있어 친히 벌하려 하였다.
조선왕 이호는 숙고하여 짐이 천군을 조선 땅으로 보내 이 불온한 자들을 색출하는데 기꺼이 협력했어야 하나 그러지 아니하였기에 오늘날 이런 불행한 일이 되풀이 되고 말았다.
다만 의정대신 아오바이가 조선에 출병한 것은 전적으로 그와 그가 이끄는 상황기 일족의 독단적인 의사였음을 짐은 무겁게 고할 수 밖에 없다. 그가 태조폐하의 첫째가는 심복이었음을 조선왕도 잘 알터이니, 그저 충군이라는 대의 앞에 잠시 눈과 사고가 멀었던 것이다.
조선은 예로부터 왕과 신하의 관계가 두터워 충의로 나라가 유지된 것을 안다. 이번에 있었던 불행한 일도 단지 충군과 충의라는 큰 틀에서 잠시 소란함이 있었던 것이니 조선왕은 이를 어여삐 여겨 조선이 가치있게 여기는 충이라는 뜻을 다시 아로새기길 권하는 바이다.
하여 타이시 범문정을 조선으로 보내니, 그는 나를 대신하여 다시금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그 뜻과 예를 다하여 주길 하교한다.”
범문정이 순치제의 칙서를 다 읽자, 성루 위에는 그저 침묵이 감돌았다.
“다 읽었으면 가시오.”
“예..?”
영섭의 뜻밖의 반응에, 범문정은 눈을 번쩍 떴다. 그냥 가라니? 지금 조선 왕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보아하니, 황제께선 협상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신듯 하오만.”
“그 무슨..! 조선 국왕께서는 칙서에 담긴 이면을 아직 못 보셨습니까?”
외교문서에는 절대적이거나 확정적인 표현은 삼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물며 황제가 신하인 왕에게 보내는 문서야 오죽할까.
아오바이가 상황기를 이끌고 독단으로 출병했다는 것을 밝힌 것은 순치제의 체면을 위한 꼬리자르기였다.
황제의 신하가 황명을 어기고 깽판을 쳐놓은 것을, 신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사과함으로써 조선 침공에 대해 직접적인 사과는 아니지만 황제의 체면을 봐서 사과를 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겨우 전투 한 번에 침공해서 미안하다 사과하는 것은 더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순치제 본인도 꼭 이런 문구가 들어가야겠냐며 화를 내었지만, 단호한 범문정 앞에 황제도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내가 원체 직접 말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성격이라. 사신이 이해하시오.”
영섭은 그런 그 앞에서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여기 있는 조선 관료들도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니, 범문정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지금 영섭이 범문정에게 요구하는 것은 황제의 체면을 모조리 구겨넣고 발가벗겨 한번 웃음거리좀 되어봐라 하는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명나라 출신 청나라 사람이라면 체면을 목숨보다 중시함은 변함 없을 터. 영섭은 그 아픈 지점을 짐짓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니, 범문정으로서는 당장이라도 이 모욕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이···! 조선 왕은 정녕 청나라와 전쟁을 계속 하자는
것인가!”
범문정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자, 허허 웃던 영섭도, 신하들도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범문정은 기선을 잡았다는 생각에 더 크게 질러대었다.
“의주에서 그 송귀를 붙인것도! 한성이 아닌 외지로 불러다가 군사들을 사열케 하고! 이 모든게 진정 진심으로 상국을 모시려는 마음에서 우러난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소다! 조선 왕이 이리 나온다면, 좋소. 어디 한번 계속 싸워나 봅시다! 조선의 종묘가 활활 타오를 때 까지! 조선 백성들이 모두 청나라의 복식을 입고 만주어를 말할 때 까지 말이야!”
“병력은 있으신가?”
영섭의 두 마디에 범문정이 주춤했다.
“지금 조선왕이 한번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고 기고만장한가 본데, 황제폐하께서 오십만 군사를 이끌고 당장이라도 산해관을 넘어 의주로 향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순간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며 웃었다.
“······ 그거 잘 되었군요!”
범문정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분명 조선의 갑옷이 아닌 것을 입고 있는 자가 있었다.
“우리 황제폐하께선 고토 수복을 위해 바로 북경으로 들이칠 기세인데. 병력을 빼준다면 우리야 고맙지요.”
정성공이 활짝 웃으며 범문정에게 말하니, 그는 순간 이를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혼란해 했다.
“너··· 너는 누구길래 감히 황제폐하를 언급하느냐!”
“아. 소개가 늦었군요. 나는 주성공이라 합니다. 그대는 타이시 범문정이겠군요.”
“뭐라고! 국성야(國姓爺) 정성공이 네놈이라 말이냐!”
“정씨가 아니라 주씨입니다.”
“정씨는 주씨든! 네 놈이 도적인것은 변함이 없지!”
하며 범문정은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는 듯 영섭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모든게 조선 왕이 꾸민 계략이구나!”
영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았소? 이 모든게 내가 꾸민 일이지.”
아니라고, 오해라며 조선왕이 매달릴 줄 알았던 범문정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사고가 정지해버린 것 같았다.
“지금 뭐라고..”
“내가 꾸민 일이라 하였소만.”
범문정은 자기가 서있던 바닥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명을 자처하는 저 정성공이 조선에 있다라는 것은 이미 후명과 조선이 한 패가 되어 청나라를 두들겨 팰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조선왕이 이리도 방자하게 구는 것이··· 저 도적들하고 손을 잡았기에 그랬던 것인가?”
그러자 정성공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도적 도적 하는데, 그대들이야말로 천하를 훔쳐간 말 탄 도적떼 아닌가?”
“뭐라고!”
“천하를 훔친 도적이 나더러 도적이라 하니 웃음이 나오는군.”
“이 도적놈이 정말!”
범문정의 얼굴이 터질듯 하니 정성공이 품 속에서 수발식 권총을 꺼냈다.
“뭐, 노략질 한게 맞으니 나를 도적이라 함은 이해할 수 있소. 그런데 이 권총은 자기가 도적이라 하니 모욕이라 하는데, 사과하라고 하는구려.”
하며 권총을 범문정에게 겨누니, 범문정의 얼굴이 언제 붉어졌는지 모를만큼 창백해졌다.
“이.. 이···..”
정성공은 총구를 까딱거렸다. 영섭은 이 광경을 바라보며 그 옛날 서부시대에 못된 악역이 인상 좋은 술집 아저씨를 겁주는 모습같아 순간 웃음이 나왔다. 빌리 더 키드였던가. 선댄스 키드였던가.
“사과 할거요 말거요? 나는 아량이 깊은 이라 언제건 기다릴수 있는데 이 수발권총은 성미가 화약같은지라···”
하며 손가락을 방아쇠에 살랑거리며 범문정을 압박하니 그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조..조선왕은 무얼 하시오! 일국의 왕 앞에서 죽고 죽이는 광경을 보아야겠소?”
“아··· 뭐 ‘천하의 두 나라’ 가 서로 할 말이 많은 듯 하니, 당연히 ‘작은 신하의 나라’ 에서 뭐라 할 말이 있겠소이까.”
하며 영섭이 못본 채 성 바깥 군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환호성을 이끌어내고, 정성공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권총의 부싯돌을 뒤로 당겼다.
“아니! 대체 이러는 이유가 있을거 아니요! 이유가!”
범문정이 거의 울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청나라는 어디까지 포기할 의향이 있으시오?”
영섭에 말에 범문정은 화들짝 놀랐다. 그 말은 조선으로 오기 전 범문정이 순치제에게 했던 말이 아니던가. 대체 조선 왕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수를 두는 지 소름이 돋아왔다.
“포기라니! 조선왕은 대체 무얼 이야기 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지금 갖고 있는 땅, 사람, 재물,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 뭐 그런것이오.”
“포기란 없다! 황제폐하께서 디디고 계신 모든 땅이 폐하의 땅이고, 그 땅에서 사는 사람 모두 폐하의 것이며 재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관계라 함은 무엇인가! 조선왕은 더 이상 신하가 되어 대청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인가!”
“사신은 어쩜 그리 내 마음을 잘 아시는지.”
하며 영섭이 빙그레 웃자, 범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자 정성공이 권총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우리 명나라, 영력대황제께선 청나라를 침칭하는 여진 도적들에게 교서를 내리셨지요. 자금성을 비롯한 옛 명나라의 땅을 훔쳐갔으니 이를 모두 돌려내고, 왔던 길 따라 산해관을 넘어 만주로 간다면 종사는 보존해 주겠다는 거요.”
“뭐···뭐라..“
“범문정.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남은건 무한한 전쟁밖에 없소. 더 많은 피를 흘리기 전에 끝내자는 것이지.”
“흥! 우리 황제 폐하께서 이를 받아들일거라 생각하는가? 당장 백만 대군을 일으켜 너희 후명과 조선 모두를 벌할 수 있다!”
그러자 영섭이 의아한 듯 말했다.
“백만 대군이라. 못해도 이들을 모아 조련시키고 먹이고 재우며 쓸만한 군사로 만드는 데 족히 반 년은 걸릴텐데. 가능하시겠소?”
“···병졸이었던 자는 얼마든 있으니 문제 없을 것이다!”
“정말 빨라야 반 년쯤 걸릴거라는건 부정하지 않는구려. 그런데 우리 조선은 십 삼만 군사를 움직일 수 있소이다.”
영섭은 손 두개를 활짝 펴보였다. 중신들은 민망해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정성공과 범문정은 의아한 듯 영섭을 바라보았다.
“조선왕전하. 십월 안에 군사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입니까?”
정성공이 공손하게 묻자, 영섭은 고개를 저었다.
“못해도 군사를 움직이는데 열 달은 필요한 것이겠지!”
이번엔 범문정이 조소하듯 말했다. 영섭은 그저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10, 9, 8···자. 1까지 수 세기가 끝나면, 성루 너머 운집한 십 만 군사가 당장 심양성으로 쳐들어 갈 것이오. 오늘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저 군사들의 출정식이었소.”
하며 영섭이 손가락 하나 하나 세어가며 수를 읊는데, 범문정이 크게 당황하여 영섭을 말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잠시만!”
“6···5···4 심양 불바다가 아련해지는구려.”
영섭은 지난날 북괴가 툭하면 서울 불바다 운운했던 것을 떠올리며 잠시 회한에 젖었다.
“잠깐! 잠깐!”
“3···2···”
“내가 졌소! 내가 졌다고! 황제폐하께서 칙서 말고 다른 서신을 지참하여 보낸 것이 있소이다! 내 그걸로 이야기 해 볼수는 있을 것이오! 폐하께서도 납득하실만한 지점이 있단 말이오!”
범문정이 다급하게 영섭의 손을 잡으려 하자, 영섭은 손을 싹 빼더니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이제야 사신께서 협상할 준비가 되셨구려.”
“아..아니!”
“심양 불바다?”
“···.합시다.”
영섭은 손뼉을 짝짝 쳤다.
“자 이제 ‘우리시대의 평화’ 를 이야기 할 준비가 된것 같소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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