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평화 (1)
“주자께서 말씀하시길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 금년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해와 달은 가고 세월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니 아아! 늙었도다!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송시열이 주자의 권학문을 강연하자, 조선의 높은 유학자라며 청나라 사람들이 모여와 듣기를 청하기를 벌써 세 달째.
그 중에는 청나라의 관료들도 꽤나 있어 (자의로 간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조선을 다시금 우호국으로 끌어들이려는 순치제의 노력이 꽤나 볼 만 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조선에서 못 다 펼친 주자의 뜻을 다시금 청나라에서 펼치기로 마음먹고 지난날 있었던 모든 일을 묻어둔 채, 주자의 뜻을 설파하는데 집중했다.
물론, 주자가 옛 중국 사람이었고, 그의 학문 또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송시열에게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높은 이상에 가려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스승님. 말씀이 잘 이해되질 않습니다.”
강연을 듣던 청년 하나가 손을 들고 질문을 던지자, 옆에 있던 송준길이 허허 웃으며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다.
“배움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다 열심히 배우고자 하나 게으름이 발목을 잡아 배움을 미루다 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주자깨서 말하시길 이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배우지 않는 사람은 배움을 그만두겠다고 말하지 않고 내일 하면 된다.
내일은 또 내일 할 공부가 있는데 오늘 할 공부를 내일로 미루면 내일은 두 배로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하기 싫은 공부가 내일은 두 배로 잘 될 까닭이 있겠느냐.
세월은 흘러가는데 어느 누가 가는 세월을 잡아 둘 수 있겠느냐?
세월은 나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 사람은 늙고 마는 것이다.
공부할 때를 지나치고 세월을 허송한 뒤에 뒤 늦게 공부하고자 하지만 몸은 늙어 할 수 없으니 이를 어찌 하겠느냐?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자신의 게으름 탓이니, 부지런히 배워야 함이다. 주자의 말씀은 그런 것이었다.”
순식간에 쏟아낸 송준길의 말에, 청년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 배움에는 모두 시기가 있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는 나라에도 똑같이 적용이 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엔 송시열이 그의 말을 잠시 곱씹어보더니 답했다.
“그러하다. 무릇 나라라는게 무엇이더냐. 위대한 임금이 나라를 세우고 그 기틀 아래 만 백성이 모여 그것을 떠받드는게 아니더냐? 하여 나라의 배움이라는 것은 군주가 스스로 학문하여 배우고 깨우치는 것이라 하겠다.”
청년은 송시열의 답을 듣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황상께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자 좌중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감히 무엄하게도 황상을 이 곳에서 거론하다니? 심지어 황상이 무언가 더 배워야 함을 은연에 깔아두니 강연을 듣던 다른 이들은 이 자는 미친자라며 당장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거라며 기겁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태연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는 무언가 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그렇다면···”
“비단 황상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의 임금께서도 무언가 더 배울 필요는 없지. 군주는 이미 완성된 그릇이기에 무언가 배움을 집어넣는다 하면 그저 혼란이 생길 뿐 배움보다는 통치에 힘써야 하네.”
“···그렇습니까?”
청년은 원하는 답이 듣지 못하자 조금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때였다.
“다만.”
송시열은 아까 그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히려 배웠던 것들을 덜어내야 하지. 국가의 통치에는 정답이라는 게 없네. 후일 역사를 쓰는 사람들에 의해 위인이나 악인으로 묘사될 뿐.
당장 오늘 무언가를 큰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 판단하고서 이를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일세.”
청년은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스승님의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큰 결단을 내리기 위함이라면 더 많이 알아야 하고, 이는 더 배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송시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결단을 내리기 위해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만, 동시에 독이 될 수 있네.
너무 많은 것을 알아 그 것들을 하나하나 대조하여 이것이 올바른지 아닌지 뜯어본다면 결단을 내릴 때는 이미 지나게 되겠지.
그래서 배움 보다는 오히려 덜어내야 함이지. 특히나 천하라는 거대한 땅을 통치하는데 있어서는 말일세.”
“그렇다면 스승님께서 보시기에, 오늘날 이 나라에서 덜어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문하여 주십시오!”
청년이 고개를 숙이며 묻자, 송시열은 잠시 그를 바라보며 뜸을 들이다 이내 답했다.
“···오로지 주자의 가르침 이외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라 할 수 있지.”
“그렇다는 것은··· 부처의 말씀이나 저 상제 (예수)의 말씀은···”
“흥! 불씨나 상씨나 모두 난적들이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를 설파하는 사람들이네.”
그러자 청년은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스승님.. 황실 모두가 그 부처의 말씀을 신봉하고 계신데다.. 황제폐하께서는 저 후장 (後藏,티베트 서북부)의 고승을 여러번 궁으로 초대할 만큼 열성적이신데..”
순치제는 불교를 아주 좋아하여 거의 광적인 수준이었다.항상 승려생활을 꿈꾸며 스스로를 부처의 현생으로 여겨 생활할 정도였다 하니 짐작이 되리라.
거기에 1653년에는 달라이라마 5세를 북경으로 초청하여 달라이 라마는 삼천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북경에 도착하니, 순치제는 최고의 예의로 그를 접대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사이가 더욱 돈둑해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애써 기억해낸 송시열이 당황해하며 외쳤다.
“조선말은 끝까지 들어야 함이야!! 저 붉은 비단으로 머리부터 허리까지 휘감은 나마승(喇嘛僧)들 하고 조선이나 일본에 있는 승려들하고 어찌 같은가!
게다가 후장이라는 나라는 높은 산에 은거하고 민생을 어지럽히는 대신 수행에만 힘쓴다 하는데 어찌 탐욕과 정념에 오염된 불씨들과 그 궤를 같이 하겠느냐는걸세!”
그 불씨가 부처라는게 문제긴 했지만 그 정도는 사소한 해석의 차이라고 우기면 그만인 것이니 송시열의 답을 들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습니다 스승님. 부처의 말씀을 따르는 무리는 워낙 제각각이니··· 그렇지만 저 상제를 따르는 이들은..”
“그들이 가르침은 하등 쓸모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네.
상제가 사람들에게 덕으로 원수를 갚고 원한으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였지.
그런데 원수에는 두 종류가 있네.
만약 나를 해친 원수라면 옛날 군자 가운데 덕으로서 원한을 갚은 자가 많이 있었네만, 임금이나 아버지의 원수를 두고 이런 식으로 가르친다면 의리를 해치는 바가 클 것이다.
이것이 내가 두루 널리 사랑함을 주장하는 묵자(墨子)의 부류라고 말한 까닭인데,
상제를 모신다는 이들이 더 심한 자들이니 그저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이들이 아니겠느냐?”
송시열의 답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아담이라는 신부는 사제왕이라는 조선왕 흠모하여 조선으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폐하께서 상심이 크시지요. 이 어찌 불충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청년은 웃음을 지었다.
이튿날 청년은 북경의 한 성당에 들어가 미사에 참석했다.
신부들과 기존 신자들은 새로운 신자를 환영하며, 이내 서역 말로 미사를 드릴 때 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아마도, 마르코 신부가 아무말 않고 조용히 그 날을 마무리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형제님들, 오늘로 저 마르코 신부는 여러분께 작별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별안간 선언에 신도들이 갑자기 웅성거리며 마르코 신부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성당에 보임된지도 벌써 십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난다니? 성당 그 누구도 미리 언질을 받지 못한 상태였던 터라 신도들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신부님! 떠나시다니요?······영영 가시는 건가요?”
“오 안젤라 자매님···. 그렇게 되었답니다···”
안젤라 라는 세례명을 받은 중년의 여인은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마르코 신부를 바라보았다.
다른 신도 하나가 믿기지 않는 듯 마르코 신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아니 어째서..!! ···아닙니다 신부님. 그럼 어디로 가시는지요?”
“저 남쪽나라에 세워진 명나라로 갈 예정입니다.”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신부님 그게 사실···.인가요? 명..나라라고요?”
“예 맞아요 안젤라. 이미 북경 교구에서도 지시가 내려온거라.. 듣자 하니 ‘주유량 ’이라는 자가 천주교를 국교로 선포할 예정이라 하더랍니다. 하여 북경뿐만 아니라 여기 청나라에 있는 각지의 신부들이 ‘그를 도와’ 성당을 세우러 갈 것입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청년은 마르코 신부가 어색한 발음이지만 ‘주유량’ 이라는 말과 ‘그를 도와’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이내 그는 마르코 신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신부님! 오늘 처음 상제님의 목소리를 들으러 왔는데 이리 떠나신다니 아쉽습니다. 혹 황제폐하께 아뢰어 다른 신부를 이 곳에 오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까?”
마르코는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에게 말한들 신부를 이 곳에 보내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무지한 이교도들.. 아니 이제 막 하느님의 품 안에 들어온 어린 양은 이토록 백지와 같이 무지하니 이들은 반드시 교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오! 형제님··· 황제.. ‘푸린’은 북경 교구의 사제 보임에 대해 자율권을 주셨답니다. 따라서 황제 ‘푸린’은 교구의 결정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아하 그렇습니까···”
“하지만 걱정마세요 형제여. 조만간 유능한 사제가 찾아와 다시금 하나님의 광명을 보여드릴 것이니···”
“알겠습니다 신부님! 그럼···”
하며 청년은 빠르게 성당을 빠져나갔다. 마르코 신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른 신도들에게 둘러싸여 대체 무슨 의도로 질문했던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청년이 나가면서 너무나도 활짝 웃고 있었음을 더더욱 볼 수 없었다.
청년 아니, 납목복(納穆福)이라 불리던 자는 성당을 빠져 나와 그의 아버지 구왈기야 아오바이(오보이)가 연금 되어 있던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누명을 벗고 다시금 황제폐하의 황은을 입을 천금같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오바이는 영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지, 그의 아들을 바라보며 퉁명스레 답했다.
“이 놈아. 무슨 소란이냐? 황은을 입을 기회는 또 무어고?”
“제가 방금 무엇을 보고 듣고 온 줄 아십니까?”
“뭔데 그리 호들갑이야?”
“저 서역에서 건너온 승려들이 이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무리였습니다! 저들은 조만간 저 남경의 쥐새끼 주유량이 세운 후명에 투항할거랍니다! 이를 신속히 조정에 알려 후명과 내통한 저 서역승들을 모두 때려잡아야 합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더냐?”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감히 황제폐하의..황제폐하의··· 존귀한 휘를 어디 시장 개새끼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불렀습니다! 피휘하지 않고 그냥 거리낌 없이 지껄였단 말입니다!”
납목복의 절절 끓는 외침에 아오바이는 큰 충격을 받아 몸이 얼어버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역모에 준하는 대사건이 될 터. 그리고 그 역모를 밝혀낸 그와 그의 아들은···.
“···아들아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느냐?”
“아직 없습니다!”
“그래. 황제폐하께 알현을 청해야겠구나.”
훗날, 문자의옥 이라 명칭될 대사건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오해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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