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심부름(두 아이의 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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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dfloorman
그림/삽화
3F
작품등록일 :
2024.04.15 12:46
최근연재일 :
2024.09.1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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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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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서 집을 지키는 것

DUMMY

열두 살 소년.


그가 고향 땅에서 문명과 함께 숨 쉬던 시절, 부모 손 잡고 경험할 수 있었던 사회 봉사 시간이란 대략 300시간 정도.



"아..."



허나, 좀처럼 도움이 되지 않는 경험이었다고 달이 지난 지금에와서야 아이는 비로소 위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죽이고 싶다."



하도 끌고 다녀서 이제는 삐걱거리기 시작한 의자 발. 그 거슬림도 무시한 채, 여느 때처럼 등받이를 잡고 자리에 털썩 주저 앉기로 하는 쇠약함의 가정부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공허한 염원들을 이처럼 화장실이 아닌 장소에다가 쑥 배출해내는 것이 저도 모르게 그만 습관으로 잡히게 된다.


과연, 예쁜 쓰레기를 키운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었을까?


머리를 쥐어 뜯은 어린 일꾼의 미간에는 오늘도 찾아 든 여럿 언덕들이 한데 모여 재차 장대한 맥을 이루기로 한다.



"오늘은 뭐가 싫다고 하셨더라? 가루가 뭉친 스프? 그것이 꼴보기가 싫어 입에 대지를 않으시겠다? 이런 몹쓸 년을 보았나!"



'어린 시절이란 보통 이러한 것이지' 라고 애써 넘어 가주는 것도 이제는 한계. 동갑내기 소녀를 돌보던 그의 찬란한 이성에도 결국 체력과 정신력에 있어 끝자락이라 부르는 녀석이 기어코 품 속을 찾고야 말았다.


거두어준 주인을 향한 감사와 반드시 은혜를 갚아 보이겠다 외치던 그의 소박한 보은의 꿈. 그 꿈이 일으켜낸 시종의 강직한 의지란 어느 눈 덮인 마을,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닌 작은 이성 친구의 변덕으로 인하여 따뜻한 물에 퍼져 나가는 시럽처럼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녹아 내리게 된다. 그녀의 밝은 미래를 위해 평생을 계획해 보았다던 소년의 당찬 설계가 '연' 도 아닌 '월' 이라는 짧은 기간 속에 돌연 막을 내리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백이면 백, 부모가 버리고 간 것이 분명해! 저런 애랑 어떻게 같이 살 수가 있겠냐고!"



짜증 가득 담긴 볼멘 소리가 저택의 긴 통로를 통하여 기러기 무리 같이 공간 속을 유유히 퍼져나가기로 한다. 낮은 신분을 가진 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언행 또한 전혀 서슴지 않기로 하는 그의 과격한 모습 속에, 어린 시종이 지금껏 얼마나 답답한 심정으로 친구를 모셔 왔을지에 관해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대목이라 할 수 있었다.



"아아, 주인님! 지금 대체 어디 계신 건가요? 와서 저 꼴을 좀 보셔요!"



눈물까지 글썽여 가기로 한 소년은 자리에서 주인을 외치기로 했다. 자애로운 눈에서 새어 나오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광명의 빛, 총명한 입술 틈에서 끊임 없이 흘러 나와지는 맑고 똑부러진 지혜의 목소리.


며칠 전 편지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두는 것으로 갑자기 저택 집을 떠나기로 한, 설산 위 부는 귀신 같은 바람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기로 하셨던 아리따운 묘령의 여성께서는 작은 행동, 작은 말씨 하나에도 매순간 현명한 사람이다 라는 느낌을 받게 해주는 '아름다운 이' 임이 그에게는 매우 분명하였다.


그런 그녀를, 애틋이 그리워하던 둥지의 어린 새끼는 그의 어미가 하루 빨리 집으로 향할 수 있도록 양손 모아 하늘에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아이가 '하얀 악마' 로부터 '월' 이라도 버텨낼 수 있었던 용기의 원천은 오직 어미 새의 존재에만 그 근거가 기인해 있었던 것이다.



"......"



씩씩대던 아기 새의 부리가 잠시 쉬는 시간을 택하기로 하자 저택 안은 비로소 밖을 스치는 바람 소리 만이 그 속을 가득 메우기로 했다. 조용히 귀에 감겨져 오는 잔잔한 산의 숨소리. 그녀에게서 배워낸 이 현상의 이름은 이른바 '겨울 속의 고요' 였다.


언제나처럼 통로 중앙에 홀로 나와 앉아 차분히 눈을 닫는 것으로, 이것들을 잠시 귓가에 느끼고 있노라 라고 한다면 다시금 맑아온 정신이 조금 전까지는 구해내지 못할 어려운 문제의 답 역시 반드시 찾아내 줄 것이라. 주인이 들려준 이 주문과도 같은 말을 어린 시종의 초롱초롱한 눈은 여태껏 단 한번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에휴."



몸 곳곳에 나누어 준 힘을 돌려 받기로 한 소년의 두 다리가 바닥을 향해 쭉 뻗어져 온다. 이번 기회에 그는 의자 등받이 뒤로 자신의 체중을 한껏 기대어 볼 속셈이다. 이렇게 의자 허리 뒤로 덜 자란 목을 축 늘이고 있을 세면 어느새 나타난 그의 주인께서 평소처럼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지는 않았을까?


"힘들지?" 라는 따스한 위로를 받았으면 했던 지친 시종의 마음은 잠시 눈을 감았던 일로 이루지 못할 소원을 위하여 허망한 행복감을 가슴 위에 갈망하기로 한다.



"빛을 잃은 어린 양은 언덕을 돌다 결국 동굴로 들어가네. 동굴에서 마주한 것은 같은 처지의 옛 동지. 이름은 악마라고 불렸다네."



구걸로 내일을 살아가던 시절. 어려웠던 잠깐의 때를 떠올리며 거지들의 막내께선 오래된 노래를 잠시 코에 흥얼거리기로 했다.



"빛이 하얗다면 내 털 역시 빛 일까? 그런데 친구야, 너의 털은 왜 검어졌느냐? 아, 동굴에서 산다는 것은 보통 그런 것이라고?"



당시에는 뜻도 모르고 부르던 것을 이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서 먼저 적응하기로 한 거지 선배들께서 친히 가르쳐 주기로 하셨던 세상의 노랫말들을, 멀리서 온 막내 녀석은 점 하나 놓치지 않아가며 완벽히 음율을 소화해낼 수 있게 된다.


이 또한 저택 주인께서 나누어준 또 하나의 자비로움이자 위대한 지식의 선물로, 이곳에 올 적만 해도 아이는 글씨 한 톨 알아보지 못하는 마을 최고의 까막눈이 맞았으나 여인을 만난 후로는 다른 세상의 언어가 더이상 어떠한 장벽의 의미도 가지지 못할 만큼 꽤나 높은 배움들을 그는 자신의 고운 스승으로부터 한 가득 얻어갈 수 있기로 한다. '말 벙어리 이방인' 이었던 비렁뱅이 출신의 아이가 현재에 와선 마을 제일가는 총명한 부엉이로 이름을 거듭나게 한 입신양명의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



퍼져나가는 생각이 이곳에 까지 미치게 되자 열심히 흥얼거리던 그의 코 풀피리는 눈치껏 부는 행위를 멈추기로 한다. 동시에 활발히 허공을 긋던 그의 작은 손 역시 마룻바닥을 향해 풀썩 주저 앉기를 결심해낸다.



'그녀가 준 것에 비해 나는 참으로 무능력한 놈이구나.'



그토록 큰 은혜와 은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비친 현실에 드러나게 된 녀석이란 축 늘어져 있다 라는 스스로의 한심한 모습 뿐. 존경스러운 자의 총애를 한동안 그렇게나 자만히 두르고 있었건만! 물려 받은 거무튀튀한 겁쟁이들의 피는 여전히 본인 또래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가벼운 존재로만 남아 이 망할 의자로부터 또다시 그녀와의 맹세를 포기하게 만들고 있었다.



"또 한번 그저 위로나 받고 싶은 것이야, 이 망할 자식아? 네 입은 주인을 찾을 때만 중요하고 그녀에게 부탁 받은 것은 정작 안중에도 없는 것이지? 대체 누가 몹쓸 놈이라는 거냐? 이런 한심한 새끼!"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빈 통로에서 유일하게 눈에 비쳐온 자를 향해 소년은 한가득 욕설을 내뱉기로 한다. 그리고는 이마 위 달랑 이는 검은색 머리카락들을 여럿 세차게 휘적 대는 것으로,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향하여 굳은 다짐들을 일장 늘어 놓기 시작하였다.



"이건 말이 안 돼! 이 내가, 이 잘나신 천재 님께서! 어째서 그런 말도 안되는 녀석 때문에 이런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하는 것이지? 오냐, 이 개 같은 놈아! 누가 이기는지 다시 좀 붙어봐야 되겠다."



절망에서 벗어나는 가장 뛰어난 방법 중 하나는 위대한 분노라 하였던가? 길을 잃은 것처럼 여겨졌던 어린 양의 눈동자 속에는 옅게 나마 투지의 빛이 들어서기로 한다.



"난 이번에도 이겨내 보이겠어. 주인님이 다시 저 문을 열어 놓으실 때,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반드시 나여야만 해. 그래 맞아, 나야 나! 그러니까 나는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실망 시킬 수는 없어."



─ 그러므로 나는 간다. 이 잡것아.



위 말을 끝으로, 어렸던 시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과 마주하기 위하여 하얀 악마가 산다는 성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기기로 한다. 결연히 닫혀진 그 입술에서는 처음과는 다른 사뭇 굳센 의지들이 단단하게 까지 느껴져 온다.



"아."



물론 이번에는 부디 가루가 뭉치지 못한 맑은 스프와 함께 마왕 님의 공간으로 슬그머니 방문하여 보는 것이, 작은 용사 님께 주어진다는 위대한 임무의 첫째 발걸음이라 할 수 있겠다.




***




큰 침대가 들어와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히 느껴지게 되는 이곳의 널찍한 공간. 그러나, 그로 인해 나타나지는 쾌적함 보다야 어쩐지 썰렁함이 더 쉽게 느껴져 오는 쓸쓸한 그녀의 방이었다.



"들어간다?"



문 손잡이를 열고 장소로 들어설 때마다 남시종은 저택 내에서 가장 넓었던 방에 대하여 위와 같은 의구심을 매순간 품어야만 했다. 그 원인을 단순하게 떠올려 내자면 소녀가 가진 방의 넓다란 공간에 비해 가구의 수가 심히 적게 되어 일어나는 일종의 대비 차 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왜?"



하얀 머리 끝에서 씰룩 대기로 하는 상대의 조막 만한 입술 구멍. 그 좁은 구멍 안쪽에서는 매번 자신을 찾아와 주는 반가운 이를 향한 반달의 눈썹 인사 대신 지금과 같은 맥 없는 소리만이 여지없이 반복 되어 나오기로 할 뿐이었다.


소녀를 가족처럼 대해 주라는 주인의 하나 뿐인 부탁, 그것을 지키기 위해라도 저택 시종은 누구보다도 큰 살가움을 그녀에게 표현하고자 수 없는 노력들을 지금껏 기울여 오기로 하였다. 허나, 저 작은 입술에게서 빼앗긴 그의 훌륭한 맥들이란 여제껏 단 한 번을 제 주인에게 온전히 되돌아온 적이 없다.


썰렁함이 느껴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아마 이것일 것이라.



"아하하..."



다만 시종에게 이것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후가 되겠으며, 이 일에 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유연한 삶을 어린 그 또한 이제는 문제 없이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



"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믿어줄래?"



다른 세상에서 지내던 시절, 숱한 미디어로부터 만나 볼 수 있었던 모종의 상황 지식을 총 동원해본 선두 문명의 그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부드러움을 선사하였던 것으로 이성 친구의 곁에 쭈뼛 다가서기를 결정하였다. 콩닥 대는 남자의 한 쪽 손에는 상대의 기준에 완벽히 부합 한다는 최고의 한 그릇이, 솔솔 연기를 내뿜으며 반듯한 자세를 갖추고는 사상 첫 프로포즈를 감히 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배고플까봐 서둘러 다시 만들어 왔어. 이번에는 퍽 마음에 들거야. 장담할 수 있어!"



슬며시 앞으로 내려와지는 그의 자신만만한 야심작. 고소한 향은 물론이오, 소녀가 지적 하였다던 작은 뭉침 하나 나타나지 않는 순수한 형태의 맑디 맑은 스프였다. 하물며 이번 요리사께서는 그녀가 좋아 한다 라는 견과류 몇 알 까지도 별 모양으로 느낌 있게 띄어 놓기를 정하였으니, 요놈은 정말이지 두 번은 나타나기 어려울 가히 완벽한 역작이라 자신감 가지고 외칠 수 있을 정도라 하겠다.



"......"


"왜 아무런 말이 없어, 이것도 별로야?"



무반응. 박살난 자존심을 보다 깊은 지하실까지 내려 놓으면서 만든 이 회심의 한 수는 담겨있는 그 기대치와는 달리 심히 냉랭한 반응으로 고향 항구에 뱃머리를 돌려 놓았다.



"넌 정말 질리지도 않나 보네."


"응? 그게 무슨 말이니? 질리다니? 아, 스프가 너무 물렸니? 그렇다면 이번에는 조금 색 다른 음식으로 도전 해볼까?"


"......"



'질리지도 않네' 라는 말에 담긴 나쁜 의미 정도. 그 정도라면 분명 멀리서 온 아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매우 알기 쉬운 종류의 것이었다. 첫 만남 때에도 그러 하였듯 소녀는 매번 다가오지 말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의를 쭉 거절해왔다는 사실을. 그 역시 수 차례의 경험으로 인해 이를 충분히 이해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헤헤, 넌 오늘도 참 예쁘네. 있잖아? 언제 한 번 같이 옷이나 사러 내려가지 않을래? 잘 어울릴 것 같은 옷을 내가 하나 찜해둔 게 있거든. 분명 네 마음에도 쏙 들 거야."



검은 머리 소년, 그가 이루고자 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돌파해야만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 바로 오늘날 그녀와 주고 받아야 한다는 평범하고 따뜻한 대화라 할 수 있었다. 이 대화가 여러 차례 이어지고 난 후에야 시종은 비로소 주인의 바람 대로 그녀와 진정한 의미의 친구가 되었음을 그의 사랑을 향해 직접 고할 수 있게 되지 않았겠는가?


손가락 두 개 만한 크기의 철판을 덮어내면 덮어냈지 상대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그가 접근하는 것을 물릴 수는 없게 된 노릇이었다.



"애잔하네, 내 눈에서 눈물이 다 흐를 정도야."



손에 쥔 책을 잠시 덮어 놓기로 한 그의 상대, 이내 많은 뜻이 담긴 비웃음을 소녀는 간절한 남자의 귓가를 향해 슬쩍 흘려 보이기로 했다.



'윽.'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의 관자놀이는 순간 응축 되고야 만다. 이것이야말로 아이가 눈 앞의 여자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기분 나쁘게 생각 한다는 점이었으며, 그녀를 진정한 친구로 삼고 싶지는 않았던 절대적 이유이기도 했다.



"적당히 포기하면 되는 것인데 왜 너는 그러 하지를 못할까? 옆에서는 그녀가 똑똑하다 똑똑하다, 입에 칭찬이 마르질 않던데. 혹, 내가 잘못 들었던 걸까? 아니면, 여전히 사랑 받는 아이로 남고 싶어하는 너의 그 간절함이 스스로를 이토록 못나게 만드는 몹쓸 원흉이 되기로 한 것일까? 너에게는 분명히 말했었지? 그깟 친구, 언제든 그렇다 그녀에게 이야기 해줄 수 있노라고. 이 제안을 여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온 똥고집이었을까?"



저택에 얹혀살기로 한 이후, 본인의 선배 격으로만 그녀를 알고 지내던 머나먼 타지의 아이가 그의 미숙한 심장을 여럿 데이고 난 후에야 비로소 마주하기로 한 어두운 진실 중 하나. 상대가 어떤 이유에서 그토록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지, 그것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던 소녀의 뱀 머리는 그 목적을 이루어 주겠다 갈라진 혀 사이로 검었던 제안들을 무수히 쏟아내기로 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소녀의 검은 제안을 받아 들이는 순간 지금껏 이룩한 그의 모든 노력들은 한낱 꿈과 같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였다. 하늘을 걸고 약속하였던 주인과의 뜨거운 맹세를 소년은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모습을 지녔다 하여 눈 앞의 엘프가 차별 받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 여기기로 했던 것은 순전히 영화를 너무 접하게 된 현대인만의 제대로 된 착각이었고, 마주한 현실의 엘프란 것은 어리석은 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련한 얼굴을 뒤집어 쓰고 접근해오는 달콤한 말의 지하 악마. 인간 머리 꼭대기 위에 군림하면서 사람 마음을 수시로 조종하려 드는 상위 포식자야 말로 바로 그들 엘프라, 피식자 소년은 그녀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란 말이지? 베니가 자리를 비운 지금에서도 자꾸 나타나 이러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너에게 있어 이 일들은 과연 어떠한 이득이 숨겨져 있지? 진심으로 나와 친구라도 되어볼 참이야? 그녀의 말마따나 서로 의지할 수 있다는?"


"그, 그럼! 난 처음부터 그러고 싶었는걸? 주인님... 아니지, 베니가 부탁 하지 않았어도 난 분명 이렇게 했을거야. 정말이지, 난 네가 너무 너무 좋았는걸? 꼭 좀 가까이에서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서 그래."


"그래?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서로 적당한 선에서 친구가 되어 보는 것은 어때? 솔직히 난, 그 이상 더는 못해주겠거든. 베니를 특별 취급하기는 했었지만 모든 인간이 그녀와 동일 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항상 이하의 존재로만 느껴져 올 뿐이었지. 물론 나 역시 현재는 너와 같은 처지에서 한 지붕 아래 밥을 빌 붙게 된 처지이니, 딱히 널 애완견 취급 하지는 않을게. 다만, 나와 나란히 서보겠다 라는 그런 알량한 생각들은 제발 하지 말아줬으면 하네. 네 앞에서 내 속을 그대로 게워 낼 것이 두려워 그토록 열심히 만든 너의 완벽한 스프 조차 입에 통 넣질 못하는 상황이잖아?"


"......"


"표정이 썩 좋지 않네? 혹시 그건 나, 때문이려나? 마을의 신동 님을 위해서라도 이 쓸모 없는 엘프 한 녀석이 집을 이제나마 비워줘야 했던 것일까? 하기야, 이곳은 인간의 마을이니 나 같은 엘프를 누가 반기기나 했겠어? 앞으로는 너 혼자 이곳에 살도록 해. 이곳을 네가 지키고 있는 편이 그녀를 위해서도 더 맞게 된 일이겠지. 이런 엘프 년 하나 쯤이야 나가서 치여 죽든 얼어 죽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람?"



'빌어먹을!'



강하게 몰아붙이는 상대의 도발에 세게 움켜쥘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알찬 주먹을 약자의 입장에 서있던 소년은 이를 악물고서라도 서둘러 풀어내야만 했다. 눈 앞의 역차별주의자를 상대로 이 정도 작전에 판을 물러서야 주인 볼 면목이 없다 여긴 시종의 강력한 의지는, 전보다 탄탄해져 오는 베테랑 감정선을 선보이며 끓어오르는 심장의 물을 이성이 주는 누름돌로 잔뜩 억눌러 보기로 했다.



"아하하! 내 표정이 뭐가 어떻다고 그러니? 나는 항상 이렇게 웃고 있었잖아? 너도 참 재밌는 얘라니까? 역시, 내 친구가 될 사람은 너 밖에 없어. 응, 이건 운명이야. 우린 반드시 함께 할 사람들인거야."


"...쯧!"



모처럼의 강수. 그것이 싱거운 허수로 끝이 나게 되면서, 상당히 짜증나게만 여기었던 존재가 단숨에 무너져 내릴 생각을 보이지 않자 공격하던 쪽의 기분은 오히려 나빠지고야 말았다.



"얼마 살지도 못하는 인간 주제에..."



제딴에는 들리지 않게 내뱉었다 주장 하는 그녀의 네 속닥거림은, 그 하나하나가 충분한 무게를 가지고서 상대의 귓가에 뚝뚝 걸리게 됐다.



"......"


"......"



이윽고 찾아 드는 것은 어색하기만 하였던 무거운 침묵. 단단한 각오로 전신을 무장해본 시종의 충만한 마음이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오래 버티는 것은 경험 많은 그 역시 상당히 위험한 도박처럼 느껴져 왔다.



"스, 스프는 여기다 둘게. 이번엔 꼭 좀 먹어줘. 그렇게 굶으면 속이 다 상할 테니까 말이야. 부탁해, 이에티아. 그럼, 난 이만 나가볼게..."



어색한 분위기를 뒤로 한 채 저택의 하나 뿐인 남자 아이는 서둘러 친구 방을 나서기로 한다.



"후..."



혹여 상대처럼 소리를 흘려낼까, 심히 주의를 해보기로 한 긴장된 고개는 닫힌 문 뒤로 잠시 등을 기대어와 허공을 향해 짙은 색 숨을 토해내기로 했다.



"후..."



동갑내기가 나간 것을 확인하기로 한 문 반대쪽에서는 또 다른 갑갑함 하나가 같은 종류의 한숨들을 서둘러 몸 밖에 배출 하기로 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해?'



2-3m 남짓 한 거리에 떨어지게 된 둘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그 의견값이 일치하게 된다.



'주인님...'


'베니...'



베니, 넓은 저택의 주인.


느닷없이 놓여지게 된 낯설은 환경에서 두 아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따뜻하고 강인한 어른 여성. 둘에게 남겨진 그녀의 편지 내용 대로라면 비운 자리를 언제 다시 채울지는 베니, 그녀 조차 모른다고 하였다. 그 정해지지 않은 공백에는 끝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막연한 사실만이, 저택 공중에 미련을 남기기로 해 집 지키는 두 아이 마음을 더욱 혼잡하게 만들었다.



"아..."



이 황량하기만 한 공간 속을 겉도는 주변인 둘 만으로 밝게 채우는 것은 조금 벅찬 일이 아니었을까?


고개 숙여 좌절 해보는 그녀의 작고 어린 시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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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검의 회고록 6 24.09.14 3 0 26쪽
22 검의 회고록 5 24.09.07 4 0 29쪽
21 검의 회고록 4 24.08.31 7 0 26쪽
20 검의 회고록 3 24.08.24 8 0 25쪽
19 검의 회고록 2 24.08.17 8 0 24쪽
18 검의 회고록 1 24.08.10 11 0 24쪽
17 시작된 심판 24.08.03 9 0 25쪽
16 묘한 제안 24.07.27 8 0 34쪽
15 흔들리는 저울 24.07.20 7 0 24쪽
14 얼굴에서 드러나는 진실 24.07.13 7 0 22쪽
13 자매를 찾은 두 번의 패배 24.07.06 5 0 26쪽
12 완벽함의 투우사 24.06.29 8 0 25쪽
11 똑 같은 후회, 색 다른 결과 24.06.22 8 0 24쪽
10 닮아 있는 앙숙 24.06.15 10 0 27쪽
9 산군의 약속 24.06.08 9 0 26쪽
8 어린 신부와 어설픈 신관 24.06.01 9 0 26쪽
7 가짜 부부 24.05.25 9 0 26쪽
6 붉은 갈기 24.05.18 10 0 25쪽
5 산뜻한 시작 24.05.11 12 0 22쪽
4 계약은 천천히 24.05.04 10 0 23쪽
3 편지의 뿌리를 찾아서 24.04.27 9 0 28쪽
2 찾아온 손님 24.04.20 10 0 22쪽
» 남아서 집을 지키는 것 24.04.15 21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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