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심부름(두 아이의 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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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dfloorman
그림/삽화
3F
작품등록일 :
2024.04.15 12:46
최근연재일 :
2024.09.14 01:00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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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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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산뜻한 시작

DUMMY

하나, 둘, 셋, 넷.


차곡히 쌓여져 가는 두꺼운 옷가지들. 그리고, 그 사이를 널브러져 오는 다양한 여행 품목.


잘 정돈 된 이불 위 올려지는 내일의 여행객인 이들은 곧, 손가락을 하나 둘 접어오기 시작하는 작은 안내인의 낮은 구령에 따라 침대 한 켠을 향한 들뜬 몸을 잠시 옮겨 가기로 한다.



"아가, 설마하니 이걸 다 싸 들고 갈 셈은 아니겠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눈으로만 그것을 지켜보기로 한 아디프라 출신의 남자. 말 가죽을 그대로 담아 놓은 듯한 짙은 갈색 빛 머리를 자랑하던 그가 이제는 심히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먹던 간식도 내려놓은 채 우려 섞인 말을 아이에게 전하기로 했다.



"네? 왜요? 이것도, 저것도. 다 필요한 것들 뿐인데요?"


"필요하다니... 이녀석아, 차 주전자는 도대체 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인데? 차 맛있게 끓여 먹을라고?"


"다른 곳은 이곳처럼 물이 깨끗하진 않을 것 같아서 말이에요. 어차피 끓여 먹게 될 거, 이왕 이면 있으면 좋겠다 싶었지요. 아, 이 찻잎은 주인 님께서 제일 아끼시는 거예요. 지금도 분명 그리워 하실 참인데, 만났을 때라도 바로 타 드리는 것이 직분의 도리에 맞게 되는 일이겠지요. 이건 제가 아끼는 컵이라 꼭 가져가야 하고, 저건 따로 요청해서 만든 차 전용 스푼이니까 반드시 있어야 하고. 오, 이것은 말이지요? 차 온도를 고려해서 만들었다는 특수 공법 제작 보관함으로써, 그 재질은 세상에 몇 없다는 금속을 사용해 만든..."


"......"



블라 블라 블라.



이걸 왜 가져가려는 것이냐 라고 물었을 뿐인 남자의 간단한 질문에 쏟아져 나온 것은 남다른 애정을 지닌 차 애호가 녀석의 알맹이 없는 맹탕 연설 뿐이었다.


스스로를 칸이라 밝혀온 열두 살 아이는 이처럼 또래에 비해 매우 유창한 말과 어른스러운 행동, 그리고 사회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예절 덕목들을 그로부터 모두 보여줄 수 있었기에.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조일이라는 성인 남성에게서 하나의 객체로 인정받는, 한 사람의 고견이라 생각하고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겠다 라는 높은 평가를 그는 얻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간혹 보여오는 그의 철 없는 행동이란 평가자의 미간으로부터 '역시 애였을 뿐이었나?' '내가 생각을 잘못 한 것인가?' 라는 고심을 하게 만들었고. 스스로의 안목에 대해 다시금 고려해 보기를 결정 하는 좋은 성찰의 계기가 남자에게 잠시 지혜를 마련해 주기로 하였다.



"바보 같은 소리 말고 싹 다 치워라. 이제부터는 내 말대로만 짐을 챙겨 보는 것이야."



손 위에 나무 가방을 번쩍 들어 올린 조일 속이 꽉 찬 칸의 그것을 단숨에 바닥으로 게워 냈다. 그리고는 측면에 달린 가방 손잡이를 사용하여 공중을 향해 이것을 휙휙, 부서져라 흔들어 대기로 한다.



"이것도 못쓰겠군."



하나 남은 그의 튼튼한 나무 가방 마저 이내 흉포한 손에 의해 방구석 멀리 내팽개쳐지게 되고,



"악! 내 가방!"



덕분에 옆 머리를 세차게 쥐어뜯어야 했던 물건 주인께서는 간만에 나이에 걸 맞는 소리들을 잔뜩 입 밖에 내기로 해, 독 오른 얼굴과 함께 다 큰 어른의 눈을 감히 쏘아다 볼 것을 복수 결심 하기로 했다.



"시끄러워, 이 무거운 걸 대체 어떻게 들고 다니겠다 하는 것이야? 마차 다니는 길이 무슨 전 대륙으로 나있다 하더냐?"


"그럼 없어요? 대체 어디까지 길이 나있다고 지금 제게 이러시는 건데요? 애초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조차 조일은 제대로 알려주시지 않았잖아요!"


"칵! 시끄럽다고 말했지? 어디라 할 것도 없이, 군소리 말고 내 뒤만 쫓아오면 된다. 그것이야 말로 쓸데없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가장 훌륭한 길이었지. 가방은 유연하고 가벼운 놈으로, 옷은 딱 한 벌만 챙긴다. 실시!"


"한 벌? 제정신이에요? 사람이 어찌 그리 산데요? 도중에 옷이 찢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그땐 저보고 어떻게 하라구요!"


"전부 짐 덩어리야, 짐 덩어리! 옷은 찢어지면 그때그때 산다는 식으로 해결 하겠다. 네가 다분히 체격 좋고 체력 좋은 놈이라면 모를까, 그것과 네놈은 연이 없어도 한참은 없어 보이거든. 그런데도 짐 무게를 늘리시겠다? 너의 그 알량한 무릎이 과연 하루나 버텨줄 성 싶으냐?"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아니, 이미 아는 일이야. 먼 길을 다녀본 자만이 알 수 있는 멋진 특권이라 할 수 있지. 십중팔구, 중간에 짐을 버리게 될 거다. 내가 그랬거든."


"조일이, 그랬어요? 언제요?"


"10년 전, 편지 주인 찾겠다고 선언한 그 첫날에. 그때 버린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온다."


"...왜요?"


"왜기는? 너처럼 중요하다 싶은 것들만 죄다 넣어 놨었으니까 그렇지. 나름 아끼는 보물들이었다고."


"못 찾았어요?"


"못 찾았지."


"......"



잃어버린 것을 다시는 찾지 못하였다. 여행 선배가 들려준 이 씁쓸한 과거 이야기는 고집스런 후배의 눈을 흔들어 놓기에 아주 제격인 놈이라 할 수 있었다.


칸이 가져가려 했던 대부분의 물건들은 그가 보물로 여기던 것이 아닌 그의 주인이 항시 소중하게 다루었던 것들. 그들을 잃은 후로 다시는 되찾지 못하였다 말하는 인생 선배의 쓰디 쓴 충고를 들었을 때, 어린 시종의 마음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못함을 느끼고야 만다.



"알겠어요, 당신의 뜻대로 할게요."



그녀가 좋아하는 차를 내주지 못한 다는 사실이 자꾸만 걸려 오기는 하였으나, 현재로선 어쩔 도리가 없어 눈 앞의 명에 반드시 따라야 했던 차 심부름꾼의 앳된 얼굴. 점점 시무룩함으로 가득해져 가, 어느새 몰려든 먹구름들에 의해 그 깊다란 수심을 조금씩 그림자 채워 나가기로 했다.



"너무 섭섭해 하지는 마라. 상냥하다던 네 주인께서 고작 그것 하나 이해 못해주랴? 멀리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 이러한 것이겠지. 네가 누가 되었든, 또 얼마를 가진 놈이든 간에. 현재 상황과는 전혀 관계없이 손에 쥐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양 손의 두 개로, 꽤나 한정적이기 마련이지. 그러한 면에서 여행이란 놈은 참으로 만인에게 공평한 녀석이 아니겠느냐. 너도, 그리고 나도. 완전히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이 되어 새 시작을 다 함께 걷기로 하는 것이지. 이처럼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인간은 더더욱 가까워짐을 알게 되는 것이고. 네가 주인을 만나게 되는 그날, 친구를 위한 최선의 변호를 다할 것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겠음을. 미래의 나를 대신하여 이 자리에 미리 약속을 해두마. 그러니 더이상! 그런 표정 지을 이유는 없다, 동생아."



긴 말을 마치기로 한 그의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아이의 검은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어 주기로 한다.



"예, 고맙습니다."



친구, 나를 위하여 주는 존재.


잠시 잊고 지냈던 그 참된 의미를, 소년은 꽤나 오랜만에 품 속 가득 온정을 새길 수 있기로 한다.



"헤헤..."



정수리 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잊혀졌던 살가운 감촉 속에 아직은 작은 존재였을 뿐이었던 그의 소박한 입가에는 자연스러웠던 푸근한 미소가 방긋 하고 행복을 떠올려 내기로 한다. 이 순간 소년의 외로운 마음에 찾아 든 것은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난롯불 앞의 안락함이었으며, 붉은 눈을 지녔다는 불의 신도들의 한결 같은 따스한 마음씨라 할 수 있었다.



"아이고."



자신의 바램을 어찌나 잘 알아 주었을까, 고맙게도 큰 반응을 해주는 그의 순수함 덕에 무거워진 어른의 입 역시 굳어진 근육들을 풀어줄 여유가 잠시 나마 생겨나기로 한다. 세상 모든 아이가 녀석을 닮아 주었더라면! 상당히 많은 일 또한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인데...


현실이란 놈은 절대 그러할 수 없다 라는 사실을, 혈관 사이에 끼어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된 묵은 때 같은 경험으로부터 성인의 머리는 세상을 너무나도 잘 파악해 내고 있었다. 이토록 기분 좋게 된 상상마저 단순히 망상 취급해 버리는 것으로 값진 이상의 곁 가지들을 정원사는 하나하나, 손수 끊어내기를 눈물에 작심 하기로 한다.



"그나저나 너희 그 잘난 아가씨께선 준비는 다 마치셨는지 모르겠다."



황량해진 정신의 결과로 나타나진 성인의 차가운 이성이란 육신의 주인에게 놓치지 말아야 할 단 한 가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다시금 제시를 해온다. 말 그대로 악, 병마와 같았던 존재! 죽음의 신이 만들었다 이야기 하는 검은 강에서 갓 떠올린 물이 진실로 악마가 되었다 천사들이 떠들어 댔다면, 그 형태는 기필코 그녀를 닮아있을 예정이었다.


때문에 하얀 악마와 여행을 같이 떠난다는 일이란 분명 한 해 동안 열심히 채워 놓은 농부의 곡식 바구니에 튼튼한 쥐새끼 하나를 풀어 놓았다 라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 되겠으며, 그 정신 나간 행위를 내일부터 당장 하게 된 어리석음의 주체가 바로 오늘날의 그였다라, 믿는자들은 지금껏 어두운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다.



"하아, 이게 참 맞게 된 일일까요? 전 아직도 너무나 불안해요."



이것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아이의 작은 빛냄 역시 그의 큰 이성과 거룩한 뜻을 같이 하기로 한다.



"어떤 점이 제일 걱정스럽더냐?"



대조 되는 머리 색 만큼이나 성질이 달랐던 둘이기에, 작은 천사의 가르침을 받아 찾아 든 악에 대비하는 편이 훨씬 좋겠다 여긴 불의 사도는 내려와진 신의 어린 사역에게서 그가 가진 미래 계획성에 대해 잠시 말씀 여쭙기를 감히 청해 가기로 한다.



"문제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크겠지요. 조금만 기분이 나빠져도 곧장 부딪히려 들 것인데, 그것을 어찌 말릴 지가 저는 제일 염려스럽습니다."


"그래봐야 조그만 아가씨일 뿐인데 주변에서 제압해버리면 그만 아니었을까?"



자세를 잠시 낮춘 남자가 잽싸게 양 팔을 끌어안는 곰 흉내를 내어 그의 입 속 안을 짐승처럼 으르렁 거렸다.



"안 됩니다. 그녀는, 엘프는 힘이 무척이나 세요. 절대 힘으로 그녀를 상대하려 들지는 마세요."


"저 나이 대 여자애가 세면 얼마나 세다고. 이래 뵈도 난, 다 큰 성인 남자란다?"


"제가 그걸 몰라 이 얘기를 드리게 되었을까요? 저들은 인간에 비해 힘이 월등히 강한 존재였습니다. 다 큰 말을 맨손으로 번쩍 들어 올릴 수도 있어요."


"다 자란 말을 손으로 들어 올린다고? 거짓말이지?"


"구렁에 허우적 대는 말을 꺼내오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가 있어요. 믿으셔도 되는 이야기 입니다."


"세상에나, 그거 완전 짐승 같은 놈일세 그려."


"짐승... 네, 맞습니다. 그녀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과연 짐승과도 같지요. 그것도 인간을 하위 종으로 인식하는 아주 포악한 녀석으로 말입니다. 물론, 먼저 건들지 않는 이상에야 엘프가 인간에게 먼저 다가간다는 기적 같은 일이란 절대 일어나지 않겠습니다만. 필연적으로 우리 인간 측에서 먼저 짐승에게 접촉하는 일이, 발걸음을 옮겨갈 때마다 빈번히 사고를 나타나게 될 것이겠지요."


"인간이 먼저 접근 해온다라... 아아, 그렇군! 겉보기는 아주 그럴듯한 녀석이니, 꽃에 벌레 꼬이듯 무식한 팔자들이 쉴 틈 없이 달려 들겠어. 그 모두가 놈의 심기를 자꾸만 건드려 댈 것이고, 보다 강한 녀석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에야 녀석이 길길이 날뛰는 것을 멈출 이유는 따로 없게 되겠지."


"매우 짐승 답게, 그녀는 자리에서 곧장 서열 정리에 들어가겠지요. 말릴 수 없는 폭력의 행위. 저는 그것으로 인해 나타날 후일의 일들이 너무나도 두렵습니다."


"그렇군! 아주 훌륭한 의견이었다, 동생아. 고맙다."



긴 이야기에도 매우 흡족한 결과를 받아들이신 이날의 형님께서 새로 얻게 된 남동생을 향한 감사 인사를 꾸벅 전하기로 했다. 넘치는 피에 못 이겨 마구 날 뛰던 녀석이 혹여 신관의 심판을 받기라도 하는 날에는, 여행이고 뭐고 간에 모든 일들이 완전한 끝맺음을 강제로 맞이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기껏 생각해낸 남자의 기막힌 계획 역시 무한정한 영겁의 시간 속에 모든 것을 수포로 되돌릴 상황이었고, 이를 미리 막기 위해서라도 조일은 오늘밤 중으로 괜찮은 묘수 하나를 반드시 떠올려 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한다라?'



구상 할 수 있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질 나쁜 짐승을 제어할 수 있는 강인한 억제력. 그 튼튼한 목줄을 찾기 위해서라도 새삼 심각한 고심을 해보기로 하는 아디프라 출신의 남자. 이러한 그의 사색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커다란 난제였던 이것이란 사건 장소에 다음 해가 떠오르던 날, 탐정의 손을 떠나 있는 기묘한 위치에서 너무나 손 쉬운 방법에 의해 그것이 간단히 문제 해결 되고야 만다.



'먹는 것으로 한 번 조종해볼까? 아니면 조금씩 압박을 늘리는 것으로 심리적 허점을 노려봐?'



다만 이 사실을 알리 없던 타지 사람의 짙은 이마 주름만이, 기울어져 가는 저택의 밤과 함께 달의 그녀를 쫓아 작은 어둠 속 창 밑을 근심에 드리워낼 뿐이었다.




***




이튿날 아침.



─ 아이고, 아가씨! 어서 도망치세요!



떠나는 것은 어찌 알아냈을까? 농기구를 무기처럼 등에 두른 눈의 마을 주민들이 너무나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안녕을 전하기 위하여 일행 앞에 몰려들었다.



─ 가시면 안 돼요, 엘프님! 이곳은 위험 합니다.


─ 마을 어른들이 막고 있는 틈에... 자, 어서 이쪽으로!



혼란과 공포, 상기된 얼굴에서 나타나는 것은 흔한 패닉의 상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내려 온 뜨거운 햇살이 전 대지를 향해 내리 쬐어 지는, 그런 화창하고도 좋은 날씨가 편지 모험단의 기념비적인 첫 날이 되어준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하였던 사실. 그러나, 어쩐지 마을 주민들의 차가운 낯빛은 굳은 감정의 고드름들이 아직도 턱 밑까지 길게 자리를 잡아와 그들 처마 끝에서 도통 떨어질 생각들을 굵은 뿌리에 보이지 않기로 하였다.



"뭐야, 이건?"



어제와는 사뭇 달라진 평범치 못한 그들의 행태에 순간 당황해버린 모험단의 최고 어르신. 작금의 사태에 대해 서둘러 파악해 보고자 땡그래진 눈을 열심히 굴려는 보았으나,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하여 부족한 뒤통수를 남자는 연신 멋쩍음 긁기로 했다.



"저기요, 아저씨. 대체 왜 이러시는 건데요? 뭐가 자꾸 위험하다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원래부터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줄곧 그렇게 여기기로 한 시종의 총명한 머리 역시 오늘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해져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애벌레 만한 크기의 손가락을 뻗어 주민 옷깃에 여럿 달린 발을 붙들어 놓는 것으로, 흥분한 상대방 마음을 차분히 진정 시켜 보고자 소년은 튀어 나와진 심장 위로 천천히 다독임을 어루만져 주기로 했다.



─ 여자다, 왠 괴물 같은 빨간 머리의 여자! 그 무지막지한 년이 글쎄, 아가씨를 데려가겠다 험한 소리를 입 밖에 지껄이지 않겠느냐? 어찌나 강한 놈이었는지,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 하지를 못하겠어.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합심하여 몸으로 길을 틀어 막는 중에 있다. 이 틈에 어서 아가씨를 피신 시켜야 해!



"네? 그녀를 데려가요? 왜요? 어디로 데려간데요?"



─ 야이, 답답한 녀석아! 지금 그런 걸 따질 시간이냐? 빨리 도망가야 한다니까? 아니면 그 괴물이 아가씨를 잡아가고 말아요.



"아니, 아저씨. 그러니까 왜 잡아가냐구요, 왜! 그 괴물 같은 여자에게 이유는 물어 봤을 것 아니어요."



─ 야잇, 시끄러워! 오라면 올 것이지 왜 이리 잔말이 많아! 야, 넌 그냥 가! 우린 아가씨만 모셔가면 그만이니까.



"...그렇다네. 너는 이제 어떻게 할래?"



틀어진 돌림 노래처럼 의미 없이 이어지기만 한 속알맹이 없는 대화 내용. 이 상황에선 도저히 해볼 것이 없겠다 여긴 현명한 나라의 가신은 그들 아가씨께 직접 진상을 올렸던 것으로, 드높은 왕의 고견에 따라 이번 국정 일을 쉬이 떠넘겨 보기로 하였다.



"쯧."



가만히 듣고 있던 여왕 님의 입에서 채찍 대신 붉은 혀가 땅을 거칠게 내리쳐 오기로 하시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녹색 눈에는 뒤집어 쓴 후드가 무색할 정도로 심히 기운 나쁜 빛들이 한가득 진노 뿜어져 나오기로 한다. 하얀 앞머리 사이를 헤집고 나온 악마의 형상이란 이 이상 세상을 향하여 숨김없는 악의를 따로 감추지 않기로 했다.



"어어!"



편지 모험단의 유일한 성인 남성 분께서 다 자란 그의 팔을 뻗어 올릴, 찰나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 지옥에서 올라온 잡초 싹 같은 어린 소녀는 순록과도 같은 속도로 하여금 마을 중심부를 향한 재빠른 다리를 세차게 질주해 나가기로 하셨다.



"저런, 가버렸네?"



떠나는 암사슴을 향하여 허공에 멈춘 손으로 작은 아쉬움을 달래보던 그가, 이내 소년 쪽으로 고개를 돌려 들려진 팔이 무색할 만큼의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 띄워 놓기로 한다.



"네, 가버렸네요?"



상대방 만큼은 아니었으나 이내 휙 가려 버린 긴 소매 뒤의 작은 꿈틀거림에서도 마찬가지의 옅은 웃음기가 좀처럼 행복감을 가시지 못하게 된다. 완벽히 닮아 있지는 못하겠지만 아이가 떠올린 오묘한 생각의 형태들이란 현재 남자가 하고 있을 그것들과 상당 부분 겹쳐 지는 곳이 많았으리라.



"괴물 같은 여자가 기다린다라? 넌 어느 쪽 괴물이 더 이길 성 싶었더냐?"



쫓아갈 생각이 전혀 나타나질 않겠다 이야기 하는 뻣뻣하고 길쭉하게 된 몸. 있는 자리 그대로에서 여유로운 팔짱까지 푹 껴보기로 한 사내가 이번 괴수 대전의 승부가 과연 어떠한 결말을 보여올 지에 대해, 질 나쁜 도박꾼처럼 승부 예측 하여 볼 것을 어린 상대로부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놀이 권하기로 했다.



"음, 아무리 그래도 저는 하얀 털 부족의 대표가 상금을 타갈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유연한 몸에 다가 날렵함까지 견비 했으면서도 힘이 없는 것 또한 아니랍니다. 이걸 이겨낼 방법이, 과연 붉은 갈기 분께 있어 주었을까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조건은 네 말대로 하얀 녀석이 더 좋았을 수는 있겠으나, 승부에서 이기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될 터이니 말이다. 저 못난이들의 아가씨께선 아무래도, 붉은 여자에 비해 상당히 경험 부족이지 않으셨겠니?"


"아니죠, 아니죠. 범 새끼가 어디 어미랑 싸워 강해진다 말을 전하던가요? 놈들은 원래부터 강한 녀석이었을 뿐인 걸요?"


"허허! 네 뜻이 정 그러 하다면 이렇게 의견이 갈라진 참에 어디, 내기를 한 번 해볼테냐?"


"내기, 말인가요? 좋지요, 좋지요! 모처럼 이런 큰 판이 들어오기로 하였는데, 어떤 내용의 내기를 해야 참 재미가 있어 줄까요?"



누가 먼저 상대를 물어 뜯어 놓을 것인가? 약간은 살벌한 내용이 될 수도 있었던 내용의 내기인 지라, 능글 맞은 도박꾼의 제안에 착한 아이는 분명 싫은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 극악무도한 날개 녀석이 드디어 바닥에 고꾸라질 수도 있다 생각을 마친 소년의 입에서는 생글생글한 웃음들이 도무지 집 떠나갈 생각을 보이지 않기로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간에 마지막엔 반드시 말려야 할 사람이 나타나야 하겠지. 우리는 그때 나설 사람으로 내기를 한 번 해보는 것이야. 마치 연인을 구하려는 반쪽이 된 것처럼 펑펑 울먹이며, 둘 사이를 말려 보는 것은 과연 어떠하더냐?"


"오호라! 그러니까 제 하얀 놈이 그녀에게 지기라도 하는 날엔 저는 비련의 여인이자 남편을 죽음에서 구해내는 가엾은 아내 역을 떠맡기로 하는 것이네요?"


"그렇지, 그렇지. 그 반대는 이제 내가 될 참이었고. 관객도 충분하겠다 이런 몰입감 있는 무대, 정말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참으로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


"우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랜만에 속이 막 끓어오르는데요?"


"그래? 극장 근처도 못 가본 녀석이 어찌 그리 좋아 할고? 끌끌끌! 허나, 너의 용감한 의도와는 달리 군중 앞에 서게 되는 순간 숨이 턱 막혀올 수도 있다. 혹 그들 앞에서 바보가 될까 두렵지는 않았더냐?"


"모르겠어요, 형님의 말마따나 저는 말 벙어리가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 무식한 사람들 앞에서 거짓으로 그녀를 구할 생각을 하니, 용기가 막 샘 솟아 오르는 것을 느껴요. 그들 중심에 나아가 당신들의 잘나신 얼굴들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저는 그것을 평생 동안 가보로 간직해 보고 싶어요!"


"허허, 이긴다고 할 때는 언제고. 네 안에서 하얀 놈은 이미, 져버린 후가 되겠구나! 좋다, 내기 내용은 이것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하고. 판이 끝나기 전에 우리 또한 서둘러 밑을 내려가기로 하자."


"네!"



총 총 총.



싱글벙글 영글어진 작은 방울 토마토는 그렇게 어른의 투박한 손을 따라 마을 내리막을 통통통 튀어 나갔다. 이 길을 이렇게나 기쁘게 내려간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들떠버린 어린 시종의 어깨는 저 멀리, 옹기종기 모인 얼간이들 중심에 쓰러져있을 축 쳐진 눈 토끼 한 마리를 머리에 상상해 내 과연 어떤 말을 전해줘야 제일 극적여 보이게 될 지를 고심 또 고심해 보기로 한다. 이 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쓰린 속이 과거를 기억해 낸다면 맞이한 기분은 한마디로 감개가 무량할 정도!


이처럼 여행의 첫날이란 열두 살 아이의 천진난만한 마음 속에도 신선한 바람들을 잔뜩 불어 넣어 주었다. 아주 산뜻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며, 그의 작은 일기장 한 켠에는 행복한 감정들이 분명한 기록으로써 결과에 남겨 지기로 한다.


광명처럼 비추어 오는 자신의 미래 끝자락에서는 햇살보다 아리따운 그의 주인 님이 순종하는 자를 향한 자애의 빛을 두 팔 벌려 강하게 내리쬐어 주었던 것으로, 한 움큼 크게 안아줄 준비를 보다 높은 곳에 올라 기다리는 중에 있노라 라고, 조금 전 얻은 이 좋은 예감에 대해 아이는 기쁜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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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얼굴에서 드러나는 진실 24.07.13 7 0 22쪽
13 자매를 찾은 두 번의 패배 24.07.06 5 0 26쪽
12 완벽함의 투우사 24.06.29 8 0 25쪽
11 똑 같은 후회, 색 다른 결과 24.06.22 7 0 24쪽
10 닮아 있는 앙숙 24.06.15 10 0 27쪽
9 산군의 약속 24.06.08 9 0 26쪽
8 어린 신부와 어설픈 신관 24.06.01 9 0 26쪽
7 가짜 부부 24.05.25 8 0 26쪽
6 붉은 갈기 24.05.18 10 0 25쪽
» 산뜻한 시작 24.05.11 12 0 22쪽
4 계약은 천천히 24.05.04 10 0 23쪽
3 편지의 뿌리를 찾아서 24.04.27 9 0 28쪽
2 찾아온 손님 24.04.20 9 0 22쪽
1 남아서 집을 지키는 것 24.04.15 20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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