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발판
장영길과 김필립은 지구의 장진수 박사와 통화한 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김필립 님, 제가 많이 생각해 보았는데요,”
“저는 지구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영길이 어렵게 말했다.
“김필립 님도 같이 가지 않으시렵니까?”
장영길의 느닷없는 말에 김필립이 놀랐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김필립이 물었다.
“왜 지구로 가려고 하십니까?”
이번에는 장영길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갈릴레이 행성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습니다.”
“지치셨군요.”
“퓨지티 행성은 평화로운 곳입니다만 갈릴레이의 영향력이 너무 강합니다.”
“김필립 님은 가족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없었습니다. 장 대사님을 보면서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허허.”
“그러셨군요. 그러면 지구로 같이 갑시다.”
김필립은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지난 세월이 떠오르는군요.”
“퓨지티도 좋은 곳입니다만,”
“지구도 좋습니다. 외롭지 않으십니까?”
“외롭지요. 늘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지구에 숨어서 장 대사님을 기다리는 동안 외롭지는 않았습니다.”
“기대할 것이 있으셨을 테니까요. 천문 관측 일이 재미있지 않으셨나요?”
“허허, 그랬었군요. 단지 갈릴레이가 싫어서 가신다면 지구도 알 수 없지요.”
“지구도 이미 행성 전쟁의 범위 안으로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가족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아내는 이미 떠났지만, 이제부터라도 남은 가족과 관계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흠, 이어 간다고 하는 말씀이 느낌을 알게 하는군요. 좋습니다.”
“김필립 님도 우리와 인간관계를 이어 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같이 갑시다.”
“너무나 감사한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거듭 감사를 표시하는 김필립의 말에서 그의 진정성이 보였다.
“요즘 제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손녀 새롬이입니다.”
“저는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습도 보지 못했지요. 그런데 요즘 왜 이 아이가 보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어간다는 말에 비밀이 숨어 있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아이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이시군요.”
“아니요,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만, 거부할 수 없는 느낌 같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새롬이를 본적도 없고, 이 순간 어린 새롬이를 지켜줘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군요. 신기합니다.”
“그러시군요. 모든 어른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는가 봅니다.”
“자, 장 박사에게 연락을 할까요?”
“아, 아니요. 저에게 며칠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결심까지는 마음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시겠지요.”
생태학자들은 어린 새끼의 생존 전략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른의 마음에는 어린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구석이 있다.
단지, 상황적 제약이 작용한다는 변수는 남아있다.
그러나 가족으로 인식하는 순간부터는 상황적 제약과 관계없이 서로를 응원하게 된다.
*
잉게다가 지휘하는 갈릴레이 함대는 케플러 기지를 향해 비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함대의 내부적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엑소스켈 함대 경계를 위한 장거리 정찰 비행을 계속했다.
잉게다 사령관이 배석하는 참모 회의는 일상적 업무뿐 아니라 새로운 관리 사항을 계속 도출해갔다.
새로 도출된 아이디어는 잉게다 사령관의 능력을 입증하는 평판을 만들었다.
갈릴레이 함대의 조용한 비행과는 다르게 케플러 기지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갈릴레이 행성으로부터 대규모 지원 물자 수송대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케플러 기지의 물자 사정이 그렇게 부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갈릴레이 행성에 비한다면 모든 면에서 풍족하지 못했다.
기지 출범 이래 이렇게 대규모 수송단이 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잉게다 함대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수송단이 먼저 도착할 예정이었다.
케플러 기지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케플러 기지의 이러한 소식은 잉게다 함대에도 전달되었다.
오랜 비행에 지친 함대원들에게는 즐거운 기대감이 부풀었다.
케플러 기지 도착 하루 전 여느 때처럼 잉게다 사령관은 참모 회의를 소집했다.
이날의 회의 내용은 보고 회의가 아니고 지시사항의 전달이었다.
잉게다 사령관은 케플러 기지에 도착 후 각 부서에서 70%의 인원을 교체할 수 있게 즉시 대상자를 선발하라는 내용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지시에 전 함대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교체를 자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갑작스런 지시의 배경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케플러 기지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갈릴레이로부터 오는 대규모 수송단에는 물자보다도 병사들의 숫자가 의외로 많았다.
잉게다 함대의 상당수 장교들과 병사들이 교체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잉게다 함대가 기지에 도착하자 케플러 기지로부터 수송선이 분주히 오가며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어쨌든 케플러 기지에는 인원수가 늘어났고 물자는 풍족해졌다.
이 인원들은 얼마 있지 않아 대부분 갈릴레이 행성으로 되돌아가겠지만, 기지의 분위기는 모처럼 만에 고조됐다.
잉게다 사령관과 원로원의 비밀 통화는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잉게다 사령관의 업무능력과 용인술이 높이 평가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편 엑소스켈 함대에 있는 나세르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갈릴레이 함대의 사령관으로서 엑소스켈 병사들을 만났을 때에는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처지는 영입된 장군의 신분인지 아니면 포로의 신분인지가 분명치 않았다.
차라리 갈릴레이 행성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더 좋았겠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이렇게 주저앉을 나세르가 아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고 있었다.
나세르의 방에 니꾸세 사령관이 찾아왔다.
“잘 지내십니까? 뭐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음성 통역기를 통해서 거친 기계음이 들렸다.
“저번에 제출하셨던 케플러 기지 공격 계획서는 잘 보았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어떠셨습니까?”
“글쎄요, 나쁘지 않은 계획입니다만, 갈릴레이 행성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너무 모험적인 계획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지구를 공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지구에는 갈릴레이 대사도 없는 상태 아닙니까?”
니꾸세의 말에 나세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행성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이야말로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케플러 기지는 지구 행성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도 작지만, 전략적 활용성은 매우 높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케플러 기지를 확보한 다음에 갈릴레이 행성과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효과적입니다.”
“글쎄요, 좀 더 검토해 보겠습니다.”
엑소스켈의 니꾸세 사령관과의 대화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크게 부딪히지도 않았지만, 결론이 없는 대화의 반복이었다.
나세르의 처지에서는 이러한 상황의 지속이 결코 바람직하지 못했다.
앞으로 몇 번의 만남 이후에는 니꾸세가 불가피성을 내세우며 일방적인 결정을 할 것이라고 나세르는 판단하고 있었다.
엑소스켈 함대 내에서 나세르의 위치는 매우 취약하다.
그 누구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취약한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나세르도 자신만의 본거지를 확보해야 했다.
그곳이 케플러 기지라고 나세르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세르는 더 이상 자신의 입지가 약화 되기 전에 먼저 절충안을 제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세르는 니꾸세 사령관을 찾아갔다.
“니꾸세 사령관님, 제가 사령관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니꾸세 사령관님께서 지구 행성을 중요시하시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지구 행성은 과거의 지구 행성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우주 구축함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으며 중력장 집속포라는 독특한 무기체계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구 행성과의 전쟁은 단기간에 끝이 나지 않을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구 행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면 대규모 전투에서 일단 상대방을 제압하고 협상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협상 국면에서 중요한 점은 세력 구도를 어떻게 짜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됩니다.”
“이때 큰 역할을 할 곳이 케플러 기지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씀은 1차로 케플러 기지를 공격해서 확보하고 이어서 지구를 공격하면서 협상으로 서서히 제압하자는 것입니다.”
“강온 양면 전략을 쓰자는 말씀이군요. 저에게도 좋게 들리기는 합니다.”
니꾸세는 아직도 시원하게 동의를 하지 않았다.
나세르는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니꾸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니꾸세의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는 공격 목표인 케플러 기지 공격에 많은 공격 자원을 투입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세르는 생각했다.
“저에게 10기의 전투선과 2기의 화물선을 내어주신다면 제가 공격계획을 작성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계획서를 제출해 주십시오.”
나세르의 집요함은 마침내 니꾸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니꾸세 함대에게 큰 부담은 아니었다.
나세르는 케플러 기지를 자신의 발판으로 삼고 싶기 때문에 리스크를 안았다.
그러나 니꾸세는 나세르의 성공 여부를 보고 자신의 방향을 잡으면 되는 편리한 구도의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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