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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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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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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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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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밤 나도밤

DUMMY

잠시 후, 바실리쿠스는 영주가 빌려준 말을 타고 늑대소녀를 등 뒤에 태워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말솜씨가 좋았다. 말을 타는 솜씨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동안 쿠미누스 사제가 그에게 마굿간지기 일을 맡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타면 탔지 쓰다듬고 보살피는 일은 개판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는 남들이 인정해줄 만큼 말을 잘 탔다. 누가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도 말들의 버릇을 쉬이 알고 달음박질로 성격을 파악했다. 너무 질은 땅을 싫어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진흙탕을 찰팍찰팍 밟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 있다. 바실리쿠스는 이 모든 말들의 성향을 파악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가장 적합한 질주로 녀석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 그는 평소에 말을 잘 듣는 말이 갑자기 경로를 이탈하면 한동안 그리 하도록 두었다. 가는 길을 파악하고 물을 마시러 가거나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먹으러 달려가는 일이면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고 그렇게 하도록 두었다. 하지만 발정난 암말을 향해 뛰거나 다른 말이나 짐승에게 시비를 걸러 가는 길이면 길가에 세워놓고 호되게 야단을 쳤다. 바실리쿠스가 무언가 체계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본능적인 당근과 채찍은 명확했다.




이제 말들은 멀리서 바실리쿠스의 볼록배만 보아도 말총을 흔들더니 어느새 곁으로 와서는 당근이며 사과 같은 걸 달라고 치근댔다. 바실리쿠스가 마굿간지기 일에서 쫒겨난 건 순전히 영주 가레랑의 판단이었다. 그는 말들이 온전히 바실리쿠스만 따르게 된다면 나중에 골치가 아파질 것이라 생각했다.




말은 중대사항이다. 탈 수도 있고 끌 수도 있고 밭일에 쓸 수도 있고, 새끼를 잘 까면 돈도 되고 여차할 땐 전장에도 끌고 가야 하는 데다가, 죽으면 고기도 되고 뼈는 깎아서 뭐든 만들 수 있다. 그런데도 자칫하다가 발목 같은 대라도 접질리면 산 채로 죽여야 한다.




말의 발목은 튼튼한 대신 한 번 다치면 낫지 않는다. 가레랑이 종자로서 종군하던 청년 시절, 하루는 달리던 말이 미끄러졌다. 그 말은 훌륭한 마갑을 차고 있었다. 가레랑은 별로 다치지 않았지만 말은 다리가 돌부리에 처박혀서 작살이 나고 만 것이다. 당시 그가 따르던 텅버림의 장 경은 다친 말을 살펴보고는 단검을 뽑아서 가레랑에게 건내주었다. 그 말은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주었고, 어린 수련생 시절을 함께한 말이었다. 가레랑이 싫다고 난리를 치자 장 경이 쇠장갑 낀 손바닥으로 뺨을 갈겼다.




"이대로 천천히 죽게 두던가 아니면 니가 깔끔하게 끝내라"




장 경은 매정하게 말하고는 그들을 버리고 갔다. 쓰러진 말을 어떻게든 일으켜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가레랑은 그들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날 저녁, 야영지에 천막을 치고 불을 피우던 기사들은 해가 지는 방향에서 온몸에 진흙을 묻인 가레랑이 혼자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자기 힘으로 말을 들어 끌고 가려고 했지만 도무지 안 될 것 같자 비참한 심정으로 일을 끝내고 쫒아오는 길이었다. 그날 이후 가레랑은 말에 관해서는 무자비했다. 가장 아끼던 말을 자기 손으로 죽였으니 다시는 그 어떤 말에게도 정은 주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심이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는 듯했고, 아들딸을 하나씩 낳은 다음에도 그러한 심성은 유순해지지 않았다.




바실리쿠스같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위세가 쏠리게 되면 분명 사달이 날 것이다. 그럴 바엔 좀 성에 안 차도 언제든 대체하기 쉬운 사람을 두는 편이 났다. 그래야 자리가 비었을 때에도 혼란이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실리쿠스 본인은 이런 사정을 몰랐다. 쿠미누스가 영주가 시킨 대로 잡꼬투리를 잡아 그를 마굿간에서 해임시켰고, 지금까지도 바실리쿠스는 그냥 그런 줄 알고 있다. 또한 지금 그의 머릿속은 늑대새끼에 대한 걱정 외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바실리쿠스는 식구들에게 늑대새끼를 넘기고 녀석이 사고치지 않도록 단도리를 쳤다. 말레이카와 민토네는 여전히 비몽사몽이라 그의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도 의심이 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확인해볼 새도 없이 다시 달려나와야 했다. 다른 것은 다 괜찮지만 나중에 이 일이 쿠미누스의 귀에 들어갈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성심성의껏 영주를 보필하여 사제에게 안 좋은 이야기 하나가 들어가더라도 좋은 이야기를 두 세 개쯤 더 들어가게 해서 부정적인 것을 상쇄시킬 계획을 세웠다.




성 밖으로 나오자 행렬은 이제 장원을 벗어나 숲의 어귀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실리쿠스는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말은 세차게 달려서 기수의 얼굴에 막바람을 맞혔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말은 경로를 이탈하고 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으로 바실리쿠스를 몰고갔다.




앞에서 말한 대로 바실리쿠스는 녀석이 무엇을 보고 이리 가는 걸까 싶어서 한동안 내버려 두었는데, 녀석은 가지가 울창하여 그늘이 기분좋게 내려오는 호두나무 외에 아무것도 없는 언덕에서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바닥에는 설익고 떨어진 호두열매들이 초목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호두열매의 시큼한 냄새가 났고, 잎사귀에는 송충이들이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바실리쿠스가 이러다간 늦을 것 같아서 초조해하고 있던 그 때 말이 갑자기 앞다리를 처들고 깔깔 웃어댔다. 그 바람에 바실리쿠스는 말 등에서 한동안 로데오를 탔다.




"뭐야, 이 녀석 왜 이래!"




말은 그렇게 한동안 하늘이 떠나가라 웃다가 바실리쿠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빠는 정말 자기가 탄 말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바실리쿠스는 사실 그동안 정신이 많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야말로 이 말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아보았다.




"뭐야, 클리셰 너냐?"




말은 뭐가 그리도 웃긴지 바닥을 쿵쿵 찍어대며 마구 웃었다.




그러고보니 달릴 때의 버릇도 그렇고 목덜미의 갈기털도 그렇고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이다 싶었는데, 마굿간의 왕초가 소중히 여기는 15살 배기 아가씨 클리셰였던 것이다. 바실리쿠스는 수치스럽고 화도 많이 나서 순간 이 녀석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격할 뻔 했다. 허나 그랬다간 다른 식구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고 무엇보다 마굿간 왕초에게 사지가 분질러질 것이다.




그로써는 말등을 철썩 때리며 이렇게 화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지금 어른을 놀려!"




그러자 클리셰는 바실리쿠스를 바닥에 내리고 발굽을 닥다그닥 등을 돌렸다.




"뭐 몇 살 차이 난다고 어른행세 하고 그래, 어이 없게."




바실리쿠스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바실리쿠스는 다시 클리셰의 등에 올라타려고 했다. 클리셰는 몸을 뒤로 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꾀송꾀송 장난을 쳐댔다. 바실리쿠스는 화가 나서 그만 그녀의 둔부며 허벅지를 두 주먹으로 때렸다.




"야 임마 사람이 급한데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아프기는 커녕 가렵다는 기색도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바실리쿠스를 놀리다가도 바닥에 떨어진 호두열매를 씹더니 퉤 뱉었다.




바실리쿠스가 전전끙끙 앓고있던 그 때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로드렉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클리셰는 네가 허락을 구하길 바라는 거야. 저 애 성깔이 장난 아니잖아. 보통의 말들이랑은 다른 대우를 원하는 거라구."




그리고 다시 쑥 들어갔다. 바실리쿠스는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고 물을 정신도 없었다.



"정말 그런거야?"


"......"


"정말 내가 너한테 빌면서 허락을 부탁해야겠냐?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클리셰는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몸을 돌려 귀를 가까이 대왔다. 허나 바실리쿠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이번만큼은 안 돼!"



원래라면 사람에게 한 번 비는 것 정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바실리쿠스다. 하지만 이틀 연속으로 이런 일을 겪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실리쿠스는 클리셰를 내버려두고 목적지인 숲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가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꽤나 먼 거리였지만 그는 제 발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제 발 저린 클리셰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바실리쿠스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최근 몇 년 들어 마굿간에 안 좋은 기운이 불어와 어린 말들이 죽거나 못 태어나거나 하여 그녀에겐 또래 친구가 거의 남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요 몇년 사이에 클리셰는 바실리쿠스와 어울리게 되었다.



어느새 클리셰는 성공적으로 바실리쿠스의 기분을 풀어주어(그의 기분을 푸는 데에는 웃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를 자기 등에 태우고 목적지인 숲속을 향해 달려갔다. 클리셰는 간만에 바깥으로 나왔다며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바실리쿠스 이 녀석도 정말 너무하군, 그래. 동생을 타고 이리저리 뛰다니는 동안에도 눈치 못 채고 연신 아프게 박차나 차다니. 클리셰가 화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쯧쯧."

"그 잠깐 사이에 바실리쿠스 오빠가 내 버릇이며 성질을 죄다 파악하더라니까요. 기분나빠!"



로드렉의 말에 클리셰가 이렇게 눙쳤다. 바실리쿠스는 면목이 없어졌다.



"그렇다 해도 다들 합심해서 나는 이렇게 골려대다니, 때와 장소를 좀 가릴 수는 없었어? 이러다 영주님한테 호통이라도 들으면 죄다 당신들 책임이야!"

"자기가 애초에 일찍 일어났으면 이런 일도 없었는데 그걸 가지고 잠깐 골려준 친구들을 허물하는구만!"



클리셰와 로드렉은 깔깔 웃었다.



"이번 외출은 아주 큰 모험으로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보통 이런 이야기에선 숲속에서 괴물을 만나고 그것와 맞서 싸우게 되어있지요. 뒤늦게 도착한 영웅이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출하고 큰 보상을 받을 거예요. 어쩌면 숲속의 아름다운 요정여왕을 만날지도!"

"그 이상한 말버릇도 이제는 그만 둬. 니가 말하는 그 예언들은 예전부터 하나도 들어맞질 않는다구. 남들이 보면 정신이 이상하다고 할 걸."



허나 클리셰의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녀의 서투른 예언이 멈추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는 그냥 웃어넘겼다.



어느덧 숲의 어귀가 가까워졌다. 늑대가 요즘 기승을 부린다는 소문과 다르게 오월햇살이 드비치는 첩첩삼림은 잎새그늘이 융융거리는 신록으로, 말하자면 하품 나오게 평화롭다. 참나무 소나무 박달나무 느티나무, 산사나무 뽕나무 은행나무 조팝나무, 단풍, 미루, 느릅, 물푸레, 조팝, 줄기에 사과맛이 쪽 나는 찔레와 진짜 산사과, 야생 국화, 들국화, 백합, 장미, 너도밤, 나도밤, 진짜 밤, 봄바람. 저 멀리 사람들이 나들이 돗자리를 펼쳐놓고 있었다. 바실리쿠스는 그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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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반딧불이가 많은 숲 (1) 24.07.29 7 1 12쪽
14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3) 24.07.29 7 1 11쪽
13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2) 24.07.29 9 1 13쪽
12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1) 24.07.28 7 1 11쪽
11 개와 사람을 반쯤 합쳐놓은 24.07.28 8 1 12쪽
10 산사과 같은 머리 24.07.27 10 1 12쪽
» 너도밤 나도밤 24.07.27 13 1 11쪽
8 너 제정신이냐? 24.07.27 10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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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더 많이 다친 사람은 바실리쿠스였다 24.07.26 11 1 11쪽
5 안 돼요! 24.07.26 11 1 13쪽
4 닭대가리 게레할드 24.07.26 17 1 11쪽
3 늑대의 습격 24.07.26 13 1 12쪽
2 난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드는 걸 24.07.26 28 1 11쪽
1 쿠미누스 사제의 억지 24.07.26 9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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