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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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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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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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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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과 같은 머리

DUMMY

"자, 모두 조용히."




바실리쿠스가 목소리를 낮추어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사람처럼 말 하면 안 돼. 지금 우리 중에서 사람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그는 안장에서 내리면서 그들이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확인했다. 클리셰는 아무리보아도 보통의 일반 말 같았고 로드렉은 주머니에 꽁꽁 숨었다. 바실리쿠스는 말을 끌고 영주 앞으로 갔다. 영주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바실리쿠스는 조금 멀리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가 늦어버렸군요."


"바실리쿠스 요녀석!"




영주는 언성을 높혔다.




"애는 잘 데려다놓았냐?"


"그럼요."


"사리 분간도 못하는 애들을 이렇게 위험한 자리에다 데려오면 안 되지."


"예, 예,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니가 데리고 사는 거지?"


"어....."




바실리쿠스는 여기서 아니라고 딱 잡아떼면 조카를 매정하게 내쳐버리는 상놈이 됨을 깨달았다.




"제대로 씻기고 밥도 먹이고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


"그 애가 제대로 자라날 때까지는 니가 잘 보살펴야 해."


"네."


"매일 교회도 데려가고. 도시도 데려가고, 좀. 응?"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좀 씻어라!"


"저는 매일 씻는데요, 영주님."


"이게 씻은 거야?" 가레랑은 바실리쿠스의 목덜미 냄새를 맡아보았다. "씻은 건가?"




바실리쿠스는 영주를 따라가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러고보니 쿠미누스 사제님은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제가 그 얘기는 전해듣지 못해서요."


"음, 사제님은 카슈밍 교구회의에 가셨어. 아마 내일쯤 돌아오실걸."


"그렇군요... 아, 그러고보니 영주님, 이번 겨울에는 돼지를 얼마나 잡으실 예정이신지요?"




바실리쿠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글쎄다... 그건 왜 묻느냐? 그때 가봐야 알 거 같은데, 요 돼지야! 너는 항상 먹을 생각 밖에 없는 거냐?"


"그게 아닙니다요. 이번 겨울에 잡을 돼지를 정하는 일을 한 번 저한테 맡겨보시는 게 어떤가 해서요."


"그걸 벌써부터 생각하게?"


"제가 이제부터 돼지치기와 다름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저라면 어떤 돼지가 살이 통통하고 살과 살 사이에 기름이 잘 올랐는지 고를 수 있을 겁니다. 한 번 믿고 맡겨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거 원래 니가 할 일이긴 했다, 바실리쿠스." 영주는 공터에 가까워지자 바실리쿠스에게 말고삐를 넘겼다. "전통적으로 우리 영지에서 돼지와 관련된 일들은 모두 돼지치기의 임무거든. 그러니 그래 나한테 부탁하지 않아도 된단다."




영주는 그 말을 끝으로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마리의 옆에 앉아 한동안 금슬좋은 부부 행세를 했다. 하지만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바실리쿠스는 영주의 말과 클리셰 두 마리 모두 끌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무슨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번개처럼 달려나가기 위해 눈과 귀를 예민하게 두었다. 일행들은 공터에 돗자리를 펴놓고 단체로 독서를 하는 중이었다. 사내들은 한쪽에서 장비를 손보던가 아니면 아예 함께 앉아있던가 하며 함께 들었다. 바실리쿠스는 뭔가 이상해서 그로가네한테 갔다.




"형님, 내가 전후사정을 듣지 못해서 그러는데 이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사냥은 나중에 간다신다. 지금 이건 영주님 마누라 기분 풀어주려고 나온 나들이 같은 거지."


"아, 그래요?"




그로가네는 갑옷의 쇠사슬로 된 부분을 열심히 닦는 동안 한쪽 귀는 저쪽을 향하고 이따금 웃음을 띄거나 하며 제법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여자들이 지쳐 돌아가면 아마 그 때 우리도 시작하지 않을까. 너도 조금은 쉬고 있어라."




바실리쿠스는 그럼 뭐 그러겠다고 하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그러면서 자기 몸 냄새를 맡았다. 스스로의 사람됨만 보아도 저렇게 여자며 남자들이 한데 모여앉은 곳에(영주의 어린 아들과 딸도 있으니) 합석하는 건 쑥쓰러울 뿐더러 돼지 냄새 때문에 비난까지 받을 일이다. 그래서 아마 주변에 같이 앉은 사내들이 다들 저쪽으로 가더라도 자기 혼자는 계속 여기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자못 쓸쓸한 예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영주가 한구석에서 숲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으니 병사들도 대장 있는 곳이 마음 편하다는 듯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실리쿠스는 영주의 딸이 책을 받아들고 다음 이야기를 낭송하는 데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이야기는 바실리쿠스도 잘 알고 있었다. 옛날에 어느 왕이 왕비를 맞이했는데, 그 여왕이 알고보니 괴물이었고, 아들 하나를 낳아준 뒤에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괴물로 변해버린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어요. 저는 이 이야기를 톰브리아의 사람들에게서 들었어요. 그 고장에는 지금은 없지만 몇백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강하고 부유한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지요.... 그 나라에서는..."




그 때, 갑자기 한쪽에서 돼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낭송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그들은 한 번 가서 알아보라며 바실리쿠스를 보냈다. 그곳에는 보통 크기에 살이 토실토실 오른 여름 돼지가 나무에 묶여있었다. 병사와 하녀 몇 명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늑대새끼들 꾀어낼 때 쓸 돼지야. 미끼 돼지."




하녀가 말했다. 그녀는 낄낄 웃으면서 돼지의 엉덩이며 허릿살이며 그나마 통통한 부분을 북처럼 착착 두드렸다.




"이따 좀 멀리까지 끌고 가서 도끼로 머리를 때리면 돼. 내가 도와줄게."




돼지의 목덜미를 잡고 꽉 누르고 있던 병사는 돼지의 등어리를 톺더니 벼룩 한 마리를 붙잡고 터뜨렸다.




"근처에 적당한 개울이 있으니까 멱을 따서 피를 좀 모아두고 나머지는 거기에 매달아서 씻을 거야. 그렇게 하면 다들 요기할 정도는 되겠지."




그는 입맛을 다시고 주변에서 영생이 같은 적당한 꿀풀 따위를 뜯었다.




"이따 먹을 때 좀 넣어야지. 먹고 남은 건 적당한 데 둬서 썩힌 다음 놈들을 꾀어낼 거야. 이 돼지는 전혀 낭비하는 부분이 없는 셈이지. 이제 알겠니, 바실리쿠스야?"




하녀가 일어나 바실리쿠스에게 날이 시퍼런 도끼를 쥐여주었다. 이 도낏날 뒷면의 뭉툭한 부분으로 돼지의 미간을 두 차례 가격하여 절명시키는 것이 그에게 암묵적으로 떨어진 임무였다. 다른 데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이 고장에서는 돼지를 그런 식으로 잡는다. 아마 다른 데도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겨우내 살찐 돼지를 잡는 시기가 다가오면 집에서 쉬고 있는 나무꾼들이 푼돈이나 벌러 추운 날씨에 눈을 퍽퍽 밟으며 오기도 한다. 아무래도 도끼를 자주 다루는 사람이 조준도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온 나무꾼들은 돼지를 한 세 마리 정도 잡아보고는 돌연 멈칫한다. 눈 꾹 감고 한두마리 더 잡다가 침을 퉤 뱉고 집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면 구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돼지치기가 나머지를 이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지 바실리쿠스는 이런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바실리쿠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들이 가고 난 뒤에 그는 돼지한테 무릎을 꿇었다.




"바실리쿠스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된 거지?"




늙어서 눈꼽이 많이 낀 돼지가 물었다. 그의 등살은 탄력이 완전히 죽어버렸고 푸르딩딩한 어묵처럼 주름이 잡혀있었다.




"내가 죽을 때가 된 거지, 바실리쿠스야?"




도르헤 영감은 만나면 이 말만 했다. 아마 가축과 인간 사이를 오가는 바실리쿠스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저승사자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영감의 눈은 몇 년 전부터 눈 앞에 앵앵거리는 게 나비인지 파리인지도 구분을 못했다. 그런 사람은 살 때 죽을 때도 모르는 법이다. 낡은 부분은 눈만이 아니었다. 발굽도 그랬다. 저 발굽은 너무 해진 나머지 굽 낮은 구두처럼 된 데다 콧물 흐르는 코는 쪼그라든 채로 냄새를 비식비식 맡아서 주변에 썩은 사과나 자두가 있으면 그쪽으로 비루한 입술부터 쭈욱 댔다. 문제는 영감이 이제는 무엇이 자두고 진흙탕인지조차 헷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임에도 틈만나면 망령 든 사람처럼 코를 이쪽저쪽 씰룩거리며 이것을 맛보고 저것을 맛보고 하다보니 길가를 떠돌다가 이렇게 돼지고기가 고픈 사람들에게 저항없이 붙들리고야 만다.




'나도 언젠간 이렇게 되겠지. 과거의 젊음은 사라지고 몸도 정신도 약해져서 혼자서는 설 수도 없는 몸이 되어버릴 거야. 그러니 사람은 가정을 이루어야 해. 서로를 지켜줄 존재들을 예쁜 정원처럼 가꾸어 나가야한다고. 그런데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심란하고 또 쓸쓸한 생각은 가을이 아닌데도 사람의 옆구리를 쏠아먹는다. 돌아가면 일단 식구들을 단단히 혼내줄 것이다.




'못된 인간들! 영감님은 이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해.'


"난 이제 준비가 됐어. 옛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갈 준비가 말이야."


"그런 말 마세요." 바실리쿠스는 돼지의 머리를 긁어주었다. "영감님 식구들은 살아있어요."


"그 애들이 살아있니?" 늙은 돼지는 힘없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별 희한한 일이 다 있군."




바실리쿠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는 돼지를 풀어준 뒤에 밖으로 끌고 나가고 있었다. 돼지는 온순하게 그를 따라오면서도 입으로는 이런 말들을 했다.




"모두 다 때가 있는 거야. 인간에게도 때가 있듯이 돼지한테도 때가 있는 법이지... 나는 돼지의 때를 선택했을 뿐이란다. 그러니 나를 한 마리 돼지로 죽게 해다오."


"아저씨 반은 사람이잖아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자, 돌아갑니다."




바실리쿠스는 경로를 잘못 선택했다. 말하자면 그는 적당한 언덕 아래로 돌아가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일단 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길은 멍 하니 앞니로 강아지풀을 뜯고 있는 그로가네가 앉은 자리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그들은 눈을 마주쳤다. 바실리쿠스는 못 본 척을 하고 계속 앞으로 갔다.




"난 죽을 때가 됐어...."


"영감님은 안 죽어요.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저랑 같이 돼지우리로 돌아가자고요."


"안 갈래...."


"식구들이 영감님을 보살펴줄 테니까요."


"안 갈래..."




도르헤가 벌레먹은 산사과 같은 머리를 처들었다.




"난 죽을 때가 됐는데 왜 너는 자꾸 그런 말을 하니?"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로가네가 뒤를 쫒아왔다. 하지만 바실리쿠스를 불러세우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꼴을 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서 잠시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들이 점심용으로, 그리고 늑대 유인용으로 데려온 늙고 병든 돼지를 동네 착하지만 조금 모자란 돼지치기가 오손도손 끌고가는 모습을 말이다. 조금씩 혼잣말을 하는 것도 같았다. 자기가 모르는 무언가 깊은 속뜻이, 이 고장 돼지치기들끼리 전해져 내려오는 주문이라던가 풍습 같은 걸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비척비척 쫒다가 숲의 어귀에 접어들자 불안한 마음으로 뒤를 슬쩍 돌아보는 바실리쿠스와 또 한 번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바실리쿠스 입장에서도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참 난처했다. 정 이상하면 저쪽에서 말이라도 걸어오면 될 텐데 계속 말없이 따라오기만 하니 추격자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가 된 것 같고 죄 지은 기분마저 들었다.




참고로 그로가네는 이 때 늑대사냥에 대비하여 온몸을 가볍고 단단한 차림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허리띠에 칼을 차고 있었다는 뜻이다. 바실리쿠스는 무슨 변명을 해도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만 같아서 차라리 저쪽에서 묻기 전까지 말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마침내 그로가네가 뒤에서 입을 열었다.




"야, 야, 지금 어디가냐,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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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매춘하는 개 인간 (1) 24.07.30 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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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반딧불이가 많은 숲 (2) 24.07.29 7 1 12쪽
15 반딧불이가 많은 숲 (1) 24.07.29 7 1 12쪽
14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3) 24.07.29 7 1 11쪽
13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2) 24.07.29 9 1 13쪽
12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1) 24.07.28 7 1 11쪽
11 개와 사람을 반쯤 합쳐놓은 24.07.28 8 1 12쪽
» 산사과 같은 머리 24.07.27 10 1 12쪽
9 너도밤 나도밤 24.07.27 12 1 11쪽
8 너 제정신이냐? 24.07.27 9 1 13쪽
7 이기고 지는 게 무슨 소용인가? 24.07.26 8 1 11쪽
6 더 많이 다친 사람은 바실리쿠스였다 24.07.26 10 1 11쪽
5 안 돼요! 24.07.26 11 1 13쪽
4 닭대가리 게레할드 24.07.26 17 1 11쪽
3 늑대의 습격 24.07.26 13 1 12쪽
2 난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드는 걸 24.07.26 28 1 11쪽
1 쿠미누스 사제의 억지 24.07.26 9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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