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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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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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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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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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개와 사람을 반쯤 합쳐놓은

DUMMY

바실리쿠스는 멈춰서서 그로가네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형님, 사실은요. 이 돼지는 너무 늙고 병들어서 먹어봤자 맛도 없고 입맛만 버릴 거거든요. 제가 잽싸게 성으로 가서 싱싱한 돼지랑 바꿔올게요."


"식사시간 거의 다 돼가는데 언제 바꿔오겠다는거야." 그로가네가 말했다. "그러다 고귀한 분들이 굶는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래? 너의 다리는 몽땅 분질러질 걸."


"에이, 그거 가지고 사람 다리를 분지를라구요."


"너 그 얘기 못들었냐?"


"뭔 얘기요?"


"아주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지. 지금 네가 벌이는 행동의 결말, 그 단초가 될지도 모르는."




그로가네는 쭈그려 앉아서 돼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지금의 영주님 말고 예전 영주님, 그러니까 가레랑의 아버님인 고틀레프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야. 그분이 정말 아끼는 염소가 있었는데 그 염소가 너무나도 병들고 늙어서 제 구실도 못하게 되었데. 그래서 멋모르는 바보들이 그 염소를 허락도 없이 잡아먹어 버렸다는 거야. 놈들이 말하기로 그 염소는 옛날부터 외양간에서도 풀려나 주인없는 염소처럼 제멋대로 떠돌아다녔다는 거지. 그래서 영주의 염소인지도 몰랐다는 거. 그리고 가레랑의 어머님이 먹는 걸 허락했다는 거. 마지막으로 그 염소는 자기들이 발견했을 때 이미 죽어있었다는 게 놈들의 변명이었지. 그 날 사람 다섯 명이 병신 돼서 나갔어."


"정말 무서운 얘기군요." 바실리쿠스는 말했다. "형님, 그건, 그런 말이죠. 예, 정말 무서운 이야기에요. 하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 아닙니까. 그분은 죽었고요. 가레랑 영주님은 저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분이에요."


"하지만 마님은 널 싫어하잖아. 거기다가, 너가 벌써 가레랑을 잘 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거냐? 사람은 자기마다 정해놓은 선이 있는 거야. 물론 네 의도는 선량하다만 사람이 굶게 되면 그런 건 상관이 없어지지."




바실리쿠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로가네한테 설득된 건 아니지만 그가 자신의 앞길을 막아놓고 전혀 비켜줄 생각이 없는 건 분명했다. 그래서 동의의 표시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것의 대꾸로써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어떡하죠."


"어떡하긴 임마!" 그로가네가 외쳤다. "지금 당장 이 돼지를 제자리에 갖다놓으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얏!"




앞에서 말했듯이 그로가네는 허리춤에 시퍼런 생칼을 차고 있었다. 바실리쿠스는 이판사판이다.




"형님! 제 말을 들어보세요. 이 돼지는 정말 먹어봤자 불쾌하기만 할 거라니까요! 요 어묵처럼 쭈글쭈글한 뱃가죽좀 봐요."




바실리쿠스가 보란듯이 도르헤의 뱃가죽을 꾸깃꾸깃 만졌다.




"아파..."


"분명 속에 벌레도 많고 창자는 고름으로 가득 찼을 거라고요. 뱃가죽을 열자마자 꾸물거리는 구더기와 함께 고린내가 쏟아져나올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죽여서 미끼로 쓴다는 거 아냐. 먹는 건 덤이고!"




바실리쿠스는 이대로 한 판 치고박고 싸워서 순간의 상황을 모면해보는 게 어떨까 싶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허나 그랬다간 뭔가 상당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것처럼 느껴졌다.




바실리쿠스는 한바탕 대성통곡을 하며 도르헤의 등 위로 풀썩 엎드렸다.




"형님! 내가 평소에 형님한테 기분나쁜 일들을 많이 했다면 그건 미안해요. 하지만 형님이 나한테 악감정이 있다손 쳐도 지금 내 말은 들어줘야 해! 사실 이 돼지는 말이죠..."




이 때 바실리쿠스가 무슨 말들을 그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았는가는 굳이 늘어놓지 않겠다.








한 편 영주의 딸인 테레사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나도 지루한 나머지 간신히 하품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시녀들이 앉아있었고, 돗자리 위에 노란색 비단 돗자리를 하나 더 깔아서 남들과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지루한 이야기의 낭송을 끝내고 앉은 뒤, 그녀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을 하나도 듣지 않고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해가 안 된단 말야. 어젯밤 있었던 그 일 말이지.'




그녀는 어젯밤 외양간 근처에서 목격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개가 사람처럼 하고 다닌다니 그건 전혀 이치에 들어맞지 않은 거잖아?'




그녀는 어제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몸이 이상하게 찌뿌둥하고 눈을 감아도 잠이 몰려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날따라 평소같지 않은 달밤의 칙칙한 기운이 요상하게 몰아쳐서 사람의 담즙에 못된 영향을 준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이상한 밤이었다. 달이 달 같지 않고 별이 별 같지 않으며, 세상 외부에서 들어온 투명한 막이 하늘을 온통 뒤집어쓴 것처럼 정말정말 요상한 밤이다.




테레사는 누운 자리에서 이뇨욕구에 시달리다가 한숨을 쉬면서 일어났다. 옷을 입고 시녀 한 명을 데리고 성 내 뒷간으로 향했다. 허나 그날 밤 변소 근처에서 영주의 딸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밤중이라 없는 게 당연하지만). 오줌 싸러 간다는 말은 남들 몰래 밤산책을 위한 핑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모님 몰래 성 밖으로 나갔고, 그곳에서 마굿간지기인가 돼지치기인가 확실치 않은 사람이랑 얼마 전 들어왔던 외지인이랑 한바탕 주먹다짐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근처에 숨어서 한동안 구경했다. 분명 더 많이 얻어맞고 있는 게 분명한 사람이 지지 않고 상대방에게 주먹을 올려붙이는 것을 보고, 테레사는 저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같이 데려간 하녀 마리에뜨한테 물어보았다. 그렇게 영주의 딸은 바실리쿠스 비스콘티의 이름이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소란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을 떨어뜨렸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딸처럼 그 시각까지 깨어있었던 가레랑도 그 자리에 나타났다. 자기가 지금 깨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소란쯤 그냥 무시하고 싶었으나 영주로서 가만히 있는 건 눈치 보이는 일이었기에 그가 몸소 나온 것이다. 가레랑은 사람들을 해산시켰고, 싸움을 일으킨 두 사람은 따끔하게 꾸중했다.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고 돼지우리 속에서 쑤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도 테레사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방금 전 그 소란을 목격한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리는 굳었고, 귀는 예민하게 열렸다.




지금까지 밤산책을 하는 것이랬자 몰래 외양간 창문 위로 올라가 양이나 염소들이 흘레붙는 걸 구경하거나 저 멀리 밀밭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하녀가 저 곳에는 늑대나 개 같은 짐승이 있다고 겁 주는 걸 듣고 자기는 그런 걸 믿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받아치는 둥 소소한 여흥일 뿐이었으나,




다 큰 성인 남자 두 명이 저 건장한 나이의 혈기와 힘으로, 서로를 죽일듯이 때리며 드잡고 욕하고, 주먹으로 구타하여 코피를 터뜨리는 일들을 이처럼 생생한 광경과 폭력으로 목격하는 일은, 규방 처녀 비슷하게 살아온 그녀에겐 아무래도 자극이 큰 것이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테레사가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사람을 때리고 막 욕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물론 나도 사람들이 싸우는건 자주 보아왔지만 방금 건 아예 다른 일이었어. 정말 무자비하군. 자칫하다 살인까지 날 수도 있었을거야."


"사람들이야 저렇게 싸우는 거죠.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세요?" 하녀 중 한 명이 강아지풀을 뜯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볼 일이야 있었겠어요? 저 바실리쿠스 멍청한 녀석이 제 몸 안 사리고 싸우느라 만창이 난 것 뿐이지 다들 저정도는 싸운다구요."


"정말 그럴까?"


"그럼요."


"그럼 주님에게 기도할 일이군. 자, 다들 손 모으고 빌자꾸나."


"뭐라고 빌어요?"




마리에뜨가 물었다.




"이 세상에서 폭력과 아픔이 모두 사라지도록 말이야. 그리하여 누구나 하느님의 행복과 기쁨 아래 살 수 있도록 말이지."


"아가씨는 참 마음씨가 좋군요. 하지만 저는 이 기회에 차라리 다른 소원을 빌고 싶은데요."




시녀가 말했다.




"이건 소원이 아니야. 말 그대로 바람이지. 그건 그렇고, 너는 어떤 소원을 빌고싶은 건데?"


"차라리 저렇게 마음대로 치고받고 싸우고, 욕하고, 마음대로 살아도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 하고 싶네요."


"그건 왜지?"


"저 꼴을 보세요."




시녀는 잔뜩 얻어맞고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 아픔에 신음하는 바실리쿠스를 가리켰다.




"저렇게 운수 나쁜 하루를 보낸 사람한테 너는 나중에 지옥에 갈 거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은 주님이 아니라 악마죠 악마."


"그건 저 사람한테 달린 일이야."


"그 말도 일리가 있네. 뭐, 그런 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지 않겠어?"




그들은 몰래 가져온 사과주를 조금씩 돌려마셨다. 테레사는 입안에 향이 돌고 얼굴이 화끈해졌다.




잠시 후, 테레사는 마리에뜨한테 저 바실리쿠스라는 남자를 치료해주라고(게랙탱이라는 남자는 아무래도 외지인이었기 때문에) 한 뒤 자기는 시녀와 함께 성으로 돌아와 다시 잠에 들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어보니 여전히 쿵쿵 뛰고 있었고, 그래서 이런 날에는 도저히 얌전하게 잠만 자고 있을 수는 없겠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다른 시녀들은 그때쯤 모두 피곤한 잠에 들어있었다. 왜냐하면 바실리쿠스가 일으킨 소란이 그들의 잠을 한 번 깨워서 몹시 피곤하고 졸린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아무도 모르게 가볍고 날쌘 옷을 입은 채 창문을 타고 조심조심 내려왔다. 성벽 위 보초들의 눈을 피해 그늘에서 그늘로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추격자와 숨바꼭질하는 기분을 느끼며 말똥냄새가 지독한 마굿간 왼편에 섰다. 테레사는 낮과 다른 것이라고는 밤으로 인한 어둠과 달로 인한 그늘 외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구석이 나타날 때마다 그쪽을 탐색하듯이 들어가 숨죽였다. 어느새 그녀는 성문에 가까운 지점까지 와있었다. 그곳에서는 성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 뒤쪽의 으슥한 구석이 보였다.




그 구석에는 한 쌍의 남녀가 한방중의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아직 이때의 테레사는 그걸 정확히는 모르고 있었으나 사람같이 생긴 그림자 두 마리가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고 미묘한 예감을 느꼈다. 이내 그들은 서로의 팔이며 손을 다정하게 잡고 상대에게만 전달될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테레사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밤이고 바람 한 점 없어서 목소리가 잘 들려오는 밤이었다.




"이렇게나 저를 보고 싶으셨다니, 당신은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인가요?"




테레사는 어서 빨리 달이 구름 속을 벗어나 저쪽의 사람들을 비춰주었으면 하였다. 테레사는 기다렸다. 이제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두 사람이 전보다 더 가까이 서로를 붙잡은 채 부드럽게 문질거리는 형체만을 이끼 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분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보름에 가까운 달이 날파리를 휘어잡듯이 바람처럼 팔을 후렸다. 남자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볼 수 있는 건 환하게 입을 벌린 여자의 얼굴 뿐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하며, 매춘부들이나 입을만한 호리호리하고 화려한 겉옷을 걸친 저것은 개와 사람을 반쯤 합쳐놓은 반인반견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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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반딧불이가 많은 숲 (3) 24.07.29 4 1 11쪽
16 반딧불이가 많은 숲 (2) 24.07.29 7 1 12쪽
15 반딧불이가 많은 숲 (1) 24.07.29 6 1 12쪽
14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3) 24.07.29 7 1 11쪽
13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2) 24.07.29 9 1 13쪽
12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1) 24.07.28 7 1 11쪽
» 개와 사람을 반쯤 합쳐놓은 24.07.28 8 1 12쪽
10 산사과 같은 머리 24.07.27 9 1 12쪽
9 너도밤 나도밤 24.07.27 12 1 11쪽
8 너 제정신이냐? 24.07.27 9 1 13쪽
7 이기고 지는 게 무슨 소용인가? 24.07.26 8 1 11쪽
6 더 많이 다친 사람은 바실리쿠스였다 24.07.26 10 1 11쪽
5 안 돼요! 24.07.26 11 1 13쪽
4 닭대가리 게레할드 24.07.26 17 1 11쪽
3 늑대의 습격 24.07.26 13 1 12쪽
2 난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드는 걸 24.07.26 27 1 11쪽
1 쿠미누스 사제의 억지 24.07.26 9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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