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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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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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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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1)

DUMMY

'방금 내가 본 게 개야, 사람이야?'




테레사는 커다란 나무 소쿠리 뒤에 숨었다. 그건 아기씨의 몸을 가릴 정도로 컸다. 그녀는 방금 자기가 본 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인지, 혹 악마가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눈이 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더니 무서워졌다.




독자 여러분도 지금까지 알던 상식 선에서는 터무니없게 여겨지던 일이 실은 무척이나 뻔뻔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자기가 모르는 사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진실임을 깨닫고는 세상을 원망하듯 바라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세상은 '네가 물어보지 않았으니 대답하지 않았을 뿐' 이라는, 다소 이기적인 반응을 보낸다. 테레사는 지금 그 경계에 발을 들이고 쪼그려 앉은 상태였다.




테레사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내밀어 다시 그쪽을 보았다. 개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뒷모습을 보아하니 남자는 성의 순찰을 보는 위병이었다. 테레사는 한동안 그들을 따라가다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지점까지 와서 멈췄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 함께 성벽 위 요철에 감싸인 통로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하얀 달빛에 비쳐 그렇게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남녀의 모습을 눈에 훤히 담을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고 허리에 손을 감던가 하며, 마치 계단 한 칸을 올라가는 일마저 각자의 사랑을 증명할 기회라도 되는 듯이, 애무하며, 애무하며, 또 살포시 감싸안으면서, 끔찍이도 사랑하는 사람처럼 상냥하게 서로를 다루었다. 여자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머리를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그런 상태에서는 보통 사람과 확연히 구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마다 흐붓이 반사되는 저 빨강과 초록의 호박단 옷 속에서 짐승의 꼬리가 마치 지렁이처럼 탐스럽게 움직이는 것은 분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피부 속의 정맥처럼 옷 위로 툭 튀어나와서 들뜬 엉덩이와 함께 좌우로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희롱하듯이 딱 붙어서 옷감을 이리저리 할 때마다 달빛의 손길이 달라졌다. 그 그늘과 양지의 굴곡 사이사이에 피는 것들이 이러한 휘영청 달밤의 상황과 평소답지 않은 공기, 공들여 짠 비단과 한창 남녀의 밀회, 암묵적인 동의, 봄풀이 여름풀로 의식할 새도 없이 바뀌어가는 달달한 흐름에 함께 버무려져, 현 상황을 서술하는 혼돈의 문자가 직조될 때마다 달은 매번 점자처럼 그 위를 쓰다듬었다.




위병은 자신과 닮았으나 또 전혀 닮지 않은 저 견인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이 전혀 낮설지 않은 방식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이 때 테레사는 확신했다. 저것은 사람과 짐승이 반반 섞인 인외(人外), 그녀가 알던 세상에서 한참 동떨어진 존재라는 걸. 저것은 아마 하느님이 처음으로 짐승을 빚어낼 적에, 그처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역사와 더불어 이 세상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으며(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아버지의 영지와 성도 예외는 아니라는 걸!




왜냐하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과 짐승은 예로부터 존재해왔으니, 그 둘의 중간쯤 되는 존재 역시 아예 없으리란 법은 없노라 쉽게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거기서부터 따라가지 않고 황급히 방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올라간 자리는 자신의 방에서 잘 보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높은 곳에서 보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느닷없이 불어오는 찬바람에 같이 자는 시녀들이 신음했다.




"어떤 정신나간 여편네가 이 날씨에 창문을 열어놓은 거야?"




뒤쪽에서 들리지 않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율리돈나가 졸린 눈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 어깨에 손을 다소곳이 얹었다.




"아기씨,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감기에 들고 말 텐데요. 어서 이불에 들어와 주무시고 창밖 경치는 내일 아침에나 보도록 하세요."




그때까지 성벽 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테레사의 시선은 두 밀회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방에서는 돌벽이 달빛에 허옇게 바랜 부분만을 분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테레사는 눈 좋은 율리돈나한테 대신 봐보라고 했다.




"저기 성벽 위에 뭔가 보이는 거 없어?"




율리돈나는 예의상 그쪽을 한 번 보았다가 테레사가 재촉해서 실눈을 뜨고 다시 제대로 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경비 서는 위병 아저씨들 말고는요."




테레사는 몹시 실망했다. 하녀의 능력이 아쉬운 게 아니었다.




'이럴바엔 차라리 그 때 뭐 하는 사람들인지 말이라도 걸어볼 걸.'




아쉽게도 침대맡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시녀들은 그녀에게 꿀과 치즈와 버터를 섞은 걸 따뜻하게 두어 숟갈 먹였다. 잠자리는 데워져 있었고, 이번에는 잠이 잘 왔다.




쿡시 가문 사람들의 계보는 대대로 잠이나 한 번 자면 그 전날의 사소한 일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마는 건망증의 기질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어있다.




허나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잠과 망각의 악마가 밤꿈 사이에 그녀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하더라도 남에게도 차마 믿으라고는 할 수 없을 그 광경의 기억이 그녀의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 그 일은 도저히 꿈결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침에 몸단장을 도와주는 시녀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줄 아는지 아예 바보취급을 했다. 하지만 테레사는 남들이 뭐라 말하던 자기가 보았던 게 잘못 본 거라던가 환영이나 환청 따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본 건 본 거다. 그래서 이번 일은 마음 속에만 넣어두고 나중에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찾으면 그 사람에게 털어놓겠노라 다짐했다.




그날 아침 나들이 준비가 모두 끝나기 전까지 테레사는 베베를 무릎에 앉혀놓고 어젯밤 보았던 그 광경을 말해주며 등어리를 쓰다듬었다. 베베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인데, 테레사는 고양이의 이쪽저쪽을 만져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녀가 고양이한테 물었다.




"내가 잘못 본 거였을까?"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그녀의 품 속을 빠져나와 기지개를 폈다. 그러더니 창문 아래로 휙 내려가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테레사는 이제 아버지를 따라 나온 숲속에서 낭독회를 끝내고 이제 막 점심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가레랑은 딸에게 술 탄 물을 조금 허락했다. 그런데 먹기로 한 돼지고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 가레랑이 무슨 일인가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였는데, 잠시 후 싸웠는지 같이 땅에 굴렀는지 옷이 더럽혀진 두 사내가 영주의 앞에 끌려왔다.




가레랑이 두 사람을 추궁했다. 그로가네라는 이름의 병사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바실리쿠스가 점심 때 먹을 돼지를 몰래 끌고 나가는 걸 봤습니다. 제가 따라가서 어딜 가냐고 물었더니 저 돼지는 병들고 맛없어서 차라리 싱싱한 새 돼지로 바꿔오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안됐다고 했더니 갑자기 주저앉고는 이상한 말들을 해대는 겁니다. 이 놈은 자기가 아끼는 돼지라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고 했지요. 하지만요, 영주님. 돼지치기가 돼지한테 정을 주었다가 어떻게 될 지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중한 돼지라고 잡는 것도 마다하면 나중에 바실리쿠스는 영주님이 요구하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저 녀석이 돼짓간의 모든 돼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날에는 어떡하죠? 저 불쌍한 녀석은 갇힌 돼지들을 모두 풀어주려고 할 겁니다. 바실리쿠스는 들어먹으려고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저도 좀 세게 나갔죠. 어느새부턴가 말싸움을 하게 되었고, 갑자기 저 놈이 저를 들이받고는 싸우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벌은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영주는 두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가 바실리쿠스에게 저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바실리쿠스는 입을 열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 옆에 그 문제의 늙은 돼지를 눕혀놓고 얼굴이며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저 돼지를 넘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돼지는 사타구니에 똥오줌을 지려놓고 혀를 힘없이 바깥에 내놓은 채 정신없이 누워있었다.




"바실리쿠스, 그게 네가 아끼는 돼지냐? 그 돼지를 잡을 수가 없어서 이런 일을 벌인 거냐?"




영주는 간만의 나들이를 나왔는데 이렇게 분위기를 망치게 되어서 몹시 화가 났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실리쿠스가 못된 마음을 먹고 벌인 일은 아닌 것도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고작 돼지 한 마리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우는 바실리쿠스를 영주가 평생 이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병신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한편으로는 바실리쿠스 자체가 좀 모자란 건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주는 바실리쿠스에게 나중에 엄한 벌을 내릴 것을 약속하고 두 사람을 포옹하고 화해하게 시켰다. 그리고 지금 당장 바실리쿠스에게 저 돼지를 잡아서 피를 뺄 것을 명령했다.




"그런 명령은 내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주님."




바실리쿠스가 침통하게 말했다.




"이 돼지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그러니 그런 명령은 내리지 않으셔도 되어요. 제가 가서 피를 빼고 오겠습니다."




영주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것도 그로가네가 대답했다.




"저희가 치고박고 싸우는 사이에 저 돼지는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희가 서로 부둥켜안고 땅바닥에 구르는 동안 저 돼지는 꿀꿀거리면서 저희를 말리기라도 하듯 냄새를 맡거나 옷을 물고 잡아당겼죠. 저희는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근처에 있는 바람에 바실리쿠스의 눈 먼 팔꿈치에 갈비뼈를 맞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꾸욱 눌려버렸습니다. 뼈가 약해질 정도로 늙은 돼지였습니다. 폐와 심장이 짓눌리고 입에서는 혀뿌리가 빠져나왔습니다. 절명한 거죠. 바실리쿠스가 싸움을 멈춘 건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영주님께서 보낸 사람들이 저희를 발견했죠."




영주는 그 말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 사람을 보내 바실리쿠스를 지켜보게 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돌아와서 말하길 바실리쿠스는 가레랑이 시킨 대로 돼지의 멱을 따서 개울물에 담근 다음 사타구니에 묻은 오물을 씻고 있었다고 했다. 가레랑은 알겠다고 하고 상황을 종결시켰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놀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같이 식전 기도를 한 뒤 깨끗하게 씻은 돼지를 삶아먹었다. 그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살코기를 바르고 남은 돼지는 깊은 숲속에 놓고 적당한 나무에 묶은 다음 사람들을 시켜 밤새 주변을 지키게 하였다. 멀리서 늑대들이 냄새를 맡고 오면 영주에게 달려가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중엔 바실리쿠스도 있었다. 그것이 영주가 그에게 내린 벌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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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반딧불이가 많은 숲 (2) 24.07.29 6 1 12쪽
15 반딧불이가 많은 숲 (1) 24.07.29 6 1 12쪽
14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3) 24.07.29 6 1 11쪽
13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2) 24.07.29 8 1 13쪽
» 영주가 바실리쿠스에게 내린 벌 (1) 24.07.28 7 1 11쪽
11 개와 사람을 반쯤 합쳐놓은 24.07.28 7 1 12쪽
10 산사과 같은 머리 24.07.27 9 1 12쪽
9 너도밤 나도밤 24.07.27 12 1 11쪽
8 너 제정신이냐? 24.07.27 9 1 13쪽
7 이기고 지는 게 무슨 소용인가? 24.07.26 8 1 11쪽
6 더 많이 다친 사람은 바실리쿠스였다 24.07.26 10 1 11쪽
5 안 돼요! 24.07.26 11 1 13쪽
4 닭대가리 게레할드 24.07.26 16 1 11쪽
3 늑대의 습격 24.07.26 12 1 12쪽
2 난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드는 걸 24.07.26 27 1 11쪽
1 쿠미누스 사제의 억지 24.07.26 90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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