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1일차, 외부활동
철물점 외에도, 이곳저곳을 돌았다. 현 상황에 대해 머릿속으로 설계한 것이 많다.
'당장 식량도 3개월, 길게 봐야 5개월치다.'
내 빌라가 그리 넓진 않거든. 생존 물품들과 식량을 사모았어도, 둘 공간이 적다. 그래서 비축해 둔 건 불과 저 정도.
철물점을 필두로 한 잡다한 물자도 필요하지만, 결국 식량도 필요했으니.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편의점과 마트 등지였다.
"크르륵-"
물론 그곳엔 좀비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내겐 원거리 무기가 있단 말이지.
'유효 사거리는 20~30m 이내로 생각하고...'
방해요소가 없고, 몸을 숨기기 적당한 위치에서 저격한다.
팡!
퍼억-
"명중."
"크라락-!"
근데 좀비는 죽지 않았다. 보아하니 쇠구슬이 머리에 박히긴 했는데, 뇌까지 데미지를 주기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
"쩝. 별수 없지."
이건 계산범위에 들어있다. 애초에 이 녀석은 무기의 실험 대상에 가까웠으니. 나는 곧장 다음 탄환을 꺼내 장전했다. 형태는 손가락보다 굵은 통짜 금속다트다.
탄환생성 스킬은 1레벨 시점에선 화약을 쓰는 탄두까진 무리지만, 쇠구슬이나 금속다트까진 가능했다.
타다닷!
화가 난 듯 달려오는 좀비의 머리를 겨누고, 다시 사격.
퍽-!
"크륵...!"
털썩.
잠시 비틀대다 쓰러지는 녀석.
[좀비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5코인을 획득합니다.]
아슬아슬하게 합격인 위력이었다.
'위력보정 덕이군. 이거면 여유롭겠어.'
이후로는 안전하게 하나씩 처리. 또 필요한 걸 털고 나오길 반복.
합쳐서 열 마리쯤 잡았을까?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어느덧 3레벨에 달했다.
"크게 변한 건 없군."
스탯이나 스킬레벨도 여전했다. 아무래도 큰 변화를 느끼려면 레벨을 더 높여야겠지.
"슬슬 가볼까."
마트와 편의점 등을 털고, 마지막으로 생활용품점 '다있어'까지. 가방을 꽉 채웠다.
"그어어어어으으으..."
저 멀리선, 몇 시간 전부터 이어진 참사로 생겨난 좀비들이 점점 온 동네로 흩어지는 중이었다.
더 이상 느긋하게 물자 조달을 할 순 없는 노릇.
욕심부리는 일 없이, 재빨리 집으로 돌아갔다.
터벅, 터벅.
빠른 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했을 때쯤.
"...음?"
뭔가 이상한 게 보였다.
"크러어억! 크륵!"
우선 뚱뚱한 체형과 문신. 아까 전 죽였던 3인방이 좀비로 변해있었고...
"크리란! 크라악!"
그중 한 녀석이, 눈에 띄게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뭐야.'
키가 족히 3m까지 자라났고, 뚱뚱하던 살집은 더 커졌다. 몸에 그려놓은 용이 웬 코모도 왕도마뱀이 될 정도.
이건 예상 밖이다.
하필 집 근처에서만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어서, 어찌 무시할 수도 없고.
---
[변이좀비-팻맨(LV.5)] [불사형]
[생전 각성자였던 자가 죽고, 좀비가 되며 변이를 일으켰다. 그로 인해 생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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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상태창을 각성한 이가 죽게되면, 더 강한 좀비로 살아나는 듯했다.
'거, 너무 빡세구만. 일반적인 좀비만 해도 모이면 성가신데...'
잠시 길을 돌아가 상황을 살폈다.
"그어억...그억..."
터벅. 터벅.
봉천역에서 생겨난 좀비웨이브는 사방팔방으로 퍼지고 있었고, 도보로 불과 20분거리인 내 거주지에도 점점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길어봤자 5분.'
그 이상 지체된다면, 온 동네로 퍼지고 있는 좀비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지익-
계산을 마치자마자 가방을 열었다.
음식점 근처에서 주운 공병을 꺼내, 조달해온 휘발유와 식용유, 비누를 으깨넣었다.
몸체엔 성냥을 테이프로 붙이고, 입구에 티슈를 꽂고 밀봉하며 마무리.
'2분쯤 걸렸군.'
재료를 꺼내는데 1분, 만드는데 1분이다.
[아이템 '화염병'을 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이템화되었고.
[화염병(F)]
[간단하지만 확실한 위력을 지닌 화염병.]
[범위+, 지속력+]
남은 건, 3분 안에 놈들을 처리하는 것.
화륵!
성냥에 불을 붙이고 모습을 드러낸다.
"크럭? 크러러럭!"
날 보자마자 흥분해 달려드는 3인방.
쨍그랑!-화르르륵-!
화염병은 곧장 가운데의 '팻맨'에게 투척한다.
"크러어어어어억!?"
"잘 타는군."
몸에 지방이 많아서 그런가? 화염병에서 터져나온 불은 3m에 가까운 놈의 거체를 점점 집어삼켰다.
화르륵-타닥. 탁.
살이 타는 냄새. 마치 전장에 돌아온 느낌이다.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을, 고개를 흔들어 떨쳐낸다.
"크라라락-!크락-!"
녀석은 화염에 의해 근육이 수축해, 땅을 뒹굴고 있었다.
'단순 공격용도 말고도, 움직임을 제한하는 데에도 좋겠어...'
앞으로도 이런 강력한 개체를 만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그롹! 그롹!"
"카아악!"
타다다다닥!
나머지 두 녀석도 내게 달려들지만...
푸슉-퍽!
[좀비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5코인을 획득합니다.]
한놈은 슬링샷 라이플로 처리.
'다 좋은데, 한 발 한 발 장전이 오래 걸리는 게 문제다.'
남은 한 놈은 직접 처리할 수밖에 없다.
"어려울 건 없지."
퍼억-!
"카악!?"
체중을 실은 밀어차기로 넘어트린다.
그리고...
푸각!
손도끼로 머리를 쪼갰다.
[좀비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5코인을 획득합니다.]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됐다.
"크럭-크러억!!"
뚱뚱한 녀석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인 채 땅에서 구르고 있었고, 놔두면 죽을 듯싶었으니 돌아갔다.
철컥.
현관문을 잠근 직후.
['팻맨'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50코인을 획득합니다.]
녀석을 처치했다는 메세지들이 표기됐다. 그게 끝이 아니다.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역시 보통 놈은 아니었는지, 단박에 레벨도 증가헀고.
[구역 내 최초로 변이좀비를 사냥했습니다.]
[업적 달성 보상으로 500코인을 획득합니다.]
이어서 업적 달성까지.
"후우..."
턱.
창 밖으로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의자에 앉았다.
"많이도 몰려왔군."
귀환 직후, 은천동에서도 구석에 속하는 내 거주지 근처엔 좀비떼가 몰려왔다.
'거진 신림에 붙어있으니, 봉천동에서도 끝자락인데...'
아마 다른 곳도 비슷한 상황일테지.
딱-
보드마카의 뚜껑을 따고, 거실의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지익- 지익-
오늘 하루 동안 알게 된 것을 메모한다.
[상태창의 존재, 비현실적인 상황.]
[통신이 끊겼다. 군경은 커녕, 국가기관의 통제 조차도 없다.]
[서울 21-A지역의 0차 침공자는 '리치-데스몬드'...?]
└[이 '리치'라는 존재에서 비롯된 것인지, 좀비들이 득시글 댄다.]
└[이들은 머리에 대한 공격에 약하고, 다른 부위에 외상엔 둔감하다. 또, 소리와 시각에도 반응함.]
[사람이 많이 죽었다.]
[옆집의 위험분자는 제거했지만, 앞으로 마주치게 될 미지의 위협을 더 조심해야겠지.]
탁-
그 외 다른 중요한 것들을 정리했을 때쯤, 보드마카를 내려놨다.
"...일단 이 정도로 해둘까."
창밖을 보니,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어느덧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Tip: 해가 지면, 흑마법의 영향이 강해집니다. 이에 따라 모든 언데드가 강화됩니다.]
[리치-데스몬드 휘하의 시체기사 9기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세상에 도래한 멸망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이게 다가 아니었나..."
시체기사라니, 좀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
[해가 진 시간에는 외출을 삼가하십시오. 시체기사는 산 자의 기척을 쫓습니다.]
그런가.
당장 시체기사에 대적할 확신이 없다면, 활동시간을 한정해야겠군.
그때 마침, 오토바이를 탄 무리들이 눈에 띄었다.
'젊어보이는군.'
끽해야 20초반일까. 같은 취미로 뭉친 또래들인 듯 했다.
라이더용 보호장비와 헬멧. 그리고 한손으로 운전하면서도 휘두를만한 작은 둔기까지.
저들의 가방은 각종 물자로 가득 차 있겠지.
좋은 구성이다.
부와아아아아앙-!
요란하게 튜닝한 엔진음이, 조용해진 도시에 울려퍼진다.
재빠른 속도와 능숙한 운전실력으로 좀비들을 따돌리는 그들.
허나, 그들의 목숨은 이미 경각에 달해있었다.
기사를 태운 유령마가 소리 없이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으니까.
척 보기에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지만, 그들의 속도는 오토바이보다 빨랐다.
"끝이군."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시체기사의 커다란 검에 참혹한 살육의 장이 펼쳐진다.
놈의 정보가 표기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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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기사] [LV.20][불사형]
[리치에 의해 되살아난 기사입니다. 흑마법에 의해 강화되어 생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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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상황을 눈에 담고, 다시 화이트보드로 향했다.
지익-지익-
[살아남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짐을 새겼다.
---
이후로는, 커튼 사이로 쌍안경을 내밀고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해가 진 시간에는 외출을 삼가하십시오. 시체기사들은 산 자의 기척을 쫓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혹여 집 안에 있어도 찾아올지 누가 아는가. 녀석들이 산 자의 기척을 어떻게 쫓는지 알 방법이 없으니.
[멸망에서 '1일'을 생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어느덧 시간은 열두 시.
[멸망 1일차 특별 랭킹 집계를 시작합니다.]
랭킹이라니?
[랭킹 측정 기준은 '기간내 코인 획득량' 입니다.]
그런가.
과연 내 랭킹은 몇 위일지. 일단 지역 내에서만 집계하는 것 같다.
내가 오늘 잡은 것만 치면 좀비가 8마리. 첫날에 이 정도면 과연 어느 정도일까?
대부분의 사람이야 패닉에 빠져 좀비를 죽일 생각은 못 했겠지만, 자동차로 들이받거나 다급해진 경찰 인력이 발포했을 수도 있는 법.
이런 변수들을 생각하자면 나보다 많은 좀비를 처리한 이가 있을 수도.
[서울 21-A 지역의 랭킹을 공개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1위-신중한]
[2위-박재홍]
[3위-이동영]
.
.
.
[축하합니다! 랭킹 1위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내가 1등이었거든.
'점수 공개는 없나...'
2,3등과 얼마나 격차가 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잡은 좀비의 숫자로 계산하면, 2등과 3등도 첫날부터 열 마리는 죽였다는 것.
좀비들은 바로 전까지만 해도 같은 동네에 살아가던 인간들인데, 그렇게 막 죽여댄다니?
'사람 머리라고, 좀비들하고 다르게 취급한단 보장도 없지.'
역시 조심해야한다.
[지급목록: 코인x1,000]
1등상은 코인인 모양.
[1일차 서울 21-A지역의 생존율은 42.5%입니다.]
...이 지역을 나누는 기준은 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속한 지역의 사람이 절반이 넘게 죽었다.
일단 큰 분류가 서울이니, 동 단위를 최소로 잡는다 해도...하루 만에 최소 10만명 이상 죽은 것이다.
'참혹하군.'
이건 전시상황보다 더한 사망률이다.
그저 숫자통계로 차갑게 알려줄 뿐이지만, 얼마나 참혹하고 무력하게 죽어 나갔을지. 전장에 있었던 나는 체감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래서 코인이란거, 어디에 쓰는 건데."
업적 보상에, 랭킹 보상까지 합치면 벌써 2,000개가 넘는다. 분명 사용처가 있을 텐데.
머리속이 복잡하게 빙빙 돌아가던 그때.
"영차...!영차...!"
난데없이 집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날카로워지는 감각.
'집안에 나 말고는 없는데, 침입자인가?'
손도끼는 이미 손에 들려있다. 실내에서도 대비를 풀지 않고 있으니까.
"으그긋!"
다시 한번 들려오는 목소리에 위치를 특정한다. 이건 거실의 벽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괴물 고양이인가?'
빛나는 구멍이 뚫린 벽에선 웬 뚱뚱한 체형의 고양이가 버둥대며 집안에 침입하고 있었다.
휘익!
곧장 달려들며 손도끼를 휘두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완전히 빠져나온 고양이.
"냐항!?"
녀석이 파닥거리며 아슬하게 회피한다. 기세를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내려치려는 찰나.
"오,오해입니다요!"
녀석의 입에서 인간의 언어가 나왔다.
이 녀석,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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