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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DUMMY

57. 겨울


튀르키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이후.

볼로냐로 돌아온 시현의 일상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이른 아침부터 체력 단련을 하고 검술과 창술을 수련하는 것은 여전했으나,

여러 학문을 공부해야 하는 시현에게 스승이 되어 주었던 필호의 부재로 인해 시현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현에게 있어서 필호와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었다.

갓 성인이 된 시현을 남겨두고 실종된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 시현을 보살펴 준 고마운 사람.

피붙이 하나 남지 않은 세상에 홀로 남은 시현에게 가족이 되어 준 사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을 잃어버린 이후, 시현은 그저 공부와 훈련에 매진했다.

마치 그것만이 삶의 이유라는 듯.


그런 시현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푸코 교수는 그런 시현을 위해 새로운 소식 하나를 들고 시현을 찾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

볼로냐 대학의 도서관은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방대한 양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볼로냐 대학의 교수직을 맡고 있는 푸코 교수를 향해 인사를 하는 도서관의 사서를 뒤로 하고,

은은한 종이 냄새가 풍겨오는 책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자 신화와 역사를 다룬 책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서가에 기대어 책장을 넘기고 있는 시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현 군, 공부를 하는 것은 좋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시간도 소중히 했으면 좋겠군.

베아트리체와 아일라 양이 종종 시현 군이 걱정된다면서 찾아오고는 한다네”

“예 교수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시현의 질문에 푸코 교수는 두툼한 종이 봉투 하나를 건네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시현은 교수에게서 넘겨받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살폈다.

그 봉투에 담긴 것은 500유로 지폐 한 묶음이었다.


“이 돈은 뭐죠?”

“지난 번 튀르키예 임무에 대한 보상이라네.

이번에는 현금으로 준비했지만 다음부터는 자네 계좌로 입금될 걸세”


500유로 지폐로 100장.

5만 유로.

한화로 7000만원에 해당하는 돈.

불과 몇 개월 전 까지만 해도 10평이 채 되지 않는 원룸에서 살며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하며 살던 가난한 휴학생이었던 시현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거금이었다.

물론 시현의 통장에 있는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을 포함한다면 이 것 보다 몇 배는 많은 돈이 있었지만 이러한 액수의 돈을 현금으로 받아 보는 것은 생각보다 파괴력이 있었다.


시현은 자신의 첫 임무로 받은 보상에 감탄하며 종이봉투에서 돈다발을 꺼내보는 순간,


-툭


그 안에서 딸려 나온 종이 한 장이 시현의 발 밑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종이를 집어서 펼쳐보자 지도 한 장이 나왔다.

지도에 표시된 땅은 역삼각형 모양의 섬이었는데,

그 중 동쪽에 있는 산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죠?”

“다음 임무라네. 그 지도가 가리키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겠나?”


시현은 잠시 지도를 바라보고는 금방 정답을 알아냈다.


“시칠리아 섬의 에트나 산이군요. 그렇다면 이번 임무는 불카누스와 관련이 있나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

그 곳에 있는 에트나 산은 유럽 최대의 화산이기도 하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대장장이의 신이자 불의 신이기도 한 불카누스는 시칠리아 섬의 에트나 화산 깊숙한 곳에 자신의 대장간을 만들어 신들의 무구를 만들고 있다.

불카누스의 불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주변에 그 불길을 뿜어내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 것이 바로 에트나 산의 화산 분출이라고 한다.


시현의 예측에 푸코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여러 가능성 중 하나지. 에트나 화산 밑에 봉인되어 불을 뿜는다는 티폰일 가능성도 있고 말일세”


티폰.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제우스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자 보낸 불사의 뱀 괴물.

마찬가지로 에트나 산에 관련된 신화가 있다.

힘겹게 티폰을 퇴치하는 데 성공한 제우스가 산 밑에 티폰을 봉인했고,

봉인된 티폰이 종종 불을 뿜으며 몸부림치는데 그 것이 바로 에트나 산의 화산 분출이라는 이야기이다.


푸코 교수는 임무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최근 에트나 산의 화산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관측 결과가 있었다네.

그리고 주변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도 목격되었다고 하더군.

격렬한 폭풍이 일어나 민가에 피해를 입히거나,

거대한 쇠기둥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기도 하고,

겨울잠을 자던 뱀들이 일제히 땅 밖으로 나와 얼어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네.

이번 임무는 마리오와 함께 시칠리아 섬으로 가서 이러한 괴소문들의 근원을 찾는 것일세.

잘 할 수 있겠나?”

“마리오 씨랑 저 둘이서요?”

“그래, 나는 다른 할 일이 있어서 직접 갈 수는 없네만, 마리오가 함께 있다면 무력이 필요한 일은 대부분 해결할 수 있을걸세.

혹시나 베아트리체나 아일라 양이 함께 가고 싶다고 한다면 데려가도 되겠지.

그리고 아테나 님도 있지 않는가?

그럼 무운을 빌겠네”


그렇게 말한 후 푸코 교수는 몸을 돌려 도서관 밖으로 사라졌다.


시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나 티폰과 관련된 서적을 두어 권 대출해 밖으로 나섰다.

따뜻했던 도서관 밖으로 나서자 코끝을 시리게 하는 찬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몄다.

휴대전화를 꺼내 누구에게 먼저 전화를 할까 고민하다 베아트리체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여보세요? 시현아 왠일이야?]

“어, 방금 푸코 교수님이 새로운 임무를 주고 가셨는데, 너도 같이 갈래?”

[당연하지, ···근데 혹시 아일라한테도 물어봤어?]

“아니, 지금 너한테 가장 먼저 물어본거야”

[으흠? 좋아! 그럼 아일라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셋이서 밥이나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자]

“그래, 그럼 한 시간 있다가 숙소 앞에서 모이자”


오랜만에 듣는 베아트리체의 목소리에 왠지 기분이 좋아진 시현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때마침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처음으로 맞는 눈이었다.


58. 시칠리아


비행기를 타고 시칠리아로 날아가는 동안,

펑펑 내리던 눈은 어느새 비로 바뀌었다.


“시칠리아는 일년 내내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따뜻한 지방이거든

그래서 어릴 때에는 매년 시칠리아 섬에서 겨울을 보내곤 했어”


베아트리체의 설명을 곁들인 비행은 길지 않았다.


시현, 마리오, 베아트리체, 아일라, 아테나, 이상 네 사람과 한 여신의 장미십자회 일행은 얼마 안 가 비가 내리는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 공항에 도착했다.


“베아트리체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오늘 안에 도착하지 못할 뻔했군”


공항 문을 나오자마자 투덜거리는 마리오의 등을 찰싹 때리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에 시현과 아일라, 그리고 아테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은 시간이 늦었으니 숙소로 바로 가자고”


마리오가 딸의 매서운 손길이 닿은 자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시현과 아일라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출발하기 전, 숙소를 예약하려는 시현을 막았던 것이 바로 마리오이기 때문.

이번 파견 임무에서 리더 역할을 맡게 된 마리오는 말했다.


“시칠리아 섬 파견 임무라는 말을 듣고 바로 준비했지”


베아트리체 또한 으스대며 말했다.


“시칠리아 섬에는 우리 가족이 쓰는 별장이 있거든”


이윽고 일행은 루소 가문의 별장에 도착했다.

시칠리아의 주도(主都) 팔레르모.

그 도시에서 수 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해 있는 고즈넉한 집.

겉으로 보기엔 나무 지붕을 올린 돌집처럼 생겼지만,

내부는 꽤나 넓은 공간을 현대적 시설과 전통적인 인테리어로 꾸몄다.


아름답고 정취가 있으면서도 편의성을 놓치지 않은 별장의 모습에

시현과 아일라가 감탄했다.

마리오는 콧대가 한껏 높아진 모습으로

자신의 별장에 찾아온 손님들을 환영했다.


“방은 많으니 각자 알아서 선택하도록 하고,

내일 본격적으로 임무를 시작하기 전에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술도 한잔 곁들이면서 놀자꾸나”


“요리는 누가 하나요?”


베아트리체의 질문에 아테나가 의견을 냈다.


“각자 요리를 해서 맛을 비교해봐도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본인이 정한 요리에 맞춰서 각자 장도 봐 오고 말일세”


아테나가 던진 말에 베아트리체와 아일라가 서로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웠다.


“나의 요리 실력으로 시현이의 마음을 사로잡겠어!”

“저도 요리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시현은 아테나의 발언이 불러온 나비효과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반면 마리오는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러면 나와 여신님은 심사위원을 맡으면 되겠군. 이거 기대가 되는걸”


소박한 이벤트 매치에 들뜬 마리오가 차고에 주차된 자동차를 꺼내러 가자,

시현은 뒤늦게 주섬주섬 장바구니와 지갑을 챙겼다.


.

.

.


마리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도착한 팔레르모 시내의 한 마트.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식자재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나는 신선한 채소와 육류, 생선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한 재료들이 넘치는 이 곳에서,

경쟁적으로 장을 보는 베아트리체와 아일라를 뒤로 하고

시현은 아테나와 함께 식재료를 고르고 있었다.


시칠리아 섬은 예로부터 화산재로 인해 비옥한 토양을 갖고 있어 농업이 발전했다.

특히 오렌지, 올리브, 토마토, 피스타치오 등이 유명하며,

이탈리아에서 세번째로 많은 와인을 생산하는 생산지로,

마르살라 와인이 특산품이기도 하다.

또한, 참치, 정어리, 황새치, 앤초비 등의 생선도 유명하며,

특히 이 지역의 앤초비는 여러 요리에 조미료처럼 사용된다.


시현을 졸졸 따라다니던 아테나가 질문했다.


“시현, 자네는 어떤 요리를 만들 생각인가?”

“글쎄요, 아마 베아트리체와 아일라 씨는 식사 종류를 할 텐데,

저는 돌체(Dolcè, 디저트)라도 만들어 볼까요?”

“오오, 자네가 만드는 디저트라니, 기대가 되는걸”


시현은 피스타치오를 살펴보다가 어떤 요리를 만들지 결정했다.

필요한 재료들을 모두 골라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일행들에게 다가가 어떤 요리를 할지 물어보아도

베아트리체와 아일라는 비밀이라며 고개를 저을 뿐,

시현에게는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반면, 마리오는 와인 코너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 마리오에게 물어보았다.


“마리오 씨가 보기에는 누가 이길 거 같나요?”

“음? 당연히 아일라가 이기지 않을까?”

“베아트리체는요?”

“베아트리체는··· 내 딸이지만 요리에 대한 재능은...”


마리오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현은 불길함을 느꼈다.


짧은 쇼핑이 끝난 후.

다시 별장으로 돌아온 일행은 요리를 시작했다.


시현은 밀가루, 계란 흰자, 설탕, 마르살라 와인, 커피가루를 섞어 반죽을 한 후, 원통형 틀에 감싸 기름에 튀겨냈다.

그리고 리코타 치즈를 고운 체에 걸러 튀겨 낸 과자의 속을 가득 채우고,

피스타치오 가루를 양 끝에 뭍혀,

접시에 가지런하게 올려 낸 후,

슈가파우더를 골고루 뿌려 장식을 했다.


지금 일행이 있는 장소,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에서 유래된 디저트.

카놀리(cannoli).


시현은 자신이 만든 카놀리에 스스로 감탄하며 만족스러워했다.


이탈리아에 오기 전,

필호의 가게, 바 액서스에서 일하던 시절에

필호에게 여러 요리를 배우곤 했다.

이 카놀리 역시 필호에게 배운 디저트인데,

베아트리체와 아일라가 메인 요리를 만들 것을 예상했기에,

디저트로 괜찮은 메뉴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시칠리아 섬과 어울리는 카놀리가 떠오른 것이다.


시현은 완성된 카놀리 사이에서

유독 못생긴 것을 하나 골라서 맛을 보았다.


바삭한 과자에 촉촉한 리코타 치즈,

독특한 피스타치오의 맛이 잘 어우러졌다.


달콤한 맛에 살며시 미소짓던 시현의 올라간 입꼬리는

이내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내려왔다.


달콤한 카놀리는

쌉쌀한 커피 맛과 함께

필호에 대한 그리움만을 남기고

입 속에서 녹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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