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의 남부 경비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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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탈
작품등록일 :
2024.08.06 15:26
최근연재일 :
2024.09.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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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5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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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이, 소년, 어른(1)

DUMMY

- 왜 제국의 군인이 되었나?

- 밥을 주니까요. 밥 굶는 지옥보단 밥 주는 지옥이 낫죠.

- 그것참 명쾌한 답변이군. 하지만 은휼, 내 말 잘 들어두는 게 좋을 거다. 군인이 된 이상 맘을 단단히 먹어야 하니까.

- ······?

- 가장 끔찍한 지옥은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이다. 전쟁터란 그런 곳이야.


“하······”


밖은 아직 밝았다. 괴물이 밤에 출현하는 이상, 경비대원 중 최소한 절반은 밤낮을 바꿔야 했다.

따라서 아직 취침 시간이라는 이야기였다. 지금 저 밖에서 대낮의 불침번을 서고 있을 사람들을 제외하면.

하지만 은휼은 잠들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깨어나 버리고 말았다. 


한 시간도 못 잔 것 같군. 중얼거리던 은휼은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땐 억지로 움직이는 편이 낫다.


은휼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서랍을 바라봤다.


그곳을 열어보니 편지가 하나 있었다. 삼주 전에 영지에 내려온 황제의 서신보다도 빠르게 전해져왔던 편지였다.


“······”


한참이나 편지를 바라보던 은휼은 그것을 다시 서랍에 넣어버렸다. 그리고는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토록 전쟁터에서 도망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젠 전쟁터가 찾아오고 있었다.


미친 괴물 놈들. 은휼은 작게 중얼거렸다.


영주는 인류의 존속이니 뭐니 떠들어댔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지금이 전쟁터로 돌아갈 때라는 사실이었다.




***




잭은 성벽 위에 걸터앉은 채로 머리카락 하나 없는 머리를 연신 쓸어내렸다.


“날씨 한번 참 개같군.”


하늘은 어두웠다. 먹구름이 하늘을 완전히 먹어 치워버린 것이다. 습기는 이곳저곳에 내려앉으며 뜬금없는 물방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물방울이 만들어지는 곳 중 하나는 잭의 대머리였다.

잭의 옆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호크가 말했다.


“덕분에 네 턱수염 냄새도 심해지는군.”

“턱수염 냄새?”

“넌 모르나? 네 턱수염에선 썩은 브로콜리 냄새가 난다. 네 코는 진작에 그 냄새와 함께 썩어버린 모양이군.”


퉤, 잭이 성벽 밖으로 침을 뱉었다. 핏빛 웅덩이에 침이 통 소리를 내며 착지해 가라앉았다.


“언제 한번 널 줘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인 것 같군.”

“네 검이 화살보다 빠르다고 자신하나?”


호크는 활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반문했다. 


“내 검에 코가 꿰뚫린 활쟁이가 수십이다, 개자식아.”


잭은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쏘아봤다.

물론, 싸우진 않는다. 싸우면 대장이 나타나서 둘 다 박살내버리니까.

그것이 은휼이 대장인 이유기도 했다.

막나가는 조장들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으니까.

잭은 검자루에서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귀머거리 새끼.”

“귀가 없어도 청력은 너와 비슷하다.”

“지랄은.”


호크는 귀가 없다. 정확힌 귓바퀴가 없다. 오랜 용병 생활 중에 두 귓바퀴를 날려 먹은 탓이다.

물론, 호크는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는다. 오히려 머리가 날아가지 않고 귀만 날아갔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는 성격이다.


“젠장, 조장씩이나 돼서 보초를 서야 한다니. 그것도 이깟 놈이랑.”

“누군 좋을 것 같나. 말동무가 턱에 드워프 겨드랑이털 달고 다니는 자식 밖에 없다는 게.”

“니미, 내 턱수염은 엘프의 머릿결 수준이라니까.”


잭은 자랑스럽게 새빨간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호크는 표정을 잔뜩 찌푸리며 냉소했다.


“엘프가 보면 콧방귀를 뀌겠군.”


잭은 잠시 호크를 쏘아봤다가 투덜거렸다.


“난 왜 쉬지도 못하고 보초를 서야 하는 거지? 당장 두 시간 전에 순찰을 돌고 왔는데.”

“비상사태를 대비해 언제나 최소 조장급의 대원이 보초를 선다는 걸 잊었나? 대장도 손수 나서서 보초를 서는데.”


잭은 습관적으로 호크의 말꼬리를 잡기 위해 생각하다가, 딱히 틀린 말이 없음을 속으로 인정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런 놈을 보초 세울 순 없겠지.”


잭이 고개 돌려 쳐다본 곳엔 바렌이 걸어오고 있었다. 잭의 조에 속하는 바렌은 성벽 앞에 쌓이는 시체, 혹은 괴물의 흔적 따위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괴물들이 먹다 남긴 시체가 있을 경우, 그들은 그것을 마저 먹기 위해 돌아오기 때문에 시체를 성벽에서 멀리 치워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은휼이 생각하기에 바렌의 빈약한 담력을 기르기엔 그것만큼 초보적인 임무도 없었다.

그리고, 잭은 그런 임무를 준비해온 바렌의 모습을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씹새끼는 갑옷을 도대체 어떻게 쳐입은 거야!”


성벽 아래로 걸어오던 바렌은 잭의 우렁찬 고함을 듣고서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예, 예?”


성벽 위의 잭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는 바렌의 동작은 심각하게 굼떴다.

그 이유는 바렌의 옷이 터지기 직전이기 때문이었다.

빵빵한 천 갑옷 위에 하드 레더를 억지로 뒤집어썼고, 그의 팔다리엔 사이즈가 맞지도 않는 보호대가 착용되어있었다.

게다가 손엔 가죽장갑을 쓰고 있었고 목에는 아주 두꺼운 목도리가 둘려있었다.

호크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잭은 제 머리를 때리며 소리쳤다.


“여기 남부다, 이 등신아! 괴물이 무서워서 더위 먹고 죽으려는 거냐? 그 하드 레더는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차라리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지 그랬냐!”


바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항변했다.


“물리면 똑같이 변하잖습니까! 물리면 안된다구요!”

“저 놈들 생긴 게 사람이랑 똑같은데 그런 놈들 이빨이 천갑옷이라도 뚫겠어?!”

“숫자가 말이 안되잖아요! 여기저기 붙잡힌 채로 뜯어먹히면 어떡하냐구요!”


말이 안 되긴 하지. 저토록 많은 걸 보면 괴물들이 제국 전체 인구수보다 많을 거다. 게다가 물리면 똑같이 몬스터화 되어버리니······

그래도 저건 좀 과했다. 애초에 지금은 낮이었다. 잭은 더욱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애초에 네가 밖에 핏자국 치우는 동안 괴물을 마주칠 일은 없어! 그놈들은 어차피 햇빛 아래에선 못 움직인다고. 안 그래, 호크?


잭은 호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호크는 잭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호크는 저 먼 곳을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호크?”

“······오늘 날씨 때문인가. 큰일 났는데.”


호크가 앞을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잭, 봐라.”


잭은 순식간에 굳어버린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성벽 너머 저 멀리.

호크만큼 눈이 좋지 않은 잭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마침내 잭이 읽어낸 정보는 간단했다.

도망치는 사람들, 흐린 하늘, 먹구름에 완전히 차단된 햇빛, 어두운 낮, 그리고 괴물들.

등줄기에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잭은 소리쳤다.


“대장님 불러와!”

“이미 왔다.”


은휼은 어느새 성벽에 가까이 와있었다. 잭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가 부르러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왔습니까?”

“마침 잠에서 깨서 그냥 와봤다.”

“대장님 한 시간 전에 자러 가지 않았습니까?”

“한시간 정도 잤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성벽 위로 올라온 은휼은 잭과 호크가 발견한 무리를 확인했다.

은휼은 여전히 그 무리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는 호크에게 물었다.


“호크.”

“피난민 열둘에 괴물은 스물이 조금 넘습니다.”

“낮인데도 하늘이 어두워서인가. 멀쩡히 움직이는군.”


그래도 스물 언저리. 해볼 만한데.

옆에서 잭이 중얼거렸다.


“저 양심도 없고 지능도 없는 것들이 이젠 낮에도 움직이는군.”

“그래도 소규모다.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은휼은 판단을 마치고 말했다.


“좋아, 연다.”


잭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열어라!”


성벽 아래에 있던 3조 대원, 바렌은 즉시 달려온 3조의 다른 대원들과 함께 성문을 열기 시작했다.

모두 잘 단련된 몸인데 반해 바렌만 갑옷 때문에 뚱뚱해 보여 눈에 띄었다.

한편 피난민 무리는 어느새 성벽에 퍽 가까이 와있었다.

은휼은 나직이 말했다.


“호크.”

“네, 대장님.”

“스물까지 줄여.”

“알겠습니다.”


호크는 즉시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당장이라도 쏠 듯이 활시위를 팽팽히 잡아당긴 호크는 달려오는 무리를 노려볼 뿐 활시위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다. 잭은 답답해서 외쳤다.


“호크, 이 빌어 처먹을 놈아! 언제 쏘냐!”

“귀 아프군.”

“아플 귀가 있냐?”


호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멍청이가, 검만 잡아본 무식한 놈이라 그런지 활쏘기가 쉬운 줄 아나 보군?”

“뭐가 어렵다고. 검술이 더 어렵지.”


호크의 활은 아주 미묘하게 목표를 향해 조준점을 바꾸고 있었다.


“활을 든 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바람을 읽어야 하지. 그리고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내 거리는 정해져 있고, 초시(初矢)가 이후의 것을 결정하는 법이니까.”

“저것들 지금 코앞까지 왔다! 대체 언제 쏘는데!”


한쪽 눈을 감고 표적을 노려보던 호크가 입을 떼었다.


“지금.”


핑! 활시위를 떠난 첫 번째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다.

호크는 그것의 적중 여부는 이미 결정되었다는 듯 다음 화살을 걸고 있었다.

그의 태도가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듯 화살은 달려오는 피난민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바로 뒤편의 괴물의 눈에 적중했다.

초시(初矢)는 적중했다. 영점을 잡은 활잡이에게 거리만 주어진다면, 그는 무적인 법이다.


“전멸은 못 시킵니다. 화살로 눈을 관통해 뇌를 완전히 부수기엔 어려우니까 말입니다.”


여전히 한쪽 눈을 감은 채로 화살을 쏘아대는 호크가 말했다.


“그러나 스물까진 줄이겠습니다.”


은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다른 조도 왔겠지. 이젠 호크의 2조도 도착해있었다.

은휼은 나직이 말했다.


“잭, 어제랑 똑같은 진형으로.”


잭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성벽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내려가서 소리쳤다.


“참 빨리도 오는구나 2조! 당장 창 들고 앞에 서라! 설명 짧게 할 테니 귓구멍 열고 똑똑히 들어라. 피난민이 무사히 우리를 지나가고 나면 그대로 창을 찌르는 거다! 찌를 땐 무조건 눈깔을 찔러서 뇌를 박살 내라! 


2조와 3조는 대열을 맞춰 선 채로 잭의 말을 진중히 듣고 있었다. 가장 어린 바렌은 벌벌 떨고 있었지만.


“적중하든 빗나갔든 그 후엔 그냥 창 버리고 물러서라! 3조는 뒤에서 칼 들고 대기하다가 2조가 창 찌르고 물러나면 즉시 교대한다!”

“““옙!”””

“두 당 한 마리만 죽이면 된다, 존나 쉽지 안 그러냐!”


잭은 특유의 고막에게 미안한 우렁찬 목소리로 사기를 끌어 올린 후, 바렌의 어깨를 턱 짚으며 말했다.


“특히 바렌, 제발 잘하자, 응?”

“무, 물리면 어떡하죠?”

“야 이 개새끼야. 그 상태로 물리면 그것도 기적이다. 그리고 물리면 뒈지는 거지 뭘 물어!”


잭이 바렌의 목도리를 빼앗고 머리를 후려칠 때, 은휼이 내려와서 말했다.


“잭이 말한 대로 진행한다. 3조는 나와 함께한다. 2조가 찌르면 나와 함께 즉시 교대하는 거다.”


경비대원들과 은휼은 곧장 성문 밖으로 나갔다. 과연 피난민 무리는 어느새 지척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특히 한 남성은 따라잡히기 직전이었다.


“으아악!”


피난민들은 각종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말조차 하나 없는 그들은 두 다리만이 그들의 구원자였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는 힘을 다 써버리기 직전이었다.

맹목적으로 달려오는 괴물들은 거의 다 따라잡은 피난민을 잡아서 먹어 치우기 위해 손을 뻗고 있었다.


잭이 진열을 갖춰 달려가는 대열 속에서 소리쳤다.


“여기로 오슈! 더 빨리!”


그 후부턴 찰나였다.

생존을 갈망하는 이들의 비명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어지럽게 일어난 흙먼지가 시야의 한구석을 차지함과 동시에 피비린내와 썩은내가 후각을 유린한다.

배부른 포식을 원하는 괴물들의 괴성은 코앞에서 들려와 귀를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지금!”


뾰족한 창이 번뜩인다.

잭의 2조, 이름난 용병이었던 잭에게 훈련받아 찌르기만큼은 전문인 2조의 대원들이 각자 눈앞의 새빨간 안광을 향해 창을 찌른다.


괴물들의 새빨간 안광에 대원들이 비친다. 

생물에게 본능적으로 공포를 가져다주는 그 맹렬한 붉은색 앞의 인간은 그저 날붙이 하나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라티온의 베테랑 경비대원은 고작 그딴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푸욱, 마치 하나의 화음처럼 거의 동시에 눈이 관통당해 뇌를 파괴당한 괴물들이 쓰러진다.


열 개의 창 앞에서 아홉의 괴물이 쓰러졌다.


구 할이라. 적중률 괜찮군. 2조의 뒤에서 대기하던 은휼과 3조에게 남은 것은 열 한 마리였다.


“아오, 저 폐급 새끼!”


그 와중에 잭이 소리쳤다.

이곳의 경비대원 중 베테랑이 아닌 신입, 바렌은 그런 안광에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한 괴물이 목젖쯤에 창이 대롱대롱 꽂힌 채로 살아있었고 바렌은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으아악!”


또한 가장 뒤처졌던 피난민은 그 괴물에게 덮쳐져 겨우 저항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 상황은 은휼의 계산 범위 안이었다. 은휼이 즉각 소리쳤다.


“3조!”


교대할 때였다.

창을 찌름과 동시에 손을 놓아버린 2조가 물러섰다.

3조는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고, 아직 살아있는 괴물들은 맥없이 넘어져 버렸다.

괴물들의 시체와 그것에 꽂힌 창이 어지럽게 얽혀 아직 살아있던 괴물들의 발을 걸어버린 탓이다.


“다 죽여라!”


잭이 고함으로 사기를 끌어 올리며 소리쳤다.


3조는 경비조장 호크의 조다.

호크는 타인을 가르치는 것에 재능이 없다.

그러나 그의 조원들은 자연스레 호크의 최대 장점을 배운다.


침착함.


호크가 이끄는 조는 몬스터가 판치던 라티온에서 언제나 극한의 위기 상황 속 임무를 수행했다.

그것은 호크의 흔들림 없는 침착함 때문이었고, 조원은 자연스레 그를 닮는다.

따라서 3조 대원들의 검은 차갑고 날카롭다.

또한 유기적으로 서로를 돕는다. 마치 호크의 화살처럼.


호크의 초시(初矢)가 적중한다면 다음 화살은 무조건 적의 숨통을 꿰뚫는다.

그처럼 3조의 전투는 한 명이 괴물의 몸통을 꿰뚫어 움직임을 저지하면 다른 대원이 목을 쳐버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목이 잘리고도 살아남아 꺽꺽대는 괴물들의 대가리는 3조의 신발에 밟혀 처참히 부서진다.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이어지는 전투의 한복판.


그곳에 홀로 교대하지 못하고 고립되어있던 바렌이 소리쳤다.


“대, 대장님!”


바렌은 다른 2조와는 달리 물러나지 못한 채로 한 괴물과 대치 중이었다.

그의 앞엔 다른 괴물에게 덮쳐져 물어뜯기기 직전인 피난민이 맹렬히 저항 중이었다.


“물러나.”


은휼은 검을 치켜들고 돌진했다.


2조는 일격이 강하고, 3조는 연격이 강하다.


은휼은 그냥 은휼이다.


전직 기사였고 지금은 경비대장인 그의 무력은,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저 상황에 맞는 움직임을 가질 뿐.

지금 은휼이 선택한 움직임은, 그저 돌진이었다.


콰직! 은휼의 거대한 몸집과 함께 돌진해온 검끝에 괴물의 머리가 무력하게 부서졌다.

그 괴물과 대치 중이던 바렌의 안면에 괴물의 피가 튀었다.

참 대견스럽게도 바렌은 그 핏물에 비명 지르지 않고, 그의 경비대장을 위해 소리쳐줬다.


“대, 대장님, 뒤에!”

“알아.”


은휼의 옆에서 다른 괴물이 날아들고 있었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기에 검을 휘두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은휼은 팔을 들이밀었다.


까드득! 은휼은 괴물의 이빨이 팔을 파고드는 느낌을 느꼈다.

그러나 몬스터라고 해봐야 인간의 신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괴물들.

인간과 엇비슷한 치악력으론 두꺼운 천 갑옷조차 뚫지 못한다.


애꿎은 곳을 물어뜯은 잘못을 저지른 괴물은, 그 대가로 목 밑에 들어오는 서늘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은휼의 검신이 괴물의 목을 관통했다. 식도와 기도, 척추, 그리고 뇌가 잘리고 부서지는 감각이 검신을 따라 전해져왔다.


은휼이 검을 뽑자 괴물은 힘없이 늘어졌다.


곧장 신경을 끈 그는 뒤돌았다.


그곳엔 바닥에 쓰러진 채로, 자신을 물어뜯으려고 드는 괴물의 안면을 붙잡고 버티는 피난민이 있었다.


당장 달려간 은휼은 그 괴물의 옆구리를 걷어차 버렸다.

괴물의 갈비뼈가 부서지는 오묘한 감각이 발끝으로 전해져왔다.

저 멀리 날아가 몇바퀴 구른 괴물은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 곧장 은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멈칫, 괴물은 멈춰버렸다.


구름 사이로 한줄기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망설이면 안되지.”


은휼과 괴물 사이에 구름을 꿰뚫고 도달한 햇빛.

그 앞에서 괴물은 멈칫하고 말았다.


그 망설임의 결과는 뻔했다.

괴물의 머리는 날아갔고, 맥없이 땅을 나뒹굴었다.


“자, 네놈이 그토록 싫어하는 햇빛이다.”


목이 잘렸는데도 여전히 살아 이빨을 딱딱거리는 그 괴물의 머리를 은휼이 공을 차듯이 햇빛 속으로 넣어버렸다.


키에에엑! 괴물은 지금까지 들은 그 어떠한 괴성보다도 끔찍한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결국 괴물은 햇빛 속에서 고립된 흡혈귀처럼, 잿가루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음, 역시 타 죽는군. 은휼의 소소한 실험을 끝으로, 상황은 종료됐다.


“다 끝났나?”

“2조, 부상자 없습니다.”

“3조, 마찬가지입니다.”


은휼은 각자의 몫을 해낸 대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털었다.

투두둑, 핏물과 뇌조각, 무엇인지 모를 살점들이 검신으로부터 땅으로 떨어졌다.

바렌은 그 피와 살점들을 보며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방금의 전투에서 실수뿐이었다.

창은 빗나갔고, 그 덕에 제일 뒤처졌던 피난민은 따라잡혀 죽을뻔했고, 홀로 너무 앞으로 나가서 교대에도 실패했고, 겨우 검을 꺼내 들고 대치했으나 결국 은휼이 도와주었다.

바렌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 대장님.”

“······바렌.”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해서—”

“창을 찌를 때 시기가 너무 늦었다.”

“······예?”


은휼은 그가 뒤집어쓴 피만 아니면 방금 전투에 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했다.


“왜 망설였지? 괴물이 두려웠나? 아니면 네 창이 빗나갔을 때 초래될 결과가 두려웠나?”

“······둘 다입니다.”


은휼이 바렌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손은 따뜻함 따위가 아닌 차가운 충고를 담고 있었다.


“바렌, 죽음은 망설이는 자를 좋아한다.”


생사가 오가는 전투에 처음으로 참여한, 신입 경비대원에게 할만한 충고였다.


“죽기 싫으면 망설이지 마라. 동료를 죽이기 싫다면 역시 망설이지 마라.”


전장에선 망설이면 죽는다. 은휼이 뼈저리게 실감했던 사실이었다.


바렌은 눈물 얼룩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린 소년이지만, 안타깝게도 생사가 오가는 순간에 죽음은 나이를 묻지 않는다.


은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잭에게 고개를 돌렸다.


“잭, 피난민 성벽 안에 들여서 검사해봐.”

“예, 알겠습—”

“대장님!”


그때 갑자기 성벽 위에서 호크가 소리쳤다. 그의 손가락은 저 멀리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저거 뭡니까?”


잭이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잭의 손가락 역시 저 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휼은 그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파도가 있었다.

은휼이 잘 알고 있는 파도였다.


무수히 많은 적군이 맹렬히 진군해올 때 만들어지는 거대한 육신의 파도.

괴물들이 그러한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흙먼지는 마치 안개처럼 자욱했고, 그 속에서 일렁이는 붉은 안광과 검은 그림자는 모든 경비대원에게 사형선고처럼 다가왔다.


기사조차 죽여버린 그 괴물 무리가 온다. 은휼조차 순간 표정이 흔들릴 정도였다.


바렌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얼이 빠져있었다. 은휼이 바렌에게 외쳤다.


“말했지, 망설이면 죽는다고. 빨리 일어나!”


가끔 전쟁터에서 현실감각을 잊어버리는 놈들이 있다.

대개는 신병들이다.

옆에서 들려오는 전우의 포효, 애국심을 끌어올리는 지휘관의 연설 따위가 신병을 용기가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크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렌 역시 그러한 경우였다.


“마,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바렌은 검을 치켜들고는 달려오는 괴물 수백의 무리 앞에 섰다.

잭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뭐해, 등신아!”

“예, 예?”

“망설이지 말고 도망치라고!”


잭은 이미 성문을 향해 도망치고 있었다.


“뭘 싸워, 씨발 도망쳐!”


백병전도 정도가 있지! 잭은 소리치며 달아났다. 은휼 역시 잭을 따라가고 있었다.


“대, 대장님!”


바렌은 비명 지르며 뒤따라오기 시작했고, 잭은 곧장 성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외쳤다.


“빨리 닫아!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닫아!”


으아악! 비명 지르는 갑옷 뚱뚱이 바렌이 성문을 통과함과 동시에 쿵, 성문은 완전히 닫혔고 잠금장치마저 완벽히 채워졌다.


잭은 성벽 위의 호크에게로 뛰어가서 물었다.


“호, 호크, 저거 몇 마리지?”

“······못 세겠군. 너무 많아. 최소 수백이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용병인 잭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래도 그는 베테랑이었고,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 알았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 불러와! 1조부터 9조까지 다 불러오라고! 영주님도 당장 모셔와!”


경비대원 한둘이 순식간에 다른 이들의 호출을 위해 달려가고, 그들을 제외한 현재 이곳의 경비대원은 성벽 위에 서서 하나같이 침을 꿀꺽 삼켰다.


“대, 대장. 이거 말이 되는 거요?”


잭이 물었다. 잭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저렇게 많은 수가 성벽을 향해 달려온다.

당장 공성전을 위해 기름이라도 끓여야 하나? 기름은 어디서 구해오고? 그럼 돌덩이라도 위에서 던질까? 아니, 지금 돌멩이라도 던질 사람조차 부족한데?


은휼 역시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괴물들은 서로를 밟고 넘으며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결국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은휼은 나직이 말했다.


“······전투 준비.”

“예, 예?”

“전투 준비!”


성벽 위에 도열한 자들은 은휼의 고함에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검끝은 대부분 떨리고 있었다.


다가온다. 그들이 다가온다.

수백의 말이 달리는듯한 굉음을 내면서.

수백의 오크조차 겁을 집어먹을 괴성을 내지르면서.


황야의 회오리처럼 흙먼지를 하늘 높이 일으키며 다가오는 포식자들 앞에서 경비대원들은 한없이 낮아 보이는 성벽 위에 서있었다.


이곳엔 끓는 기름도 없었고, 집어던질 돌도 없었다. 오로지 검뿐이었다.


“온다!”


은휼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할 일이 정해져 있으면 수행할 뿐이다.


“버텨!”


순식간에 달려온 다른 경비대원 몇몇은 성문에 달라붙었다. 성문이 뚫리면 끝이다.


캬아악! 선두의 괴물이 끔찍한 소리를 내지르며 성문에 몸을 부딪쳤다. 쿠웅! 충돌은 계속된다. 하나, 둘, 끊기지 않고.


성문은 무너질 듯이 떨렸고 나뭇조각이 떨어지기도 했다. 밑의 경비대원들은 성문에 몸을 붙인 채로 필사적으로 밀고 있었다.


하지만, 괴물들은 더욱 괴이한 방식의 공성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돼.”


성벽 위에 검을 들고 있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야 그들의 적은 성벽을 넘기 위해 사다리를 끌고 오는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은휼이 성벽 위에서 전투 준비를 말한 것은, 은휼이 예상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 대장님. 지금 저것들 성벽을 타고 오르는 겁니까?”


한 경비대원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은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밟으면서까지 먹잇감을 쫓는다. 그러한 행동은 그들의 맹목적인 포식 욕구에서 기인했다.


그리고, 그들의 거대한 포식 욕구들이 뭉치고 뭉쳐져 괴이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서로를 밟는다. 한 괴물이 쓰러지고, 그 위에 다른 괴물이 올라선다. 그 괴물 역시 걸리고 밟혀 넘어진다. 그 위에 다른 괴물이 올라선다.


성벽 앞에서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말도 안 돼, 탑을 쌓는군.”


공성전에 간혹 사용되곤 하는 공성탑이, 나무나 돌 따위의 재료가 아닌 고깃덩이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성벽을 넘기 위해서 그들은 서로를 밟고 밟으며 성벽을 타고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 차리고 검을 들어라!”


은휼이 소리쳤다. 그 고함은 정신이 나가버리기 직전이던 경비대원들의 정신을 붙들어주었다.


“그래봐야 넘어오는 것은 소수다! 성문이 뚫리지 않게 막고—”


캬아악!

결국엔 성벽만큼이나 높이를 갖춘 그들의 끔찍한 탑의 최상단에서, 한 괴물이 뛰어들었다.

은휼의 눈앞에 날아오는 이빨이 보였다. 그것의 피 섞인 침이 입 안에 가득한 것 역시 눈에 보였다.


촤아악! 은휼은 그 목을 썰어버렸다. 몸은 날아오던 관성 그대로 성벽 안으로 떨어졌고, 은휼이 잘라버린 목은 다시 성벽 밖으로 떨어졌다.


핏물이 흩뿌려지며 성벽에 무늬를 그렸다. 최초로 성벽을 돌파한 괴물을 베어버린 은휼은 말을 이었다.


“······성문이 뚫리지 않게 막고, 올라오는 괴물을 베면서, 어떻게든 버틴다. 알겠나!”

“““예, 옙!”””


경비대원은 두려움을 억누르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괴물 역시 화답하듯 거대한 불협화음으로 대답하며 성벽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구름에 막혀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던 태양이 한줄기 손을 뻗었다.


은휼의 시야에 가득하게 내리쬔 햇빛은 끔찍한 육편의 탑에도 비쳤고, 그들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고기 타는 냄새와 함께 그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성탑은 순식간에 허물어졌고, 그 아래에 압사당한 괴물의 시체만이 남았다.

재빨리 도망친 괴물들은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성벽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그렇게 끝이었다. 세상은 순식간에 적막을 되찾았다. 극도로 긴장되었던 감각이 풀어지며 살결에 닿는 바람이 새삼스러웠다.


“······살았군.”


은휼이 중얼거렸고, 잭은 아예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햇빛 한 번 빌어먹게 따뜻하군.”


다른 경비대원 역시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구름 사이로 돋아난 햇빛은 그들을 비춰줬지만, 아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아주 끔찍한 사실이 그들을 덮쳤기에.


“······저것들 밤에 또 오면 어떡합니까?”


지금은 낮이었다. 즉, 저들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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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 24.08.23 46 2 22쪽
12 3. 아이, 소년, 어른(7) 24.08.22 48 2 14쪽
11 3. 아이, 소년, 어른(6) 24.08.21 53 2 17쪽
10 3. 아이, 소년, 어른(5) 24.08.20 59 2 22쪽
9 3. 아이, 소년, 어른(4) 24.08.19 66 2 19쪽
8 3. 아이, 소년, 어른(3) 24.08.18 71 2 20쪽
7 3. 아이, 소년, 어른(2) 24.08.17 86 3 22쪽
» 3. 아이, 소년, 어른(1) 24.08.15 94 2 26쪽
5 2. 인류 최후의 기사(4) 24.08.14 96 3 21쪽
4 2. 인류 최후의 기사(3) 24.08.13 103 3 20쪽
3 2. 인류 최후의 기사(2) 24.08.13 107 4 21쪽
2 2. 인류 최후의 기사(1) 24.08.13 114 1 18쪽
1 1. 프롤로그 24.08.13 150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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