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의 남부 경비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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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탈
작품등록일 :
2024.08.0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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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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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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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이, 소년, 어른(2)

DUMMY

“존나 파!”


잭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소리쳤다. 그의 고함에 경비대원들의 움직임이 더욱 분주했다.


“떨어지면 목 꺾여 뒈질 정도로 파는 거다!”


경비대원들은 땅을 파고 있었다. 경비대원뿐만 아니었다. 영지의 온갖 장정들이 전부 동원되어 땅을 파고 있었다.


“깊게 팔수록 놈들이 오기 힘들다! 최대한 파내!”


비교적 성벽이 낮은 곳에 공호를 판다.

공호(空濠)란 물이 없는 해자(垓子)를 의미한다.

즉, 성벽을 따라 구덩이를 파두는 것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성벽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괴물들이 서로를 밟고 밟아 성벽을 넘으려 드는 기이한 상황에, 이만큼 효율적으로 작용하는 수성 방법이 또 없었다. 


성벽 위에서 은휼은 잭이 공호를 만드는 현장 속에서 진두지휘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호크는 은휼에게로 와서 보고했다.


“대장님.”

“그래.”

“직전에 구했던 피난민 중 하나는 물린 상처가 있습니다.”

“옥에 가둬만 두고 돌아와.”

“알겠습니다.”


피난민은 지금 처리할 사안이 아니었다. 해는 벌써 하늘 꼭대기에 다다라있었고, 이젠 저물 일만 남았으니까.


잭은 성벽 아래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다가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의 머리는 물론이고 턱수염에도 땀이 맺혀있었으나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이 말했다.


“이것만으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해놔야지. 성벽 보강은?”

“끝났습니다.”


은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잭, 호크, 은휼은 갑작스레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느꼈고, 동시에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꺄르륵!

모든 경비대원은 저 웃음소리를 들으면 일단 손부터 올라간다.

먼저 경례 자세를 완성한 다음 어디서 영주님이 오는지 찾는 것이다.


영주, 비샨 라티온이 성벽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면서 말했다.


“성벽 보강은 끝났나?”

“끝났습니다!”


잭, 호크, 은휼의 경례 앞에서 비샨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공호는 계속해서 판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아.”


비샨은 흉벽에 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공성전이다. 3년 전 미노타우르스 습격 이후로 처음이군.”


옛날부터 몬스터가 날뛰는 영지였지만, 3년 전에 벌인 대규모의 공성전 이후로 몬스터의 습격은 뜸했다.


“그때 경비대장 은휼의 공은 아직 기억한다.”


비샨이 은휼을 쳐다보며 말했다. 꺄르륵! 그의 목소리를 따라 바람이 은휼의 어깨를 짓누르듯이 불어왔다.


“그동안 검이 녹슬지 않았길 바라지.”

“단언컨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좋다. 이제 수성 병기를 준비하지. 병기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지만.”


비샨이 말했다.


“우선 돌부터.”


잭은 듣자마자 튀어 나갔다.


“4조! 사람들 끌고 가서 돌멩이 죄다 갖고 와! 어차피 저놈들이 성벽을 부수진 못해! 성벽 수리용으로 남겨두지 말고 그냥 전부 쏟아붓는 거다!”


가장 간단한 방식의 수성 병기는, 성벽 위에서 무거운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것이다.

그것에 적격인 두 가지는 돌과 나무였다.

은휼이 물었다.


“통나무도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래. 자원을 아낄 때가 아니야. 수성에 도움 되는 건 뭐든지 해야 한다.”


그 말을 듣고 이번엔 호크가 튀어 나갔다. 그가 사람들을 시켜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비샨이 말했다.


“질려(蒺藜)를 깔아둔다고 해서 놈들의 움직임을 그다지 저지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군. 쇠뇌 따위도 역시 별 의미가 없겠지. 호크 정도의 실력 아니면 뇌를 부수진 못할 테니까.”


비샨은 호크나 잭과 같은 경비 조장의 이름은 물론, 경비대원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한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경비대를 신뢰하고, 또 아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비샨은 흉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그동안의 전투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난 전쟁이 싫다, 은휼.”

“······저 역시입니다.”

“죽은 자들은 삶을 잃고, 산 자들은 삶을 잃은 시체를 바라봐야 한다. 난 그 짓거리를 너무 오래 해왔어.”


그것은 은휼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비대장 이전에 전장의 기사로서.


“3년 전의 그 공성전을 끝으로 너무나 평화로웠던 것일까. 왜인지 다시 찾아온 피로 얼룩진 일상이 두려워지는군.”


허구한 날 성벽이 부서지고, 부서진 성벽 위로 몬스터가 쳐들어와 손수 화염의 정령으로 불기둥을 세우고, 또 죽어간 이들의 시체를 태워야 했던 과거보다 이 3년 동안은 수십 배나 평화로웠다.


3년 동안에도 슬라임이나 트롤 따위가 자주 나타나 사람 몇 죽이고 식량 창고를 습격하곤 했지만, 그 정도면 과거와 비교했을 때 말도 안되게 평화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비샨은 자신의 영지가 전쟁터로 재차 바뀌어가는 것을 보았다.

성벽 주위로 해자가 만들어지고, 모든 이들이 총동원되며, 그들의 표정은 한없이 어둡다.

아이는 울고, 겁쟁이는 울음을 참는다.

무고한 이들이 사망하고, 충성스러운 경비대는 전사한다.


“3년 전에 넌 조장이었지.”

“네, 그랬습니다.”

“내가 치하했던 경비대장 하나는 그때 죽었다. 검술이 참 뛰어난 녀석이었지.”


그가 기억하는 경비대원의 이름 중 대다수는 다시 부를 일 없는 이름이었다.


“죽지 마라. 명령이다.”


바람이 불어왔다. 정령의 바람일까.

요 며칠간 성벽 앞에 쌓였던 시체는 전부 치웠는데도 왜인지 바람을 타고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죽음이란 그런 법이다. 죽음이 머무른 땅은 그 흔적을 애써 지워도 피비린내가 남는다.


지독한 전쟁터, 그리고 명령.

은휼은 그 명령이 정말 ‘명령’임을 느꼈다. 

죽지 말라는 이야기는 패배하지 말라는 이야기일까.

어찌 되었든 은휼은 죽기는 싫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비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 안쪽에 방어벽도 쌓아야겠지. 구덩이를 파는 것은 물론이고.”


그 말을 듣고 은휼은 성벽을 내려갔다.

만에 하나 성문이 돌파당했을 경우를 대비해, 성문 안쪽에 구덩이를 파고 주위엔 방어벽을 설치한다.


목수들은 나무로 방어벽을 만들고, 여타 장정들은 땅을 판다.


부모는 아이에게 단단히 일러두며, 죽음을 각오하는 청년들의 얼굴은 오히려 무표정에 가깝다.


그렇게 해는 저물어간다.


마침내 어둠이 하늘을 뒤덮자, 전쟁터는 완성되었다.




***




투둑, 투두둑.

이슬비가 내린다.

떨어진 빗물은 가죽 갑옷에 맺혀 팔을 따라 미끄러진다.

마침내 손까지 다다른 이슬은 손가락에서 대부분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끝까지 손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슬은 마침내 검자루에 다다른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온 어두운 성벽 위, 은휼은 지독하리만치 익숙한 검자루의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호크는 팔짱을 낀 채로 저 멀리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고, 잭은 연신 턱수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바렌은 비에 젖은 손톱을 깨물고 있었으며, 비샨은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긴장해.”


2조 조장 잭은 제 조원들에게 말했다. 물론 바렌을 포함해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3조 조장 호크는 말이 없었고, 그의 조원들 역시 말이 없었다.


4조 조장 해리의 결벽증은 지금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비와 흙먼지로 더러웠다.


그 밖에 각각의 조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저 적막뿐. 비 내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영주의 정령마저 입을 다문 적막이었다.


“옵니다.”


적막을 깬 것은 호크였다. 하늘을 노려보던 영주가 이젠 앞을 쏘아보며 물었다.


“수효는?”


호크는, 흔치 않게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지 표정을 찡그리다가 답했다.


“······한 마리입니다.”

“한마리라고?”


잭의 반문에 호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크의 말대로 얼마 안 지나 모습을 드러낸 괴물은 한마리였다.


철퍽, 철퍽. 비에 젖은 괴물의 맨발이 흙을 짓누른다.

붉은 안광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다.


“이런 시발, 왜 한 마리야?”

“제2파가 올지도 모르지.”


잭의 중얼거림에 은휼이 답했다. 영주는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호크, 쏴도 좋다.”


이미 호크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빗물 머금고 불어온 바람은 팽팽히 당기어진 활시위와 함께 손가락을 차갑게 압박한다.

숨을 참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몸에 오로지 빗방울만이 중력을 따라 움직인다.

결국 중력을 버티지 못한 물방울이 낙하하자, 화살은 비행을 시작했다.


“명중이군, 훌륭하다.”


영주가 말했다. 가히 신궁이라 칭해도 될 실력이었다.

날아간 화살은 그 한마리 괴물의 왼쪽 눈에 꽂혔다.


그 바람에 괴물의 몸뚱아리가 뒤로 기울어져 갔다.

철퍽! 괴물의 발이 진흙을 짓밟았다.

괴물은 호크를 똑바로 노려봤다. 그리고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키에엑! 그 끔찍한 소리가 모두의 고막을 강타했다.


화살에 맞은 괴물의 안구는 끔찍하게 짓뭉개졌지만, 다른 눈은 성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화살로는 뇌를 부수기 힘들군.”


영주의 말을 호크가 부정했다.


“아뇨, 닿았습니다.”


호크의 화살은 놈의 눈을 뚫고 가 뇌에 닿았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갑자기 괴물의 몸이 허물어졌다.

무릎꿇듯이 주저앉은 괴물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놈은 끝까지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왜인지 불안하다. 은휼은 원인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 괴물의 죽음을 끝으로, 어떠한 괴물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림은 길어져 가고, 달빛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져 있다.


 대기하고 있던 해리가 중얼거렸다.


“운이 좋으면 오늘 안 올 수도 있어.”

“그래. 매일매일 나타나진 않았잖수?”


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운이 좋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은휼 역시 그리 생각했다.

다만 전장에서 운을 기대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그래서 은휼은 움직였다.


“대장님?”


흉벽 너머로 몸을 내밀었고, 아래를 확인했다.

그곳엔 미처 치우지 못한, 낮에 압사당한 괴물의 시체. 그리고 급하게 파낸 공호가 있었다.


“······설마.”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은 마지막에 이르러 그림의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


우린 아직 저들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영주는 은휼과 마찬가지로 흉벽 아래를 내다봤다. 그의 표정은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영주님.”

“그래.”

“저와 똑같은 걸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마도. 그럼 시험해봐야겠지.”


영주가 손아귀를 펼치고 말했다.


“모든 어둠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정령이여. 오로지 어둠뿐인 곳에서도 고고히 존재를 지킬지니, 창공의 한줄기 섬광이 되어라.”


찬란하게 밝은 빛이 영주의 손아귀에서 피어올랐다. 마치 나비 같기도, 만개한 개나리 같기도 한 황금빛은 영주의 손을 떠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샛별 하나가 떠오른 것처럼 정령은 하늘을 환하게 비췄다.


달빛조차 먹구름에 가려진 어둠 속 빛의 정령은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광원이었다.


“여, 영주님?”


잭은 당황하며 말했다.

저 괴물들은 빛과 소리에 이끌린다. 그것은 초기부터 알고 있었다.

빛 혹은 소리가 발생한 쪽으로 놈들 고개가 휙휙 돌아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영주가 하는 행동은 사방의 괴물들에게 지금 우릴 잡아먹으러 오라고 소리치는 꼴이었다.


“여, 영주님 왜 저러시는 거요?”


잭이 은휼에게 작게 물었다. 그러나 은휼은 대답하지 않고 호크를 불렀다.


“호크. 확인해봐.”

“예?”

“이곳으로 향해오는 괴물이 있나?”


호크는 흉벽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을 향해오는 놈들은 없었다.


“없습니다. 단 한 마리도.”


한 마리가 찾아왔을 뿐, 괴물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일까?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일까? 


은휼은 불안감이 어김없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영주 역시 생각을 끝낸 얼굴이었다. 

이젠 서로가 내놓은 답과 맞춰볼 때였다.


“······우린 왜 낮의 괴물 무리가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지?”

“그야, 괴물들은 이곳에 언제나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설령 운이 좋아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끔 괴물들이 시체를 남김없이 먹지 못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실컷 포식 중에 해가 떠올라버리는 상황이 있었다.

그렇게 포식을 끝마치지 못하면 그들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그렇기에 은휼은 바렌을 시켜 시체를 성벽으로부터 멀리 치운 것이다.

비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거다. 다람쥐조차도 먹이를 어디 놔뒀는지 기억한다. 저놈들도 그러겠지.”


놈들은 먹이가 어디 있는지를 기억한다.

즉, 저놈들은 당연하게도 이 영지의, 이 성벽의 위치를 기억한다. 비샨이 물었다.


“지금까지 저것들의 행동 양식이 어떠했지?”

“기본적으로 어두워지면 나타납니다. 매일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만, 한 번 나타날 땐 한 마리부터 스무마리 정도까지 소규모로 나타났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점검해보지. 처음에 이 앞에서 기사가 죽었을 때. 그때엔?”

“대규모로 몰려와 기사를 죽이고, 남은 이를 전부 잡아먹은 다음, 성벽을 긁어대다가 사라졌습니다.”

“젠장, 그때였군. 그때 성벽을 그렇게 긁어댄 게 이유가 있었던 거다!”


영주가 소리쳤다. 그들이 기사를 잡아먹고 떠난 다음 날, 성벽엔 핏빛 손자국이 가득했었다.

다른 경비대원들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는 은휼은 더욱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대규모로 습격해온 적이 있었나? 오늘 낮을 제외하고 말이다.”

“······간혹 이 영지 주위를 배회하는 것은 탐색대를 보내서 확인한 적이 있으나, 직접적으로 습격해온 적은 확실히 없었습니다. 오히려 몇 마리만이 남고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고 보여지는 날도 많았습니다.”

“왜지? 왜 대규모로 성벽을 습격해온 적이 한 번도 없었지?”


결국 결론은 간단했다.


“저놈들은 알고 있던 거다. 먹이가 성벽 너머에 있다는걸. 그래서 구태여 습격해오지 않은 거다! 성벽을 넘기엔 아직 수가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저놈들은 결국 수를 채웠고, 유난히 어두웠던 낮에 습격해왔다.


“뛰어난 지능, 그따위 것이 아니다. 뛰어난 지능이 있었다면 겨우 먹구름 좀 낀 날에 공격을 감행하진 않았겠지. 저놈들은 어둠이 찾아오면 고기를 먹기 위해 움직인다는 맹목적인 의지 하나만을 가질뿐이다. 개미와 동급인 수준의 지능이겠지. 하지만 개미는 군집이다!” 


저토록 무리로 몰려다닌다는 것은, 애초에 서로 간의 상호작용이 있음을 생각해야만 했다.


“마찬가지인 거다. 저 괴물들은 군집이다. 저놈들은 기사를 잡아먹을 때 성벽의 존재를 확인했고, 그 후로 기다렸다. 다른 괴물들이 이곳으로 더욱더 남하할 때까지! 마침내 수가 모여서 성벽을 넘을 수 있을 때까지!”

“······”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실패했고, 우린 수성을 준비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서 더욱 많은 수의 괴물이 필요하겠지.”


비샨이 손가락으로 호크가 죽인 괴물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저놈은 뭐겠나? 저놈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소규모로 성벽 앞에 나타난 놈들은 대체 뭐였겠나?”

“······정찰.”

“그래. 놈들은 계속해서 확인한 거다. 이 성벽이라는 감옥 안에 인간이라는 먹이가 아직 잘 있는지!”


그렇게 말하니 퍼즐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은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쩐지 이상했습니다.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괴물의 의지와는 대치되는, 물리면 몬스터화가 진행된다는 모순점이.”

“먹잇감을 동료로 만들 이유는 없다. 시체조차 아까워서 긁어먹는 놈들인데. 그렇다면 그 몬스터화는 무슨 의미겠나?”

“······미완결된 포식을 위한 안배. 마찬가지로 먹잇감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정찰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즈음에서 비샨과 은휼은 완벽한 결론에 다다랐다. 비샨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들은 군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이브 마인드. 맹목적인 포식 기계들은 살코기를 입에 넣기 위해 무리가 한 개체처럼 움직인다.

페어리들이나 가지고 있는 그러한 의식을 저런 괴물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오지 않는다’가 아니야. 저들은 반드시 온다. 이것은 단지 유예일뿐.”


공호로 인해 더욱 높아진 성벽조차 넘을 정도로 수를 불릴 때, 그들은 다시 돌아온다.


“수백으론 부족하단 걸 깨달았으니 다음엔 수천으로 올지도 모르지.”


상당수의 경비대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적막 속에서, 밤은 결국 지나갔다.

해가 뜰때까지도 그들은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빌어먹게 악독하군. 마치 모든 지성체를 지워버리기 위한 몬스터인 것처럼.”


새벽의 여명이 찾아왔을 때 영주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우리가 절망에 절여져 그들의 입맛에 어울리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인가.”


그의 손은 흉벽을 부서질 듯이 그러쥐었다.


“······감히.”


영주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전원 해산하고 원래의 일과를 진행한다.”


해가 떠 있는 낮 동안엔 더 이상 성벽 위에서 벌벌 떨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영주는 명령을 남기고 성벽에서 떠나갔다.


“대, 대장님. 그러니까 요약하면 저놈들이 나중에 수십 배로 몰려온다는 거 아닙니까?”


바렌이 은휼에게 물었다. 은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거였군.


대마법사 뮤렐과 소드마스터 한카르라는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들이 있음에도 제국군이 패망한 세 번째 이유.


군체 의식. 저들은 고등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의 군체 의식을 가진다.


저놈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강하다. 그리고 저놈들은 자신들이 모여야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렌의 말대로, 저놈들은 이 성벽을 넘어 우리를 씹고 뜯기 위해 충분한 수가 갖춰지면 돌아올 것이다.


······며칠 안 남았겠지. 며칠 뒤면 저놈들은 훨씬 많아진 수로 습격을 감행할 것이다.


은휼은 주위를 돌아봤다. 경비대원들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휼이 보기에 그들이 표정은 심히 어두웠다.


공성전에선 보통 수성측이 유리하지만, 장기화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결국 성벽 안에 갇힌 자들은 미쳐간다.

공포에 젖은 육체는 굳고, 반대로 정신은 말라 죽어간다.

역사적으로 전쟁에서 수성측이 적군에게 성문을 열어주는 일은, 주로 그러한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


은휼은 대장이었다. 이들을 이끄는 자였다.

이 영지를 지키는 무력 집단이 미치지 않게 관리해야만 했다.


“다들 표정이 어둡군.”


이럴 땐 가장 두려워하는 녀석부터 북돋아 주어야 한다.

가장 겁이 많은 겁쟁이가 용기를 낸다면 다른 놈들이 용기를 안 내고는 못 배기니까.

그렇기에 은휼은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 바렌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바렌, 두렵나?”

“예, 예?”


은휼의 체격은 거대했고, 그의 눈동자는 마치 깊은 심연처럼 상대를 옥죄는 것 같았다.


“두렵나? 저들의 이빨이 우리를 향할까 두려운 건가? 솔직히 말해도 좋다.”

“예, 두, 두렵습니다.”

“나 역시 그렇다.”

“예?”

“나 또한 죽음이 두렵다. 늙어 죽는 거라면 모를까, 괴물들에게 물려 뜯겨서 죽는 건 더욱 두렵군.”


바렌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가 아는 은휼은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은휼은 맥없는 목소리로 죽음이 두렵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얼간이는 오래 살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

“당연히 이 영지의 모든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할 거다. 영지민은 물론이고 하물며 영주님도 말이지.”


바렌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은휼의 목소리엔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우린 망설여선 안 되는 거다. 설령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도, 우린 망설이지 않고 끝까지 발버둥 쳐야 한다. 우리의 뒤에, 우리처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검을 쥔 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이 앞에 서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

누군가는 두려움에 맞서야 한다.


“바렌. 실컷 두려워해라. 그리고 나서 용기를 내는 거다. 그게 검을 쥔 겁쟁이들이 택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알겠나?”

“예, 예.”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바렌의 눈동자가 조금은 덜 떨리는 것을 확인한 은휼이 살짝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를 놓았다.

또한 은휼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더없이 크게 외쳤다.


“라티온의 경비대원은 들어라!” 


모든 경비대원이 고함에 놀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를 쳐다봤다.


“결국에 저놈들은 돌아올 거다! 동부의 전선이 불확실한 이상 며칠 안에 금세 수를 불려서 몰려오겠지! 어쩌면 정말 수천마리가 올지도 모른다!”


언제나 침착하던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이번만큼은 격정적이었다.

그것은 경비대원 모두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은휼이 일부러 감정적으로 소리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냐! 우리에겐 공성을 준비할 시간이 있고, 평생을 준비해온 검이 있다!”


호크, 잭, 해리, 그 밖에도 여러 경비 조장들이 허리를 곧게 펴고 은휼을 바라봤다.

자연스레 다른 경비대원들의 몸에도 힘이 들어갔다.


“두렵겠지. 우리가 숱하게 봐온 시체가 우리의 정해진 결말이 아닌가 두려울 것이다!”


은휼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치켜든 검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은 어느새 아침이 되었고, 다시금 떠오르는 태양은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 좋다. 두렵다면 실컷 두려워해라!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해라! 그리고 분노해라! 저항해라! 결국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그게 아님을 깨달아라!”


늘씬한 검신이 여명을 품고서 찬란하게 빛난다.

은휼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확연히 가라앉아있었으나, 경비대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죽음이 우릴 넘어 이 성벽 안을 침입할 때다.”


스르릉, 탁. 은휼은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고서 말했다.


“전원 해산한다. 그리고 쉬어라. 오늘 경계는 최소한으로 한다.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는 거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우린 전쟁을 준비한다.”


성벽 안에서 버티는 자들과 곧 찾아올 수천마리의 괴물들.

전쟁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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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아포칼립스의 남부 경비 대장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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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5) 24.08.29 46 2 17쪽
16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4) 24.08.28 44 2 12쪽
15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3) 24.08.26 50 2 12쪽
14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2) 24.08.24 51 2 15쪽
13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 24.08.23 46 2 22쪽
12 3. 아이, 소년, 어른(7) 24.08.22 48 2 14쪽
11 3. 아이, 소년, 어른(6) 24.08.21 53 2 17쪽
10 3. 아이, 소년, 어른(5) 24.08.20 59 2 22쪽
9 3. 아이, 소년, 어른(4) 24.08.19 66 2 19쪽
8 3. 아이, 소년, 어른(3) 24.08.18 71 2 20쪽
» 3. 아이, 소년, 어른(2) 24.08.17 86 3 22쪽
6 3. 아이, 소년, 어른(1) 24.08.15 93 2 26쪽
5 2. 인류 최후의 기사(4) 24.08.14 96 3 21쪽
4 2. 인류 최후의 기사(3) 24.08.13 103 3 20쪽
3 2. 인류 최후의 기사(2) 24.08.13 107 4 21쪽
2 2. 인류 최후의 기사(1) 24.08.13 114 1 18쪽
1 1. 프롤로그 24.08.13 150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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