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의 남부 경비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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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탈
작품등록일 :
2024.08.0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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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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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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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

DUMMY

『······교단이 이 대륙에서 모든 감염병의 위협을 지워낸 거룩한 업적을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신을 숭배하는 순수한 종교적 가치관 아래에 이뤄냈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다.

난 그들의 생각이 기사를 낭만적 존재로 여기는 것만큼이나 잘못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감히 말하건대, 그들은 대륙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집단이다.

그들은 무고한 시민을 마녀로 몰아 불태워 죽일 수 있는 신성력을 가졌고, 황제의 군대와 비견할 수 있는 기사단을 가졌다.

교단은 그저 종교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한, 한 국가를 뒤엎을 수 있는 사병을 보유한 준군사조직이다.

심지어 교황이라는 자가 교단을 제 손바닥 위에 두고 있으니, 교단은 그야말로 반역이 가능한 군부인 것이다.

만약 황실의 기사와 마법사가 만약 교단의 군대보다 강하지 못했다면, 인간을 비롯해 전 대륙의 종족은 정통과 이단이라는 종교인들의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하에 박해당했을지도 모른다.』


교단 지정 금서 목록 中 ‘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다’, 12p, 유릴 피터스 저




“몬스터화가 중첩될수록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그리고 동맥을 물리면 몬스터화가 심각하게 가속된다. 이거군?”

“네, 그렇습니다.”


물린 사람이 괴물이 되어 또 다른 사람을 물고, 그 사람이 괴물이 되어 또 다시 다른 사람을 물고.

그 과정이 쌓이면 쌓일수록 몬스터화의 속도는 가속된다.

그리고 목 따위의 동맥을 물리면 몬스터화가 더욱 가속된다.


그것이 목격담과 사투의 흔적, 시체들의 모습 따위를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괜찮은 추론이군. 사상자는?”

“221명입니다.”

“그중 경비대원 및 영지민은?”

“경비대원은 여섯, 영지민은 스물이 사망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많이 죽지 않았군. 그게 결코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진 않지만.”


영주는 은휼이 건넨 사상자 목록을 쓱 훑어보고는 말했다.


“불칸, 에른, 바얀, 케벤, 리트거, 수에른. 유망한 녀석들이 갔군.”


영주는 한숨을 쉬었다. 또 대원들이 죽었다.


그래도 다행이라 할만한 것은 사건이 터졌던 날의 상황을 생각하면 확실히 적게 죽은 거다.


영주는 눈앞에 서 있는 은휼을 바라봤다.

자신이 정령왕을 소환하고 탈진한 직후 내린 마지막 명령을 이행한 정령들의 호위 속에 은휼이 괴물을 쓸어버렸다.

며칠 전 그 사건 속에서도 영지가 살아남은 것은 이 경비대장의 공이 컸다.


“단언컨대 만약 네가 없었다면 영지는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과찬입니다.”

“아니, 은휼. 네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감사를 표하지.”


영주는 죽은 경비대원의 이름을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추모할 때가 있고 치하할 때가 있는 거다.


“원하는 게 있나? 상황이 상황이라 무얼 들어주긴 힘들다만, 그래도 말해봐라.”


은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현 상황과 적합하지 않은 요청이라곤 생각됩니다만, 저에겐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풍부한 고기와 빵입니다.”

“······?”





***





영지가 몬스터의 습격을 이겨내고 나면, 경비대원들은 언제나 여관으로 향했다.

몬스터는 격퇴해도 사람은 죽었고, 또 경비를 서야 하니 그 전에 술이나 실컷 퍼마시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비번인 대원 중 몇몇은 여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와, 이건 그냥 맹물 아닌가.”


해리는 투명한 수프를 스푼으로 떠봤다. 그래, 정말로 투명했다.

주방에 남아있는 수프를 직접 떠왔는데, 그 스프는 거의 맹물 수준이었다.


하긴. 식량을 영주님이 죄다 징발했을 텐데, 이런 걸 기대하는 게 멍청한 거지.


사실 이곳엔 음식도 없었고 술도 없었다. 그리고 여관 주인도 없었다. 그때 괴물이 되어서 죽었다.

그래서 사실 해리도 돈 안 내고 수프를 떠왔다.


그저 이곳에 있는 경비대원 몇몇은, 동료가 죽자 평소 습관대로 이곳에 들어와서 분위기만 낼 뿐이었다.

해리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엔 세 명의 경비대원들이 다투고 있었다.


“내가 두 마리의 목을 땄지.”

“난 세 마리거든?”

“에게? 난 네 마리 죽였다 이 새끼야!”


4조 조장 해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들의 술잔엔 물이 담겨 있었다.


“건전한 새끼들, 쯧.”


한 마리밖에 못 죽인 해리는(대장이 오지 않았으면 그 여섯 마리를 전부 잡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혀를 차며 맹물 같은 수프를 먹었다.


“어이, 해리! 넌 얼마나 죽였냐?”

“······의미 없는 비교를. 대장님은 혼자서 수십은 죽였을 텐데, 우리끼리 비교해서 뭐 하나?”


해리는 그렇게 말하고선 후다닥 술집을 나섰다. 하나밖에 못 죽였으니까.


······사실 그 전의 몬스터 습격과는 달리 성과를 자랑하는 것조차 탐탁지 않았다.


그들 중 몇몇은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이었을 테니.


해리는 요 며칠간 수색과 시체 처리 작업 때문에 씻지 못해 간지러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좀 씻고 싶다. 


이 정도면 결벽증 환자가 아니라 자신이 결벽증이라고 믿는 망상증 환자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만큼 해리는 깔끔한 상태로 있고 싶은 욕구를 며칠간의 일과 때문에 미친 듯이 억눌렀다.


그래서 해리는 여유가 생긴 김에 조금이나마 씻어보려고 연무장의 우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은휼이 있었다. 은휼은 연무장 중앙의 바위 위에 앉아서 눈 감은 채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해리가 다가가서 물었다.


“뭐하십니까?”

“명상.”


해리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존나 건전한데.”


대장이라 그런가. 맹물을 술처럼 처먹는 놈들보다 수십 배는 건전하다.

은휼은 해리가 말을 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궁금해진 해리가 물었다.


“명상은 마법사들이나 하는 거 아닙니까?”

“기사도 한다.”

“······어찌 됐건 대장님은 왜 하십니까?”

“옛 생각이 나서.”


무슨 소리지. 옛날에 명상가셨나. 해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은휼을 쳐다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묘하게 분위기가 변했다. 착각인가?


해리는 은휼을 잠깐 지켜보다가, 몇분이 지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자리를 피했다.


한편 은휼은 눈을 감은 채로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만약 저 성벽을 넘어 수천의 괴물이 영지에 들이닥치고, 두 발을 땅을 디딘 채로 맞서 싸워야 한다면, 이겨낼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이겨내야 한다.

그러니 강해져야 한다.

오래전 검을 놓지 않았던 때만큼, 아니, 그보다 더.

성벽 아래서 갈색빛 오러를 뿜어내다가 죽어버린 어느 기사. 그보다도 더욱더 강해져야 한다.


명상하던 은휼은 눈을 떴다.

해리는 그새 사라졌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오랜 명상 덕분에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마치 온몸의 혈관에 새로이 깨끗한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상쾌하군. 은휼은 검을 뽑았다.


곧바로 내려 베고, 올려 벤다. 찌르고 검을 회수한 다음 다시 찌른다.

원심력을 이용해 횡으로 베다가, 사선으로 베고, 또다시 찌른다.


익숙하다 못해 지겹도록 숙달된 동작을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반복한다.

불어오는 바람도, 흘러내리는 땀도, 거칠어지는 숨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했을지도 모르는 검격을 멈추자, 머리가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후우.”


몸이 좀 풀렸으니 이젠 단련할 때였다.


연무장엔 거대한 직육면체의 바위 하나가 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의 영주조차 갓난아기였던 시절, 이 땅을 습격했던 스톤 골렘이 죽어버린 시체였다.


네모나게 몸을 웅크린 채로 죽어버린 골렘의 시체는 너무나 무거운데다 단단하기까지 해서, 지금까지 처리 못한 채로 연무장에 장식을 겸해서 방치되고 있었다.


처리하는데 막대한 돈이 들 테니 차라리 그 미적인 모습을 살려서 놔둔 것이다.


은휼은 그 골렘의 시체에 손을 갖다 댔다.


‘내 목표는 이거다.’


탐색대로 보낸 잭이 귀환하면 그때부턴 수천마리의 괴물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전까지 어떻게든 강해진다.


은휼은 골렘의 시체 옆에 놓인, 그것과 비교했을 때 조금은 작은 바위 앞에 섰다.

이것부터 시작한다.

은휼은 그 바위를 밀기 시작했다. 골렘과 비교했을 때 작은 수준이지, 사람 몸보다 거대한 바위였다.


그런데도 은휼은 겨울에 눈사람을 만들듯 바위를 천천히 굴리고 있었다.


“아니, 뭔······”


해리는 이제 다른 대원이랑 교대할 차례였기에 영주성을 빠져나가다가 단련 중인 은휼을 발견하곤 입이 벌어졌다.

그는 저 무식하고도 효율적일 것 같은 바위 굴리기 단련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저건 건전한 건가 폭력적인 건가.


바위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근육 덩어리가 바위를 굴리고 있었다.

해리는 진지하게 저 폭력적인 단련 방식의 건전함을 고려해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그저 대장의 괴력에 감탄하기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열심히 실천하다가 연무장을 떠났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해리는 일과를 끝내고 교대한 다음 영주성으로 돌아왔다.

흘린 땀이 찝찝해서 우물에서 대충이라도 씻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물이 있는 연무장으로 돌아왔는데, 거기엔 바렌이 있었다.

그리고 바렌은 적당한 곳에 앉아서 은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바위를 굴리고 있었다.


“와, 대장님 아직도 굴리고 있는 거냐?”

“네? 아까도 저러고 계셨습니까?”

“그래. 하늘 훤할 때 굴리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네.”


해리와 바렌이 지켜보는 동안 은휼은 계속해서 바위를 굴렸다.

그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땀에 젖어있었고, 바위는 연무장을 수십바퀴는 돌았는지 모서리가 뭉툭해져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은휼이 바위 굴리기를 멈췄다.

그러고는 방금까지 굴리던 바위 위에 앉아서 무언갈 먹기 시작했다.


영주에게 받아온 고기였다.


단련에 제일 중요한 것은 식사였다.

성 안에 고립된 채로, 불확실한 남부의 지원만을 기다리는 현 상황에서의 배급은 단련 중인 몸에겐 너무나 부족했다.

그래서 영주에게 고기와 빵을 부탁한 것이었다.

다행히 한 명 배불리 먹이는 정도는 가능했기에 그는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지금 은휼은 고기를 뜯고 있었다.

아무리 감자만 줘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은휼이라고 해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고기를 입에 넣으니 그 녹아내리는 지방과 육향이 가히 천상의 맛이었다.


그리고 해리는 그걸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시발, 저거 어디서 난 거야.”

“그러게요?”

“대장님이 훔쳐 오진 않았을 텐데. 뭐지, 대장님이 허락 맡고 가져온 건가.”

“갑자기 고기를요? 왜요?”

“음, 생각해보니까 저 몸이 며칠 전까지 감자 몇 개 먹고 굴러갔다는 게 신기하지 않냐? 그 손톱만 한 소시지도 배급 끊긴지 일주일이 넘었으니까.”


바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바위를 저렇게 굴려댈 수 있는 사람이 겨우 감자랑 수프 조금 먹고 움직였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잠깐, 그럼 잘 먹으면 더 강해진다는 건가?

얼마 전엔 대장이 맨손으로 괴물 골통을 부숴버리기도 했는데?


바렌은 대장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해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고기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까 맹물 수프를 먹었던지라 부러웠다.


“저게 사람 몸입니까? 몬스터보다 더 강해 보이는데.”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오래 단련했을 때 나올만한 몸이지.”

“오래 단련이라, 대장님 젊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조장인 잭, 해리 등등에 비하면 훨씬 젊어 보이긴 한다.

다만 그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글쎄다. 나이 얘기 따윈 절대로 해주질 않으셔서.”


은휼이 말해주질 않으니까. 바렌은 짧은 식사를 마치고서 다시 바위를 굴리기 시작한 은휼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장님은 대체 뭐하던 사람일까요.”

“글쎄다.”

“예전부터 느낀 겁니다만, 대장님 오우거 같지 않습니까?”

“대장님이 저능하다는 거냐?”

“아니, 무슨 소립니까. 몸 얘기죠.”


해리는 바렌의 말을 듣고선 은휼을 바라봤다. 그 탄탄하다 못해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근육은 겨우 오우거 수준이 아니었다.


“오우거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냐?”

“오우거 본 적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지. 4년 전에 여기 왔었······ 아, 넌 그때 없었겠군.”


해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놈은 1년 차라 4년 전 일을 모르겠지. 해리가 말했다.


“오우거가 한 마차로 몰려와도 대장님이 이긴다.”

“네?”

“그때 대장님이 오우거를 한 손으로 메다꽂았어. 그놈은 목 꺾여서 뒈졌고.”

“그게 정말입니까?”


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렌은 믿기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베테랑 대원들이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대장님은 오우거가 아니라 거인족 같다. 대장님 정도면 거인족 중에 작은 거인의 키랑 비슷하지. 괴력도 거인과 비슷한 수준인 것 같다.”

“오, 거인족도 본 적 있으십니까?”

“내가 드워프도 아닌데 봤겠냐.”

“?”


바렌이 멍하니 해리를 바라보던 때였다. 갑작스레 그들 머리 위의 나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만인.”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해리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곳에 호크가 있었다.


“거기서 뭐 하냐?”

“구경.”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던 거냐. 근데 방금 뭐라고?”

“야만인의 피를 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야만인?”


호크는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오래전 서쪽 평야에 야만인들이 살았지. 지금은 오크의 영역이지만 그때엔 야만인들이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렸어.”

“처음 듣는 소린데.”

“그야 야만인의 혈족은 200년 전쯤에 사라졌으니까.”


해리는 그 말을 듣고, 아직도 바위를 굴려대는 대장을 바라봤다.

확실히 야만스러운 단련이긴 하다.

해리는 고개 들어 물었다.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아냐? 난 들어본 적도 없는 얘긴데.”

“······독서.”


해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바렌이 말했다.


“근데 왜 자꾸 훈련을 하실까요? 그것도 평소보다 더욱 힘들게.”

“글쎄다. 부족하다고 느끼신 걸까.”

“부족할 리가 없잖습니까?”


호크는 여전히 은휼을 바라보다가, 그 옆의 큼지막한 골렘의 잔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골렘을 밀어보려는 걸지도 모르겠군.”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저거 2년 전쯤에 잭이랑 나랑 불칸······이랑 긱센, 타칸네 조가 죄다 달라붙어서 밀었는데 안 밀렸던 거다.”


해리의 말에 바렌이 동의하며 말했다.


“그래요. 사람이 저걸 어떻게 혼자서 밉니까? 말이 안 됩니다.”

“아무리 대장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안 그러냐 호크?”

“······동의한다. 어떤 핏줄을 타고났든 사람인 이상 한계는 있으니까.”





***





며칠이 지났다.

은휼은 여느 때처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또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것은 오늘의 기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몸이 가벼운 것이었다.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고, 온몸의 근육에 힘이 넘쳤다.


오늘도 연무장에서 훈련한다. 그 골렘의 잔해를 밀기 위해서.


솔직히 말해서 그 바위는 사람이 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옛 상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사는 사람이 아니다.


기사는 전쟁 병기다.


기사가 사용하는 오러는 마나를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응집시켜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렇듯 기사는 마법사단의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마나를 사용하는 전쟁병기였다.


마법사들이 마나를 술식으로 구체화한다면 기사는 그 마나를 몸에 담는다.


은휼은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이후부터 몸에 스며드는 기운을 느꼈다.


아침의 찬바람, 이불에서 일던 먼지, 가벼운 발이 디디는 흙, 산뜻하게 흔들리는 나뭇잎과 그것에 맺힌 이슬.

모든 풍경과 존재에 깃든 마나가 찬찬히 몸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몸에 들어온 마나는 혈관을 따라 온몸을 순환했고 그 차가운 감각을 따라 혈관의 지도가 그려지듯 소름이 돋았다.


15년만인가. 마나를 사용하는 것은.


명상을 하면서 마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끝냈고, 바위를 굴리면서 적응은 끝냈다.


근육 하나하나에 힘이 넘쳤다. 그 어느 때보다 근육이 제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상태였다.


은휼은 골렘의 잔해에 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두 다리는 곧게 땅을 디뎠고, 흉통과 복부의 근육은 마치 통나무처럼 몸 전체를 단단하게 엮었다.

자세가 잡히자 온몸의 근육이 강하게 수축하며 땅과 바위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그극······ 수십 년 전 무너진 골렘의 잔재가 그 아래의 땅과 긁히며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은휼이 이윽고 두 손바닥을 떼었을 땐, 그의 온몸에 땀이 흘렀고, 두 발의 위치는 아까와는 달랐다.


골렘의 잔해는 분명히 몇 발자국 밀려있었다.


“······돌아왔구나.”


기분이 묘하다. 은휼은 굳은살 가득한 제 손바닥을 바라봤다.


정말로 기사로 돌아가는 거다. 전쟁터를 누비던 그때로.


은휼은 손을 꽈악 쥐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몸 안의 마나를 심장에 축적할 수도 있어야 하고, 그것을 검에 실체화할 수도 있어야 한다.


강해지는 길에 이제야 첫 발걸음을 뗀 거다.


길게 봐야지. 막힘 없이 강해지려면 오히려 성급해선 안된다.


그리고 그동안 일과를 다른 대원에게 미뤄놨으니, 오늘 하루 정돈 대신 해줘야 할 때다.

요 며칠간 너무 폭발적으로 훈련했다. 하루 정돈 쉬어야 몸에 무리가 안 가겠지.


무엇보다 이 골렘을 민 것으로 끝이 아니었기에 쉬는 날도 필요했다.


은휼의 목표는 이 골렘의 잔재를 베는 것.

검으로 벨 수 없는 바위를 검으로 베어내는 것.

그것이 은휼의 목표였다.





***





해리는 식사를 마친 후, 연무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잉?”


뭐지, 묘하게 연무장이 달라진 것 같다.

이상한 위화감에 해리는 연무장을 계속해서 쳐다봤다.

왜 이렇게 어색하지. 분명 무언가 달라졌는데.


······설마? 언뜻 스친 생각에 천천히 연무장의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다가갈수록 그의 의심은 확신이 되고 있었다.


연무장의 풍경이 평소와는 달랐다. 분명 저쪽 나무는 골렘과 가까웠고, 이쪽 나무는 골렘과 멀었는데.


그 둘과 골렘 사이의 거리가 달라졌다. 그래서 풍경이 바뀐 것이다.


해리는 골렘의 앞에 섰다.

그 아래의 흙에, 그토록 무거운 바위가 끌리며 땅이 팬 자국이 있었다.


어느새 바렌은 옆에 와서 해리와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장은 사람이 아닌가 봐.” 

“······진짜 밀린 겁니까 이거?”

“그래. 허, 눈앞에 증거가 있는데 믿기지도 않는군.”


대체 뭐하던 사람이야? 해리는 대장이 거인족이 아니라 혹시 거신병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그날 경비대원들 사이에선 은휼이 골렘의 잔재를 밀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특히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는, 즉 지루하게 풍경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경비대원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 주제가 있었다.


“그 골렘 옛날에 기사가 밀어보려다가 실패하지 않았었나?”

“그랬을걸. 아마 10년 전쯤에 영주님이 보상금을 걸었던 적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지나가던 성기사도 밀어보려다가 실패했었다더군.”

“기사랑 성기사도 실패했던 걸 대장님이 해낸 거잖아. 기사랑 대장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가장 재밌는 대화 주제는 ‘누가 더 강한가’이다.

대륙에서 가장 유행하는 대화 주제 중 하나가 대마법사 뮤렐과 소드마스터 한카르가 전투를 벌인다면 누가 이기는지일 만큼.

그 대화 주제는 결론이 지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이런 주제는 시간을 순식간에 잡아먹을 만큼 오락적이었다.


“······그래도 기사가 더 강하려나?”

“아니, 기사가 못한 일을 대장이 했잖아. 그럼 대장이 더 강하겠지.”

“그 기사가 약했던 걸 수도 있잖아.”

“에이, 약하면 기사일 리가 없지.”

“우리 대장님이 기사보다 강하면 왜 기사를 안 했겠어.”

“흥미가 없었던 걸 지도 모르지.”


물론 그들은 그들의 대장이 기사였던 걸 모르고 있었고, 애초에 기사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도 잘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는 주제부터 과정까지 별로 건설적이지 못했다.


“그럼 성기사는?”

“······성기사랑 대장님이 싸우면?”


성기사에 대해선 더욱 몰랐다. 그래서 이런 주제의 결과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냥 자기가 응원하는 쪽이 이길 거라고 결론 내려버렸다.


“글쎄다. 근데 대장님이 질 거 같진 않은데.”

“나도.”


그리고, 동쪽 성문. 호크는 여느 때처럼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피난민 혹은 괴물이 자주 보이곤 하는 동쪽엔 눈이 가장 좋은 호크가 주로 보초를 서는데, 그런 호크는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옆에서 호크와 같이 보초를 서던 2조 대원 톰슨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귀족의 문양이 보인다.”

“······귀족이요?”

“그래. 동부의 귀족인 거 같은데. 근데 그거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호크는 한참이나 눈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말과 마차엔 두 개의 깃발이 있었다.


하나는 귀족의 문양.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단의 문양도 보이는데.”

“교단이요?”

“교단의 깃발을 지닌 자는 은색의 갑주를 입고 있는데. 이건 보고해야겠군. 영주님께 보고하고 대장님도 불러와라.”

“뭐, 뭐가 온다고 보고할까요?”

“동부의 어느 귀족이랑······”


호크가 덧붙여 말했다.


“성기사.”


귀족과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두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한 무리의 말과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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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아포칼립스의 남부 경비 대장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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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2) +1 24.09.12 18 1 18쪽
23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1) +1 24.09.11 22 1 18쪽
22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0) +2 24.09.05 31 4 16쪽
21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9) +2 24.09.03 36 2 13쪽
20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8) +2 24.09.02 38 3 13쪽
19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7) +1 24.09.01 43 3 14쪽
18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6) +1 24.08.30 37 3 17쪽
17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5) 24.08.29 45 2 17쪽
16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4) 24.08.28 44 2 12쪽
15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3) 24.08.26 49 2 12쪽
14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2) 24.08.24 50 2 15쪽
»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 24.08.23 46 2 22쪽
12 3. 아이, 소년, 어른(7) 24.08.22 48 2 14쪽
11 3. 아이, 소년, 어른(6) 24.08.21 53 2 17쪽
10 3. 아이, 소년, 어른(5) 24.08.20 58 2 22쪽
9 3. 아이, 소년, 어른(4) 24.08.19 65 2 19쪽
8 3. 아이, 소년, 어른(3) 24.08.18 71 2 20쪽
7 3. 아이, 소년, 어른(2) 24.08.17 85 3 22쪽
6 3. 아이, 소년, 어른(1) 24.08.15 93 2 26쪽
5 2. 인류 최후의 기사(4) 24.08.14 96 3 21쪽
4 2. 인류 최후의 기사(3) 24.08.13 103 3 20쪽
3 2. 인류 최후의 기사(2) 24.08.13 106 4 21쪽
2 2. 인류 최후의 기사(1) 24.08.13 114 1 18쪽
1 1. 프롤로그 24.08.13 148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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