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의 남부 경비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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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탈
작품등록일 :
2024.08.0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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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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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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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류 최후의 기사(4)

DUMMY

- 나는 못 합니다.

- 왜?

-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 넌 기사다. 사람이 아니라.

- 차라리 기사를 그만두겠습니다.

- 제국군을 그만두겠다고?

- 예.

-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텐데.

- 상관 없습니다. 설령 마법사 놈들이 제 머리를 열어서 제멋대로 뜯어고치더라도.


“음······”


익숙한 장면, 선명한 기억.

불쾌한 꿈자리, 불편한 잠자리.

은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은 자연스레 올라가 잡념을 털어내려는 듯 머리를 털었다.


영지 경비에 신경 쓴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해 비듬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익숙하군.”


이렇게 살았었지, 원래는.

그래도 참호 대신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으니 훨씬 나으려나.

점점 과거의 풍경이 현재와 겹쳐질 정도로, 상황은 암울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은휼은 게으른 태양보다도 일찍 일어나 밖을 나섰다.




***




라티온의 현재 상황은 이러했다.


성벽 바깥을 괴물 무리가 배회한다. 그 수효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감히 대적하기 어려운 숫자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은 해가 지면 성 가까이 나타난다. 매일같이 나타나진 않는 것을 보니 다른 곳으로 몰려갈 때도 있는 모양이다.


또한 라티온 영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저런 괴물들이 판치고 있을 터였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식량이다.


전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이다. 식량이 확보되어야 사람이 밥을 먹고 살아 움직인다.

하지만 현재 영지 내의 식량 비축 상황이 곤란해질 정도로 여러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첫 번째는 농업과 축산업 생산의 중단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몇 명의 인원을 밖으로 내보낸 결과, 그나마 있는 밭이 저 괴물들에게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동물까지 전부 잡아먹혔음이 확인되었다.


두 번째, 오지 않는 상인.


상인은 전쟁터에서의 보급과 비슷하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식량이니까.

물론, 이런 상황에 외부에서 상인이 짐마차에 식량을 가득 싣고 올 리가 없었다. 피난민이라면 모를까.


세 번째, 늘어만 가는 피난민.


그들의 수 역시 무시할 정도가 아니다. 사람이 늘면 입이 늘고 식량은 줄어든다.


마지막으로, 비대칭적인 소모전.


적은 굶어 죽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식량에 문제가 생긴 전시 상황에서,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배급제로 식량을 틀어쥐면 된다.


은휼은 경비대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영주성 내의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감자군.”


감자, 그리고 무려 소시지다. 소시지가 작긴 하지만 이 정도면 매우 풍족하다고 볼 수 있다. 최소한 경비대에게만큼은 식량을 아끼지 않겠다는 영주의 의지겠지.


배급을 받은 은휼의 시야에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잭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오, 대장님.”


은휼은 잭의 옆에 앉았다. 잭은 감자를 입에 넣고선 투덜거리고 있었다.


“온아 억억아에.”


존나 퍽퍽하네. 그렇게 투덜거리며 감자를 씹어 삼킨 잭이 말했다.


“젠장, 가뜩이나 피곤한데 이젠 배고파 뒤지겠군. 대장님은 그 몸뚱아리가 겨우 이거 먹고 굴러갑니까?”

“음?”


은휼은 잭에게 자신의 식사를 보여줬다.


“난 대장이라서 음식이 두배다.”

“아니 뭔 시발—”


옆에서 잭이 계급 차이에 따른 차등분배에 열불을 낼 때 은휼은 유심히 감자를 바라봤다.


감자라. 


전쟁터는 곰팡이 핀 빵과 묽은 수프, 그리고 감자 맛이 나는 지옥이었다.

은휼은 감자와 눈씨름을 하다가 그것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래도 맛은 있군. 이 부서지는 식감과 은은한 단맛은 곰팡이 핀 빵과는 비교가 안 되는 특식이다.


한편 잭은 그런 은휼을 유심히 바라봤다.


참 맛있게도 처먹네.


뭘 줘도 잘 처먹는 걸 보면 그리 잘 살던 사람은 아닐 테고.

머리가 은발이라서 차분한 귀족 같아 보이긴 해도 눈빛은 늑대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검술은 분명 검 들고 지옥문 한번 건너갔다 온 사람이 분명한데, 몸에 흉터도 별로 없다.


잭은 돌려 말하는 재주가 없었기에 은휼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대장.”

“음?”

“대체 뭐하던 사람이요?”


은휼은 순간 감자로 막혀버린 목을 뚫어내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잭의 말투가 살짝 껄렁해졌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 진지하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지?”

“흉터가 없어. 신기해.”

“흉터? 흉터라면 여기 있다만.”


은휼은 소매를 걷었다. 거기엔 꽤나 큰 흉터가 있었다.


“그게 무슨 흉터요?”

“예전에 불에 데었다.”

“아니, 그딴 거 말고. 날붙이에 베인 흉터 없수?”

“없다만.”

“그니까 왜 없냐는 거요.”

“그게 이상한가?”


잭은 턱수염을 길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나랑 대련 전적이 어떻게 됐수?”

“내가 네 목을 이백번쯤 베었지.”

“그래. 그게 이상한 거요.”

“뭐가, 네가 쳐 발린 게?”


잭은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정도 실력을 갖추려면 구를 만큼 굴러야 한단 말이요. 상대를 베어온 사람이면 베일 때도 있었을 텐데. 심지어 난 비교적 이 영지에 온지 얼마 안 돼서 모르지만, 다른 놈들이 무용담을 떠들어대는 걸 보면 대장은 무슨 신화 속 존재 같단 말이요.”

“그런데 왜 몸에 베인 흉터가 없냐, 그 말인가?”

“바로 그거요.”

“안 맞으면 그만이잖나.”

“허. 그것참 쉬운 대답이군.”


은휼은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과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잭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옆의 다른 경비 조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해리, 미안한데.”

“응?”

“손에 소시지 기름 묻히기 싫은데. 포크 좀 빌려주지.”


해리는 결벽증이 있는 경비대원이다. 실제로 그의 방엔 먼지 한 톨조차 관측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식사를 할 때 언제나 개인 식기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해리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바라보다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쓰던 거라서 빌려주긴 좀······ 어?”


쿵! 잭이 순식간에 해리의 포크를 집어 채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쐐애액! 세갈래로 갈라진 모양의 포크가 공기를 네갈래로 찢으며 날아들었다.

포크가 노린 곳은 은휼의 목이었다.

그러나 포크는 목표 지점에 닿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미쳤나?”


은휼이 말했다. 포크는 너무나 간단히 막혀버렸다.

허공에서 은휼이 잭의 손목을 잡아챈 것이다. 

잭은 어이없는 실소를 흘렸다.


“허. 어이가 없군.”


처음부터 읽혔군. 잭은 잡힌 팔의 손을 완전히 펼쳐 포크를 떨어뜨렸다.


챙그랑, 포크가 땅바닥을 나뒹굴었고 해리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은휼이 잭의 손목을 꽈악 붙잡은 채로 말했다.


“네가 대장직에 욕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감자를 더 먹고 싶었나?”

“감자는 니미. 내가 포크로 하극상 벌일 병신으로 보입니까?”

“그래.”

“시발, 아무튼 못 막았으면 내가 알아서 멈췄을 거요.”


아닌데. 이 새끼 찌르려다가 막히니까 말 돌리는 것 같은데.

은휼이 잭의 손목을 놓아주자 잭은 자리에 앉고는 말했다.


“대장.”

“왜.”

“나는 용병이었수.”

“알아.”

“그것도 이름 좀 날린 용병.”

“그 정도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대장이 너무 강한 거지. 내 찌르기에 안 죽은 사람이 없수. 방금 하나 생겼지만.”


기사를 안 만나본 모양이군. 은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찌르기는 무슨. 넌 눈동자에 뭔 짓 할지 다 보인다. 그것부터 고쳐.”


피식 웃은 잭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 은휼 역시 식사를 끝낸 직후였다.

침묵을 지키던 잭이 물었다.


“대장, 군인이었수?”

“······군인?”


잭은 진지한 목소리와 껄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잔인하지만 냉정해.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

“보통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이 그리 되는데, 나름 용병으로 이름 좀 날렸던 나도 실력 있는 은발 용병은 들어본 적도 없단 말이지. 그러니까 대장은 용병이 아니야.”

“······그래서?”

“용병 말고도 그런 부류가 하나 더 있수.”


은휼은 잭이 무얼 말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잭은 은휼의 예상 그대로 말했다.


“제국의 군인. 그 중에서도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


은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잭이 말했다.


“내 말이 틀렸수?”

“······내가 옛날에 말했을 텐데.”

“과거 묻지 말라고? 대장, 너무 무른 거 아니요?”


잭은 손가락으로 영주성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성벽 밖에서 괴물이 깽판을 치고 있수. 북부랑 동부는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고, 제국군은 전멸했을지도 모르지. 대마법사란 놈이나 소드마스터란 놈이나 하나같이 뒈져버렸을지도 모른다고. 황제란 놈도 살아있긴 할까?”


황실 모독 발언까지 서슴지 않을 만큼 지금 잭은 진지했다. 


“우린 이 성안에 갇혔수. 그리고 지금 이 영지에 경비대는 유일한 무력 집단이고, 대장은 그런 경비대를 이끄는 사람이요. 대장이 영주 바로 다음으로 전 경비대원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


잭은 평소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한없이 진지한 눈으로 은휼을 쳐다봤다.


“그럼 내 목숨 맡길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어야지.”


침묵이 흘렀다. 자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지켜보던 해리는 포크를 쥔 채로 대장과 잭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공기를 꽉 쥐어서 숨도 못 쉬게 만드는 것 같던 적막을 은휼이 깨뜨렸다.


“그래, 군인이었다. 하지만 명예롭게 군생활을 끝내지 못했다.”

“뭐 불명예 전역이라도 했수?”

“비슷하지.”

“이런, 폐급이었던 모양이요? 어쩐지 흉터 하나 없더라니. 좆됐군.”

“어떻게 생각하든 좋지만, 더는 묻지 마라.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수준은 되니까.”


잭은 은휼의 사나운 눈빛을 읽었다. 경고였다.

대장이 저런 눈빛을 보이면 얼마 안 가 상대방은 사경을 헤매는 게 일반적이었다.

잭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뭐, 강하다니 됐수. 아무리 그래도 대장이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기사는 아니겠지. 막 오러를 쏘아대는 그런 제국군의 기사 말이요.”


잭의 말투는 여전히 껄렁했다.


“내가 무식하긴 하지만, 하나는 알지. 황실이 임명하고 또 엄격하게 통제하는 힘인 기사는 제국군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오래전에 오러 기사 하나가 황궁에서 오러 난사한 이후로 황실이 기사를 아주 엄격하게 통제했지 않았수?”

“······그랬었지.”

“오러 기사의 사병화를 시도했다가 목 날아간 귀족이 어디 한둘이요. 그래도 그런 기사가 하나라도 있다면 분명 숨통이 트일—”

“대장님!”


그때 호크가 은휼을 찾으며 급하게 이곳에 들어왔다.

잭은 표정을 잔뜩 찡그리며 철천지원수와도 가까운 사이인 호크에게 말했다.


“뭐야, 왜 밥 먹는데 산통 다 깨부수는 거지?”

“닥쳐봐, 드워프 겨드랑이털.”

“내 콧수염은 드워프 털이랑 비교가 안 되는 결을 가졌—”

“대장님.”


잭의 말을 끊으며 호크가 전한 말은 지금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전령이 돌아왔습니다.”





***





경비대원, 칼슨. 그는 성벽 밖 어딘가에서 도사리는 괴물 무리의 위협을 무릅쓰고 내보낸 전령이었다.

전령의 목적지는 수도였고, 그가 출발한 것은 약 열흘 전의 이야기였다.


영주, 비샨 라티온의 집무실엔 그와 전령 칼슨, 서기관 그리고 은휼이 있었다.

전령은 며칠간 쉬지 않고 달려와 몰골이 처참했지만, 침착하게 숨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남부의 칼하라 영지를 경유해 수도로 향할 생각이었습니다.”


수도까지 왕복으로 열흘은 너무나 짧은 시간인데? 그사이에 수도를 갔다 왔다고?


그때 영주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핵심부터.”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너무 핵심인데. 은휼은 자신의 입이 벌어졌는지 점검해야만 했다.


음, 벌어졌군. 마침 은휼은 멍청하게 벌어진 입으로 멍청한 질문을 던졌다.


“제국이 멸망했다고?”


안타깝게도 집무실엔 멍청한 질문도 무겁게 받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깔려있었다. 칼슨이 말을 이었다.


“저는 칼하라 영지를 경유해 수도로 갈 생각이었으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칼하라 영주는 제국 수도의 함락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칼하라는 수도로부터의 피난민을 수용 중입니다.”


비샨은 은휼에게 고개 돌려 물었다.


“은휼. 제국군의 최종 집결지가 수도라고 하지 않았나?”

“네, 그렇습니다.”


확실히 그랬다. 기사의 시체에서 발견한 작전 하달서엔 그리 적혀있었다.

제국 수도는 후퇴하던 제국군의 최종 집결지.

글쎄, 이쯤 되면 제국군은······


“제국군은 완전히 패망했군.”

“네. 대마법사 뮤렐은 사망, 소드마스터 한카르는 행방불명, 교단의 최상부 역시 연락이 되질 않는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칼슨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나오지 않는 말을 애써 내놓았다.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적막과 함께 영주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은휼은 자신의 얼굴도 그러리라 확실할 수 있었다.


어느새 모두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지금이 낮인데도 불구하고 집무실을 조용한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영주가 밤새 잠조차 자지 못했음을 명징하는 다 녹아 말라붙은 촛불은 지금 아무런 쓸모조차 없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리네르 영지마저 무너졌습니다.”

“리네르 영지까지?”


리네르 영지는 남부의 영지 중에서 가장 내륙에 위치한 영지였다. 수도에 가깝게 위치한 만큼 대도시였고, 리네르 영주의 사병은 상당히 강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리네르 영지마저 무너진 것이다. 비샨은 힘없이 말했다.


“저 몬스터들이 수도를 집어삼키고, 이젠 남부마저 집어삼키려고 든다는 소리군.”


칼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리네르 영지에 관해서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괴물에게 물린 자는 똑같이 괴물로 변해버린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비샨이 은휼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확인했던 정보군. 그때 못 잡아냈으면 큰 일이 벌어졌겠지. 좋은 판단이었다, 은휼.”


은휼은 고개를 끄덕였고 칼슨이 말했다.


“리네르 영지는 수용한 피난민 다수가 변해버려 순식간에 함락당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리네르 영지에선 그런 정보를 받지 못한 모양입니다.”


비샨의 시선은 책상을 향해 떨어졌다.


“······제국이 정말로 무너져가는군. 아니, 이미 무너진 것이지.”


그가 바라보는 곳엔 지도가 하나 있었다. 그는 힘없는 동작으로 펜을 들어 제국의 북부와 동부, 정중앙의 수도를 지워버렸다.


“겨우 삼 주다. 겨우 삼 주 만에 제국이 무너졌어. 정보가 전해지는 속도보다도 적은 빠르게 진군해왔다.”


황실이 미확인 몬스터 확산 사태에 총력전을 감행하겠다는 서신이 온 지 겨우 삼 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군.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 뜬금없이 나타났는데, 그게 삼 주만에 무적이라고 불리던 제군을 전멸시키고 수도도 무너뜨리고 이젠 남부에까지 마수를 뻗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은휼은 집무실의 공기가 터무니없이 답답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바람의 정령이 영주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겠지.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군. 내 딸이 지금 가 있는 영지에게 연락하는 건 계속해서 실패하고, 그곳으로 보낸 경비대원들도 돌아오질 않고, 제기랄!”


비샨은 책상을 내려쳤다. 그 진동이 바람을 타고 온 집무실을 휘저어놓았다.


아무도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영지는 이마를 짓누르더니 턱짓했다.


축객령이었다. 은휼을 제외한 이들은 부리나케 집무실에서 나갔고, 은휼 역시 돌아서 나가려던 참이었다.


“아니, 은휼. 자네는 가만 있게.”

“······?”


쿵. 그 사이에 빠져나간 이들이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그때 비샨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우리에겐 식량이 부족해. 우린 고립됐다. 밖으로 나가는 선택은 밤이 되면 찾아오는 자들에게 먹잇감을 내어줄 뿐이야. 그나마 해볼법한 선택은 오로지 마차만을 이끌고 식량을 남부의 다른 영지로부터 구해오는 거겠지. 말은 괴물보다 빠를테니.”

“과연 남부의 다른 영지가 식량을 내어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나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진 않는다. 우리의 결말은 아사일지도 모르겠군.”

“······피난민을 그만 받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입이 너무 많으니까. 그게 맞는 선택이겠지.”


비샨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은휼은 가만히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은휼에게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여기 있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은휼은 가만히 있었다. 비샨은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비샨은 실종된 딸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애써 지워버렸다. 


대의는 구분되어야 한다. 귀족은 대의를 실현하는 자들이다.


지금은 마땅히 대의를 좇을 때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비샨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피난민은 계속해서 받아야겠어.”


비샨이 눈을 떴다. 그의 목소리는 정령이 인도해주는 공기를 따라 선명하게 은휼의 귀에 꽂혔다.


“은휼.”

“네. 듣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도록.”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은휼은 차오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비샨은 어느새 귀족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 영지는 언제나 인력이 부족했지.”

“······?”

“잡무를 담당하는 인력은 말할 것도 없지. 게다가 이 영지의 무력이라고는 나, 그리고 자네가 속한 경비대 정도뿐이다. 이 영지는 오래전부터 이어진 몬스터와의 다툼으로 부유함을 꿈꿀 수 없게 되었어.”

“네, 그렇습니다.”

“이 영지는 부족한 인력 대신 경비대의 우수함에 많은 것을 의탁하고 있었다. 난 그렇기에 은휼, 너의 유능함을 높이 산다. 통솔력 따위는 물론이고 단순한 무력으로 보아도 제국의 기사가 아니라면 너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겠지.”


그야 은휼은 기사였으니까. 은휼은 급작스러운 칭찬에 더욱 큰 불안감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칭찬이 서두로 온다면, 이어질 이야기는 보통 따르기 힘든 명령임을 은휼은 군인으로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은휼.”

“네.”

“나에겐 제국군처럼 멋들어진 병력이 없다. 하지만 항상 내 기대 이상을 보여준 경비대가 있지. 그러니 그 경비대의 대장인 은휼, 바로 너에게 말하겠다.”


은휼은 묵묵히 비샨을 바라봤다. 비샨의 입에서 나온 것은 맥락 모를 질문이었다.


“날 도와줄 수 있겠나?”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언제나 열과 성의를 다해 영주님을 도울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약속이라, 좋군.”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영주의 책상에 놓여진 양피지 따위가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린 발버둥 쳐야 한다는 이야기다.”

“······?”

“우린 계속해서 발버둥 칠 것이고, 계속해서 피난민을 받을 것이다. 왜냐고?”


정령의 바람은 비샨을 위해 지도를 들어 올려주었다. 지도를 잡아챈 비샨이 소리쳤다.


“우리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지도에 그려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은 직전에 영주가 펜으로 지워버렸었다.


“북동부에서 시작된 이 원인 미상의 몬스터 확산 사태는, 제국의 흥망 따위를 다룰 것이 아니다. 수도는 함락당했고 황실은 스러졌다. 제국은 이미 멸망한 것이지.”


그러나 지도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부분이 있었다.


“인간의 살코기를 탐하는 저 괴물들은 이미 북부와 동부를 휩쓸었고 제국의 중심에 다다랐다. 이제 남은 것은 서부와 남부뿐이야. 아니, 서부는 이종족의 영역이니 인간에게 남은 것은 남부뿐이라고 해도 되겠지.”


그것은 제국의 남부.

라티온이 속한 바로 그곳이었다.


“대륙을 통틀어서, 인류가 자립 중인 곳이 남부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

“제국이 무너진 지금 이것은 인류가 멸망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다. 호들갑은 아니겠지.”


비샨은 남부의 귀족으로서 일어섰다.


“이건 전쟁이다. 제국이 아닌, 인류의 존속을 건 전쟁.”


은휼이 보기에 비샨은 광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은 명료했다.


“우리에겐 더 이상 기사도 무엇도 없어. 하지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려야 한다! 남부의 모든 영지는 이제부터 살아남고 살리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거다. 왠 줄 아나!”


평생을 몬스터와 싸워온 귀족의 혜안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인류의 존속이 우리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진작에 전역한 군인에겐 상당히 끔찍한 말이었으며.


“은휼, 라티온의 경비대장. 난 제국 최후의 영주들 중 하나로서 이 종족 전쟁에 사력을 다할 거다. 그러니······” 


남몰래 은거한 기사에겐 너무나 무거운 말이었다.


“나를 도와 인류 최후의 병사가 되어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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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8) +2 24.09.02 37 3 13쪽
19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7) +1 24.09.01 43 3 14쪽
18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6) +1 24.08.30 37 3 17쪽
17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5) 24.08.29 45 2 17쪽
16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4) 24.08.28 44 2 12쪽
15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3) 24.08.26 49 2 12쪽
14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2) 24.08.24 50 2 15쪽
13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 24.08.23 45 2 22쪽
12 3. 아이, 소년, 어른(7) 24.08.22 47 2 14쪽
11 3. 아이, 소년, 어른(6) 24.08.21 52 2 17쪽
10 3. 아이, 소년, 어른(5) 24.08.20 58 2 22쪽
9 3. 아이, 소년, 어른(4) 24.08.19 65 2 19쪽
8 3. 아이, 소년, 어른(3) 24.08.18 70 2 20쪽
7 3. 아이, 소년, 어른(2) 24.08.17 85 3 22쪽
6 3. 아이, 소년, 어른(1) 24.08.15 93 2 26쪽
» 2. 인류 최후의 기사(4) 24.08.14 96 3 21쪽
4 2. 인류 최후의 기사(3) 24.08.13 103 3 20쪽
3 2. 인류 최후의 기사(2) 24.08.13 106 4 21쪽
2 2. 인류 최후의 기사(1) 24.08.13 114 1 18쪽
1 1. 프롤로그 24.08.13 148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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