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다시 미궁으로 가기 전에
24. 다시 미궁으로 가기 전에
파는 쪽도, 사는 쪽도 계약을 오래 끌 이유가 없어서 잔금일을 이틀 후로 잡아버렸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렇게 빨리 거래가 진행되는 것은 저도 처음 경험합니다.”
“빨라서 나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저야 감사하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빠른 거래에서 사기 칠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기를 칠 수 있는 다른 사람과 달리 자신은 믿을 만한 사람이니 앞으로도 거래를 계속하자는 뜻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나쁠 것 없는 제안이다.
믿을 수 있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있다는 것은 내게도 좋은 일이니까.
그러나 만만하게 보일 생각은 없었다.
“내게 사기를 치려는 자는 목을 쳐주면 그만입니다. 증거? 설마 내가 사람 몇 죽이는데 증거를 남길 것 같습니까?”
내 말에 부동산 중개업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확실히 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내 협박을 금방 이해하다니.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법.
앞으로도 그는 나를 만만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유례가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계약을 서두른 것은, 되도록 빨리 모든 거래를 마무리하고 미궁에 갔다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돈이 떨어져 간다.
거래 몇 번에, 미궁에서 가지고 나온 마석을 거의 다 사용해 버렸단 말이다.
미궁 지하 2층에 묻어놓은 마석이 필요했다.
부동산 계약과 공증은 이틀 후 타넬론 시청에서 진행되었다.
전근대의 야만적이고 주먹구구식의 행정을 각오했지만, 의외로 계약은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아날로그적이기는 했지만, 부동산 권리증과 거래 서류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있었고, 계약 보증과 거래세 징수를 위해 동석한 관리들의 태도도 모범적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뇌물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중에 듣기로는 부패한 관리는 타넬론의 백작이 직접 목을 자른다고 하니, 그들의 태도가 일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타넬론의 백작님께서는 치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상업과 미궁 쪽은 꽤나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그쪽은 마석이 들어오니까?
계약을 마치고 여유가 생긴 김에 시청을 둘러보았다.
타넬론에서 부동산을 구입했고, 사업체도 차리려는 입장이니 시청을 드나드는 일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적어도 어디가 어딘지는 알아야 쓸데없이 헤매지 않지.
사실 미궁을 드나드는 용병들에게 타넬론 시청은 별로 존재감이 없다.
미궁관리청이라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적어도 한두 번은 갈 일이 생기기만, 시청은 글쎄?
구태여 갈 일이 있을까?
나 같은 경우도 시청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시청을 돌아보던 나는 얼마 가지 않아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정책이 투명해!
이 사람들 정책을 미리 공고하잖아!
시청에서는 타넬론에서 벌이는 각종 사업에 대해 미리 공고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백작이 계약을 존중하고, 행정에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고 하지만, 이런 것까지 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이곳의 문명 수준에 대해 산업혁명기의 지구와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조하는 정도.
그 정도가 적당하겠다.
물론 이런 행정이 전시 행정에 가깝다는 것은 안다.
시정부에서 진행할 사업을 대놓고 짬짜미로 나누어 먹지는 않겠지만, 공정한 입찰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공정한 입찰이라니.
그런 것은 현대 지구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내정자에게 몰아주는 꼼수가 존재하니까.
아마 이렇게 사전에 미리 공고를 해도, 이미 내정된 자가 있을 것이다.
설사 그 정도로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대충 이들 중의 하나가 가져갈 것이라는 식으로 ‘정해진 무리’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정해진 무리’는 대부분 타넬론의 토박이들일테고.
그러나 현상수배나 토벌 같은 일까지 미리 내정하지는 않겠지?
돈 많은 타넬론 토박이들이 하기에는 아무래도 거친 일이니까.
나는 시청 입구 쪽의 벽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는 각종 공고문들 중에서도 특별히 한쪽에 몰아놓은 문서들에게 다가갔다.
그곳에는 돈이 급한 용병이라면 반색하고 공고문을 떼어갈 만한 내용이 수두룩하게 붙어 있었다.
살인, 살인, 살인, 강도, 강도, 절도, 절도.
질 나쁜 강력범의 수배 영장이 하나 가득이었다.
그들 중에는 개인이 아니라 단체도 있었다.
소위 말하는 떼강도 또는 산적 말이다.
치안이 안 좋다고 하더니 타넬론 외부에는 떼강도까지 날뛰는 모양이었다.
나는 수배 영장 중 몇 개를 기억해 두었다.
만약 미궁에서 누군가가 선수 쳐서 마석을 털어갔다면, 급한 대로 저들 중 몇 놈 잡아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현상금도 현상금이지만, 저놈들이 숨겨두었을 재물도 무시 못한다.
자매를 원한 사람을 만나러 간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였다.
아내와 어린 아들.
“나는 한 사람을 요구했던 것 같은데?”
내 질문을 중개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매물로 오른 사람의 아내가 나섰다.
“어디를 가든 남편과 함께 갈 겁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곁에서 단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제법 똘똘하게 생긴 어린 녀석이 비슷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러나 남편은 오히려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긴장한 눈빛까지 감추지는 못했지만, 억지로라도 여유있는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중개인은 내 질문에 여유로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계약은 한 명과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덤입니다. ”
“덤?”
“그렇습니다. 추가 비용은 없습니다.”
중개인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추가 비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중개인에게 매물의 가족을 인질로 쓰겠다고 암시하기는 했지만, 매물로 나온 사람에게까지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심지가 굳건한 사람일수록 부당한 위협에는 반발하는 법이니까.
대놓고 가족의 생명을 볼모로 잡겠다고?
가족도 위험한 일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이러면 대놓고 반발하라고 떠밀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덤이었다.
“내가 원한 사람은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았나? 그런데 가족까지? 그건 아니지. 죽을 수도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제안하는 겁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 되어도 가족을 생각하면 포기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리고 저들은 모두 계약 내용을 알고 동의했습니다. 빚에 비하면 목숨은 별로 무겁지 않습니다.”
한 번 거래하고 났더니 신용이 쌓인 모양이었다.
이제는 아무리 위험해도 광산의 인부나 미궁의 짐꾼 정도의 일이라는 말은 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중개하는 매물이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일을 해도 상관없다는 사람임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빚에 비하면 목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합니다.”
매물로 나온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의 어조는 정중했지만, 간절함이 숨어 있었다.
“그건 무슨 말이지?”
“전 타넬론 출신이 아닙니다. 그레이홀드 출신이지요. 만약 고향에 가족을 남겨둔 채 피신한다면 가족이 어떤 일을 당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왜?”
“제 사업을 망가뜨린 자들이 저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안이 대대로 쌓은 덕이 적지 않습니다.”
“상인 출신이었군.”
“검도 남들만큼 씁니다.”
나는 계약서를 다시 확인했다.
계약금의 총액은 300 타넬론 골드.
개인에게는 큰 금액이지만, 대대로 사업을 하던 상인에게는 흘러지나가는 돈일 수도 있다.
“계약금의 총액이 300타넬론 골드? 대를 이어 상업에 종사한 상인이 그 정도를 융통하지 못했다는 거요?”
“융통하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계약하기로 결정했다.
돌아갈 곳이 없는 고급인력이다.
자원하는 인질도 있고.
내가 원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단순히 거점 관리만 맡길지, 아니면 내 대신 이리저리 사업에 써먹을 수 있을지는 일을 좀 시켜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중개인께서는 일을 잘하시는군요.”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자매를 전문으로 하는 중개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종류의 자매를 전문으로 하는 이 사람은 3대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해온 집안의 사람이라고 들었다.
여러모로 위험하고 꺼림칙해서 가까이할 사람은 아니지만, 일에 한해서는 신뢰할 수 있다는 평판이었다.
위험하고 꺼림칙하다는 평판은 그가 범죄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그가 범죄자들의 우두머리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
이런 일을 하는데 거친 사람들을 거느리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사무실에 병풍처럼 늘어서 있던 사람들 역시 거칠게 살아온 티가 나는 자들뿐이었다.
하지만 3대에 걸쳐 쌓아올린 평판을 나락으로 보낼 정도로 경우가 없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그냥 두어도 되겠지?
나와 계약을 한 사람은 레지널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는 40세.
상인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내 옆에는 엘리너가 함께 있었다.
“우리는 자주 집을 비울 겁니다.”
그 말을 한 후, 나는 레지널드에게 타넬론 골드 100개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남은 현금이었다.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공구를 갖추도록 하고, 증기 기관을 만드는 업체와 그곳에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를 조사해 놓으세요. 특히, 피스톤을 만드는 곳이 중요하니 피스톤 비슷한 것을 만드는 곳이라면 모두 조사해야 합니다. 증기기관의 가격과 크기도 알아놓으세요.”
내가 말을 시작하자 레지널드는 곧 수첩을 꺼내서 쓰기 시작했다.
말하는 속도와 거의 비슷하게 써 내려가는 모습을 보니 대대로 상인이었다는 그의 집안이 얼마나 교육에 투자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금속을 다루는 업체도 조사해 놓으세요. 특히, 질 좋은 강철괴나 강철봉을 만드는 곳이 우선입니다. 가죽 업체도 필요합니다. 완성품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그 이전 단계의 업체를 수배해 주세요. 금속이나 가죽의 경우 가격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최대한 좋은 품질이어야 합니다.”
“집안 관리는 어떻게 할까요?”
잠시 말을 멈추자, 레지널드가 물어왔다.
질문할 만했다.
집 안이 엉망이었으니까.
원래 딸려 있던 가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관리가 안 된 티가 역력했다.
“그건 알아서 하세요.”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외지에서 흘러온 사람이 타넬론에서 얼마나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지.
업체를 조사하고 수배하는 일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흥정하고, 사람을 다루는 일은 얼마나 잘할지.
그리고 일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하는지.
그런 것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잘하면 중요한 일을 맡길 것이고, 못하고 그에 걸맞은 일을 시키면 된다.
기대에 아주 못미치면?
그럼 근거지에 대한 관리나 맡기면 그만이다.
돈을 건네고 지시를 내린 나는 그를 내보냈다.
우리가 미궁으로 떠난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 작가의말
좀 늦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