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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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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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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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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삼정산의 정체

DUMMY

검존(劍尊) 적천백(赤闡魄). 광동의 작은 무가에서 태어나 뒷배 하나 없이, 수십년간 무림의 최고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대의 고수. 세력 하나 없던 젊은 시절부터 행해진 그의 협행(俠行)은 아직까지도 매화자들의 단골 소재이다. 그런 그를 존경하는 정파의 젊은이는 수두룩하게 많다. 참고로 이 자리에 있는 수장들은 젊은 시절, 검존에게 안 맞아본 사람이 없다.


그의 등장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휩싸였던 자리가 모두 조용해졌다.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검존 앞에 더 늙어보이는 맹주와 정파무림인들이 포권하며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다. 겉보기가 이상하지만, 무림맹주와 검존의 나이차만 해도 손자와 할아버지 수준이다.


"남궁의 정청이 검존 어르신을 뵙습니다. 은거하신 뒤 환동하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 곳에 계실지는 몰랐습니다."


"그래, 남궁의 아해는 정말 오랜만이구나. 저 산적놈이랑 제갈가의 아해는 그래도 가끔 마주쳤는데, 너는 수십 년만에 보는 것 같구나. 무림맹주가 되었다는 소리는 오래 전에 들었다. 지금이라도 예를 갖춰주랴?"


"아닙니다. 제가 어찌 어르신께 예를 받겠습니까. 편히 대해주십시오."


"뭐, 나도 그 편이 편하지. 젊을 때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구나. 아비를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지 할애비를 닮지 않겠다던 그 모습은 이제 보이지가 않아.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아비보단 조부를 닮은 모습으로 컸구나."


"....."


검존은 겉보기와 달리, 깊지만 서글픔이 담긴 시선으로 맹주를 바라봤다. 남궁정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그들간에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듯 하다.


"긴 말하지 않겠네. 병력들을 거두고 돌아가시게."


"어르신!"


맹주가 납득하지 못한 채로,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적천백은 허락하지 않고 손을 올려 제지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운을 드러내면서, 선포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 자리에 있는 정사 모든 무림인들에게, 오십 년을 넘게 지켜온 검존이라는 무게를 걸고 나 적천백이 말하겠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칼을 찬 무인으로 살아왔고, 협의를 추구하는 정파의 무인으로서 부끄럼없이 살아왔음을 단언한다.


칼 끝에 수많은 사마외도의 피를 묻혀왔다. 죽고 죽이는 비정강호에서 벌어진 살인들을 반성하지는 않겠다. 반대로 그대들은 이 적천백이 칼을 들어 지켜온 정파무림의 의기(意氣)와 양민, 무인들의 목숨들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내 모든 명예를 걸고, 삼정공가의 정의(正義)를 보증하겠다. 만일 삼정공가가 보증한 나 검존의 명예를 훼손시킬 시, 직접 검을 들어 그를 바로잡고 떨어진 명예를 감당할 수 있는 어떤 처분도 받아들이겠노라."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선언이었다. 말을 마친 적천백은 녹림왕 위무진에게 다가갔다.


"녹림의 수장이여, 그대가 우리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 것을 따지지 않겠네. 다만, 협력을 약속한 삼정공가가 중원의 다른 세력들에게 비난받을 일은 만들지 않을 것을 약속해줄 수 있겠는가?"


"나 녹림산왕 패호도 위무진이오. 정과 사를 떠나서 한 명의 사내로서 약속하겠소. 우리 녹림과 삼정공가의 관계로 인해 검존의 명예가 훼손될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말이오. 다만 검존께서도 이 것만큼은 확실히 해주십시오. 나 위무진이 이런 약속을 하는 것은 당신의 힘에 굴복해서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이오. 이 곳에 모인 정파놈들과 검존께서 계신들, 죽으면 죽었지 힘에 굴복하진 않소."


"물론일세. 자네는 젊을 적부터 나한테 숱하게 맞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사내이지 않았는가? 자네는 평생동안 이 적천백에게도 단 한번도 굴복한 적 없는 사내라는 것도 내 보증하지."


마지막으로 검존은 내게로 와서 묻는다.


"대(大) 삼정공가(三井公家)의 어린 가주도 약속해주시겠는가?"


"삼정공가의 공도유가 본가의 진의(眞意)를 보증해주신 검존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어르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바른 기준을 지키겠다는 것을요."


맹세하는 내게서 뒤돌아서서 모여있는 대중들에게 검존이 마지막 선언을 했다.


"보시다시피 내 모든 명예를 두 세력이 나누어 짊어졌네. 이후의 모든 결과는 본좌가 짊어질 것이니, 그대들은 더 이상의 소요를 일으키지 말고 돌아가시게."


그의 축객령에 무림맹 무사들은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우왕좌왕했다. 무림맹주 남궁정청은 할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애써 참아내며 검존께 짧게 목례하고 뒤돌아서자 무인들은 그를 뒤따라서 돌아갔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애써 견뎌내던 다리가 풀려 주저 앉았다. 검존의 뒤에 서있던 그의 손자, 적현이 나를 부축해주었다. 자리를 지키던 제갈상현과 당명천은 검존과 짧게 인사를 나눈다. 녹림왕과 그의 수하만 어색하게 자리에 서있었다. 내가 그들을 챙겨, 함께 본가로 입산하자고 말한다.


동생들은 상황이 끝났음을 마을에 알리고, 분가의 인원들을 복귀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나와 어른들은 고수들답게 빠른 속도로 본가로 돌아왔다. 이후로 나눌 이야기가 많았지만, 다른 이들을 모두 접객당으로 보낸 적천백이 제 집인 양 초옥의 안방으로 들어가 나만 따로 불렀다. 따라들어간 내가 오늘의 일에 감사인사를 드렸다.


"며칠밖에 안된 짧은 인연인데도, 어린 저를 믿고 나서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결코 어르신의 명예에 흠이 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인사는 아까도 했잖나.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라네. 이제 완전히 이 곳의 주인인 자네가 알아야 할 일이고 말이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되는 것이 없어서, 침묵하고 그가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자네는 내가 정말 건락 하나 얻어먹자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더라도, 그냥 저희 사는 모습을 좋게 보셔서 머무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내 대답에 빙긋 웃는 그가 뜻 밖의 이야기를 전했다.


"지금 자네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이 초옥말일세, 내 친우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은거지였다네."


크게 놀랐다. 어떤 말로 대답을 해야할 지 몰라서 역시 그냥 듣고 있기만 했다.


"이 곳의 이야기를 작년부터 듣긴 했지. 웬 어린애들이 모여살면서, 이것저것 만들어낸다고 말이야. 뭐 처음에는 잘된 일이라고만 생각했어. 오갈 데 없는 어린 아이들이 터전을 잡고 잘 살게 되었다니 말이야.


그래도 궁금하긴 해서, 감숙까지 발걸음했지. 그리고 이 아랫마을에 머물면서 어떤 아이들인지 주워듣곤 했어. 제법 좋은 소리를 듣고 살고 있기에 안심했다네. 저기 학당을 세우고 공짜로 밥을 주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소리에 현이도 보내봤다네.


입신양명시키겠다고 글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사람 베어버리라고 칼질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더군. 힘든 아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이야기에 더 궁금해졌지. 마침 무슨 대회를 한다기에 구경 좀 하려니까 제갈가 녀석이랑 거지두목놈이 보여서 잠시 자리를 피했네. 조용히 지켜보고 싶었거든.


녀석들이 다 떠나는 걸 확인한 다음 찾아온걸세. 자네는 내가 듣고 생각했던 것만큼 괜찮은 아이였어. 그래서 머물기로 한거지.


아차, 이 집의 본래 주인에 대해서 말해주는 게 우선이겠지. 그의 이름은 단리세극(段里世克)이라고 하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지. 진명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하지만 그는 생전에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었다네. 그 시절 세상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지. 무극천마(武極天摩), 이제는 교리를 따라 서역으로 이주한 성화신교의 마지막 교주일세."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궁금하긴 했었다. 전생의 무협관련 콘텐츠에서는 단골로 등장하는 최강의 존재 천마(天摩)가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말이다. 들리는 소문은 많았지만, 내부분열로 멸망했다던가, 천산을 버리고 중원 곳곳에 침투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던가, 근거없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교주의 뜻을 따라, 새로운 신인(神人)을 찾으러 서역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천마가 이 곳에서 은거하면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는 늙어 죽지 않았네.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 들어봤는가? 그는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실제로 등선했지. 내가 지켜보는 눈 앞에서 말이야. 아무튼 그 친구가 젊을 적부터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던 당시 얻은 별호가 있었는데 신기자(神器子)라고 하네.


이 산의 정상을 지키는 진법도 그가 구축한거지. 애초에 이 진법은 그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되어있을텐데, 어떤 영문인지 자네들 남매와 동물들은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더구만. 처음에는 자네가 그의 후손은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사당의 위패들을 보니 그 것도 아닌 것 같더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더는 짐작되는 게 없다네.


어쨌든 처음에는 내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현이를 앞세워 찾아왔지만, 막상 겪어보니 마음에 안드는 것이 없더구만.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자네는 시대를 잇는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하네. 오랜 과거에 머물고 있는 나와 이 시대를 담당하는 접객당의 아해들, 그리고 자네와 우리 현이 같은 어린친구들. 같은 하루를 살고 있음에도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공존하며, 자네가 추진하는 변화들을 받아들이고 있지.


그래서 남은 생을 이곳에서 머물고 싶어졌어. 우리 현이도 이런 곳에서 성장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말이야. 나이를 떠나서, 한 편으로는 그런 자네에게 존경심이 있다네. 부디 지금의 모습을 변하지 않고 유지해주면 좋겠어. 현이에게도 좋은 영향력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 그를 지켜주기 위해 부질없는 내 이름과 검을 걸었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놀라운 비밀들을 알게된 것과 상관없이 검존의 진심담긴 말들이 가슴을 울렸다. 이 중원 땅에도 이해자가 있었다. 시대를 이어서 미래로 나아가고 싶던 나의 갈망. 앞으로도 지켜줄 것이란 말보다도, 지금껏 살아온 과정을 이해해준 것이 더욱 기쁘게 다가왔다.


"이해자가 되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삶이 어르신의 기대와 맞아떨어질 지 모르겠지만, 살아왔던대로 추구하는 방향대로 변하지 않고 가보겠습니다."


더 적절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나오는대로 말했다. 그런 내 대답이 듣기 좋았는지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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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삼정산의 정체 +12 24.09.19 243 13 11쪽
36 36. 다 떠들었냐? +2 24.09.19 221 9 12쪽
35 35. 최강의 빈객이 제발로 굴러왔다. +5 24.09.18 268 10 10쪽
34 34. 산 남자끼리의 우정 +3 24.09.18 260 11 14쪽
33 33. 천하제일 장인대회 (3) +5 24.09.18 276 13 13쪽
32 32. 천하제일 장인대회 (2) +4 24.09.17 340 11 13쪽
31 31. 천하제일 장인대회 (1) +3 24.09.17 397 14 7쪽
30 30. 올해도 감자농사는 내려놓지 않을 겁니다. +4 24.09.16 400 12 12쪽
29 29. 드디어 김치찌개를 먹다. +4 24.09.16 432 14 12쪽
28 28. 새 가족의 탄생 +6 24.09.16 466 16 11쪽
27 27. 중원제일 산업도시, 삼정산 +4 24.09.15 504 17 13쪽
26 26. 후추를 얻다 +2 24.09.14 529 18 8쪽
25 25. 세가들과의 인연 +3 24.09.14 544 13 8쪽
24 24. 기간산업의 변화 +2 24.09.14 584 15 7쪽
23 23. 기틀 마련 +2 24.08.30 735 16 13쪽
22 22. 세상에 오롯이 서려 합니다. +3 24.08.29 725 17 12쪽
21 21. 은혜갚은 백가장 +4 24.08.28 726 16 12쪽
20 20. 전문 행정인력 진남매 +3 24.08.28 716 16 11쪽
19 19. 호구조사 +5 24.08.27 731 17 11쪽
18 18. 삼정공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3 24.08.26 750 17 11쪽
17 17. 새 가솔을 거두다 +6 24.08.25 762 19 12쪽
16 16. 가족 +6 24.08.25 745 20 7쪽
15 15. 새봄맞이 +5 24.08.25 756 19 9쪽
14 14. 삼남매 첫 나들이 +3 24.08.25 786 21 11쪽
13 13. 혹시 반로환동 하셨습니까? +4 24.08.24 790 18 16쪽
12 12. 이다지도 찬란한 것을 +4 24.08.23 814 19 10쪽
11 11. 밥값 하셔야죠? +3 24.08.22 808 18 11쪽
10 10. 다짐 +5 24.08.21 828 17 11쪽
9 9. 백예린 +3 24.08.21 838 2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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