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가족
계절은 완연한 봄이다. 풀들이 제법 올라오자, 아침마다 동생들이 먼저 나서서 망월엽초를 모아왔다. 이제는 밖에서는 큰일을 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공남매들이다. 커져버린 살림규모답게 할 일도 늘었다. 마을에서 품을 팔며 얻은 지식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감자밭은 순을 정리했다. 고구마밭은 씨감자처럼 고구마 채로 심었던 터라, 우후죽순 올라온 새순들을 끊어다가 간격을 두고 다시 옮겨 심었다.
다른 밭들도 김을 매거나 기슭에서 부엽토를 가져와 토끼와 닭의 배설물을 섞어 거름을 쳤다. 곳곳에 연결된 수로 때문에 물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닭을 치는 것도 많이 바뀌었다. 먼저 축사를 보수했다. 축사들은 작년 대공사 때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늘어난 지식을 활용해서 꽤 많이 손봤다.
흙바닥을 중원식 시멘트로 미장했고, 물그릇을 치우고 대나무 수로를 연결해서 신선한 물을 공급했다. 더운 여름에도 환기가 될 수 있게 벽 중간중간에 통풍구를 만들었다.
사료에는 튼튼한 알을 낳을 수 있도록 석회가루를 섞는 것도 배웠다. 동생들이 심심풀이로 잡아오는 개구리같은 것들을 영양식으로 주는 날도 있었다.
토끼 축사도 비슷하게 보수했지만 면적은 훨씬 컸다. 가끔씩 사냥을 나가는 동생들 손에 잡혀오는 새식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전문 농장수준의 규모가 되어버렸다. 솔직히 이제 토끼고기는 좀 지겨워졌다.
마늘은 씨앗으로 심을 경우 한쪽만 나온다는 것을 양곡점 아주머니께서 말씀해주셔서, 씨앗을 사지 않고 마늘을 사다가 그대로 심었다. 덕분에 제법 비싼 투자가 되었지만, 전생의 기억이 강렬한 공도유씨께서는 늘 마늘맛이 그립기 때문에 아깝지 않았다.
제 할 일이 점점 없어지는 도구는 위기감을 느낀건지, 심심했던 건지 전문 탐험견이 되어서, 약재당에 도움이 될만한 각종 소재를 수집해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고무발명의 진전은 이어지지 않았다.
늘어났던 일들을 어느 정도 끝마치고 여유가 생기자, 동생들은 자주 마을에 내려갔다. 부모님 없이 살다 보니, 저잣거리에서 어른들게 귀여움받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내가 채워줄 수 없는 영역이라 마음이 짠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픈 깨달음이 나를 때렸다. 뒤통수를 쎄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눈물이 났다.
부모님의 기일을 잊고 살았다. 어머니까지 돌아가신 후 한 번도 챙긴 적이 없다. 물론 그 이후로 하루하루 살아남기조차 버거웠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았으니까.
불효막심하다는 죄책감에 한 손이 저절로 가슴을 친다. 동생들을 키우면서 문득 생각이 들 때도 있었음에도, 제사는커녕 한번 찾아 뵐 생각조차 안했다니.
아버지는 군역에 동원되어 돌아가셨고, 전사한 병사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화전촌에서 병사하셨고,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했었다.
화장한 유골은 마찬가지로 유언에 따라 당시 살던 집 뒷마당에 감나무 밑에 묻었었다. 지금은 모두 불타 없어졌지만, 유골함은 남아있을 것이다. 멈추지 않은 눈물을 훔쳐내면서 중턱을 향해 내달렸다.
‘엄마, 죄송해요. 지금 갈게요.’
나쁜 새끼. 쓰레기 새끼. 불효자 새끼. 스스로를 경멸하고, 욕하고, 울부짖으면서 내달렸다. 이유도 모르는 도구가 함께 뛰어내려 왔다.
전신에 내공을 다 쏟아부으면서 쉬지 않고 내려가다보니, 반대로 올라오고 있는 동생들이 보인다. 마르지 않던 눈물이 더 펑펑 쏟아졌다. 내 앞에 다가온 동생들을 양 팔로 껴안는다.
‘미안해, 미안해.’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보는 동생들이 이유도 모르고 같이 소리내어 울었다.
한참을 울고난 뒤, 조금 진정이 되자 동생들에게 말했다.
“어머니를 모셔오자.”
그제서야 내가 왜 그토록 서럽게 울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 동생들이 다시 흐느꼈다. 나와 달리 동생들에게는 어렴풋한 기억뿐이지만, 그럼에도 잊지 않았었다고 한다.
동생들은 자기들끼리 마을에 내려갈 때나 돌아올 때마다, 빠짐없이 살던 집을 둘러보고 어머니 묻힌 곳도 찾아갔다고 한다.
소화가 말하기를 내가 잊은 것 같다고, 아니면 자기들 보살피느라 힘들어서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더 가슴이 찢어졌다.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삼 년이 지났는데도, 불에 탄 마을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을씨년스러웠다. 다시 뛰어가서 유골함이 있을 자리를 파냈다. 함의 윗부분이 보이자 다시 울음이 났다.
더 속도를 높이면서도 조심스럽게, 정말 조심스럽게 파냈다. 드디어 꺼내진 유골함을 바닥에 두고 눈물을 닦는다. 동생들을 옆에 세우고, 마음을 담아서 경건하게 큰절을 두 번 올렸다.
“어머니, 늦어서 죄송해요. 모시러 왔어요.”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천천히 산을 올랐다. 자식들이 살아가는 곳을 천천히 감상하시라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중에, 도구가 혼자 멈췄다.
도구와 처음 만났던 그 장소다. 도구가 걸어가는 곳을 보니 작은 돌무덤 같은 것이 하나 보인다. 저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난 날, 죽일 듯이 덤벼든 것도 이곳을 지키려는 의지였을 것이다.
어머니 유골함을 잠시 내려두고, 마찬가지로 동생들과 함께 큰절을 두 번 올렸다. 남들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에겐 도구도 가족이었기에, 짐승의 무덤일지라도 그 부모한테 큰절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 삼남매는 잠시 묵념하며 조의를 표했고, 도구는 새 가족들을 소개해주듯이 기분좋은 소리를 내며 무덤주위를 몇 번 돌았다. 그리고 다시 산을 올랐다. 초옥에 도착해서도 유골함을 안고, 다시 한 바퀴를 걸으면서 천천히 둘러보시게 했다.
지어놓고 용도를 정하지 않았던 누각을 열고 상을 가져와서 그곳에 어머니 유골함을 모셨다. 눈치좋게 소화가 깎아 온 나무 위패 두개를 받는다. 손가락에 진기를 싣어서, 경건하게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을 새긴다. 그리고 유골함 앞에 위패를 세웠다.
'공진위', '단지윤'
세워 둔 위패 앞에 서서, 동생들과 다시 한번 큰절을 두 번 올린다.
‘죄송합니다. 이제 잊지 않을게요.’
그날 밤, 동생들과 이불 속에 누워서 생전의 부모님과 있었던 이야기들을 해줬다. 대부분이 나만 기억하는 이야기들이지만, 동생들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도 있었다. 가끔씩 기억날 때마다 부모님 이야기를 해주기로 하면서 잠에 들었다.
동생들이 잠들고 나서, 나는 하나의 위패를 더 깎아서 사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부모님 위패 옆에 세웠다.
‘김옥자’
전생의 어머니 이름. 한글로 새겨진 위패를 보고 동생들이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오빠(형)에게는 부모님만큼 소중한 분이시라고. 그냥 그렇게만 말하련다. 이제야 삼정공가(三井公家)에 가족이 모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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