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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탱이
작품등록일 :
2024.08.1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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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7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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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호구조사

DUMMY

함께 삼정공가를 둘러봤다. 넓은 계단식 밭, 잘 다듬어진 길, 장원 전체와 밭까지 비는 곳 없이 이어진 대나무 수로, 뒤뜰의 연못과 욕조, 부엌, 소금과 양식이 채워진 곳간, 전문농장 수준의 축사 두 곳, 문명을 초월한 측간, 부모님들을 모신 사당, 우리가 사는 초옥, 마지막으로 그들이 살게 될 신축 가옥.


"이 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방이 두칸이니, 서로 좋으실대로 쓰실 곳을 정하시면 되겠네요. 잠시 쉬시면서 두분끼리 시간을 가지시고, 정리가 되시면 초옥에 찾아오십시오. 식사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쉬다니요. 준비를 돕겠습니다."


돌아서는 나를 따라 나오려는 것을 저지한다. 전형적인 이 태도를 빨리 고쳐둬야, 앞으로 내가 편할 것 같다.


"앞으로를 위해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격식을 차린다고 불필요하게 말이 길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할 말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할 것이고 제가 굳이 말이 없다면 정말로 괜찮은 겁니다. 지금은 도움이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응이 필요하실 겁니다. 동생분과 둘이서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지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나왔다. 마을에 내려가기 전에 점심을 어느정도 준비해둔 상태다. 나름 새 식구가 생기는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닭을 여덟마리나 잡았다.


도구까지 여섯식구에, 혹시 더 먹고 싶어할까봐 여유분 두마리까지. 생육이 느린 편이어서 여전히 귀한 취급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여유는 있었다.


중원에서의 첫 삼계탕을 했다. 아침부터 푹 끓여둬서 황기와 닭육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동생들의 기대가 느껴진다. 참기름과 소금에 묻힌 산나물, 보리밥까지...늦은 점심을 다 차려간다.


한상에 담으면 먹는 것도 눈치볼까봐, 삼계탕은 두당 한마리씩, 반찬은 적당히 나눠서 다섯 개의 그릇과 접시에 담는다. 적절한 시기에 진남매가 나왔다.


예린네가 머물던 시절에 쓰던 큰 상을 마루에 펴서 상차림을 끝냈다. 상 앞에 앉아있는 우리들에게 인사한다.


"살 집을 주시고, 이렇게 양식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당하게 제 몫을 다하도록 늘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소민, 진소한 남매입니다."


내가 일어나자 동생들도 따라 일어난다. 함께 목례하는 것으로 인사의 답을 한다.


"잘 부탁합니다. 아시다시피 공도유입니다. 이 집의 장남입니다."


"전 둘째, 공소화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언니."


"전 막내, 도하에요. 소한이랑은 동갑이에요."


진남매에게 바로 옆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올라오라고 했다. 이런 사소한 거 하나하나 차근차근 가르쳐야지.


음, 측간 사용은 소화가 가르쳐줘야겠네. 아무튼 남매는 차려진 상을 보고 또 놀랐고, 이미 이런 반응일 거라 생각해서 정리한다.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일입니다. 오늘 상차림은 평상 시보다 힘을 쓰긴 했지만, 대부분이 자급한 것이라 과한 것이 전혀 안됩니다. 언제나 차려진 식사에는 부담을 느끼지 마세요. 저도 근면성실한 사람입니다. 차려지면 잘 먹으면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특별한 일 없다면, 늘 이렇게 다섯이 모여서 식사할 겁니다. 식구끼리 밥은 편하게 먹읍시다. 우리 공가는 밥상 앞에서 예의, 격식 없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구요. 당장에는 어색하실테지만 이조차 노력해야 하는 일임을 기억하세요. 이상 끝! 식사 시작!"


내 말이 끝나길 기다린 소화와 도하는 아침부터 궁금해하던 삼계탕의 맛을 본다. 그동안도 충분히 잘 먹어왔지만, 잡탕스럽지 않고 완성된 작품답게 해본 것은 이 삼계탕이 거의 처음이었다.


화하둥이는 식사를 전투적으로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진남매의 속도에 맞춰주고 있었다. 이 조차 괜히 눈치볼까봐 동생들에게 목재창고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들의 식사도 끝나갔다. 공가만의 방식을 일러준다.


"우리집에서는 식사는 함께 하지만, 끝마치는 것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각자 다 먹었으면, 자기 먹은 것을 들고 나가서 설거지를 하지요. 그 외에도 대부분, 각자 맡은 일을 알아서 해나가는 게 하루 일과입니다.


맡은 일의 기준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맏형인 제가 요리솜씨가 좋기 때문에 매 끼니 식사를 담당하고, 어린동생들이 육체능력이 훨씬 좋기 때문에 농사일을 저보다 많이 하죠.


그 외 능력치가 필요없는 일은 그때그때 아무나 하는 편이구요. 이렇게 대다수의 살림살이가 합리적이고 효율을 중시하는 체계입니다. 이 집에서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본인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쫓기는 마음을 내려놓고, 여유를 찾아야만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두 남매도 내 성격을 이해한 듯 했다. 의욕충만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남매가 살짝 부담스러워지려 한다. 소민이 대표로 답한다.


"천천히 배워나가겠습니다. 사람이 필요하다 하셨지요? 필요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 때까지는 밥값을 못하더라도 신세 좀 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이 아이가 맘에 든 부분이 이런 점이다. 내가 하는 말을 있는대로 듣고, 듣고자 하는 말을 답한다. 앞으로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동생들이 창고에서 가져 온 것을 소민에게 건넨다.


"여기서는 자기가 지낼 집 현판은 자기가 직접 쓰고 걸어요. 우리집도 셋이 같이 썼고, 예린이 누나네도 그랬어요. 이제 이건 소민이 누나가 완성하시면 되어요."


어느 집 막내인지 이제 똑부러 지게 말도 잘한다. 긴장된 손으로 빈 현판을 받아들이고 침묵하는 소민을 보니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혹시, 글을 못 익히셨습니까?"


그제서야 놀란 소민이 대답한다.


"아뇨! 사서와 시경 정도는 압니다. 그저 받아도 될까 고민을 좀 했습니다."


이 시대의 소녀가장이 사서를 배웠다고? 얘네 정체가 뭐야? 속으로 놀랐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뭐, 일단 받으시고 천천히 고민하세요.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 저랑 차 한잔 하는 시간을 갖죠. 소화, 도하는 그동안 풍운강호(브루마블 중원판) 펼쳐놓자. 사람이 많아야 재미있지."


빈 현판을 방에 두고 나온 두 명을 약재당으로 데려왔다. 혹시 내가 미리 알아둬야 할 배경과 상황이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말할 수 있는 선에서만 하면 되고, 아니라면 굳이 꺼낼 필요 없다고도 했다.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담임선생님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진남매는 아랫마을 대정촌에서 살았다고 한다. 하급 관리출신 할아버지가 낙향해서 학당을 열었고, 그냥저냥 먹고는 살았더랜다.


어머니는 병약하셔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건 우리집이랑 비슷하네. 나이는 열 세살과 아홉살. 소미가 나보다 한살 어리고 소한이 도하와 동갑이다.


문제는 아버지인데, 평생 억지로 응시하는 향시를 늘 낙방하고 술로 인생을 허비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가산을, 질 안좋은 사람들과 상단을 꾸리다가 사기를 당해서 길바닥에 나앉았다고 한다.


당연히 평판이 안좋았던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고, 그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했다.


이 세상에서는, 아니 어쩌면 어디든지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야기.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의 인망은 좋았었기에, 처음에는 어려운 처지의 두 남매를 재워주고 먹여주는 이웃들이 있어서 신세를 졌다고 한다.


자신도 늘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허드렛 일로 품을 팔아 밥값을 했다고. 그렇게 살던 어느 날, 보살펴주던 할아버지 친우분의 손자가 자신에게 점점 손을 대려고 했고, 거둬 준 은혜가 있기에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야반도주해서 삼정촌에 왔다고 한다.


사람들 눈을 피해서 노숙도 많이 하고, 운 좋은 날은 품삯받은 집 부엌가를 얻어 잤다고 했다. 워낙 사람에 대한 불신이 강한 상태여서, 호의를 받아도 거절했는데 주로 객잔주인 아저씨였다.


정말 정말 사람 좋은 아저씨니까, 결국엔 마음을 열고 객잔 빈방을 얻어서 아저씨를 도우며 지내왔다고 한다.


알고보니 내 조수 일을 권유한 것도 아저씨란다. 먹고 자는 것은 걱정하지 말고 내게 일을 배우라고. 소한이 자주 아파서 약값이 많이 들다보니 객잔일을 도와도 모이는 게 없는 것을 알고 계셨으니까.


그렇다고 약초꾼일만으로 돈이 되겠는가? 그랬다면 전생 기억 없이도 잘 먹고 잘 살았어야지. 약초일은 부차적인 것이고, 아저씨는 내게서 사는 요령을 배우게끔 하시려던 것 같다.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그런 느낌이 왔다.


높은 수준의 배움 때문에, 혹시라도 반역 누명을 쓴 역적의 후손은 아닐까하는 염려와는 달랐다. 그냥 이 시대에서는 어느정도 겪을 수 있을만큼의 불운이었다. 그만큼 불운과 불행이 흔한 시대이다.


물론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더라도 품을 생각이었기도 하다. 자주 아프다는 소한의 상황도 물었다. 어떤 병을 앓고 있는 것인지, 주의해야 할 점이나 도울 수 있는 점 등을 말이다.


의원 말로는 선천적으로 약할 뿐, 특별한 병증은 없다고 한다. 음, 면역력 부족인가? 잘 씻기고 잘 먹여보자.


다 듣고나서 우리 이야기도 했다. 똑같이 흔한 이야기이다. 살아남아서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이지. 비슷한 처지의 고아들은 매해 겨울에 많이 죽는다.


어찌저찌 살아남기 급급했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고 산 속 생활을 개선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리고 뒤 늦게서야 진법의 보호 영역에서 살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고 말이다.


호신술로 익히려던 무공이었지만 알고보니 동생들이 무재를 타고나서 산생활이 더욱 편해졌다고도. 내가 현대인의 기억을 가진 것을 빼면, 그녀와 내 차이는 그냥 운이 좋고 나쁨 정도였다.


다 듣고나서 나는 즉각해서 두사람에게 역할을 분배했다. 소민은 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것. 글만 가르쳤으면 됐지, 솔직히 내 사상과 많은 면에서 충돌하는 유학을 굳이 동생들에게 배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더 편견없이, 조금 더 제한없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하지만 지식으로서, 어느 정도 교양으로서 익혀두는 것을 마을에 내보내고나서 깨달았다.


마침 할 일 없는 지식인이 생겼기도 하고. 소한은 오직 건강해지는 노력을 하기로. 그냥 건강하게만 자라라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진취적으로 건강해질 방법을 찾아가는 노력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보살펴주는 누나 없이도, 한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찾을 수 있다. 그냥 내 생각이다. 부차적으로 동생들의 말벗이 되어달라고. 혹시라도 사춘기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꼭 좀 말해달라고도.


모든 정리를 끝마치고 자리를 일어났다. 그럼 이제 다같이 친해질 시간을 가져야지.


마루에서 기다리던 동생들과 놀이판에 앉았다. 각자도생을 배우는 교훈의 놀이. 중원판 브루마블, 이름하여 풍운강호!


"주사위에 내공사용 금지! 전음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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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1. 천하제일 장인대회 (1) +3 24.09.17 353 14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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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9. 드디어 김치찌개를 먹다. +3 24.09.16 394 13 12쪽
28 28. 새 가족의 탄생 +6 24.09.16 425 15 11쪽
27 27. 중원제일 산업도시, 삼정산 +4 24.09.15 463 1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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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 세가들과의 인연 +2 24.09.14 502 11 8쪽
24 24. 기간산업의 변화 +2 24.09.14 538 13 7쪽
23 23. 기틀 마련 +2 24.08.30 691 15 13쪽
22 22. 세상에 오롯이 서려 합니다. +3 24.08.29 681 16 12쪽
21 21. 은혜갚은 백가장 +4 24.08.28 678 14 12쪽
20 20. 전문 행정인력 진남매 +2 24.08.28 676 14 11쪽
» 19. 호구조사 +3 24.08.27 686 14 11쪽
18 18. 삼정공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 24.08.26 704 14 11쪽
17 17. 새 가솔을 거두다 +5 24.08.25 716 16 12쪽
16 16. 가족 +5 24.08.25 702 17 7쪽
15 15. 새봄맞이 +3 24.08.25 714 16 9쪽
14 14. 삼남매 첫 나들이 +2 24.08.25 744 1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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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다짐 +4 24.08.21 786 16 11쪽
9 9. 백예린 +3 24.08.21 793 18 11쪽
8 8. 무림인과의 조우 +5 24.08.20 805 1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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