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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탱이
작품등록일 :
2024.08.1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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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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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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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0. 다짐

DUMMY

각자의 사정을 알고나니 딱히 좋은 게 없는 상황이다. 간단하게 짚어보면 우리는 숨어사는 처지이고, 저들은 누군가들에게 쫓기는 처지이니까.


우리 공가만을 위해서라면 당장에라도 내보내는 게 맞다. 좋지 않은 첫만남 뒤에 괜찮은 관계가 될 듯도 했지만, 그래봤자 하루도 안된 인연일 뿐이다.


우리의 안전을 내어주면서까지 챙겨 줄 의리는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정적만이 이어졌다.


이런 내 고민을 이해한다는 듯이 백예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포권하며 먼저 입장을 정리한다.


"목숨을 구함받고 좋은 식사까지 얻어 먹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당장에 뭐 하나도 갚지 못하고 발걸음을 떼는 것이 죄송하지만, 저희는 갈 길이 멀어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고자 합니다. 시끄러운 일들이 정리되는대로 반드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인사와 함께 금속으로 된 명패를 하나 받았다. 백가장의 보은패라는 듯 하다. 아직 밤이 긴 계절이고, 산 속은 더 빨리 어두워진다.


등불 하나 의지한 마루에서 일어선 두 명이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선뜻 그러라고도, 아니라고도 말 못하는 내게 목례하고 뒤돌아선다.


이게 맞나? 호위가 있다고는 해도 부상당한 아이가 고작 철검 몇개 얻겠다는 사람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으며 도망다니는 게 말이다.


심지어 그 호위도 부상당한 채로.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다.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떠나는 그들에게 뛰어가 길을 막았다. 여전히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이 결정 때문에 가족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기껏해야 한나절 인연, 그럼에도 내 안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댔다.


"밖이 어둡습니다. 내려가시더라도 날이 밝고 가시는 게 지금 서두르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그리고 잊으신 것 같은데 진입로에 진법이 있었다고 하셨지요. 저와의 접촉없이는 통행이 안 되었던 거 같은데요. 그리고 저는 오늘 누구들 덕분에 더는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묵고 생각해보시지요."


이화가 심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공자께서는 저희가 어찌 이러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은인께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고도의 진법이 존재하는 것은 확인했지만, 혹시라도 그 마저도 파훼되어 어렵게 지켜오신 이 곳이 세상에 노출될까봐 염려됩니다. 애초에 제 고집 때문에 생긴 일이라 지금도 충분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서로가 지금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고, 저희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마음 만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더는 은인께 위험을 떠넘길 수는 없습니다."


좋은 사람들이다. 저들이나 나나. 이런 상황에서 만났기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착잡할 뿐, 아마도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그저 다른 세상 사람들로 여기며 스쳐갔을 게 뻔한 세상.


하지만 지금은 한나절 인연에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복잡하게 꿈틀대는 울화 비슷한 것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잘못한 일도 하나 없이 그저 약자로 살아 온 지난 날들과 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인권의식이 기본이었던 전생의 삶.


약자의 삶이란 공통된 입장과 상반되는 사회의식이 내면에서 어우러진다.


왜? 이들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왜? 우리 공씨삼남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들이 반대로 죄인처럼 살아야하는가?


"우리가 죄 지었습니까?"


결국 터졌다. 바닥을 응시하면서 혼잣말처럼 쏟아냈다.


"그깟 날붙이 좀 얻겠다고 사람을 해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는데, 그런 놈들에게 쫓기는 어느 집 딸래미는 나보다도 어린 여자애이지 않나, 보호해 줄 어른들만 없을 뿐 누구의 것도 탐하지 않고 제 먹을 거 직접 벌어먹고 사는 아이들은 세상의 악의에 겁먹고 산꼭대기에 숨어 살아야 하질 않나..."


"은인도 아시지 않습니까. 옳고 그름따위를 따질 상황이 아니란 것쯤은. 현실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저희만 아니었다면 전부 없었을 일, 이미 벌어졌으니 한시라도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훗 날에 갚는 것이 가장 나은 길입니다."


"아뇨. 정했습니다. 은인이라고 하셨습니까? 갚는다고 하셨습니까?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머물고 가십시오."


그들에게 죄책감을 더 해줄 생각도 아니고, 동정심 같은 게 생겨난 것도 아니다. 영웅심리는 더욱 아니고. 그냥 화가 났다. 어디다 풀어야 할 지 모르겠는 그런 거.


"무림인들이 가볍게 외쳐대는 협(俠)이라거나 의(義)라거나, 혹은 유학자들이 제 멋대로 떠드는 군자의 덕목이라던가 그런 건 저는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고요. 이건 그냥...어쩌면 세상에 대한 제 혼자만의 화풀이일지도요. 우리 사이에 목숨 걸만한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린 아이의 순간적인 치기도 아닙니다. 짧지만 저를 겪어 본 그대들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어리석은 시골아이 같던가요? 그렇지 않다면 저를 믿으시고 제 뜻에 따라주십시오."


더 실랑이하고 설득할 생각도 없다. 어쩌면 공도유 인생 처음으로 타인에게 제 멋대로 구는 것일 수 있다. 두 사람의 손을 가로채서 끌고 가다시피 초옥으로 돌아왔다. 멀리서 보고 듣던 동생들과 도구까지 그들을 반긴다.


"저어...언니들, 무슨 일인지 저는 잘 모르지만 우리 오라버니 하자는대로 하면 다 잘될 거에요."


"나쁜 놈들한테 쫓기시는거면, 누나랑 제가 혼내줄 수도 있어요! 형아가 그랬어요. 저랑 누나는 차기 천하제일인이라고."


그들을 다독여주려는 동생들의 말이 따뜻하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하늘같은 장남에의 존경심 또한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게 이들에게 큰 위로는 되지 않겠지만.


"불편한 마음이실 거 압니다. 어쩌면 연 호위님은 괜히 제 집까지 동행한 것을 후회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냥 기다려서 해독제를 받을 걸 하고 말입니다. 이제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랍니까. 제가 아무리 맘 편히 먹으라 말해봤자 크게 와닿지 않으시겠지만, 한두시진 전까지 가장 마음 졸이던 사람은 접니다. 갑작스러운 화가 계기가 된 건 맞지만, 저는 마음을 잡았고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우리 사는 것을 좀 더 살펴보세요. 대책없이 이러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두 사람이 다시 행색을 풀고 방에 들어가 쉬기를 권했다. 동생들이 각자 방에 잠자리를 봐줬고, 안방은 소화를 포함함 여자 셋, 앞방은 나와 도하가 자기로 했다.


나는 계속해서 강경하게 두 사람에게 누워쉬기를 권했다. 우물쭈물만 하는 그들이 뭐라도 말하려고 입만 열면 내일 말하자면서 다 끊어냈고,끝내 그들이 눕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등불을 끄고 마루로 나왔다.


막내는 늘 그렇듯이 눕자마자 잠들었고, 아마도 여자들은 복잡한 기분으로 제대로 잠들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 귀염둥이 소화랑 있으면 조금은 맘을 내려놓게 될지도.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겸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임했다. 고수였다면 심마에 빠질 수도 있을 상태였지만, 고작해야 삼재심법이니까. 토납하면서 사색에 집중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무엇이 변했는가? 오늘을 계기로 협객(俠客)이라도 될 셈인가? 아니면 이 부조리하고 무법이 팽배한 시대를 깨트리는 혁명가가 될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숨어사는 것을 그만두고 평범하게 마을에 자리잡아서 객잔 점소이라도 될 것인가?'


모두 아니다. 단지 앞으로는 약자의 입장을 죄인처럼 여기지 않겠다는 마음 뿐이다. 산 속에 숨어살고 있지만 일어나지도 않은 위험에 벌벌 떨지 않을 것이고, 죄를 짓지도 않았음에도 죄인처럼 위축되는 것을 그만둘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가는대로 살 것이다.


시작은 피난처였지만, 이제 삼정산 꼭대기는 내 집이고 우리집이다. 무엇 하나 내 손 닿지 않은 것이 없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번창했다. 기연이나 다름없는 이 행운 속에서 하고싶은 거 다 해보면서 살아보련다.


이런 내 각오에 응원해주듯이, 주변의 정기가 내게로 찾아오는 것을 체감한다. 먼지만큼의 경계도 없이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기꺼이 그 것들을 맞이하며 숨을 들이쉰다.


제법 강직한 기운이 허락된 혈도들을 거세게 돌고나서 단전에 자리한다. 작았던 세상이 조금 커진 것을 느끼며 눈을 뜬다.


눈을 뜨고 스스로를 살핀 다음,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돌아보니 이화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소짓던 그녀가 축하인사를 건넨다.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공자."

"감사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 좀 자주내고 살 걸 그랬습니다."


그녀는 농담으로 화답하는 내게 미소지으며, 자신의 검병을 내게 내밀었다. 나도 말 없이 그 손잡이를 쥐며 검을 꺼내들었다. 무거웠다.


"운기할 때처럼 천천히 진기를 주입시켜보십시오."


시키는 대로 검에 내기를 불어넣자 검이 진동하며 소리를 내었다. 검명이었다.


"그 상태로 주입하는 내공을 천천히 올리십시오. 손에서 반발감이 느껴질 수 있는데, 힘으로 밀어넣으셔야 합니다."


불어넣는 내공을 늘리자 기운들이 반항하듯이 역행했다. 집중력을 유지한 채로 진기를 다스리며 힘을 쏟아 밀어넣자, 검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유형화되었다.


"검기입니다. 일류무사의 상징이지요. 당장에는 구현도 느릴테고 유지도 얼마 못 하시겠지만, 지금의 감각을 잊지 말고 수련하시면 됩니다. 다시 한번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얼떨떨했다. 길고 복잡했던 하루의 보상으로 충분했다. 언젠가는 도달하겠지만, 익힌 검법도 없이 고작 삼재심법뿐이었기에 시간이 오래걸릴 것이라 생각해왔다.


천재 동생들보다 먼저 일류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올봄은 꿈꿔왔던 내공괭이질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혼자만의 망상에 빠지려다가 이화가 있었음을 깨닫고 말을 건넨다.


"쉬이 잠 들지 못할 것은 소저나 저나 같은 듯 한데, 약차라도 한잔 나누시겠습니까?"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별구경 하기 좋은 시간이군요."


현대기준으로는 둘다 싸구려 멘트를 날린 셈이지만, 그런 생각이 덮어질만큼 밤공기가 청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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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 새 가족의 탄생 +6 24.09.16 425 15 11쪽
27 27. 중원제일 산업도시, 삼정산 +4 24.09.15 463 1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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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4. 기간산업의 변화 +2 24.09.14 537 13 7쪽
23 23. 기틀 마련 +2 24.08.30 691 15 13쪽
22 22. 세상에 오롯이 서려 합니다. +3 24.08.29 680 16 12쪽
21 21. 은혜갚은 백가장 +4 24.08.28 678 14 12쪽
20 20. 전문 행정인력 진남매 +2 24.08.28 675 14 11쪽
19 19. 호구조사 +3 24.08.27 685 14 11쪽
18 18. 삼정공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 24.08.26 703 1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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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 백예린 +3 24.08.21 792 18 11쪽
8 8. 무림인과의 조우 +5 24.08.20 803 1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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