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붉은 옥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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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
작품등록일 :
2024.08.27 13:28
최근연재일 :
2024.09.17 12:51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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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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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글자수 :
12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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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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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쇠망치를 들고 뭘 하겠단 걸까

DUMMY

늦은 시간.


자전거 도로가 엿보였다.


머리 위로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이 펼쳐졌다.


지나온 내 인생처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한 줄기 빛도, 희망도 없던 시절. 그래도 꿋꿋하게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다.


이제 겨우 25년을 살았지만, 그동안 겪어온 일이 너무 많은 탓에 족히 100살은 넘게 산 기분 이었다.


내 꿈은 평범했다.


그냥 남들처럼 사는 거. 딱히 넓은 집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연봉 수억 원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소한 일상을 누리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운명은 내게 호의를 베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군 제대 이후, 아르바이트와 일용직으로 모은 돈을 몽땅 날리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회에서 알게 된 놈. 나보다 세 살 위인 사기꾼에게 보기 좋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시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텐데, 라고 수백, 수천 번은 더 넘게 후회를 하며 이를 갈며 울분을 삼키곤 했다.


부모님 병원비가 부족하다고 말하던 그놈은 눈물까지 흘리며 내게 통사정했다.


나 또한 비슷한 처지였기에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놈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모조리 내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놈은 날 배신했다.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연락을 끊어버릴 줄은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난 충격에 휩싸였고, 세상을 원망하며 비관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한 채 껍데기만 남은 가죽처럼 세상을 살다 가긴 싫었다.


‘내가 어떻게 버텼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그놈과 함께 포장마차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나눠 마시던 술맛이 되살아났다.


매우 쓰고 고약한 기억.


생각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놈이 그렇게 연락을 끊고 난 이후.


처음엔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라 믿었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조만간 연락이 올 것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빠르게 지났고, 두 번 다시 사기꾼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도통 소식이 없네. 싹싹하고 부지런해 보였는데...’


놈이 일한다던 식당 사장님의 탄식을 뒤로 한 채, 결국 난 6개월간의 추격을 끝내버렸다.


매일 밤 빈속에 술을 퍼부어대는 짓도 그만두었고, 빠르게 이사 준비를 했다.


계약 기간도 끝났고, 사기꾼과의 기억이 얽혀 있는 그곳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사라고 해봤자 별다른 준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옷 몇 벌과 자잘한 물건들, 부모님이 보내주신 김치가 전부였으니까.


새로 구한 원룸은 많이 낡긴 했지만, 이것저것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어서 대충 몸만 들어가면 되는 장소였다.


물도 콸콸 잘 나왔고, 그런대로 깨끗해 보이는 세면대와 막힘없이 시원하게 잘 내려가는 변기. 그럭저럭 지낼만하다고 생각했다.


공간이 좁고, 입주 첫날 큼지막한 바퀴벌레를 보긴 했지만. 그런 것쯤은 이미 어릴때부터 많이 봐왔던 터라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내게 바퀴벌레는 애완동물, 아니 애완곤충 정도일 뿐이었고, 거미나 돈벌레, 그리고 장판 밑이나 습한 곳을 찾아다니는 집게벌레까지.


그것들 모두 별거 아닌 녀석들로 생각되었고, 지금은 매끈한 꼬리를 가지고 있는 살찐 쥐를 보아도 시큰둥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사 첫날 저녁.


소리 없이 바닥을 기어가는 바퀴벌레 한 녀석이 포착되었다.


뻣뻣한 날개, 통통한 몸집. 찔리면 그대로 살을 파고들 것처럼 보이는 딱딱한 다리와 탐욕스레 주위 모든 걸 자신의 레이더망에 가두려 하는 흉측한 더듬이.


“뻔뻔한 놈.”


바퀴벌레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데구르르.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녀석은 이 구역을 새로운 주인에게 내어주기가 싫은 건지 이빨까지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물론 그건 내 상상일 뿐이지만.


정말 빠드득, 거리며 이가는 소리가 귓속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탁.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입속에 든 라면을 계속 씹으며 뚫어져라 놈을 응시했다.


건방지게도 놈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내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쪽에 놓인 배달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냅다 놈의 등짝을 후려쳤다.


-빡!


한 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놈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두 번, 세 번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몸뚱이가 팟, 하고 터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수 초간 가느다란 다리를 떨며 내게 저항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내 손에 걸린 이상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곤죽이 되어버린 놈은 곧 움직임을 멈췄다.


평소 같으면 그냥 살려 보내줄 수도 있겠지만, 믿고 따르던 형이란 놈에게 사기까지 당한 마당에 내게 자비심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죽은 바퀴벌레를 치우고 나서 남은 라면을 먹어치웠다.


짐 정리는 대충 끝냈다.


다음날부터 다시 일자리를 구할 작정이었다.


구질구질한 기억은 다 잊고 이제부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운명은 나를 계속 지옥으로 몰아넣으려 했지만, 인정머리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세상 앞에 무릎 꿇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사 온 지 3일째 되던 날.


밤이었다.


그동안 겪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곱씹으며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고 있던 눈동자가 움직였다.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15미터쯤 앞.


딴생각에 빠져있었던 탓에 미처 포착하지 못한 광경. 눈동자가 닿은 곳엔 괴상망측하게 생긴 인간 하나가 서 있었다.


중세 수도사를 연상시키는 검은 옷자락, 하얀 해골 그림이 박힌 가면, 비정상적으로 길어 보이는 팔과 다리.


“저게 뭐야.”


뚫어지게 놈을 쳐다보았다.


희미한 가로등에 비친 그것은 인간으로 보기엔 체구가 너무 컸고, 움직임 또한 부자연스러웠다.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괴생명체라 느껴질 만큼 기괴하게 생긴 놈의 손엔 께름칙하게 보이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쇠망치였다.


‘영화라도 찍는 건가.’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카메라나 스탭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할로윈데이도 아니고, 외국도 아닌데 저런 괴상한 복장으로 서 있는 놈을 마주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꾸오오!”


“.......”


순간 머리칼이 쭈뼛거렸다. 몸엔 소름이 돋았고,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눈앞에 서 있는 저놈이 인간이 아닐 거라 확신했다. 이성적으론 설명할 수 없는 쎄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놈은 죽음과 공포의 감정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새벽 2시.


멀쩡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만큼 세상은 개판이었고, 매일같이 크고 작은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꼴로 서 있는 놈이라니.


하지만 이성이란 놈이 본능과 촉을 찍어 누르려 했다.


저건 그저 가면을 쓴 거구의 인간일 뿐이라고, 겁먹지 말라고 소리쳤다.


“크흠.”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으나 부정적인 생각에 얽매어있을 필요는 없었다. 어두웠고, 빛이라곤 가로등이 전부였다.


인간의 눈으로 어둠 속을 꿰뚫어 본다는 건 불가능했다. 가로등이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뭔가 잘못 본 게 틀림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상식적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공포감을 물리치려 애썼다.


지옥문이 뚫렸거나 지하 연구소에서 조작한 거인일 거란 상상은 집어치우는 게 상책이었다.


어쨌거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이 편했다.


놈을 무시하며 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처음엔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띄었다. 놈의 발밑에 무언가, 아니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


불길한 느낌.


거인이... 미치광이 거인이 누군가를 쓰러뜨린 게 분명했다.


사기꾼과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내 앞길에 엄청난 재앙 덩어리가 떨어지다니.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은 분명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아니, 숨이 붙어 있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식물인간에 가까운 상태일 것이다.


이런 엿같은 기분은 늘 맞아 떨어지곤 했다. 놈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아예 그 앞으로 걸어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확인을 해야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주춤거리며 서 있자, 내면에서 어서 도망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잘 못 본 걸 거야.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걸 거야.’


그 말을 주문처럼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럼. 진짜 그럴 것이다. 쓸데없는 상상은 괜한 화를 불러오는 법.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차피 저 앞에 서 있는 거인과 희생자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였고, 만일 저들이 그들만의 사이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미치광이는 저놈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가 지옥문을 뚫은 게 분명해. 그곳에서 저놈이 튀어나온 것이고.’


운 나쁜 인간이 미치광이 거인의 손에 걸려 죽은 게 분명했다.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뻣뻣하게 굳은 다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머릿속.


심장은 이미 한참 전에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려앉았고, 검붉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쿵쿵 울렸다.


머릿속이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었다.


더이상 앞쪽을 자세히 살펴보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굳이 더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저놈이 진짜 거인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아니면 발밑을 구르는 인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이라도 하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려 하다니.


나란 놈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녀석이었다.


이건 현실이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


쇠망치를 들고 있는 놈의 머리가 반쯤 돌아버려 제정신이 아닐 거라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놈이 인간인지 아닌지는 이젠 중요치 않았다. 새로 이사 온 동네 자체가 괴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하다못해 풀벌레 소리나 도로를 지나치는 차 소리, 바람소리라도 들려와야 하는데.


마치 나 혼자 출구 없는 세계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내 돈을 가지고 사라진 사기꾼과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앞으로는 좀 더 멋지게 인생을 살고자 집까지 옮겼건만.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과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불행 또한 끝났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지랄 염병인 세상이었다.


어둠의 그림자가 계속 내 뒤를 쫓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가슴이 갑갑해졌다.


끈질기고 추악하고 비열한 자식.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연거푸 내 인생을 망치려 덤벼든다고 생각하자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돌겠다, 진짜.


본능은 어서 뒤로 물러나라고 외쳤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엔 비겁자가 되긴 싫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판 붙어볼까.


주먹 한 방으로 놈의 턱뼈를 으스러뜨리는 환상적인 상상을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놈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뚫어지게 날 쳐다봤다.


-헉.


눈동자가 마주쳤다.


가면 사이로 뚫린 눈구멍에서 뜨거운 레이저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그것은 곧장 날카로운 쇠붙이가 되어 내 심장을 푹, 찔렀다.


‘저놈이 날 쳐다보고 있어. 미친... 거인이 날 알아차린 거야.’


마치 인상착의를 기록하고 있기라도 하듯, 놈은 한동안 움직임을 멈춘 채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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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데빌의 정체 2 24.09.15 8 1 13쪽
20 데빌의 정체 24.09.14 8 1 13쪽
19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 24.09.13 9 1 14쪽
18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4.09.12 8 1 13쪽
17 깜짝 파티 24.09.11 8 1 13쪽
16 회전목마 아이들 2 24.09.10 8 1 12쪽
15 회전목마 아이들 24.09.09 11 1 13쪽
14 이세계 편의점 24.09.08 10 1 13쪽
13 토머스의 수첩 4 24.09.07 10 1 12쪽
12 토머스의 수첩 3 24.09.06 9 1 14쪽
11 토머스의 수첩 2 24.09.05 12 1 13쪽
10 토머스의 수첩 24.09.04 11 1 12쪽
9 은신처 2 24.09.03 11 1 12쪽
8 은신처 24.09.02 12 1 13쪽
7 웰컴 투 헬 2 +1 24.09.01 17 1 12쪽
6 웰컴 투 헬 +1 24.08.31 19 2 14쪽
5 그것들 2 +1 24.08.30 18 3 13쪽
4 그것들 24.08.29 25 3 13쪽
3 엘리베이터를 타고 2 +1 24.08.28 35 3 12쪽
2 엘리베이터를 타고 24.08.27 42 3 14쪽
» 쇠망치를 들고 뭘 하겠단 걸까 24.08.27 64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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