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붉은 옥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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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
작품등록일 :
2024.08.27 13:28
최근연재일 :
2024.09.1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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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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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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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그것들

DUMMY

길은 앞쪽으로 쭉 펼쳐져 있었다.


나를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걷기만 하면 되었고, 여전히 주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더더욱 날 불안케 했다.


이대로 계속 가야 하는 할까. 아니면 움직이지도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꼼짝 않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


도대체 뭘? 뭘 기다린다는 거야? 그 망할 기계가 움직이길? 아니면 누군가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네 심장을 파먹길?


이곳에선 몸 안에 숨어있는 감정들이 뼈와 살을 뚫고 튀어나와 각각의 인격을 갖춘 생명체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놈들은 더더욱 선명해지고 강해져서 결국엔 나를 잡아먹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미치겠네.”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발걸음을 멈추면 그대로 영원히 석상처럼 굳어져 가루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영화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세계에 대한 모습들이 떠올랐다.


수많은 영상들과 인간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온갖 기괴한 것들이 슬그머니 고물 기계를 타고 내려와 내 주위를 에워쌌다.


다시 돌아가야만 해, 집으로.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그래야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과 판단은 누구라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았고, 나는 이상한 곳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고물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 한, 집으로 되돌아가긴 글렀다는 뜻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현실이 되고 말 거라는 미친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뭔가가 나를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릴 순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난 계속 걷고 있었고, 어느샌가 상가가 즐비한 거리를 지나 주택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까지 살아있는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몇 개의 주택을 지났을 때, 반쯤 놓고 있던 정신이 되돌아온 듯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저 평범한 주택이었다.


오래된 빌라들, 단층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초록색 대문 앞에 보이는 빨간 우체통, 골목 한쪽에 주차된 차들과 주인 없는 자전거.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빈 깡통과 빛바랜 종이 같은 것들.


한동안 나는 그것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분명 낯익은 것들이었으나, 이곳이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른 공간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개판이긴 해도 내가 살던,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던 비좁은 원룸이 그리웠다.


이렇게 황량한 공간은 꿈에서조차 오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금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역시나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몇 발자국 더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휴대폰이 떠올랐다.


왜 이제야 생각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이곳에선 모든 게 비상식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


생각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말이다.


서둘러 바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미친 거인으로부터 도망치던 중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한동안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빤히 휴대폰을 노려 보았다.


내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실망감, 그리고 황당함과 분노까지.


폰은 먹통이 되어있었다.


전원 버튼을 몇 번이나 눌러보며 재차 확인했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예상했던 결과야.’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무용지물이 된 그것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고장이 난 게 틀림없었다. 여긴 다른 세상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미치광이 거인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절로 전원이 켜질 것이란 것도 알았다.


4차원, 아니 이세계라고 해두자.


그게 무엇이든 이 엿 같은 곳에서 나는 혼자였고, 휴대폰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을 좀 더 탐사해볼지, 아니면 다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갈지 말이다.


그렇게 우두커니 선 채 고민하던 바로 그때였다.


“살려줘!”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쥐죽은 듯 고요한 이곳에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젖어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다.


칙칙한 공간을 가로질러 내 귀를 찌른 건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의 비명이었다.


소리를 지른 어린아이를 찾는 건지, 아니면 아이를 잡아먹으려는 뿔 달린 괴수를 기다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디야.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냐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다시금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엔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저기다!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달렸다.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닌, 아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주택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들리는 소리라곤 내 숨소리와 발소리가 전부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흡사 집채만 한 거인들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타다다닥!


한동안 바닥을 가로지르던 내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나 귀에 거슬리는 발자국소리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인은 없어. 이건 내 소리야. 내가 숨 쉬는 소리, 그리고 내 발끝에서 나는 소리가 전부야.’


여긴...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사라졌던 공포감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위험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고 했는데, 나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다. 게다가 더더욱 충격적인 건 고물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마른 침을 삼켰다. 뱃속이 꿀렁거렸다. 여전히 어린아이에 대한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지만, 더이상 앞으로 나아갔다간 그대로 끝장나 버리고 말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조금전... 엘리베이터가 작동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이 마지막 움직임이라면...’


이곳에 갇히고 마는 거다. 영원히.


아이의 비명소리가 희미해졌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이를 구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미 그것이 무엇이든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수 초간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거리는 다시 고요를 되찾았고, 여전히 나는 혼자였다.


움켜쥔 주먹에서 힘을 뺐다.


빠르게 몸을 돌렸다.


지나온 거리를 되짚어가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올바른 방향인지, 혹시 중간에 뭔가가 튀어나오지 않을지,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목구멍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비명쯤은 도로 삼켜 버려야 그나마 생존확률이 높아진다는 걸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이윽고.


주황색 지붕을 가진 2층 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비명 소리를 들으며 달려가던 중 얼핏 눈앞을 스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길을 잃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엔 빨간 우체통이 놓여 있었다. 초록색 대문을 가진 집. 그곳에서 잠시 멈춰섰다.


두 갈래, 혹은 세 갈래 길이 나올 때마다 주춤거렸지만, 용케도 상점이 즐비한 곳을 벗어나 처음 주택가로 접어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광경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꾸물거리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가슴속에서 울려 퍼졌다.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 전 지나쳤던 차도였다.


차도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했지만 어쨌든 차도는 차도였다.


드문드문 차들이 멈춰서 있었으니까.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다시금 귀를 기울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바닥에 버려진 종잇조각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였다.


길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어보며,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도로 위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큰 키에 구부정한 등, 기다란 팔다리를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놈이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살점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 찢겨나간 옷자락. 그리고 말라붙은 검붉은 핏자국.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걷고 있는 놈이 인간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저걸 뭐라고 부를까.


그러나 고민이고 뭐고 할 새도 없었다.


놈은 피로 범벅이 된 조그마한 인형을...


‘젠장. 저게 뭐야?’


놈이 들고 있는 건 어린아이였다. 5살이나 6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조금 전 들었던 비명 소리는 진짜 였던 것이다.


잘못 들은 소리도, 내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끔찍한 사실이었다.


-헉....스.


놈은 삐죽 튀어나온 이빨로 아이의 시체를 물어뜯고 있었다.


짐승처럼 게걸스럽게. 입에 피를 흠뻑 묻히면서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충격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아이를 구하고 싶었지만, 이미 싸늘한 시체,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흉물스레 보이는 저놈을 당장에라도 때려눕히고 싶었다.


하지만 놈들은 분명 무리를 이루고 살고 있을 것이다.


단지 지금 내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지금 당장이라도 우우, 하며 떼거리로 몰려들 수도 있었다.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만 한다.


놈에게 들키기 전에.


가끔 티브이를 보면 사나운 포식자가 힘없는 사냥감을 잡아먹는 장면이 나오곤 했다.


화면으로 그 모습을 볼 땐 그저 무심하게 넘기면서 원래 세상은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자연의 섭리고 질서였으므로. 이상할 건 전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저 광경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인간을 먹어 치우는 좀비라니.


게다가 난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는 상태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가운데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생존 본능이 그것을 찍어 눌렀다.


다행히도 놈은 아직까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먹이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득했던 정신이 되돌아오자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뱃속에서 뭐가 올라오든 간에 목구멍 밖으로 뱉어내기는 불가능했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뜨겁고 시큼한 액체를 가까스로 삼켰다.


여길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급선무였다.


나와 같은 인간, 그것도 어린아이 혼자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였다.


또 다른 놈이 근처 어딘가에서 어슬렁거리며 먹잇감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당연히 있지 않겠어? 저놈들은 무리를 이루고 살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으로 굴러떨어지다니.


되돌아가면 그 망할 엘리베이터를 영원히 없애버리고 말리라.


그리고 쇠망치를 든 미치광이 거인 또한 가만두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나는 재빨리 초록색 대문이 달린 집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우드득!


뼈 씹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숨소리를 죽였다.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다.


10초... 30초... 1분...


놈의 식사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배를 다 채운 것일까?


반쯤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 뻣뻣한 두 다리로 간신히 서 있던 나는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눈동자를 움직여 밖을 살폈다.


혹여라도 놈이 내 숨소리를 듣고 쫓아와 목을 물어뜯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계속 여기에 서 있을 순 없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또 다른 놈은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소리라든가 비명, 딱딱한 뼈다귀 같은 걸 무자비하게 잡아 뜯는 따위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없었다.


놈이 사라졌다고 판단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좀 더 대담하게 몸을 움직였다.


천천히 대문 밖으로 나갔다.


두어 발자국 앞으로 걸음을 옮긴 후,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러곤 조용히 놈이 있던 곳을 응시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먹이를 먹어치운 놈이 사라졌을 거란 기대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건, 옆쪽으로 조금 자리를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놈의 발치엔 찢기고 피범벅이 된 옷가지와 뼛조각 같은 것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배가 잔뜩 불렀기 때문인지, 아니면 갈 곳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놈은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끄륵끄륵!


좀비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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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불의 힘 루드락샤 24.09.17 5 1 14쪽
21 데빌의 정체 2 24.09.15 8 1 13쪽
20 데빌의 정체 24.09.14 8 1 13쪽
19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 24.09.13 10 1 14쪽
18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4.09.12 9 1 13쪽
17 깜짝 파티 24.09.11 9 1 13쪽
16 회전목마 아이들 2 24.09.10 8 1 12쪽
15 회전목마 아이들 24.09.09 11 1 13쪽
14 이세계 편의점 24.09.08 10 1 13쪽
13 토머스의 수첩 4 24.09.07 11 1 12쪽
12 토머스의 수첩 3 24.09.06 9 1 14쪽
11 토머스의 수첩 2 24.09.05 12 1 13쪽
10 토머스의 수첩 24.09.04 12 1 12쪽
9 은신처 2 24.09.03 11 1 12쪽
8 은신처 24.09.02 12 1 13쪽
7 웰컴 투 헬 2 +1 24.09.01 18 1 12쪽
6 웰컴 투 헬 +1 24.08.31 19 2 14쪽
5 그것들 2 +1 24.08.30 18 3 13쪽
» 그것들 24.08.29 26 3 13쪽
3 엘리베이터를 타고 2 +1 24.08.28 35 3 12쪽
2 엘리베이터를 타고 24.08.27 42 3 14쪽
1 쇠망치를 들고 뭘 하겠단 걸까 24.08.27 65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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