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붉은 옥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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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
작품등록일 :
2024.08.27 13:28
최근연재일 :
2024.09.1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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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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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처

DUMMY

좀비들은 근처에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품에 안고 있던 녀석이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이젠 새로운 주인에게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조금 더 주위를 둘러보려 했지만.


튼튼하고 안전한 은신처고 뭐고 간에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좀비 출현에 일단 모든 걸 중단하기로 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4층 빌라 한 채. 입구 쪽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아무도 없는 빈집, 조용한 그곳에서 흉물스런 무언가가 튀어나와 이빨로 내 목을 물어뜯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소리쳤고, 앞으론 정말 열심히 살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떨어져 버렸다.


이미 결정된 미래는 바꿀 수가 없는 걸까.


운명이란 놈은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이 틀림없었다.


야비한 자식.


어쩌면 날 시험해 보는 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 낙담하고 무릎 꿇길, 공포와 절망에 젖어 비굴하게 울며불며 도와 달라고 빌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절대 저놈들의 먹이가 되지 않을 거야. 맞서 싸울 거라고!


분노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싸움을 벌이는 좀비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빌라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숨을 죽이고 계속 유리문 밖을 응시하던 그때였다.


오른쪽 방향. 우르르 몰려드는 좀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놀랄 틈도 없이 커다란 건물 뒤편에서 꽤 많은 수의 좀비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싸움을 벌이고 있던 놈들을 포함해 오른쪽에 있던 무리, 그리고 건물 뒤에 있던 놈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잠시 뭘 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한 듯 서성거리거나 어기적거리며 근처를 배회했다.


놈들을 유심히 살폈다. 한두 놈도 아니고, 족히 수십은 될 듯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좀비들의 모습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기괴한 울음소리와 다소 괴팍해 보이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것들은 서로의 몸을 밀치거나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거나 고함을 지르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사나운 짐승으로 돌변할 듯 으르렁거렸다.


일촉즉발의 현장이었다.


끔찍한 살육의 장면. 닥치는 대로 상대방을 물어뜯거나 손톱으로 할퀴어 대면서 싸움을 벌이는 광경이 뒤를 이었다.


‘헉...’


나와 좀비들과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행히 어둠과 흉흉한 달빛이 내 모습을 가려주고 있었지만, 이곳 어디에도 내 편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폐부를 가르는 공기까지도 그런 느낌이었다.


놈들이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그건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그것은 밤에도, 낮에도 밖으로 돌아다닐 수가 없다는 걸 뜻했다.


엘리베이터가 계속 엿을 먹이는 한, 이곳을 탈출하는 방법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절망적인 감정이 몰려들었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흉물스럽게 생긴 놈들을 향하고 있었고,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여차하면 재빨리 도망칠 생각이었다.


한동안 미동조차 없이 서 있던 그때.


구름 사이로 숨어들었던 달빛이 튀어나와 사방을 비추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상대방의 머리통을 통째로 떼어내는 놈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내려앉은 달빛 덕에 피 튀기는 살육 현장이 더더욱 처참하게 느껴졌다.


밤이라 저것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던 조금 전의 생각을 바꿨다.


어린아이의 목을 물어뜯고 동족의 팔다리를 무자비하게 잡아 찢는 한낮의 그 끔찍한 장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충격이 몸을 휩쓸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머리가 어질거렸고, 호흡은 점점 가빠졌다.


이곳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저놈들 중 하나라도 날 발견하면 그 즉시 고깃덩어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강아지를 안은 팔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고개를 파묻고 있던 녀석이 꿈틀거렸고, 목구멍 밖으로 깡! 하고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허공으로 핏물이 튀어 올랐다.


놈들 중 하나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어둠 사이로 보이는 두 개의 눈동자가 피에 잔뜩 굶주린 악마처럼 붉게 빛났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기분 탓일 것이다. 어두운 밤, 더더군다나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놈의 눈동자를 본다는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


용기를 내야 한다. 용기를!


바보같이 굴지 말자고 뇌까렸다.


하지만 놈은 여전히 날 쳐다보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이곳으로 뛰어올 듯 어깨를 들썩였다.


몸 안에 있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곧 저 망할 놈들이 일제히 덤벼들 테고, 난 그대로 지옥행일 것이 뻔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와중에도 강아지는 계속 꿈틀거렸다.


입술 사이로 나지막이 말을 내뱉었다.


“가만히 있어, 꼬맹아.”


내 말뜻을 알아들은 건지 녀석은 움직임을 멈췄다.


이로써 저것들이 소리에 민감하다는 건 확실해졌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놈이 꺽꺽, 거리며 괴이한 소리를 계속 내질렀다.


몇몇은 하던 짓을 계속했고, 또 다른 몇몇은 그에 대꾸하듯 목구멍 사이로 괴상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놈들이 그러고 있는 사이 슬금슬금 뒤쪽으로 물러났다.


시선은 여전히 좀비들을 향해 있었다.


제발 내게 안겨 있는 꼬맹이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계단을 오르려던 찰나였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놈을 포함해 좀비 몇몇이 어기적거리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 나를 알아본 것은 아닐 것이다.


달빛이 바닥을 비추고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난 몸을 숨기고 있었고, 저것들이 그 정도로 시야가 좋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까?


내가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다 빈정대며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는 내면의 존재가 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좀비는 원래 그러니까...


영화 속 저놈들의 시력은 최악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말이다. 그럴 거라고 판단했다.


소리나 냄새 같은 거라면 몰라도. 시력은 영 꽝인 족속들.


놈들에게 욕설을 내뱉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또 다른 좀비들에게 발각될 확률이 높았다.


저만치 앞쪽에서 움직이고 있던 놈들의 타깃이 나는 아닐 거라고 멋대로 결론지으려 했지만.


놈들은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얼른 숨어야겠어.”


꼬맹이를 향해 말했다. 털 뭉치가 꿈틀거렸다. 얼른 뛰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내가 막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눈앞에 살벌한 광경이 펼쳐졌다.


어둠 속을 뚫고 튀어나온 또 다른 무리가 내 쪽으로 향하고 있던 좀비들을 덮쳤다.


그러자 뒤엉켜 싸움을 벌이고 있던 놈들을 비롯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팔을 흔들거리며 서 있던 놈들이 그 모습을 보고 광분했다.


피 튀기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나름 평온을 유지하고 싶었던 그룹인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평온함을 내던지더니 굶주린 늑대처럼 상대를 향해 덤벼들었다.


이로써.


내 눈앞에 드러난 좀비들 모두 싸움판에 끼어들고 말았다.


세상에나...


완전 개판이었다.


여긴 아군도, 적군도. 친구도 형제도 없는 이상한 세계가 확실했다.


하긴, 좀비들이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으려나. 놈들에게 친구 어쩌고 하는 거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쿵!


이윽고 몇 놈이 바닥에 쓰러졌고, 남은 놈들 중 몇몇이 날카로운 이빨로 동족의 살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보면 볼수록 놀라움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좀비들을 실제로 겪어본 나로 썬 이 정도로 막장인 족속들은 처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쳐 날뛰고 있는 살아있는 시체들을 보고 있자니 급속도로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이곳을 떠돌며 매일같이 사나운 좀비들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더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괜찮아? 무서워서 그래?”


바르르 몸을 떨고 있는 강아지를 흘끔거렸다.


만일 내가 정신을 놔버리거나 포기한다면. 이 녀석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었다.


어두운 결말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공포와 뒤섞인 쓸모없는 상상의 끈을 싹둑 잘라 버렸다.


바로 지금이다!


저놈들이 동족을 뜯어먹으며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을 때 도망쳐야만 했다.


하지만 어디로?


계단을 오르려다 잠시 행동을 멈췄다.


유리문 밖으로 나간다면 분명 놈들에게 발각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아침까지 이곳에 서 있기엔 너무 위험했다.


유리문 밖과는 달리 빌라 안쪽은 줄곧 조용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 같았다.


귀를 기울였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나 귀에 거슬리는 숨소리, 비릿한 피 냄새가 풍기진 않는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위험은 없어 보였다. 고개를 돌려 다시 밖을 응시했다.


놈들은 여전히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다. 꺽꺽, 거리거나 끽끽, 거리면서. 외계어 같은 말을 지껄이며 있는 힘껏 상대의 목을 조르고 팔다리를 잡아 뽑고 살을 찢었다.


최후의 한 놈만 남을 때까지 전쟁을 벌일 작정이라는 걸 알았다.


여긴 동족이고 뭐고 없는, 먹고 먹히는 비정한 세계였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이젠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아남으로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용케 놈들의 눈을 피해 다른 곳을 찾는다 해도 그곳이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주위가 어두웠고, 저것들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다른 놈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이곳에 몸을 숨기는 게 최선이란 판단이 섰다.


발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재빨리 빌라 안쪽으로 이동했다. 1층, 오른쪽과 왼쪽.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문이 열렸는지, 잠겼는지조차도 알 길이 없었다. 굳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고개를 들어 2층 계단을 응시했다.


빛 한 줌 없었지만, 하얗게 페인트칠을 한 벽에서 희뿌연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덕에 다행히 어느 정도 앞을 식별할 수가 있었다.


위험은 없어 보였지만, 잠시 고민했다. 좀 더 위로 올라가야 할지, 아니면 1층에 몸을 숨겨야 할지 말이다.


그러나 이미 내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맨 위층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정글처럼 위험하고 지옥의 가시밭처럼 끔찍한 곳이었다. 본능이 모든 걸 판단하고 움직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럴 때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2층을 지나 3층에 도착한 후, 역한 피냄새나 악취가 풍기진 않는지 확인했지만 별다른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되도록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다.


4층에 도착했다.


문 앞에 선 채 잠시 심호흡을 했다.


쥐 죽은 듯한 고요.


아무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비명이나 뭔가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소리라도 들려오길 바랐다.


죽음의 강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양쪽에서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문. 그중 하나를 택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감이랄까. 촉 같은 거였다. 선택은 신중해야 했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물끄러미 문손잡이를 응시했다.


붉은벽돌 빌라 4층.


내가 선택한 이곳에 만일 무언가가 숨어있다면. 아니, 살고 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 밤 내 생명은 끝장인 셈이었다.


혹시 주위에 늘어선 주택들이 좀비들의 은신처가 아닐까. 동족을 잡아먹는 놈들도 어디선가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테니까.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캄캄한 눈앞이 더더욱 어두워지면서 사방이 가로막힌 미로처럼 다가왔다.


그래도 이미 결정한 이상 몸을 돌릴 순 없었다. 밖엔 놈들이 우글거렸고, 밤이 깊어갈수록 더더욱 많은 좀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쇠붙이의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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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불의 힘 루드락샤 24.09.17 5 1 14쪽
21 데빌의 정체 2 24.09.15 8 1 13쪽
20 데빌의 정체 24.09.14 8 1 13쪽
19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 24.09.13 9 1 14쪽
18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4.09.12 8 1 13쪽
17 깜짝 파티 24.09.11 8 1 13쪽
16 회전목마 아이들 2 24.09.10 8 1 12쪽
15 회전목마 아이들 24.09.09 11 1 13쪽
14 이세계 편의점 24.09.08 10 1 13쪽
13 토머스의 수첩 4 24.09.07 10 1 12쪽
12 토머스의 수첩 3 24.09.06 9 1 14쪽
11 토머스의 수첩 2 24.09.05 11 1 13쪽
10 토머스의 수첩 24.09.04 11 1 12쪽
9 은신처 2 24.09.03 11 1 12쪽
» 은신처 24.09.02 11 1 13쪽
7 웰컴 투 헬 2 +1 24.09.01 17 1 12쪽
6 웰컴 투 헬 +1 24.08.31 18 2 14쪽
5 그것들 2 +1 24.08.30 18 3 13쪽
4 그것들 24.08.29 25 3 13쪽
3 엘리베이터를 타고 2 +1 24.08.28 34 3 12쪽
2 엘리베이터를 타고 24.08.27 42 3 14쪽
1 쇠망치를 들고 뭘 하겠단 걸까 24.08.27 64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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