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붉은 옥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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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
작품등록일 :
2024.08.27 13:28
최근연재일 :
2024.09.1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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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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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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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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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의 수첩 2

DUMMY

머리 가죽이 바짝 조여들고 두려움에 뱃속이 꿀렁거리려는 찰나 고개를 돌렸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밤이었고, 밖엔 좀비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딘가를 향해 떼를 지어 몰려가긴 했지만, 주위를 기웃거리며 밤새 돌아다니는 놈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우선은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이곳에 숨어있어야 한다.


토머스의 수첩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7월. 늦은 오후.


토머스가 적어 놓은 숫자를 응시했다.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의 열쇠를 풀고 있기라도 하듯.


이곳에 굴러떨어진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휴대폰 또한 먹통이 되어 날짜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죽은 토머스는 날짜를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시간이란 놈은 이곳에선 고물 엘리베이터만큼이나 쓸모없는 것이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결국 나는 토머스가 적은 날짜가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정확히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불분명했고, 어쩌면 맛이 가버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끄적거렸을 수도 있었다.


시간 보다 더 중요한 건 토머스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살아있었더라면 우린 진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용감하게 좀비들을 물리치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멋진 모험을 할 기회를 잃어버린 게 너무너무 아쉬웠다.


수첩에 적힌 글을 읽을수록, 그리고 밤이 깊어질수록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점점 많아졌다.


...그 뒤로도 넋두리 비슷한 말들이 계속 이어졌다.


여길 탈출하고 싶다던가, 좀비들을 먹어 치우고 그 뼈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싶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잔뜩 광분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토머스의 말과 감정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는 심장마비가 왔을 것이다. 공포에 잔뜩 짓눌린 심장이 결국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자멸하고 만 것이다.


나 또한 그와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 때문에 숨이 막혀 죽거나 굶주림에 지쳐 죽을 수도 있었다. 나를 따르던 자그마한 꼬맹이와 함께 말이다.


무서움은 그렇다 쳐도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인간은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길을 잃고 먹을 게 없다는 건 머지않아 죽을 거라는 뜻이었다.


내가 그렇게 수첩에 적힌 글에 열중해 있을 때였다.


엎드려 있던 꼬맹이가 고개를 움직였다.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창가를 노려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내가 물었다.


그러나 곧 녀석이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고 창문 밖을 살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들.


사라졌던 좀비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수백의 좀비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조금 전.


그것들이 한바탕 거리를 휩쓴 이후, 새벽이 올 때까지 잠잠할 것이라 생각한 내 예상이 틀리고 만 거다.


“깍 두루! 깍케케!”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놈들은 앞다투어 서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이빨로 목덜미를 물어뜯고 팔다리를 잡아 뜯으며 사납게 그르렁거렸다.


전쟁이 또 시작됐군.


행여나 내 모습이 보일까, 커튼으로 창문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뒤를 돌아 꼬맹이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쉿!”


행여나 녀석이 눈치 없이 짖을까 염려하며 일부러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꼬맹이는 한쪽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강아지가 윙크를 하다니.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은 친구였다. 겉보기엔 좀비는커녕 토끼나 다람쥐 세상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을 정도로 약해 보이는데, 그래도 꽤 배짱이 있는 녀석 같았다.


꼬맹이는 내게 긴장하지 말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더니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다시 좀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커튼을 살짝 젖힌 채, 그 사이로 밖을 살폈다.


지옥이 따로 없는 광경. 끝내주는 장면이 계속 이어졌다.


카메라가 없는 게 아쉬웠다. 찍어 놓으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공포특집이었다.


영화를 보듯, 한동안 그것들의 모습에 빠져있었다.


비처럼 피를 흩뿌리고, 살점을 먹어 치우며 뼈를 내던지는 그들만의 놀이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계단을 지나 이곳으로 쳐들어오진 않을까.


걱정하며 토머스의 나이프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럴 위험은 없어 보였다.


그들만의 재밌는 게임을 끝마친 좀비들이 또다시 어딘가를 향해 사라질 무렵.


조용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버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에 골로 가버릴 지경이었다.


내일 아침 당장 저것들과 마주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일단 쉬고 싶었다.


나이프를 다시 배낭 속에 집어넣고 바닥에 누워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꼬맹이가 갑자기 내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요녀석!”


말티즈를 안아 들었다.


가벼웠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살이 많이 빠진 듯했다. 주인이 보고 싶은 건지 아니면 먹을 걸 달라고 그러는 건지 녀석이 끙끙, 거리며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래. 알았어. 착하지?”


일단 불안해 보이는 꼬맹이를 달래려 손으로 계속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녀석은 몇 번 더 몸을 떨더니 혀로 내 손을 마구 핥았다.


-헥헥.


귀여운 이미지를 폴폴 풍기고 있는 꼬맹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살아있다는 게 느껴졌다.


여긴 지옥이긴 하지만, 어쨌든 난 살아있었다. 그건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반드시 이곳을 탈출하고 말리라, 다짐하며 한동안 꼬맹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놀아 주었다.


토머스의 가방에 개껌이 없다는 게 유감이었다. 그것만 있었더라면 정말 완벽한 생존 가방 이었을 텐데 말이다.


녀석은 계속 꼬리를 흔들거나 내 손가락을 물어뜯는 흉내를 내며 장난을 쳤다.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아니면 개껌이 그리웠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밥은 내일 줄게.”


좀비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설마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제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질 않기만을 바라며.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비몽사몽 간에 눈을 떴다.


꼬맹이가 날 보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앞발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자세로.


아마도 내가 잠에서 깨기만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배가 고파 보였다. 목도 말라 보였고. 심심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이리와.”


꼬맹이는 한동안 내게 재롱을 피워댔다. 이리저리 구르기도 하고 혀로 내 뺨을 핥거나, 깡! 소리를 내며 짖거나 끙! 거리며 앞발로 누워 있는 내 얼굴과 어깨를 툭툭 치다가 냅다 도망을 가는 놀이였다.


이곳이 좀비들의 세계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당장 기지개를 켜고, 설탕을 왕창 집어넣은 커피를 마시며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야호! 소리를 내지를 수 있을 만큼 끝내주는 기분.


즐겁고 유쾌한 놀이었다.


새로운 친구가 생긴 덕분이었다.


꼬맹이 녀석이 혀로 자신의 앞발을 핥으며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달은 보이지 않았다. 꽥꽥거리며 야단법석을 떨던 좀비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세계의 아침이었다.


눈동자를 움직였다.


꼬맹이는 여전히 자신만의 놀이에 빠져있었다.


“오늘부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거야. 냄새나고 못생긴 놈들하고 몸싸움을 벌일 수도 있어. 그땐 알아서 도망쳐라.”


-꿍!


표정으로 보아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너도 같이 싸울 거라고?”


-깡!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뻣뻣하게 굳은 팔다리를 풀었다.


탁자 위 램프에선 여전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햇살이 희뿌옇게 보여서 그런지 램프의 빛이 더 밝게 느껴졌다.


허리를 굽혀 물병을 집어 들곤, 그릇에 물을 조금 부어 주었다.


꼬리를 힘차게 흔들던 녀석은 목이 말랐는지 급히 물을 먹기 시작했다.


“조금밖에 없어.”


꼬맹이가 목을 축이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토머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체였으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남자. 흐트러짐 하나 없이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그의 모습을 그리며 천천히 거실을 가로질렀다.


아무리 시체라지만 그래도 아침 인사를 거를 순 없었다.


이곳에서 만난 유일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방문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벌떡 일어나 아침 인사를 건네진 않을까, 다시금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매끄럽고 서늘한 손잡이의 느낌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문을 열자 먼지 냄새, 그리고 시체 냄새가 풍겼다.


어젯밤에도 이런 냄새가 났었던가. 그런 기억은 전혀 없었다.


미동조차 없이 누워 있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안녕, 토머스? 안녕...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별 인사가 필요했다.


게다가 난 그의 배낭을 가져갈 참이었다.


필요한 걸 남겨줘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곳에서 며칠 더 기다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짓이라고 결론지었다.


괜히 시간만 낭비할 뿐. 그래 봤자 지치기만 할 뿐이다.


내가 진짜로 미쳐버리기 전에, 더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목격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아직까지 정한 바가 없었다.


사나운 좀비들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놓은 것들도 없었다.


미래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사방에서 좀비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판국에 모든 일이 내 계획대로 움직여 줄 리가 없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이거든 저거든 간에 말이다.


그를 뒤로 한 채 문을 닫으려는 찰나였다.


그의 머리맡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반쯤 접혀 있는 메모지였다.


시간이 지체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메모지를 펼쳤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힌트라도 적혀 있는 것일까?


그러나 본능은 그게 아니라고 소리쳤다.


배낭 속에서 발견한 수첩과 똑같은 필체가 눈앞에 드러났다.


더 이상의 방황은 끔찍하다.

누군가... 그것이 언제 일지 모르겠지만.

나를 발견한다면

땅속에 묻어 주었으면 한다.

밤마다 사방에서 튀어나와 우글거리는 저것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깊고 깊은 곳에 날 숨겨 주기를.


신의 가호가 있길.


-당신의 친구 토머스로부터


할 일이 늘었다는 걸 알았다.


소원대로 그를 땅속에 묻고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시체를 묻을 곳을 찾을 수나 있을까.


땅을 파려면 단단한 도구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삽 같은 것 말이다.


운 좋게 삽 비슷한 걸 구한다고 하더라도 좀비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었다.


물론 내겐 용감한 보초병이 있긴 하지만.


침대 발치께에 앉아 있는 꼬맹이를 발견했다. 새로 만난 주인을 잃어버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내 옆에 꼭 붙어 있을 기세였다.


눈이 마주쳤다.


“배고프지?”


빠르게 움직이는 꼬리.


-헥헥.


“조금만 기다려.”


다시 토머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이제 웃고 있었다.


하마터면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을 뻔했는데, 빠르게 식어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묻어 줄 친절한 이웃을 만나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 듯했다.


“토머스?”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의 부탁을 모른 체하며 그냥 가버릴 수는 없었다.


“내게 행운을 빌어줘.”



그로부터 1시간 후.


배낭에서 꺼낸 육포와 비스켓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난 뒤, 빌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자그마한 주택에서 곡괭이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마터면 그걸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잠깐! 멈춰! 여기 필요한 게 있어.


이건 미친 짓이라고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피던 중 내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멈칫거렸다.


여기야! 여기!


어릴 때 농사를 지어본 경험도 없었고, 곡괭이라는 물건을 잡아본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원하는 걸 손에 넣자 기분이 좋아졌다. 뿌듯함이라고나 할까?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수선화를 닮은 노란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이 좋겠어.


적당한 곳을 고른 나는 즉시 곡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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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불의 힘 루드락샤 24.09.17 5 1 14쪽
21 데빌의 정체 2 24.09.15 8 1 13쪽
20 데빌의 정체 24.09.14 8 1 13쪽
19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 24.09.13 9 1 14쪽
18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4.09.12 8 1 13쪽
17 깜짝 파티 24.09.11 8 1 13쪽
16 회전목마 아이들 2 24.09.10 8 1 12쪽
15 회전목마 아이들 24.09.09 11 1 13쪽
14 이세계 편의점 24.09.08 10 1 13쪽
13 토머스의 수첩 4 24.09.07 10 1 12쪽
12 토머스의 수첩 3 24.09.06 9 1 14쪽
» 토머스의 수첩 2 24.09.05 12 1 13쪽
10 토머스의 수첩 24.09.04 11 1 12쪽
9 은신처 2 24.09.03 11 1 12쪽
8 은신처 24.09.02 12 1 13쪽
7 웰컴 투 헬 2 +1 24.09.01 17 1 12쪽
6 웰컴 투 헬 +1 24.08.31 19 2 14쪽
5 그것들 2 +1 24.08.30 18 3 13쪽
4 그것들 24.08.29 25 3 13쪽
3 엘리베이터를 타고 2 +1 24.08.28 35 3 12쪽
2 엘리베이터를 타고 24.08.27 42 3 14쪽
1 쇠망치를 들고 뭘 하겠단 걸까 24.08.27 64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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