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붉은 옥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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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
작품등록일 :
2024.08.27 13:28
최근연재일 :
2024.09.1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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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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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헬 2

DUMMY

역시나 이번에도 엘리베이터는 심하게 요동쳤고, 그 바람에 난 중심을 잃고 말았다.


품에 안겨 있는 녀석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조금씩 희망의 끈이 가늘어졌지만 그래도 그걸 놓을 생각은 없었다.


얼마 후 도착한 곳.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 너머 바깥 공간을 응시하던 나는.


...조용히 웃었다.


내 눈에 비친 광경이 좀 전과는 달라져 있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건 분노로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얘긴 이럴 때 하는 소리 같았다.


강아지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좀 전과 같은 상황이란 걸 깨달았는지,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눈치 하난 빠른 녀석이었다.


이쯤 되면 엘리베이터가 날 집으로 데려다줄 확률은 거의 없다는 걸 알아챘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걸 타고 여길 왔으니, 집으로 데려다줄 것도 엘리베이터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고집을 부렸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확인했다. 역시나 전원이 들어오질 않았다.


함정에 빠진 기분에 이어 이번엔 아예 시궁창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었다.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늪지대와도 같은 곳.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 운명이 좀비들과 뒹굴며 먹고 먹히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차라리 하루 라로 빨리 그것들의 이빨에 꿰뚫려 인간성을 잃어버린 채 영원히 썩지 않는 시체가 되어 이곳을 누비며 살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절망이란 놈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날 지배하려 했다.


여기서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려? 좀비들의 먹이가 되려면 애쓰지 말고 얼른 그렇게 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흔들리던 내 눈동자가 악다구니처럼 빛났다. 어느새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날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는 고물 따위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주먹을 뻗어 모든 걸 깨부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거짓 희망인지 아니면 악마의 장난인지 모를 것들이 내게 수작을 걸어왔다.


계속 하라고... 멈추지 말고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켜보라고 말이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팔을 뻗었다. 벽에 붙어 있는 버튼을 향해서.


망할 놈의 세상이라고 지껄이면서.


.

.


그로부터 1시간쯤 후.


지친 얼굴로 엘리베이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물 기계를 계속 움직인 탓이었다.


지금이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눈앞에 지옥이 펼쳐질 때마다 휘몰아치던 분노를 가라앉히고 빠르게 몰려드는 공포심을 뒤로 물리치면서 연신 버튼을 누르고, 덜컹거리며 요란스레 소리를 내지르던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긴 나는.


시뻘게진 얼굴로 결론을 내렸다.


도끼로 산산조각 내도 시원찮을 이 망할 고철 덩어리는 절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긴 시간 동안 그 모든 걸 묵묵히 견뎌내고 있던 강아지가 몸을 뒤척였다.


고개를 든 녀석은 내 얼굴과 엘리베이터 밖을 번갈아 바라보며 코를 벌름거렸다.


비릿한 피 내음, 썩은 악취, 그리고 숨 막힐 듯한 어둠과 정적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질까 봐 그러는지 녀석이 바짝 긴장하며 다시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문.


이 고물 기계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끊임없이 날 희롱하고 결국엔 좀비들의 먹잇감으로 내던져 줄 야비한 녀석 말이다.


한층 더 깊어진 어둠을 노려보았다.


재빨리 뛰던 심장은 이제 조용히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거부하고 싶던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밤이 되면 놈들이 사방에서 꾸역꾸역 몰려들 것이다.


도망갈 데가 없는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때 강아지가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더니 목구멍 밖으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건지.


“쉿.”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행여나 누가 들을까, 두려웠다.


그런 내 맘을 알아챈 것인지 한차례 몸을 떨던 녀석은 곧 하던 짓을 그만뒀다.


손으로 작은 머리와 등을 몇 차례 쓰다듬어 주었다. 조용히 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어쩐지 품에 안겨 있는 요 녀석이 앞으로 계속 말썽을 피울 거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야겠어.”


그렇다 해도 강아지를 버릴 생각은 없었다.


밤이 더 깊어진 이상,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보다 더더욱 위험한 상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몸을 움직여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어디서 놈들이 튀어나올지 몰라 걱정이 됐지만, 더는 꾸물거릴 수가 없었다.


건물 내부를 가로질렀다. 텅 빈 경비실 따윈 이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동안 아무도 없던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을 리 만무했다.


막상 건물 밖으로 나오자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해가 지기 전에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한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처음엔 운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해가 완전히 사라진 지금,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름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 둥근 형체.


달이라 부르기엔 너무 빨갛게 익어버린 놈. 흡사 피를 머금고 있는 듯 유난히 붉어 보이는 달이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길 한복판에 멈춰서 있는 차들을 뒤로하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멀리 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곳에도 벌써 어둠이 깊게 스며들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언제라도 튀어나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며 조심스레 계속 몸을 움직였다.


강아지는 짖거나 꿈틀거리지 않고 가만히 품에 안겨 있었다.


다행이었다.


주택가로 향하는 길목으로 접어들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닥을 스치는 내 발소리와 심장 소리가 전부였고,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따금 느껴지는 짙은 피비린내와 악취가 날 괴롭혔지만.


그런 건 견딜 만했다.


몇 개의 집들을 지나쳤다. 무심히 서 있는 가로등이 희뿌연 빛을 흩뿌렸다. 내겐 그 모습이 훨씬 더 을씨년스러웠다.


움직이지 않는 가로등조차 내게 적대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믿을 건 하나도 없다.


하다못해 우뚝 서 있는 나무들까지도 그러했다.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마당에 나무라고 멀쩡할까. 게다가 여긴 달빛도 맘에 들지 않았다.


때가 되면 빵, 하고 터져버리는 ‘피를 머금고 있는 둥근 풍선’ 같은 달의 모습은 악몽 속 그것처럼 흉물스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이었더라면.


머리 위에서 날 굽어보고 있는 저 달 속에 포식자의 이빨이 잔뜩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속이 뒤틀렸다.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기계처럼 움직였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공포와 맞서 싸우며 적당히 몸을 숨길 곳을 찾고 찾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고요한 주택들뿐이었고,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식별하기 힘들었다.


반쯤 허물어진 담벼락, 열매가 잔뜩 매달린 나무 한 그루를 빠르게 지나쳤다.


과일 향이 났지만,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일까?


열매를 따서 호주머니 속에 넣어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곳에선 모든 게 다 모호하고 위험했으니까.


내가 뭘 찾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열심히 걷고 있을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어린아이의 비명. 몸이 얼어붙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무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끔찍한 광경을.


-우드득!


뼈를 씹어 먹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피비린내가 짙게 풍겼다.


악몽 같은 기억에 눈을 크게 뜨고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무 멀리 와버렸단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돌아갈 때를 대비해 지나온 길을 눈에 담아 두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곧 내 행동을 후회하고 말았다.


앞만 보고 걸음을 옮겼을 때 보다 훨씬 더 큰 공포가 내 몸을 짓눌렀다. 금방이라도 사방에서 놈들이 몰려들 것만 같았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었다. 피처럼 붉은빛이 휘몰아치는 끔찍한 밤.


내 팔다리는 순식간에 뜯겨 나갈 테고, 살은 좀비들의 이빨에 잘게 부서질 것이며,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실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에 목이 졸리고 숨이 턱 막혔다.


다시 엘리베이터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밤을 지새울 만한 장소를 물색한다는 거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낡고 오래된 건물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금 전과 똑같은 바로 그 멍청한 짓밖에 없었다. 버튼을 누르고 망가진 고철 기계가 집으로 날 데려다주기만을 하염없이 바라던 그 짓 말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런 행위를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가는 이곳에 뭔가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면 함정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열쇠의 실마리를 얻는 장면도 있으니까.


문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는 조연, 그것도 수초 내로 빠르게 잊혀질 B급 조연.


그게 바로 나일까.


그건 아닐 거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있는 인간은 나 혼자였고, 그러니 당연히 주인공은 내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주인공이 죽는 법은 없다는 거였다.


가끔 아닌 경우도 있긴 하지만.


주인공이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지만, 결국엔 뒤쫓아 온 놈에게 칼을 맞고 죽는 황당한 엔딩 같은 거 말이다.


불길한 상상이었다.


신화 속 괴물의 촉수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바보 같은 상상을 냉큼 찍어 누르며, 여전히 내가 주인공이고, 절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등 뒤나 앞쪽이나 무섭긴 매한가지였다.


운이 따라준다면 빈집,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빈집이었지만.


잠금장치가 튼튼하고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곳을 골라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다.


과연 현명한 생각일까?


날 조롱하는 그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있던 건물에서 조용히 숨을 죽인 채 해가 뜨길 기다리거나 버튼을 눌러 그 망할 기계를 다시 한번 움직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내게 속삭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한 반복.


다른 곳으로 이동할 확률은 거의 제로라고 봐야 옳았다.


끊임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했음에도 여전히 날 지옥으로 끌고 왔으니 말이다.


적당한 은신처를 고르려 연신 눈동자를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엔 움직임 없이 늘어서 있는 주택과 빌라, 크고 작은 건물 모두 아무런 위험이 없어 보였다.


원래 위험은 보이지 않게 다가오는 법이지.


날 조롱하던 목소리가 이젠 점잖게 충고를 했다.


그쯤은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던 낡은 건물을 뒤로하고 나서 지금까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날 더 불안케 했지만, 시간을 안다고 하더라도 딱히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둥근 달이 구름 사이로 반쯤 몸을 감췄고, 주위가 조금 더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멀리 앞쪽에 거무스름한 두 개의 형체가 뒤엉켜 있었다.


재빨리 그 자리에 멈춰섰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저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딱히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린아이를 잡아먹고, 그 피를 입에 묻힌 채 히죽 웃던 놈. 동족의 살을 물어뜯는 바로 그 좀비들이었다.


“깍 뚜르! 케케!”


“두르가! 밧르!”


한 덩어리로 엉켜있던 놈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기괴한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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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데빌의 정체 2 24.09.15 8 1 13쪽
20 데빌의 정체 24.09.14 8 1 13쪽
19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 24.09.13 10 1 14쪽
18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4.09.12 9 1 13쪽
17 깜짝 파티 24.09.11 9 1 13쪽
16 회전목마 아이들 2 24.09.10 8 1 12쪽
15 회전목마 아이들 24.09.09 11 1 13쪽
14 이세계 편의점 24.09.08 10 1 13쪽
13 토머스의 수첩 4 24.09.07 11 1 12쪽
12 토머스의 수첩 3 24.09.06 9 1 14쪽
11 토머스의 수첩 2 24.09.05 12 1 13쪽
10 토머스의 수첩 24.09.04 12 1 12쪽
9 은신처 2 24.09.03 11 1 12쪽
8 은신처 24.09.02 12 1 13쪽
» 웰컴 투 헬 2 +1 24.09.01 18 1 12쪽
6 웰컴 투 헬 +1 24.08.31 19 2 14쪽
5 그것들 2 +1 24.08.30 18 3 13쪽
4 그것들 24.08.29 25 3 13쪽
3 엘리베이터를 타고 2 +1 24.08.28 35 3 12쪽
2 엘리베이터를 타고 24.08.27 42 3 14쪽
1 쇠망치를 들고 뭘 하겠단 걸까 24.08.27 65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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