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붉은 옥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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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
작품등록일 :
2024.08.27 13:28
최근연재일 :
2024.09.17 12:51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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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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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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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토머스의 수첩

DUMMY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 녀석에게 쫓기던 희생자는 이세계에 떨어져 좀비에게 잡아 먹히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상상이긴 하지만 가혹한 결말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벌레 같은 놈들을 노려보았다.


온몸으로 스며든 분노가 공포를 몰아내고 있었다.


여기서 끝장이라니.


기껏 놈들의 먹이가 되려고? 보잘것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앞으론 열심히 살아가려 애썼는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조금씩 차오르던 분노의 불길은 더더욱 불타올랐고, 용암처럼 뜨거운 그것이 내부를 활활 태웠다.


그러자 몸속에 남아있던 두려움과 공포가 일순 정지되었다.


될 대로 되라지.


시간이 지날수록 좀비들은 더더욱 많아졌고, 중간중간 소란을 피워대며 어딘가를 향해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소란스럽던 아래층은 곧 잠잠해졌다. 아무래도 밖에 있는 놈들과 합류한 듯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뭔가에 홀린 듯 놈들은 일제히 같은 방향을 향해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꼬맹이를 안아 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밖을 향한 채였다.


작고 연약한 강아지의 털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따스함이 느껴졌다. 요동치던 마음이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내 기분을 알아차린 듯 꼬맹이가 한차례 꿍,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바르르 몸을 떨었다.


“다 잘 될 거야.”


강아지를 달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향해 내뱉은 말인지...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1시간쯤 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좀비들이 한차례 주변을 휩쓸고 지나가자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위험했어.”


녀석이 바닥에 엎드린 채로 꼬리를 흔들었다.


좀 전보단 긴장이 많이 풀어졌지만, 아직 안심할 순 없었다. 언제 또 다른 무리가 이곳을 에워쌀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좀비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상상과 수많은 질문.


그 모든 건 다 욕심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천천히 조금씩 알아가자.


어쨌든 지금은 좀비에게 몰두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진짜 알고 싶은 건 이 망할 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이었다.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엘리베이터라던가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이어지는 게이트 같은 거 말이다.


생각이 많아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꼬맹이는 몹시 피곤한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옆에 드러누우려던 순간 배낭에 눈길이 갔다. 위험이 사라졌으니 안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


곧장 배낭 지퍼를 열고 안에 있던 물건들을 꺼내 들었다.


허락도 없이 유품에 손을 대다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상상조차 하질 못했는데.


이세계로 건너온 이후 내가 알고 있던 현실 세상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똑같이 흘러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멈춰서 있는 걸까? 그도 아니면.... 수십 년쯤 훅 지나가 버린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닥에 놓인 물건들이 점점 많아졌다.


반쯤 들어찬 물병, 얇은 담요 한 장. 두꺼운 양말과 장갑. 털모자. 지포라이터. 나침반. 사탕과 먹다 남은 초콜릿. 육포 조각. 뚱뚱한 비스킷. 소독약과 밴드. 굵은 밧줄. 나이프. 손바닥만 한 수첩과 펜. 그리고 안경...


먹통이 되어버린 휴대폰만 지니고 있던 나와는 달리 죽은 남자의 배낭엔 생존에 필요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이 인간이 아닌 좀비들이 사는 세상이란 사실이었다. 피에 굶주린 놈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장갑과 털모자 따위는 쓸모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일단은 처음 그대로 모두 가방에 다시 넣어 두기로 했다.


나침반으로 눈을 돌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제멋대로 빙글빙글 도는 뾰족한 바늘.


고장이 난 것일까? 내가 타고 온 엘리베이터처럼 말이다.


이것 또한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없는 것보단 나아.”


내 목소리에 꼬맹이가 눈을 떴다. 녀석은 혹시나 내가 먹을 거라도 가져왔는지 확인해 보려는 듯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까만 눈동자가 육포 조각으로 향했다.


-꿀꺽.


“아직 안 돼. 독이 묻어 있을지도 몰라.”


-꿍.


얼토당토않은 내 말에 꼬맹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너무 많이 굶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인데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항변하는 표정.


녀석은 대뜸 몸을 일으키더니 쪼르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확인을 해봐야 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녀석이 깡! 하고 짖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용!”


-깡!


꼬맹이는 인정사정없이 마구 짖을 참이었다. 그깟 좀비가 쳐들어오든 말든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귀엽게만 보이던 까만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물끄러미 녀석을 응시했다. 속마음이 느껴졌다.


-먹을 걸 내놔라. 당장 내놔. 안 그럼 삐뚤어질 테다!


일단 기다려 보라는 말을 해주려다 그만두었다. 맛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 육포로부터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일단 한입 먹어볼까?”


비닐 안에 있던 육포 조각을 하나 꺼내 입안에 넣고 씹었다. 숯불 향이 가득 배어있는 고기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독이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니.


아니 묻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씹어 삼킬 정도로 맛이좋았다.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들었다. 음식을 먹고 있는데 배고픔을 느낀다는 게 뭔가 이상했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손은 두 번째 육포 조각을 집어 들고 있었다.


-깡깡!


꼬맹이가 으르렁거렸다. 등에 난 털이 위로 솟아 오른듯한 느낌.


...굉장히 사나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자, 여기.”


손에 들고 있던 육포 조각을 바닥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꼬맹이가 달려 들었다.


-끄르릉. 꿍!


배가 많이 고픈 지 녀석은 허겁지겁 육포를 씹기 시작했다.


갈증이 났다.


바닥에 놓여 있던 물병을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병 안엔 반쯤 물이 차 있었다. 그것이 물인지, 또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육포를 먹고도 멀쩡했으니 다른 음식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예상했다.


냄새를 맡아 보았으나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목을 뒤로 젖히고 물을 마셨다.


양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아주 조금만 목구멍 안으로 흘려 넣었다.


말라붙은 목만 축인다는 생각으로. 여긴 나 외에도 물이 필요한 존재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아껴야만 했다.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건너갔다.


또 다른 식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플라스틱병에 담긴 물은 죽은 남자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거란 뜻이다.


몸을 돌리자 꼬맹이와 눈이 마주쳤다.


재빨리 주방에서 그릇 하나를 들고 거실로 되돌아갔다.


그릇에 물을 따라 주자 기다렸다는 듯 녀석이 혀를 내밀어 목을 축였다.


“조금밖에 없어.”


물을 다 마신 녀석이 더 달라는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꿍.


꼬맹이가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목구멍 밖으로 내뱉었지만. 모르는 척 시선을 외면했다.


눈동자가 천장을 응시했다.


깡깡! 하고 시끄럽게 짖지 않을지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고요.


고개를 내렸다.


다시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아버린 강아지가 엿보였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은 육포 조각을 챙겼다. 그건 새벽에 먹을 참이었다.


이곳에서 눈을 조금 붙이고 난 뒤, 길을 떠나기 전에 말이다.


지포라이터를 켰다.


탕! 소리가 나면서 불이 켜졌다.


어두운 곳에서 요긴하게 쓸 물건이라 생각했다.


그다음은 볼 것도 없었다.


담요는 추운 곳에서 쓰면 되는 거고.


바닥에 꺼내놓은 물건들을 훑어보던 중 손바닥만 한 수첩에 눈에 들어왔다.


사적인 것이라 마음에 걸렸지만, 내게 필요한 정보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안을 살펴봤다.


첫 페이지부터 글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날짜와 그 아래 사건들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 하루하루 벌어진 일들을 기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첫 장을 펼쳤다.


[토머스 리]


죽은 사내의 이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6월.


강한 호기심은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서로 먹고 먹히는 그것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쳤다.

갈 데가 없다. 해가 뜨고 지기를 반복하고, 숨기를 반복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

어둠이 저놈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다.


잠시 읽기를 멈췄다. 지금은 10월이었다.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말이다.


토머스의 수첩에 적힌 6월이란 숫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렇다면 그는 6월의 어느 날, 아니 그 이전에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그가 살던 곳이 나와 같은 세상인지도 불분명했다. 어쩌면 그는 과거의 인간 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고 뒤엉켜 버린 지구 행성 어딘가에서 이곳으로 데구르르 굴러떨어진 가련한 존재.


갑자기 그가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실수건, 고의건 간에 빌어먹을 이곳에 굴러떨어진 이상 모두 불쌍한 존재였다.


배낭 속 물건들로 미루어 보아 그는 뭔가를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왔음이 틀림없었다.


그곳이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든, 다른 곳이든 간에 그는 긴 여행을 떠난 것이다.


재수 없이 이곳으로 굴러떨어진 게 문제이긴 했지만.


꼬맹이의 털을 쓰다듬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먹을 걸 또 주려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그냥 자게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족들이 생각났다.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의문과 불길한 감정들을 떨쳐내려 애썼다.


다시 수첩으로 눈을 돌렸다.


토머스의 기록을 읽어나갔다.


6월, 한밤중.


달을 보는 것도 이젠 지쳤다.

저놈은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 왜 그걸 오늘에서야 알았을까.

볼 때마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 뒤뚱거리며 걷는 저놈이 떠오를 때마다 시체 냄새를 풀풀 풍기는 좀비들이 사방에 우글거렸다.

내게 화살이 있다면 진즉에 저놈을 꿰뚫어 버렸을 텐데.

아쉽다.

커튼을 쳐도 놈이 내뿜는 역한 피 냄새는 막을 수가 없다.


6월.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젠 날짜를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고.

새벽 무렵이다.

해가 떠올랐다. 시름시름 앓는 것 같은 태양은 인간 세상에서처럼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곳에선 태양보단 달의 힘이 더 컸다.

밤이면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달덩이가 사라질 때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낀다.

놈이 없어지면 좀비들도 힘을 잃으니까.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야만 하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언제쯤 여길 벗어날 수 있을까.


7월의 어느 날.


배가 고프다.

최후를 대비해 먹을걸 남겨둬야 한다.

...너무 외롭다.

바깥으로 보이는 썩은 시체들과 대화를 나누고픈 생각마저 든다.



나는 잠시 읽기를 멈췄다.


고개를 들고 밖을 쳐다보았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붉은 저것. 토머스 또한 밤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달을 경계했다.


주위를 붉게 물들이는 달빛이 좀비들을 더더욱 사납고 흉악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내 예측이 맞았음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여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안 좋은 곳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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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데빌의 정체 2 24.09.15 8 1 13쪽
20 데빌의 정체 24.09.14 8 1 13쪽
19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 24.09.13 9 1 14쪽
18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4.09.12 8 1 13쪽
17 깜짝 파티 24.09.11 8 1 13쪽
16 회전목마 아이들 2 24.09.10 8 1 12쪽
15 회전목마 아이들 24.09.09 11 1 13쪽
14 이세계 편의점 24.09.08 10 1 13쪽
13 토머스의 수첩 4 24.09.07 10 1 12쪽
12 토머스의 수첩 3 24.09.06 9 1 14쪽
11 토머스의 수첩 2 24.09.05 12 1 13쪽
» 토머스의 수첩 24.09.04 12 1 12쪽
9 은신처 2 24.09.03 11 1 12쪽
8 은신처 24.09.02 12 1 13쪽
7 웰컴 투 헬 2 +1 24.09.01 17 1 12쪽
6 웰컴 투 헬 +1 24.08.31 19 2 14쪽
5 그것들 2 +1 24.08.30 18 3 13쪽
4 그것들 24.08.29 25 3 13쪽
3 엘리베이터를 타고 2 +1 24.08.28 35 3 12쪽
2 엘리베이터를 타고 24.08.27 42 3 14쪽
1 쇠망치를 들고 뭘 하겠단 걸까 24.08.27 65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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